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젖은 셔츠를 입고 도서관 앞 계단에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이제 슬슬 비어가는 그의 정수리처럼 해 지는 방향으로 조금씩 옅어지는데 보기 아쉬웠는지 매미 매섭게 울고 바람도 슬며시 돌아갔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등은 아직 더 작아질 일 남은 돌멩이 같아 어쩐지 눈 떼지 못하고 나도 조용히 기다려 보다 문득 등 뒤에 수 만권의 책을 쌓아 놓은 저 남자 수 천개의 갈림길을 건너온 저 남자 수 백개의 이름을 궁글려 빚은 저 남자의 셔츠는 무엇을 기다리다 젖고 말았나 궁금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 차갑고 굳은 쇳덩어리 달리는 틈바구니를 잘도 파고 들어 여기까지 들리는 부르는 소리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세상 가장 커다란 사람이 되어 계단을 내려갔다. 

 

 

2

 

저녁은 먹었어요 하는 대답에서 배고픈 냄새가 났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저 바라본 것이었는데 들켰다는 듯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콩콩 바닥을 차 보는 아이는 무엇을 바라 여기에 왔는지 말하고 싶은 듯도 하고 말할 수 없는 듯도 하고 영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도장처럼 허공에 찍어댔고 그것은 모두의 눈에 생생히 보였으므로 우리는 다 같이 배고픔을 느꼈지만 이 배고픔을 아무리 모아 팔아도 너를 배불리지 못하겠지 깨달은 사람들 역시 하나 둘 고개를 숙이고 콩콩 바닥을 차는 사이 학생은 휴게실의 문을 열고 어두운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제서야 사람들 다시 고개를 들어 저 어두운 바깥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아이의 미래 되지 않도록 아무런 이름도 짓지 마시기를 기도 드리는 동안 떼꾼한 침묵들이 바닥으로 고였다.

 

 

3

 

물으면 대답해 줄 것 같아 일부러 하지 않은 질문들 중에는 가끔 쓸만한 것들이 나왔으므로 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밤 내일도 오늘의 얼굴로 돌아올 밤 도대체 당신은 왜 이 밤까지 남아 그 슬픈 눈으로 허공을 디디는지 왜 그 눈을 따라가면 내 눈에도 정적이 보이는지 오늘은 한 번 물어볼까 망설이다 보면 폐관을 알리는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고 오늘의 물음을 내일로 던진 것이 어쩐지 홀가분하여 슬쩍 웃어보았는데 그 슬픈 눈이 내게 너는 내일도 묻지 못할 것이라고 그것은 네가 이미 그 답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내일도 모레도 그 어떤 날에도 나는 허공을 정적을 슬픈 것을 그 어떤 것도 이미 묻지 못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4

 

 

결국 우리는 스스로 꿈결에 제조한 폭탄을 제각기 품에 안은 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하면서 걸어가는 건 아닐까. 다만 무엇을 그러안고 있는지 타인도 모르고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한 거겠지.

 

_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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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알랭 마방쿠‘의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라는 소설 혹시 읽어봤나요? 오늘 제가 읽은 쇼님의 이 페이퍼는 대뜸 이 책을 떠올리게 만드는데요, 이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라는 소설도 역시 문장에 마침표가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도서관 가보시면 도전!!

syo 2017-08-09 08:53   좋아요 0 | URL
도전!!
그치만 이 글에는 마침표가 있어요 ㅎㅎㅎ 문법적으로 마침표 찍어야 될 데는 다 찍었는데, 문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이로군요....

쇼코 2017-08-09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에서 3의 글들이 다 하나의 문장들이고 적절한 자리에서 조사가 생략 되어서 그런지 산문시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두번, 세번 다시 읽어 볼 만큼 내용도 그 도서관 풍경의 소리나 촉감이 들리고 느껴질 것만 같았고요. 4번에 달아 놓으신 책은 읽지 못해서 위의 글들과 정확히 연결시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ㅎㅎㅎ

도서관 풍경 속 사람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참말로 좋습니다. 저 또한 낯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오늘도 좋은 글 고맙습니다^^

syo 2017-08-09 12:01   좋아요 1 | URL
ㅠㅠ 몸둘 바... 제 몸둘 바를 돌려주세요.

소세키의 《유리문 안에서》는 정말 유리문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그린 그림 같은 산문이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고, 그의 눈에 포착되면 타인이나 세상이 조용한 가운데 어쩐지 쓸쓸함이 자꾸 묻어나는 것 같아요. 저 책 읽고 나름 감동 받아서 저도 한 번 사람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봐야지 했을 뿐이고 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ㅎ

오늘도 역시 글보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쇼코 2017-08-09 12:12   좋아요 0 | URL
유리문 너머로 보는 조용하고 쓸쓸한 세상, 저도 같이 보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작가라니 꼭 읽어보고 싶어요. 다음 번 책 살 때 이 책도 함께 받아보겠군요. ㅎㅎ 좋은 작가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1

 

아침에 열람실 문을 당기고 들어가면 매일 그 시간, 매일 그 자리에 앉아있는 매일 그 분들과 매일 눈이 슬쩍 마주치곤 한다. 인사라도 할까? 우리가 무슨 사인데 인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진 않을까? 앉고 싶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을만큼 일찍 오는 사람들의 동료의식 같은 게 은근 있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걸까? 전완미남, 용감한 부부, 헛되도다 영감님, 볼빨간 삼촌, 온도의 지배자, 벗지마오 그 모자, 빨간 형과 파란 동생, 킹 오브 배바지...... 내가 혼자 별명 붙이고 혼자 맘 속으로 불러보는 수많은 도서관 크루들은 나를 뭐라고 부르고 있을까. 쪼리 신은 원숭이? 물 먹는 미어캣? 텀블러 사무라이? 가장 먼저 먹는 자? 궁금하다. 그 사람들이 불러주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골고루 섞여서 나일텐데.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21세기 도서관은 혼자이고 싶은 사람에겐 너무 시끄럽지만, 가끔은 함께이고 싶은 사람에겐 또 너무 조용하다.

 

드러내지 않기와 공적인 장은 이중적인 상호전제 관계에 있다. 공적인 장이 있어야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거기서 물러나거나 접근하거나 할 수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공적인 장을 예정된 파괴에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공적인 발언이 경청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말을 해야만 고독이 고립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

 

_피에르 자위《드러내지 않기》27쪽

 

 

2

 

열람실 안쪽, 두 벽이 만나는 모퉁이 가장 으슥한 자리를 잡는 아저씨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모기약을 꺼내 분사한다. 선풍기 바람을 타고 내 자리까지 모기약이 넘어온다. 와, 상큼한 오렌지향이다. 덕분에 매일 아침 향수를 뿌리고 올 필요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향수 값이 굳고 그걸로 책을 한권 더 사거나 하는 이득은 없다. 그건 내가 원래 향수를 쓸 줄 모르니까 그렇지. 아, 갑자기 생각나는 문장. 골수 좌파 아나키스트(-_-??)인 나는 어쩐지 뿌듯하네. 오렌지 향 모기약도 좋아하는 나의 무취향이.

 

취향은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소비를 해야 비로소 생겨난다. 어떤 것에 끌리는 경향이야 타고날 수 있지만 세밀한 취향은 절대소비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취향은 자본주의적이고, 개인과 도시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_이현주《읽는 삶, 만드는 삶》44쪽

 

 

3

 

요즘처럼 산산한 아침 저녁이 이어진다면 여름이라는 계절도 그리 못된 놈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크고 작은 개미도 보고, 굵기가 엄지손가락 만한 지렁이도 보고, 축 늘어진 나무 줄기들 사이로 보일듯 말듯 지은 거미줄도 본다. 이렇게 안 쓰다가 혹시 까먹을까 봐 금연 안내문을 읽으면서 서울말 연습도 한다. 우리 도서관은 국민건강진흥법에, 음, 국민겅강, 국민건강진흥법, 음음. 서울 사는 사람 아무도 서울말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서울말. 나만 아끼는 나의 서울말. 새끼 고양이 야옹야옹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 저 아이도 내 서울말을 들었나 본데.

 

다른 사람이 쓰는 표현을 피하라. 누구나 하는 말을 그저 전달할 뿐이더라도 자신만의 화법을 생각해 내라. 인터넷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라. 책을 읽어라.

 

_티모시 스나이더《폭정》78쪽

 

 

4

 

내가 내일도 도서관에 갈 예정이듯, 오늘 도서관에 왔던 사람들은 내일도 오겠지. 우리는 매일 스치고, 서로의 조각을 한 줌씩 주워 내 안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빚으며, 그렇게 아무말도 나누지 않고 친해질 것이다. 어쩌다 하루 안 보이면 빈 자리가 눈에 들고, 며칠 안 보이면 몇 초쯤 걱정을 하기도 하고, 길게 만나지 못하면 아, 합격했나보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며 부러움과 축하를 반반 잘 버무려 넘겨짚기도 할 테지. 조금 어색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사람이 사람과 사는 방식이겠거니 한다.

 

나는 생각했다. 저 문장은 얼마나 이상한 문장일까.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 얼마나 이상한 삶들이 얼마나 이상한 내용을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한 문장일까. 그리고 만일 저 길고 긴 문장을 손본다면 어떤 표기가 맞고 어떤 표기가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들어내거나 고치거나 다듬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_ 김정선《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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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03 22:04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최고예요. 어디 다른데 가기가 귀찮을 지경이니까요....

에디터D 2017-08-0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서관을 거의 매일 다녀서 그런지 syo님의 글이 반갑네여 ㅎ

syo 2017-08-03 22:49   좋아요 0 | URL
혹시 리제님도 도서관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이시나요? 저만 그런건가요.....
 

 

1

 

봄은 잠깐 앉았다 이내 가고 무더운 여름이 길게 이어진다.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가을은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고, 추위와 함께 온 겨울이 오래 머문다.

 

 

 

2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배우며 자랐다. 요즘 아이들도 그렇게 배우는지 모르겠다. 교과서는 이 땅의 일년을 같은 크기로 네 조각 내서 3월부터 봄, 6월부터 여름, 9월부터 가을, 12월부터 겨울이라고 가르쳤는데, 실제로 몸이 계절을 그렇게 감지하고 있었으니 퍽 진실한 지식이었다. 그런데 잠깐 국어, 영어, 수학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른이 되어 보니 이 나라는 여름과 겨울이 유난히 부지런을 떠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리벙벙 10년을 더 살면서, 더 중요하고 더 엄혹한 진실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여름과 겨울이 봄 가을을 갉아먹는 일이 비단 땅의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3

 

삶의 봄은 언제까지일까?

 

열 살짜리 아이에게 삼각함수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겨우 앞이 보이던 스물 몇의 나날들을 내 삶의 여름이 시작된 지점이라 짚어 본다. 그때 나는 내 팔자 기구한 줄만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내게 삼각함수를 배워야 했던 그 아이의 여름은 벌써 열 살부터는 시작이었구나 싶다. 그리고 내가 지나가야 할 여름이 아직 한참 남았듯이, 어딘가에서 0.5점의 평균을 올리기 위해 새벽과 건강을 땔감처럼 태우며 살고 있을 그 아이의 여름도 아마 길고 뜨겁게 이어지겠지. 십 년? 이십 년? 아니면 삼십 년?

 

가을은 도대체 언제쯤 오는 것일까? 오면 꽤 있다가 가주긴 할까? 잠깐 앉아서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어쩌면 이런 말씀이 희망이 될까?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_ 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63쪽

 

아니면 좀 더 아름다운 이런 말씀은 또 어떨까?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_안도현〈가을의 소원〉전문

 

 

 

 

5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 날, 가을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전언이다. 가을이 와도 가끔은 혼자 울 것이며, 울다 스러질 때까지 초록의 날들을 되짚어 그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처방이다. 가을은 멀고, 그냥 오는 듯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서, 나한테는 아직 여름이 한참은 더 남았다는 진단이다.

 

솔직히, 여름이 길고 잠깐 본 가을의 맛이 아직 혀끝에 남았건 말건 가차없이 곧바로 긴 겨울을 살다 가야하는 이 침울한 배분이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에게 마치 팔자의 모델 하우스처럼 제공되는 것이 다 우리 탓은 아닌데, 로또가 아니라면 마냥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빡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은 물론 지구온난화가 주범이겠지만, 나는 우리 삶의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 역시 공범이나 최소한 종범쯤은 되지 않나 의심한다. 삶의 사계절이 공평하게 사등분을 회복하는 순간, 여름은 6월에 와서 세 달 있다가 가고, 겨울이 9개월 뒤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며 2월 말에 깔끔하게 물러가는 기적이 도래할 거라는 미신적 희망도 가져본다.

 

어쨌거나 기왕 비집고 열어나가야 할 여름이라면, 여름 안에서나마 조금은 듬성듬성 살고 싶다. 어쩌다 바람 시원해 잠깐 멈춰 선 자리가 눈과 귀에 아름다운 곳이라면 더 걸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천천한 걸음으로 살 '수 있'고 싶다. 곳간이든 마음자리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채우며, 혹은 비우며, 여름 위에 둥둥 떠서 가을이 올 때까지 이리저리 흔들흔들 부유할 수 있다면 그것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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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확인해 봤을 때만 해도 비 소식 없었던 것 같은데 뜻밖의 빗소리가 무척 반갑다. 그제 비가 오고 어제 그리 덥지 않더니 오늘 또 쾌적하다. 대구에 살면 여름에 연이어 3일 덥지 않다는 데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소소한 성격이 된다. 청와대에서 문건이 백만 개가 나온들, 박과 자한당에 대한 지지를 절대로 거두지 않는 심지 굳은 어르신들이 앞집 뒷집 옆집 건넛집 중 반드시 두 군데 이상에서 살고 계시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은 무덤덤한 성격이 된다. 과연 인격 도야의 도시 대구. 대한민국 교육수도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낯을 붉힐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인성교육의 한마당.

 

 

 

 

읽은 책들 170716-170731 : 40권

 

인문 일반 : 5권

 

 

 

1. 인문학 개념정원

: 편한 설명. 효과적인 예시. 간결한 서술. 개념어 사전으로서 더 갖춰야 할 요소가 있을까? 딱 맞는 시기에 만난 듯, 읽는 데 무리가 없는 좋은 시간이었다.

 

2.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 진짜 좋아하면 이런 일까지 벌이는 것이다. 세상에, 이 책을 만들면서 즐거워했을 진중권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3. 생각의 미술관

: 도서관에 입고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막상 펼쳐보니 기대만큼의 읽을 거리는 없는 책. 얕고, 새로움도 없고.

 

4.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천문이 있고 인문이 있는데, 어찌 지문이 없을 것이냐는 말은, 자부심은 물론이거니와 건축 혹은 인간이 땅위에서 지어올리는 모든 물질과 사상이 하늘과 사람에 닿아있어야 한다는 지향을 느끼게 한다.

 

5.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

: 얇은 책 속에서 종횡무진. 장보기부터 설거지까지가 요리이듯, 내가 드러나지 않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잠깐 드러났다가 그 자리를 비우며 사라지는 것, 중심을 녹여먹는 변두리를 만들고 이내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 거기부터 거기까지가 사라짐의 기술이다.

 

  

철학 : 5권

 

 

 

6. 의심의 철학

: 독자에 따라서는 유익하겠지만, 내게는 투입 대비 그다지 효율이 높은 책은 아닌 듯. 저자의 선택을 받은 철학자들에 대한 내 사전지식이 깊은 것도 아닌데, 좀 의외였다.

 

7. 자본론을 읽다

: 어렵지 않고, 시대에 뒤쳐져 있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읽어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매력이 있는 책. 전투적 독서의욕을 불러일으켰으나, 며칠 지속되지 않았다.....

 

8. 말할 수 없는 소녀

: 뭐야......뭔데..... 진짜 1도 모르겠다. 실컷 얻어터졌다. 진짜 이 양반 도대체 나한텐 언제쯤 읽히는 저자가 되어 줄 것인가.

 

9.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 맑스 맑스 하지만 엥겔스도 한 글빨 날린다. 가독성은 오히려 엥겔스가 낫다 싶을 때가 많다. 포이어바흐를 생각할때면 어쩐지 자꾸 일진 맑스-엥겔스의 발 아래 깔려서 눈물을 글썽이는 빵셔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확실히 맑스-엥겔스는 포이어바흐가 만든 빵을 먹긴 먹었다. 먹긴 먹었는데 먹어보니 그 빵 그거 알고 보면 몸에 별로다- 라는 취지로 쓴 책인 것 같다.

 

10. 화장실 철학자

: 위트 넘치는 사고 실험. 철학 지식에 대해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하기. 하하, 웃음을 유발하는 시니컬함. 어어, 조금씩 과해지는 시니컬함. 아놔, 마침내 저자를 향한 나의 시니컬까지 유발하고 마는 그 문제적 시니컬함.

 

 

법 / 정치 / 경제 : 4권

 

11. 경제학자들은 왜 싸우는가

: 100쪽 조금 넘는 작은 책이지만, 경제 공부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방향을 잡는데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

 

12. 자본론의 세계

: 명쾌한 이론 설명인데도 행여나 길어질라치면 저자 스스로 못 견디듯 곧바로 신문 기사를 제시하며 냉철한 현실 분석을 이어붙인다. 다만 오래된 책이라 2001년의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 함정. 근데 그 때나 지금이나 도찐개찐임을 알 수 있다는 점이 또 뼈아프다.

 

13. 캐릭터와 저작권

: 얇지만, 또 얇아서 한번 읽어보기에 괜찮은 책. 그러나 비싸다. 시리즈물인데, 작은 책이라 모으면 보통 책 한 권쯤 되겠구만은 6권 다 사면 6만원 돈이다. 그 돈이면 업계 사람들이 갖춰놓는 1200쪽짜리의 저작권법 책을 살 수도 있다.....

 

14. 폭정

: 빼박 선동문서다. 간결하고 강력하며 매력적이다. 목표는 명백하게 트럼프고, 저자는 한국에서 일어난 그 일을 워싱턴에서 재현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사회 / 문화 / 역사 : 3권

 

15.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 전기! 전기를 읽자! 아, 그러나 이 다섯 혁명가의 국내 번역된 전기만 해도 권수로 20권은 훌쩍 넘는다......

 

16.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서울의 곳곳을 직접 두 발로 누비는 시선이 선명한 풍경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풍경 뒤에 숨겨져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비물질적인, 동시에 너무나도 물질적인 서울의 작동 원리. 우리의 삶을 땔감으로 써 가며 이 놈의 서울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내는 훌륭한 책.

 

17. 일상기술연구소

: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까지 쓸모가 내 살갗에 직접 때려박히는 느낌의 책은 처음이다. 절대로 후속편이 나와줘야 한다.....

 

 

젠더 / 노동/ 환경 : 3권

 

 

18.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

: 《논어》는 읽다보면 "성공하는 군자의 7가지 습관"이랄지, "공 선생님과 함께한 일주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3000년 묵은 자기계발서랄까. 그러나 형식이 그렇다고《논어》가 위대한 책이 아닌 것은 또 아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위대한 책"을 "괜찮은 책"으로 바꿔 표현하면, 이 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19. 핵을 넘다

: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단단한 책이다. 원전이익공동체라는 것은 원전마피아보다 조금 더 거대한 개념인데, 우리가 주목하여 외부부터 녹여 없앨 필요가 있겠다. 사용하는 에너지의 형태가 삶의 형태를 바꾼다는 주장은 일리도 있고 매력적이다. 표지에 그려진 눈 하나 달린 고양이 얼굴이나 발 여섯개짜리 양, 두 머리의 문어 가은 그림들은 슬프지만 솔직히 좀 귀엽고 사랑스럽다. 디자이너의 센스가 돋보인다.

 

20. 그건 혐오예요

: 독자의 행동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책은 어쩌면 이런 책일지도 모른다. 이름에 abcdefg가 들어가는 서구의 학자가 쓴 무거운 학술서가 아니라. 물론 그런 책도 자기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하겠지만. 나는 이런 책이 한 때 서점가를 점령했던 수십만 종의 자기계발서들처럼 양으로 독자를 압도하여 마침내 누구의 책꽂이에도 한 권 정도는 꽂히게 되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본다.

 

 

문학 / 독서 : 11권

 

 

 

 

21. 철과 오크

: 표제작을 포함해서 세 수 정도 말고는 내게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는 다소 실망스런 시집이었다. 특히 해설은 이 책의 비호감도를 키우는 것 말고는 역할이 없다. 제발 문학을 당신들만의 고등유희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말이 어려운 것은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나는 자꾸 의심합니다.

 

22. 물고기들의 기적

: 역시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줄기 몇 가닥 건져올릴 수 있었다. 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해설 또한 말이 되어서 읽히기 시작했다. 심지어 앞의 시집에서와 같은 해설자가 쓴 건데도!

 

23. 책, 고양이, 오후

: 마음에 아무것도 담아두고 싶지 않을 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슬쩍 젖어들 때, 마음이 열릴 때, 그럴 때는 소소한 이야기를 소소하기 듣기가 좋다.

 

24. 추락

: 거장의 책은 읽고 나면 온몸이 쑤실 때 있다. 이건 도저히 내가 감당할 만한 수준의 어택이 아니다. 그러지 말았으면 싶은 선택들이 이어지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죄다 불편몽둥이로 나를 쿵쿵 때린다. 나는 이들 중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고, 어쩌면 그게 이 책의 주제인 것도 같다. 너는 불편함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포기하려면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저러나, 좋다. 역시 부커는 진리인 듯.

 

25. 취미는 독서

: 고양이라디오님이 이 책을 읽고 왜 나를 떠올리셨다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고만고만한 책인데, 일단 남의 나라 책 이야기라 흥이 덜하고,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 분야의 전설적인 명작으로 칭송받는 이 모 작가님의《잘 지내나요?》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26. 명예

: 명민하다. 이야기 위에서 찬찬히 노를 젓다가도, 때가 되면 서퍼처럼 이야기 위에 올라타는 밀도 조절. 이야기가 등장인물을 부당하게 대접할수록, 현실에 사는 독자에게는 그게 정당하게, 최소한 있을 법하게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27.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 무슨 말인지 모를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겪기 힘든 경험인데도, 나는 배수아의 이야기를 온통 사랑했다. 이래저래 10년을 묵혀두고 만나지 못했거나, 혹은 만남을 피해왔던 그 사랑이 더욱 단단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28. 선한 이웃

: 연극과 연극이 얽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몇 개의 역을 동시에 진행하는 중첩된 배우처럼 산다. 순간 순간 역할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음과 삶이 겹쳐져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모든 순간에 우리는 엘렉트라인 동시에 클리타임네스트라인 채로 있다. 내가 맡은 배역이 다른 이의 배역을 만들기도 하면서. 모든 행동과 대사가 그대로 중첩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누구도 단일한 의미로 해석되는 단일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29.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 아니 이게, 내 눈에는 "페미니즘적"과 "책 읽기" 중 어느 쪽에 방점을 찍고 봐도 좀 중량이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은데.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으니 피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읽어보라는 식의 평들도 몇 보인다. 그 말이 난 더 슬퍼.

 

30. 읽는 삶, 만드는 삶

: 앞의 책보다는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 책의 <한국단편문학전집> 꼭지가 더 옹골차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다른 꼭지들 역시 하나같이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데, 멋부리지 않고 담담하며 시종일관 겸손한 문장들로부터 나오는 힘이 아닐까 싶다. 나처럼 까부는데 쾌락을 느끼는 녀석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인 것 같다.

 

31. 저스티스맨

: 개인이나 집단의 심리가 요동하는 양상을 가공없이 서술하는 데서 빼어난 역량을 보이는 작품. 그리고 재미가 있다. 과연 세계문학상의 지향에 딱 들어맞는구먼. 근데 의외로 문장은 허술한 데가 있고, 많이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과한 나머지 너무 부린다는 느낌이다. 당최 내가 뭐건대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쪼록 더 좋은 문장을 짓는 작가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분류 / 주마간산식 읽기 : 9권

 

 

 

 

32. 지방의 진실 케톤의 발견

33. 논어를 읽다

34. 디스 이즈 마티스

35. 처음 읽는 베르그송

: 번역 똥이다. 요즘은 구글도 이정도는 한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다.

36. 시사iN 513

37. 시사iN 514

38. 경박한 시사 경제 톡

39. 열정속으로 하버드 로스쿨

40. 네이티브가 생각하는 영문법 감각

 

 

2

 

 

결국은 보름 전에 마음 먹었던《호모 데우스》도, 카프카 전집도, 《기사단장 죽이기》도 뭣도, 역시 이번에도 읽지 못했다. 그 다짐 때문인지 독서 에세이를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인과관계 참 개똥 같다..... 

 

7월이 끝났다. 얇고 가벼운 책 위주로 읽었더니 70권을 넘길 수가 있었는데, 내가 만약 이웃님들처럼 어려운 책 읽고 리뷰까지 쓰고 하면 한 달에 아마 3권 정도가 고작이겠지. 내 인생의 멘토 유 선생님이 알쓸신잡에서 책 권수에 집착하지 말거라 하셨지만, 정말 슬픈 것은, 한 달에 3권을 읽나, 아니면 75권을 읽나, 어차피 다시 한 달을 더 지나면 얄밉게도 그 모든 책들이 기억에서 깔끔하게 퇴거하고 만다는 경험적 진실이다.

 

8월에는 인공지능 관련 책들을 좀 읽어봐야지- 하고 이 자리에서 다짐했으니 아마 보름 뒤에 쓸 독서 목록에는 중동 역사에 관련된 책들이 주르륵 올라오겠지. 계획은 왜 세우고 다짐은 왜 하는 걸까? 어차피 모든 것이 랜덤 게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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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7-3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과 오크.. 그지같죠, 시집이..

syo 2017-07-31 16:42   좋아요 0 | URL
네.... 제가 못 읽는것도 있겠지만요.

곰발님 말씀이 정확한게, ‘시‘가 그지라는 느낌보다 ‘시집‘이 그지라는 느낌이었어요. 해설까지 다 포함해서.....

몰리 2017-07-3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추천 후감상.
인격도야의 도시 대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몰리 2017-07-31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할 수 없는 소녀>. 부제는 ˝코레의 신화와 신비.˝
제목에서 알 수 있거나 짐작되는 바도 1도 없네요. ㅎㅎㅎㅎㅎㅎㅎ

책으로 직접 알겠다는
마음도 1도 자극하지 않고. 저자는 아감벤.

저도 아감벤은 별로, <도래하는 공동체> 이 책 논문셤 땜에 조금 읽었었는데
......... ‘이게 어떻게 철학이죠?‘ 반발하던 기억만 남은 편. 아마 잘 읽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배수아 얘기 거의 못 본 거 같은데, 나중 포스트로 배수아 얘기 신청. ㅎㅎㅎㅎㅎ

syo 2017-07-31 21:25   좋아요 0 | URL
전 아감벤은 읽을 때마다 이거 쓴 네놈이나 읽고 있는 나놈이나 후드러패고 싶은 생각이 왕왕 들었는데, 막상 또 아감벤 읽고 리뷰쓰신 분들은 존경스러웁습니다....

배수아는 제게 몰입독서의 경이로운 체험을 최초로 선사한 작가인데.......중략...... 그렇습니다.

cyrus 2017-07-31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본문 일부를 베껴 써도, 리뷰를 써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책에서 뭐 봤는지 1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

syo 2017-07-31 21:26   좋아요 0 | URL
다른 분도 아닌 cyrus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욱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cyrus 2017-08-01 10:14   좋아요 1 | URL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기 전에 먹이를 저장해요. 다람쥐가 숨겨준 먹이 창고가 많아야 백 군데 넘는다고 하더군요. 이게 하도 많아서 저장만 해놓고 먹이를 꺼내지 못한 경우가 있대요. 책 읽을 때마다 메모를 남기는 제 모습을 먹이 창고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다람쥐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

다락방 2017-08-01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9번에 대한 감상이 저와 같습니다.

syo 2017-08-01 08:38   좋아요 0 | URL
이 책도 꽤 인기가 있었던것 같은데, 요즘 잘 팔리는 에세이류의 책들은 이상하게 별로라는 생각입니다....

AgalmA 2017-08-0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이 되면 무화되는 아니 위에 cyrus님 말처럼 베껴 쓰고 리뷰 쓰고 난리부려도 곧 잊고 마는 책처럼... 김연수 작가가 제가 여기 쓰라고 만든 제목은 아니겠습니다만 단편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떠오르는 상황이네요ㅎㅎ
아감벤, 배수아 저도 좋아하는데 반갑네요^^

syo 2017-08-05 12: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김연수 작가의 단편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저도 ‘다시 한달을 가서‘ 라고 쓰려다가 민폐같아서 ‘다시 한 달을 더 지나면‘이라고 썼어요 ㅎㅎ AgalmA님의 눈썰미에 감탄합니다.

사실 저는 아감벤은 미워합니다......미운 사람 아감벤.
 

 

1

 

반년 가까이 책 신세를 지고 있는 도서관은 아이들이 보는 책을 뺀 모든 책들이 하나의 자료실에 들어가는 작은 규모의 시립도서관이지만, 서가에만 서면 나는 여전히 막막하다. 이제 책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디쯤 꽂혀 있을 거라고 짐작할만큼 눈에 익고 발에 익은 이 책 방 한 칸이, 나는 아직도 넓다. 읽을 수 없는 모든 책은 읽을 수 없고, 읽을 수 있는 책의 대부분은 읽을 수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머리가 했지 마음이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늘 욕심내고,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작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미미한가, 나는 얼마나 사소한 인간인가, 하다보면 또 늘 헛헛해진다.

 

아름다운 것들이 책 속에 무수히 숨어 우리와의 접촉을 기다리고 있다. 탐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알 기회가 없을 것이다. 책으로 뒤덮인 그 두 개의 벽 앞에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경탄하고 있었다. 이 모든 책 하나하나를 만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나는 평생 나 자신이 얼마나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스치고 지나가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_양자오,《자본론을 읽다》 27~28쪽

 

하버드 대학의 수백만 장서를 마주하고도 의연한 자세로 탐구욕을 불태우는 저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 권 단위의 책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요런 인간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만 권을 읽기 어렵듯이, 저 사람도 백만 권을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가 됐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는 날까지도 아놔, 그 책 사 놓고 결국 읽지도 못하고 죽네, 아놔, 그 작가 신간 다음 주에 배송되는데, 굿즈도 같이 오는데, 그거 받을라고 억지로 금액 맞췄건만 보지도 못하고 가네, 하는 식의 생각에서 말끔하게 해방되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독서를 운명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끝은 하나 같이 똥이다. 독서는 똥으로 향하는 험난한 길인 셈이다! 빅 똥! 물론 백만 권을 읽고 싼 똥이 만 권을 읽고 싼 똥보다 백 배 진하고 무거울 수는 있겠지만. 

 

 

 

2

 

아무 것도 아닌 글이라도 매일 뭔가를 쓰는 일은 칭찬할 만하고, 의외로 누구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매일 쓴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닌 글이 아무 것인 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제발 아무 거라도 되어 달라는 식으로 써내는 하루하루가 쌓여 어느 날부터 정말 어마어마한 글을 만들 수 있게 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기왕 써 놓은 글들이 뿅 하고 아무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글 쓰는 사람도 똥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꽃을 쌀 수도 있지만, 그 순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똥을 쌀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먹을 갈고 붓을 들던 시절이나 원고지에 만년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쓰던 시절이면 모를까, 인터넷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과거에 싸놓은 똥들을 소거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철 모르던 시절 싸 놓은 똥 때문에, 그 똥의 진짜 의미는 그 똥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싼 똥은 냄새가 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벌써 언급했지만 그 똥은 픽션이었습니다, 같은 똥을 지금도 싸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내 상태는 불행은 아니다. 하지만 행복도 아니다. 내 상태는 무관심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지친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관심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 상태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마 글을 쓸 능력이 없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무능함을, 이 무능함의 이유는 알지 못하면서, 난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리고 이런 질문이 아직은 내가 말을 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매일 적어도 한 줄은, 마치 사람들이 이제 혜성을 향해 망원경을 겨냥하듯이, 나를 겨냥해야만 할 것이다.    

_ 프란츠 카프카,《카프카의 일기》 

 

카프카는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싸놓은 똥을 치우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매일 한 줄, 힘겹게 자신을 겨냥하며 써냈던 모든 글들이 그에게는 그래봐야 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똥에서 향기를 맡은 친구란 작자가 카프카의 똥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마침내 그 똥은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어쨌든 카프카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똥이었고, 그 덕에 똥 판별기의 기준이 치솟아, 세상에 존재하는 글의 대부분은 똥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글 쓰는 자들의 대부분은 똥머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차피 사람이란 먹으면 결국 쌀 수 밖에 없는 동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 똥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똥칠하지 않도록 내 똥을 잘 관리하는 일이 되겠다. 좋은 것 먹고, 바르게 싸고, 뒷처리 잘 하고.

 

 

 

3

 

도서관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추태 중 하나는 열람실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나가는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좌석이 열람실 입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람실 입구에서 3~5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 지점이라면, 보통은 "여보세요? 예, 예예." 까지를 열람실 안에서 해결하는 셈이다. 세 걸음만 더 걸으면 밖인데, 왜들 저러는 걸까?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저러는 사람들은 내 통계상 90%이상의 빈도로 외모 나이 50대 이상의 남성이다.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 여기가 대구인 것과는 관련이 없을까?

 

어릴 적, 예절을 숭상하는 우리 집에서 예절 위에 있는 것은 딱 하나 뿐이었다. 가장. 예절 위에 가장. 가정 안에서 예절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가정 밖에서도 자기가 에티켓 위에 존재하는 줄 안다. 계속 까똑까똑 소리가 나는데도 끝까지 진동으로 바꾸지 않고 있는 아저씨에게 내가 제발 좀 진동으로 바꾸라고 지적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그들은 에티켓 같은 사소한 것보다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뭔가를 지적하는 비윤리도덕적 패륜에 과도하게 민감한 감수성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디서 어린놈이, 하는 말을 들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나라고 다른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내 옆자리에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타인이 앉지 못하게 하는 못된 놈이다. 이 도서관에서 좌석이 부족할 만큼 사람이 붐비는 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꼭 내 옆에 앉고 싶을수도 있는데 그럴 가능성을 원천봉쇄 하는 셈이다. 감히 두 자리를 맡다니!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탐욕의 증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가 여기 앉을건데 짐을 치워달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며 묵묵히 나는 책을 읽는다. 이게 뭐 큰일이라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래저래 결국 타자와 사는 것은 똥이다, 그야말로 비이이익똥이다! 우리는 결코 서로의 에티켓을 교환하고 납득하여 아름다운 대동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건 다 저놈의 돼먹다 만 자식이 지는 도저히 용서가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르면서 누구라도 기꺼이 용서할만큼 사소한 나의 잘못을 침소봉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내가 맞고 쟤는 틀리는 식으로 다르다. 혹은 내가 맞고, 우리 편은 조금 덜 맞고, 쟤는 틀렸고, 쟤 옆의 놈은 조금 덜 틀리는 식으로 다르다. 그래서 이놈의 세상이 똥인 것이다. 아 저것들을 언제 한 번 싹 다 치워야 되는데,    

 

 

4

그림자 속으로 그림자가

파고들며 킥킥거렸다

서로의 품속에서 따스해지는 곳

덩굴들이 뒤얽히고

물고기들 함께 뛰노는 곳

가자 그곳으로

까만 밤과 하얀 별

새카맣게 빛나는 곳-

 

첫째날 밤

별들이 서로 다른 피의 정액이 되어 밤하늘이 태어났다

 

둘째날 밤의 꿈

세계는 별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엮은 꽃다발이었고,

 

셋째날 꿈속에선

차가운 바람이 은하수 위로 불자

성좌의 동물들이 첨벙첨벙 뒤섞였다

곰, 전갈, 날갯짓 치는 백조들

 

천하루날 밤, 꿈들의 막이 터져

밤하늘들이 뒤섞였다

소란스레 폭죽 터지고

물살이 별들을 쓸어갔다

어둠과 빛이 뒤섞인

그늘진 아이

쪽으로, 양도 고양이도 아닌 동물 하나 걸어와

조용히 살을 섞었다

 

혀와 혀가 만나는 곳

 

5

두송이 꽃이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곳

 

_박희수,「밤하늘」부분

 

나는 누군가는 선하게, 누군가는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랜덤설을 주창하지만, 인간의 본성과는 별개로 시인이 그리는 저런 아름다운 나라가 도래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한다는 말은, 사람들마다 "차이"에 포함시키는 것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공염불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벌써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한다. 다만 누군가에게 동성애는 차이가 아니라 치료해야 할 정신병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피부색은 차이가 아니라 내재된 인간성이며, 다른 아무개는 성차는 차이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특성이라 생각할 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가 똥일 수 있고, 나와의 관계가 똥일 수 있고, 나 때문에 사는게 똥일 수 있는 이런 똥밭 같은 위험한 이승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굴러야 하는 걸까? 저 사람 정말 똥 같군,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웃으며, 선생님 죄송하오나 전화는 나가서 받아 주시면 어떨까요, 하고 부탁하며, 상대방 또한 이 자식은 정말 똥 같군, 하지 않고 웃으며, 아이쿠, 제가 그만 정신이 없었군요. 추후에는 주의하겠습니다, 대답하는 꽃 같은 세상이 정말로 올 수 있을까? 어쨌든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 만나고 섞이는 밤이 하루 이틀을 세다 결국 천 하나의 밤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두 송이 꽃이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어려운 길이다.   

 

 

 

4

 

이렇게 시종일관 드러운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되게 센치한 상태여서 난 오늘 내가 시라도 한 편 쓰려나 보다 했는데, 세상에, 똥이라니. 

 

그렇지만 뭐 크게 더러운 일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는다. 이런 책도 버젓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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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7-20 06:06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저는 변비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갰습니다.....ㅠ

다락방 2017-07-2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이 글은 똥 파티네요.
인생도 똥 글도 똥 너도 똥 나도 똥 우리 모두 똥똥똥똥똥....
이 글을 어제 자기 전에 읽었다면 똥 꿈꾸고 좋은 하루가 되었을텐데, 어제 뻗어 자버리는 바람에 이 글을 놓치고 오늘 아침에야 읽네요...똥꿈 꾸면 좋다는데....돈 들어오는 꿈이라는데...
똥...

똥에 의한 의식의 흐름...



그럼 이만 안녕히...

syo 2017-07-20 08:18   좋아요 0 | URL
으윽 오늘 아침은 새 마음 새 뜻으로 으쌰으쌰 시작했었는데, 왜 제가 어제 싼 똥을 오늘 제게 던지셔요 다락방님......ㅠ

cyrus 2017-07-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 파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본 책들 중에서 가장 더러운 내용입니다. 책에 코를 파는 방법이 그림으로 나와 있습니다. ^^

syo 2017-07-20 13:25   좋아요 1 | URL
그렇지만 cyrus님, 코파기는 많은 경우 실제로 즐겁습니다.....

단발머리 2017-07-2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책을 산처럼 쌓아 타인이 앉지 못하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너무 마음에 와닿네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서요 ㅠㅠ
누군가는 꼭 내 옆에 앉고 싶을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어요. ㅎㅎㅎㅎㅎ

syo 2017-07-20 13:26   좋아요 0 | URL
빈자리가 많지만 굳이 내 옆에 앉고 싶었을 분들께(그런 분들이 분명히 있을거라 믿고)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집시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