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에 열람실 문을 당기고 들어가면 매일 그 시간, 매일 그 자리에 앉아있는 매일 그 분들과 매일 눈이 슬쩍 마주치곤 한다. 인사라도 할까? 우리가 무슨 사인데 인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진 않을까? 앉고 싶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을만큼 일찍 오는 사람들의 동료의식 같은 게 은근 있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걸까? 전완미남, 용감한 부부, 헛되도다 영감님, 볼빨간 삼촌, 온도의 지배자, 벗지마오 그 모자, 빨간 형과 파란 동생, 킹 오브 배바지...... 내가 혼자 별명 붙이고 혼자 맘 속으로 불러보는 수많은 도서관 크루들은 나를 뭐라고 부르고 있을까. 쪼리 신은 원숭이? 물 먹는 미어캣? 텀블러 사무라이? 가장 먼저 먹는 자? 궁금하다. 그 사람들이 불러주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골고루 섞여서 나일텐데.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21세기 도서관은 혼자이고 싶은 사람에겐 너무 시끄럽지만, 가끔은 함께이고 싶은 사람에겐 또 너무 조용하다.

 

드러내지 않기와 공적인 장은 이중적인 상호전제 관계에 있다. 공적인 장이 있어야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거기서 물러나거나 접근하거나 할 수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공적인 장을 예정된 파괴에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공적인 발언이 경청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말을 해야만 고독이 고립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

 

_피에르 자위《드러내지 않기》27쪽

 

 

2

 

열람실 안쪽, 두 벽이 만나는 모퉁이 가장 으슥한 자리를 잡는 아저씨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모기약을 꺼내 분사한다. 선풍기 바람을 타고 내 자리까지 모기약이 넘어온다. 와, 상큼한 오렌지향이다. 덕분에 매일 아침 향수를 뿌리고 올 필요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향수 값이 굳고 그걸로 책을 한권 더 사거나 하는 이득은 없다. 그건 내가 원래 향수를 쓸 줄 모르니까 그렇지. 아, 갑자기 생각나는 문장. 골수 좌파 아나키스트(-_-??)인 나는 어쩐지 뿌듯하네. 오렌지 향 모기약도 좋아하는 나의 무취향이.

 

취향은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소비를 해야 비로소 생겨난다. 어떤 것에 끌리는 경향이야 타고날 수 있지만 세밀한 취향은 절대소비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취향은 자본주의적이고, 개인과 도시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_이현주《읽는 삶, 만드는 삶》44쪽

 

 

3

 

요즘처럼 산산한 아침 저녁이 이어진다면 여름이라는 계절도 그리 못된 놈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크고 작은 개미도 보고, 굵기가 엄지손가락 만한 지렁이도 보고, 축 늘어진 나무 줄기들 사이로 보일듯 말듯 지은 거미줄도 본다. 이렇게 안 쓰다가 혹시 까먹을까 봐 금연 안내문을 읽으면서 서울말 연습도 한다. 우리 도서관은 국민건강진흥법에, 음, 국민겅강, 국민건강진흥법, 음음. 서울 사는 사람 아무도 서울말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서울말. 나만 아끼는 나의 서울말. 새끼 고양이 야옹야옹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 저 아이도 내 서울말을 들었나 본데.

 

다른 사람이 쓰는 표현을 피하라. 누구나 하는 말을 그저 전달할 뿐이더라도 자신만의 화법을 생각해 내라. 인터넷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라. 책을 읽어라.

 

_티모시 스나이더《폭정》78쪽

 

 

4

 

내가 내일도 도서관에 갈 예정이듯, 오늘 도서관에 왔던 사람들은 내일도 오겠지. 우리는 매일 스치고, 서로의 조각을 한 줌씩 주워 내 안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빚으며, 그렇게 아무말도 나누지 않고 친해질 것이다. 어쩌다 하루 안 보이면 빈 자리가 눈에 들고, 며칠 안 보이면 몇 초쯤 걱정을 하기도 하고, 길게 만나지 못하면 아, 합격했나보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며 부러움과 축하를 반반 잘 버무려 넘겨짚기도 할 테지. 조금 어색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사람이 사람과 사는 방식이겠거니 한다.

 

나는 생각했다. 저 문장은 얼마나 이상한 문장일까.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 얼마나 이상한 삶들이 얼마나 이상한 내용을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한 문장일까. 그리고 만일 저 길고 긴 문장을 손본다면 어떤 표기가 맞고 어떤 표기가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들어내거나 고치거나 다듬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_ 김정선《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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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03 22:04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최고예요. 어디 다른데 가기가 귀찮을 지경이니까요....

에디터D 2017-08-0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서관을 거의 매일 다녀서 그런지 syo님의 글이 반갑네여 ㅎ

syo 2017-08-03 22:49   좋아요 0 | URL
혹시 리제님도 도서관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이시나요? 저만 그런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