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은 잠깐 앉았다 이내 가고 무더운 여름이 길게 이어진다.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가을은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고, 추위와 함께 온 겨울이 오래 머문다.

 

 

 

2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배우며 자랐다. 요즘 아이들도 그렇게 배우는지 모르겠다. 교과서는 이 땅의 일년을 같은 크기로 네 조각 내서 3월부터 봄, 6월부터 여름, 9월부터 가을, 12월부터 겨울이라고 가르쳤는데, 실제로 몸이 계절을 그렇게 감지하고 있었으니 퍽 진실한 지식이었다. 그런데 잠깐 국어, 영어, 수학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른이 되어 보니 이 나라는 여름과 겨울이 유난히 부지런을 떠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리벙벙 10년을 더 살면서, 더 중요하고 더 엄혹한 진실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여름과 겨울이 봄 가을을 갉아먹는 일이 비단 땅의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3

 

삶의 봄은 언제까지일까?

 

열 살짜리 아이에게 삼각함수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겨우 앞이 보이던 스물 몇의 나날들을 내 삶의 여름이 시작된 지점이라 짚어 본다. 그때 나는 내 팔자 기구한 줄만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내게 삼각함수를 배워야 했던 그 아이의 여름은 벌써 열 살부터는 시작이었구나 싶다. 그리고 내가 지나가야 할 여름이 아직 한참 남았듯이, 어딘가에서 0.5점의 평균을 올리기 위해 새벽과 건강을 땔감처럼 태우며 살고 있을 그 아이의 여름도 아마 길고 뜨겁게 이어지겠지. 십 년? 이십 년? 아니면 삼십 년?

 

가을은 도대체 언제쯤 오는 것일까? 오면 꽤 있다가 가주긴 할까? 잠깐 앉아서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어쩌면 이런 말씀이 희망이 될까?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_ 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63쪽

 

아니면 좀 더 아름다운 이런 말씀은 또 어떨까?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_안도현〈가을의 소원〉전문

 

 

 

 

5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 날, 가을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전언이다. 가을이 와도 가끔은 혼자 울 것이며, 울다 스러질 때까지 초록의 날들을 되짚어 그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처방이다. 가을은 멀고, 그냥 오는 듯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서, 나한테는 아직 여름이 한참은 더 남았다는 진단이다.

 

솔직히, 여름이 길고 잠깐 본 가을의 맛이 아직 혀끝에 남았건 말건 가차없이 곧바로 긴 겨울을 살다 가야하는 이 침울한 배분이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에게 마치 팔자의 모델 하우스처럼 제공되는 것이 다 우리 탓은 아닌데, 로또가 아니라면 마냥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빡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은 물론 지구온난화가 주범이겠지만, 나는 우리 삶의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 역시 공범이나 최소한 종범쯤은 되지 않나 의심한다. 삶의 사계절이 공평하게 사등분을 회복하는 순간, 여름은 6월에 와서 세 달 있다가 가고, 겨울이 9개월 뒤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며 2월 말에 깔끔하게 물러가는 기적이 도래할 거라는 미신적 희망도 가져본다.

 

어쨌거나 기왕 비집고 열어나가야 할 여름이라면, 여름 안에서나마 조금은 듬성듬성 살고 싶다. 어쩌다 바람 시원해 잠깐 멈춰 선 자리가 눈과 귀에 아름다운 곳이라면 더 걸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천천한 걸음으로 살 '수 있'고 싶다. 곳간이든 마음자리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채우며, 혹은 비우며, 여름 위에 둥둥 떠서 가을이 올 때까지 이리저리 흔들흔들 부유할 수 있다면 그것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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