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젖은 셔츠를 입고 도서관 앞 계단에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이제 슬슬 비어가는 그의 정수리처럼 해 지는 방향으로 조금씩 옅어지는데 보기 아쉬웠는지 매미 매섭게 울고 바람도 슬며시 돌아갔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등은 아직 더 작아질 일 남은 돌멩이 같아 어쩐지 눈 떼지 못하고 나도 조용히 기다려 보다 문득 등 뒤에 수 만권의 책을 쌓아 놓은 저 남자 수 천개의 갈림길을 건너온 저 남자 수 백개의 이름을 궁글려 빚은 저 남자의 셔츠는 무엇을 기다리다 젖고 말았나 궁금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 차갑고 굳은 쇳덩어리 달리는 틈바구니를 잘도 파고 들어 여기까지 들리는 부르는 소리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세상 가장 커다란 사람이 되어 계단을 내려갔다. 

 

 

2

 

저녁은 먹었어요 하는 대답에서 배고픈 냄새가 났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저 바라본 것이었는데 들켰다는 듯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콩콩 바닥을 차 보는 아이는 무엇을 바라 여기에 왔는지 말하고 싶은 듯도 하고 말할 수 없는 듯도 하고 영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도장처럼 허공에 찍어댔고 그것은 모두의 눈에 생생히 보였으므로 우리는 다 같이 배고픔을 느꼈지만 이 배고픔을 아무리 모아 팔아도 너를 배불리지 못하겠지 깨달은 사람들 역시 하나 둘 고개를 숙이고 콩콩 바닥을 차는 사이 학생은 휴게실의 문을 열고 어두운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제서야 사람들 다시 고개를 들어 저 어두운 바깥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아이의 미래 되지 않도록 아무런 이름도 짓지 마시기를 기도 드리는 동안 떼꾼한 침묵들이 바닥으로 고였다.

 

 

3

 

물으면 대답해 줄 것 같아 일부러 하지 않은 질문들 중에는 가끔 쓸만한 것들이 나왔으므로 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밤 내일도 오늘의 얼굴로 돌아올 밤 도대체 당신은 왜 이 밤까지 남아 그 슬픈 눈으로 허공을 디디는지 왜 그 눈을 따라가면 내 눈에도 정적이 보이는지 오늘은 한 번 물어볼까 망설이다 보면 폐관을 알리는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고 오늘의 물음을 내일로 던진 것이 어쩐지 홀가분하여 슬쩍 웃어보았는데 그 슬픈 눈이 내게 너는 내일도 묻지 못할 것이라고 그것은 네가 이미 그 답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내일도 모레도 그 어떤 날에도 나는 허공을 정적을 슬픈 것을 그 어떤 것도 이미 묻지 못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4

 

 

결국 우리는 스스로 꿈결에 제조한 폭탄을 제각기 품에 안은 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하면서 걸어가는 건 아닐까. 다만 무엇을 그러안고 있는지 타인도 모르고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한 거겠지.

 

_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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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알랭 마방쿠‘의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라는 소설 혹시 읽어봤나요? 오늘 제가 읽은 쇼님의 이 페이퍼는 대뜸 이 책을 떠올리게 만드는데요, 이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라는 소설도 역시 문장에 마침표가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도서관 가보시면 도전!!

syo 2017-08-09 08:53   좋아요 0 | URL
도전!!
그치만 이 글에는 마침표가 있어요 ㅎㅎㅎ 문법적으로 마침표 찍어야 될 데는 다 찍었는데, 문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이로군요....

쇼코 2017-08-09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에서 3의 글들이 다 하나의 문장들이고 적절한 자리에서 조사가 생략 되어서 그런지 산문시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두번, 세번 다시 읽어 볼 만큼 내용도 그 도서관 풍경의 소리나 촉감이 들리고 느껴질 것만 같았고요. 4번에 달아 놓으신 책은 읽지 못해서 위의 글들과 정확히 연결시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ㅎㅎㅎ

도서관 풍경 속 사람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참말로 좋습니다. 저 또한 낯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오늘도 좋은 글 고맙습니다^^

syo 2017-08-09 12:01   좋아요 1 | URL
ㅠㅠ 몸둘 바... 제 몸둘 바를 돌려주세요.

소세키의 《유리문 안에서》는 정말 유리문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그린 그림 같은 산문이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고, 그의 눈에 포착되면 타인이나 세상이 조용한 가운데 어쩐지 쓸쓸함이 자꾸 묻어나는 것 같아요. 저 책 읽고 나름 감동 받아서 저도 한 번 사람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봐야지 했을 뿐이고 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ㅎ

오늘도 역시 글보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쇼코 2017-08-09 12:12   좋아요 0 | URL
유리문 너머로 보는 조용하고 쓸쓸한 세상, 저도 같이 보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작가라니 꼭 읽어보고 싶어요. 다음 번 책 살 때 이 책도 함께 받아보겠군요. ㅎㅎ 좋은 작가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