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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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씩 물어본다. 너는 자장면 한 그릇만한 소설을 쓰고 있느냐?

너는 네 소설로 단 한 번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맛있고 풍요롭게 해 준 적이 있느냐?"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썼다. .. 어쨌든 처음 것보다는 두 번째 것이 조금 낫다. 하지만 이 소설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소설을 다 썼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일 년간 무수한 내부 검열관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내가 진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이 소설에 관해 내 체력은 바닥이다."

 

언젠가, 한 소설가가 한 말을 늘 생각한다.

글을 쓰는 서재의 창가에 늘 한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고. 그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어 책을 내야 하는데, 그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을 글을 써야겠다고 늘 다짐한다고.

 

작가 김언수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로 등단했다. 그리고 이번엔 이 책으로 5천만원 고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후기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분수도 모르고 덜컥 상까지 받아버려서 이제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귀싸대기 맞을 각오도 되어 있다며, 돈주고 사는 책에 대해서 기탄없는 독자들의 욕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많이 두려워 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KBS TV의 책을 말하다에서였다.

최근엔 매회 3권의 책을 추천하는데, 이 책은 김갑수라는 문학평론가와 영화배우 오지혜씨가 나온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한 명의 패널은 죄송스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갑수라는 낯선 평론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이 책을 읽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는 듯한 이야기를 했었고, 작가가 야비하고 비열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제작진은 그 자리에 작가를 초대해놓고 있었고 작가는 마치 퇴근길에 오뎅 하나 사 먹고 방송국 방청객 알바를 하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같은 모양새로 거기에 앉아서 김갑수의 평을 모조리 들은 셈이다. 그의 인상은 그냥 회사원 같았다. 별로 재미없는 직장에서 시간을 때우다 온 사람처럼 가방을 메고 있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공대리처럼 말이다. 할 일 없는 직장에 그래도 매일 매일 출근하면 월급은 주니까. 하는 자세로 살고 있는 사람같은 인상.

 

최근의 소설은 낭만주의가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언수의 캐비닛은 얼마 전에 읽은 워싱턴 어빙의 "립 밴 윙클"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세상에 신종족이 나타난다. 손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입속에 도마뱀을 키우고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3년이라는 세월이 없어졌거나 매 주말마다 도플갱어를 화장하러 가는 살아남은 샴쌍둥이 자매등, 온갖 기괴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허름한 13호 캐비닛에 들어있다. 주인공은 그들의 기록을 읽고 그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그들과 상담을 하고 술을 한 잔 마시기도 하고 섹스를 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매우 특이한 사람 같지만 또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책장도 아니고 서랍장도 아니고 매우 부실해 보이며 인테리어라는 단어을 모욕하는 듯이 생긴 것이 캐비닛이다. 그 캐비닛에 세상의 비밀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캐비닛이라는 장소 안에 들어있는 철저한 구라덩어리다. 소설이라면 이 정도 구라를 떨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정말 이 소설은 사기꾼의 최고봉이 오른 자가 썼을 법한, 초 낭만주의 상상의 결정체이다.

거짓말을 끊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시사프로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온 한 사기범은 자기는 한 마디 문장을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꾸며진다고 했다. 자기는 죄값을 치루고 나와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이 작가도, 어쩌면 그정도의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근래에 읽은 한국소설중에 제일 재미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캐비닛 어때? 라고 물어본다면, 오나전 짱이지. 라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이 캐비닛은 재미뿐만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메세지와 메타포도 매우 많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주제파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가는 구라쟁이다. 세상을 설교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그저 허풍이나 떨면서 글로서 허영을 표출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 세상의 모든 증상과 현상에는 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으니까. 어떤 부분을 어떻게 편집해 내느냐 하는 것이 소설가의 자질이다. 어떤 자들은 김언수를 이 시대의 새로운 괴물같은 작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을 봐버렸기 때문에 괴물같은 작가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그는 괴물같은 세상에 시류에 잘 적응한  또 한 명의 심토마일것이다.

 

분명히 외계인은 존재할 것이다. 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 푹 빠질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와 이게 영화로 만들어지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라고 나처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게 영화가 된다면 봉준호나 박찬욱이 손을 대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로 뭔가를 만들 것 같지는 않다.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 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려라."라는 작가 후기, 그는 자본주의를 잘 알고 있는, 세상을 잘 알고 있는 작가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일부러 심사평을 읽지 않았다. 그가 받았을 5천만원이 내심 부럽기도 하지만, 귀싸대기를 올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신 김언수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냥 혼자 킥킥 대고 웃을 것이다. 뭐 박민규를 생각해도 그렇긴 하지만.

 

2007.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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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0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기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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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짧게 살다 간 이 남자, 애드가 앨렌 포우.


그의 이야기가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을 더이상 말하여 무엇하리.


그러나 나는 그의 소설을 이제서야 처음 읽어보았다는 것. -0-


그 이유는 공포였다. 나는 세계문학을 처음으로 접하던 시절에는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았고 공포나 괴기스러운 분위기는 질색을 했다. 왜 그랬을까..아마도 요즘까지도 끊임없이 가위눌림과 악몽등에 종종 잠을 깨곤 하는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흉흉해지고 엽기가 판을 치면서 이제 에지간한 피칠갑에는 놀라지도 않게 된 공포와 괴기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나 할까. 공포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자게 된 것은 생활이 피곤해서인지, 대담해져서인지, 내 자신이 그 어떤 엽기영화보다도 더 엽기스럽게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제는 포우의 소설 정도는 충분히 소화하고도 남지 않는가 싶었다.


 


검은 고양이외 포우의 단편선은 어려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내가 왜 이 번역본을 골랐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 가장 쌌던 모양이다. 우울과 몽상이라는 하늘 연못에서 나온 버전은 포우의 더 많은 단편들을 만날 수 있고 내가 읽은 이 판본은 정말 엑기스 단편만 쏙쏙 뽑아낸 것이다.


다시 시작한 공부 때문에 검은 고양이를 읽어야만 해서 단시간내에 읽을 수 있는 판본을 고른 것일 뿐,  다른 분들은 서점에 가서 넉넉히 살펴본 후 가장 맘에 드는 것으로 고르시면 될 듯.


 


여기 실린 단편들은 검은 고양이,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황금벌레, 어셔 가의 몰락, 아몬틸라도의 술통, 붉은 죽음의 가면극, 고자쟁이 심장, 도둑맞은 편지인데, 중요한 것은, 정.말. 재.미.있.다. 는 것.


명작이 멀게 느껴지지만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 나오는 뒤팽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질 것이다. 나도 책을 덮자마자, 포우의 모든 단편선을 읽어버릴테다. 라는 야심찬 꿈을 꾸었으니까. 그가 썼다고 믿기지 않는 애너벨리. 까지도 말이다.


 


ps. 포우는 겨우 40여년을 살면서도 음주, 도박, 아편, 방탕, 정신분열증, 빈곤 등을 대명사로 가지고 다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이 명작들을 보자면, 어쩌면 그는 살만큼 다 살고 간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120년 정도 산다고 해서 음주, 도박, 아편, 방탕, 정신분열증, 빈곤, 문학, 창작까지 다 하고 살겠는가.


 


2007.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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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에 읽은 책들 중, 소개하고 싶은 책들  

(요즘은 리뷰를 잘 쓰기가 어려워져서 ;;)


2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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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근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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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그대로.
타인의 고통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16,500원 → 14,850원(10%할인) / 마일리지 8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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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과연 정당한가.우리는 그곳에 가보지 않았다.
서울 문화 순례
최준식 지음 / 소나무 / 2009년 3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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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박한 저자의 명쾌한 서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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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
워싱턴 어빙 지음, 박경서 옮김 / 문학수첩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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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어빙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작가다.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대표되는 소설이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지 못했고, 또 그럴만 하기 때문에 (매우 미국적인 정서라고나 할까) 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걸은 최초의 미국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적은 일종의 기행문 형식의 에세이 스케치북은 미국이 낳은 최초의 문인으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일반독자에게 알려줘야 할 것은, 그의 소설이 영화 “슬리피 할로우”의 원작이라는 것. 그의 원작 소설은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 목없는 기사의 유령 이고, 영화는 장편이었지만 그의 소설은 단편이었다. 그리고 소설이 원작이라기 보다는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와 소설은 매우 다르다.

이 책에는 워싱턴 어빙의 소설 두 편 : 립 밴 윙클 – 잠에서 깬 한 사내의 꿈 같은 이야기 와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 목없는 기사의 유령 과 스케치북에 실렸던 수필들이 실려있다. 미국 최초의 전업작가 워싱턴 어빙은 여행을 했던 영국의 런던과 그 교외의 모습들을 스케치하듯 그려냈다.

이런 수필들은 작가의 성품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우 작가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드러나는 종류의 글이기도 한데, 워싱턴 어빙은 미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젊은 작가이지만, 영국과 유럽의 고풍스러운 멋과 역사, 전통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고즈넉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전원생활들과 소박한 서민들의 생활이, 런던이 얼마나 커다란 도시인지, 얼마나 발전한 나라인가 하는 등의 겉핥기 식의 이야기가 아닌 진솔한 이야기들을 유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가족들이 모이는 크리스마스 풍경, 유약한 아내가 남편의 진정한 힘이 되어주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 젊은 나이에 죽은 소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등등 정말 낭만주의가 무엇인지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위에 기술한 두 편의 소설은 특이하게도 후기가 실려있는데, 작가의 후기가 아닌 그 소설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누군가가 구두로 알려왔다는 듯한 분위기가 풍기는 별첨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독자도 그 후기까지 읽고 나면 갸우뚱 하게 되는 것인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가 영화 슬리피 할로우에서 봤던 것과 같은 팀버튼의 몽환적이고 기괴한 스타일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의 두 편의 소설은 팀버튼의 냄새가 많이 나고 그의 나머지 소설들은 엠마톰슨이나 젊은 휴그랜트가 흰색 타이즈를 입고 잔디밭에 양산쓰고 누워있는 그림 같다고나 할까.

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한다.



2007.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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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안을 걷다 시작시인선 62
김병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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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안을 걷다   김병호 /시작시인선 0064 /천년의 시작 펴냄
 
내가 한그루 은사시나무이었을 때
내 안에 머물던 눈 먼 새들
혓바늘 돋은 울음을 날렸다
울음은 발갛게 부풀어 둥근 달을 낳고
속잎새에만 골라 앉은 숫눈이
돌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달안을 걷다 中>
 
1971년생 시인 김병호의 시집 달안을 걷다는 짜임새 있는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듯 하다.
음산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시작된 그의 시집의 첫번째 모음 / 강가의 묘석에는 죽은 아버지와 음산한 숲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발현되는 숲의 이미지들이 생명의 탄생이나, 싱그러움들을 대변한다면, 그의 숲은 어둡고 무섭고 음침하다. 숲이 너무 울창하여 햇빛은 하나도 들지 않고 온통 습지로 뒤덮여있으며 이상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숲이다. 그런 숲에서 아버지는 마술사가 되고 죽은 누이의 장례가 펼쳐진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시인의 두번째 모음 / 난생처음 봄에서, 그는 그 숲들을 모두 극복한다.
 
오래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
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나는, 차마 묘석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강가의 묘석> 中
 
홍제동 봄산부인과 병원 앞
수줍은 아내와 난감한 나는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는데
 
아이가 먼저 닿아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산기슭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호랑이를 맨발로 안으셨고
처제는 무지개 환한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깨물었다고 하고
시골의 처외할머니는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꽃뱀 한 마리를 치마에 담으셨단다
...
 
슬그머니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면
아내의 오월 한복판엔 잎 푸른 감나무가 자라
지극한 우주가 감씨마냥 잠기고
 
손끝에 타오르는 환한 길 하나
 
<환한 길 하나> 中
 
그리고 그는 다시 바람은 무늬로 기억을 새긴다 라는 세번째 장에서 삶의 이별과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남자는
돌아갈 먼 길을 생각하는데,
 
한숨이 움파처럼 돋아난
감또개 그늘 안에서
여자는
종일 항아리를 씻었다
 
<오래된 집> 전문
 
+ 감또개 :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사람 하나 가슴에 묻는 일이
찬밥 한 덩이 물에 말아 훌훌 넘기다
눈 부딪친 밥상 귀퉁이의 떨어진 귀 자국 같아
사소한 병을 키워 잠자리 뜨겁게 만들고
어두운 말을 버려 꽃 진 나무를 시늉하지만
...
<풍경 風磬> 中
 
해 빠질 무렵의 내소사
미열처럼 스미는 어둠 안에서
무릎 접고 어깨 움츠린
배롱나무의 밑동을 본 적이 있는가
밤새 안부를 묻던 설익은 바람과 독을 키워
비탈로 내달리던 목어를
가두어본 적이 있는가 ...
 
<마음이 지다> 中
 
음산하던 세월들을 혼자 지켜내다가, 그 젊음과 청춘이 괴롭다가 어느 한 순간 어미가 되고 아비가 되는 우리의 인생처럼, 나의 인생처럼, 나는 그렇게 김병호의 시집을 읽었다.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생소한 이름의 시인 한 명이 전해주는 자식 생긴 아비의 기쁨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와 코끝이 찡하도록 감동했다.
그리고 사람 하나 가슴에 묻는 일이, 라는 구절을 몇 번씩 혀끝으로 말아 올렸다가 꿀꺽 삼키곤 했다.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읽는 시집마다 모두 절절하게 들린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좋은 시들이 많이 나오게 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도 그네들과 같이 나이먹어가며 뭔가를 조금은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2007. 4. 18.
 
세 번째 말, 요고
 

엄마 아빠란 말 다음에

아이가 배운 말은 요고

할머니도 강아지도 개나리도 요구르트도

모두 요고다

 

아이의 닭똥구멍 같은 입술 위에서

둥글고 뜨겁게 열리는

할머니와 강아지와 개나리와 요구르트가

제 이름들을 놓는 순간

요고의 할머니와 요고의 강아지와

요고의 개나리와 요고의 요구르트에는

아이만의 정한 이름과 마음이 따로 있어

아이의 요고는 서슴없다

 

태초의 말,

그것은 한 소리였다. 
 

2007.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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