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꿈을 꾸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조석이었다. 잠에서 깨어 생각해보건대, 그 얼굴과 가장 닮은 사람은 서태지이지만, 꿈 속에서 그는 분명 웹툰 작가 조석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그 서태지가 조석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을 뿐인데 그 서태지는 본인 입으로, 네 맞습니다. 조석입니다, 라고 시인했다. 안녕하세요, 조석씨. 나는 일곱 권의 책을 반납했다. 스무 권의 책을 빌리고 일곱 권을 반납했으니 열세 권이 남았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카운터에서 한 발 물러서서 몇 권이 남았는가를 어플로 알아보고 있었다. 몇 권을 더 빌릴 수 있는지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멍청하게도, 스무 권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 스무 권을 빌렸다가 일곱 권을 반납했으니 내 손에는 열세 권이 남았고, 스무 권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 열세 권을 빌렸으니 일곱 권을 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려했던 것 같다. 엄마가 너한테 사과 스무 개를 줬어. 근데 너가 사과 일곱 개를 먹었어.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너는 사과를 몇 개 먹었니? 어쨌거나 그때 갑자기 조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syo씨의 글에는 리듬이 있어요. 네? 그러니까 이런 리듬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네? 그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우와, 정말요? 네, 제가 만화로 그리고 싶습니다. 만화로요? 네,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로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네? 그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우와, 정말요? 네, 아무래도 syo씨의 글에는 리듬이 있으니까요.

 

이런 대화가 한없이 이어지다가 점차 가늘고 희미해더니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꿈을 꾼 거지? 그러니까 어제 이백오십만 년만에 맥주 두 잔 먹고, 4킬로미터를 걸어걸어 집으로 왔고, 두 시까지『쓰기의 말들』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요즘 쓴 리뷰나 페이퍼들이 갑자기 칭찬을 받아서 꽤 기분이 좋았나보다. 열심히 쓰라는 꿈인가 봐. 칭찬은 syo를 춤추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춤 말입니다. 좌삼삼 우삼사.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당최 저놈의 좌삼삼 우삼사가 뭔지를 모르겠다...... 좌삼삼 우삼사가 내 "쓰기의 말"이 되고 싶어서 얼른 꿈에 나온 걸까?

 

 

힘들면, 도망가고 싶다. 쓰는 삶에서, 쓰는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하염없이 걷지만, 일시적인 기분 전환일 뿐 마음이 홀가분하지도 걸음이 자유롭지도 않다. 글 쓰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쓰는 것. 몸의 감각이 쓰기 모드로 활성화되고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밑 원고가 다져진다. 모터가 돌아가고 원고가 불어나 있으면 그 불어난 힘이 글의 소용돌이로 나를 데려간다.

_ 은유,《쓰기의 말들》

 

 

2

 

빵 굽는 사람은 빵을 굽고, 집을 짓는 사람은 집을 짓는다. 빵 굽는 사람은 빵으로 말하고, 집을 짓는 사람은 집으로 말한다. 나는 날마다 짐승처럼 엎드려 여덟 시간씩 글을 쓴다.

_장석주,《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불굴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작가들. 오늘 책이 나왔다고 하니 지금쯤 다음다음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겠다 싶은 책 머신들. 강준만, 우석훈, 박홍순 그리고 장석주. 엎드려 여덟 시간의 글을 쓰는 문장의 짐승남은 멋이 있다. 가끔씩 저런 삶을 꿈꾸기도 한다. 평생을 치열하게 읽기와 쓰기에 매달려 살아온 것이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 되고 널리 존경받을 이유가 되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겠다.  

 

 

3

 

그리하여, 지식과 재능을 가진 당신이 그 위에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당신과 동료는 자신의 지식과 재능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무하려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고 함이 아니라 투쟁의 동료가 되기 위함입니다. 지배하려고가 아니라 미래를 정복하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당신 자신을 고취시키고자 함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중의 갈망을 이해하고 정확히 표현하려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들이 청년의 모든 도약과 함께 삶 속에서 녹아내리도록 부단히 활동하기 위함입니다. 그때라야, 비로소 당신은 하나의 완전한 삶, 이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_P. A. 크로포트킨,《청년에게 고함》

 

또한, 책상에서만 글 쓰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우되 싸움 안에서 내가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 쓰되 쓴 것을 바로 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채우고 그 이웃은 또 다른 이웃을 채우며 빙빙 돌아와 마침내 내게 오도록 하는 사람 되면 좋겠다.

 

으, 오글오글,

 

도와주세요. 중2병이 낫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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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8-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2병도 이만한 문장으로 표현되면 작품입니다. 꿈 내용 너무 재밌네요. 서태지 얼굴을 한 조석은 뭔가요. 좌삼삼 우삼사는 또..ㅋㅋㅋㅋ 앞으로도 많이 춤추세요!^^

syo 2017-08-19 11:25   좋아요 0 | URL
뭘까요 저 좌삼삼 우삼사는...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으니까 꿈에 나온걸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ㅋㅋㅋㅋ
좋은 주말 되세요, 독서괭님.

시이소오 2017-08-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syo님 글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는것 같아요. 다락방님 리뷰글도 넘 좋던데. 계속 좌삼삼우삼사해주시길^^

syo 2017-08-20 13:46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이 생업에 종사하시느라 덜 읽고 덜 쓰시는 까닭에 제 못난 글들이 이웃분들 눈에 띄는 것이겠지요. 그립습니다.....

AgalmA 2017-08-2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얼굴이 좌삼삼 우삼사로 상상되려고 해요ㅋㅋ 그게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물으시면 꿈에서 보여 드릴 수 있다고... 줄행랑))) ㅎㅎ

syo 2017-08-21 11:09   좋아요 1 | URL
거울을 봤더니 정말 제 얼굴이 좌삼삼 우삼사로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는 AgalmA님 꿈으로 확인하실 수 있겠으나, 힌트를 드리자면 꿈에서 만나보라고 추천할 만한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좌삼삼 우삼사가요.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1

 

한 사람을 아는 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한 사람을 아는 데 그 사람이 쓴 책은 몇 권이나 필요할까?

그 사람이 쓴 책은 그 사람을 아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얼마나 줄여줄까?

 

 

 

2

 

그녀는 크다고 한다. 아무리 잠든 여자 둘을 양 옆구리에 끼워 들고도 가뿐히 걸을 수 있는 괴력의 잭 리처라도, 만약 자기가 그 여자중 하나라면 그래도 잭 리처가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는 옹졸하다고 한다. 출근길 버스 기사와 왠 청년이 시비가 붙자 제일 먼저 지각 걱정을 하는 스스로를 보며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적도 있는데, 후자를 더 후회한다고 전한다.

 

그녀와 결혼하려면 일이 많다. 채식을 그만둬야 한다. 설거지를 도맡아야 한다. 둘 사이에 유지해야 할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거리는 얼마만큼인지 꾸준히 체크해야 한다. 단지 특별한 먹거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훌쩍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이국의 도시에 깊은 환상을 품는 그녀를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그곳으로 데려갈 줄도 알아야 한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서재에서 "대체 왜! 그건 아냐! 제발 그러지 마!" 하는 식의 비명이 들리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신속하게 서재로 들어가 그녀의 손을 확인할 줄 알아야 한다. 손에 책이 들려있다면 그녀는 미친 것이 아니니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고 다시 TV를 보러 가도 될 듯하다. 

 

설사 그 모든 관문을 통과해 그녀를 얻었더라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매력적인 남자들과 격전을 벌이고 끝내 쓰러뜨릴 수 있어야 틈만 나면 그들과 사랑에 빠지는 그녀를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녀는 끝없이 읽고, 소설은 끝없이 쏟아지므로 전쟁도 끝이 없다. 그럼에도 소설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소설을 사랑해야 한다.

 

비결이 궁금하다면 그것마저도 친절한 그녀가 알려준다.

 

큰따옴표 안의 글은 정말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느낌표가 있는 문장은 정말 감탄하거나 놀라듯이, 쉼표에서는 꼭 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44)

 

 

 

전부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알아낸 것들이다. 심지어 일부다.

 

내가 저자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그녀의 글을 좋아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이유다. 웃기거나, 슬프거나, 다정하거나, 혹은 냉정하거나한 그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읽는 사람을 글쓴이의 진심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믿음직한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이유경 작가의 글은 그렇다. 내가 이 글을 읽고 웃었다면 반드시 그녀도 웃었을 것이라는, 내가 이 글을 읽고 화가 났다면 반드시 그녀도 화가 났을 것이라는(아직도 화가 나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분노에 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진심이기만 하면 반드시 우리 둘 다 진심일 것이라는 믿음, 그런 믿음을 주는 글이 그녀의 손에서 나온다. 이 엄혹한 인터넷 시대에, 일기조차 남들이 볼 걸 예상해 한껏 꾸미고 포장하여 올리는 무시무시한 시대에, 아직도 저렇게 제 내장을 훌훌 다 끄집어내 보여주는 글을 쓰다니.

 

어쩌면 우리에겐 책에 대한 더 이상의 해석은 필요없을 수도 있다. 서평도 그럴 수 있다. 로쟈님과 cyrus님이 있으면 대단히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나.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느낌일 수 있다. 같은 책을 읽은 타인의 마음일 수 있다. 책의 역할이 한 사람의 내부를 채우는 것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채우는 데에도 있다면,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책 읽은 책"이 한없이 필요하다. 책 읽은 마음이 예쁘든 모났든,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여주는 책이 소중하다.     

 

 

 

4

 

나는 예쁘지 않아요. 내 친구들은 어느 정도는 예뻐요. 내가 전화했을 때 반갑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나한테 연락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좋아요. 나는 함께 있을 떄 당신이 아주 많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아주 강한 욕망이 내 안에 있죠. 그것은 거의 나의 식욕과 맞먹어요. (170)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문제의 그 식욕이 어느정도인지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밑줄 긋는 남자』의 여주인공이 쓴 편지를 흉내낸 글의 일부다. 여주인공은 벌써 답장을 받았고, 그녀도 답장을 기다린다고. 지금쯤 답장을 받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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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08-17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근사한 글이예요~~~

˝설사 그 모든 관문을 통과해 그녀를 얻었더라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매력적인 남자들과 격전을 벌이고 끝내 쓰러뜨릴 수 있어야 틈만 나면 그들과 사랑에 빠지는 그녀를 되찾아 올 수 있다.˝

특히 이 부분 좋아요.
그녀를 얻게 될 남자가 소설 속 매력적인 남자들과 벌이게 될 경쟁과 경합의 시간들. 격투와 격전들.

syo 2017-08-18 05:50   좋아요 1 | URL
가끔씩 보면 와, 저 자식은 이길 수 없겠는걸? 싶은 남자들도 있는 바, 누가 될지(혹은 된지) 모르지만 그들과 싸워야 할 그 분께 격려의 말을 전합니다....

cyrus 2017-08-18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글은 다정다감해요. syo님은 책에 친근하게 다가가서 책에서 표현하지 못한 저자의 진심까지 읽어내요. 그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syo님 글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따뜻한 글이라면 문장력, 수사, 이런 거 없어도 됩니다.

syo 2017-08-18 23:16   좋아요 0 | URL
읽어주시는 분들이 따뜻해서 따뜻하게 읽히는 걸 겁니다. 제가 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ㅎㅎ

AgalmA 2017-08-21 11:04   좋아요 0 | URL
동감ㅎ

2017-08-18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9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사단장 죽이기 1, 2 / 무라카미 하루키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하루키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은 이제 잃은 듯하다. 다른 책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밑줄을 그었다싶을 멋진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대는데, 그러다보니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상황을 만들어낸 것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섞어 직조하는 대화의 그 특이한 결이나, 사건을 전개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나는 오랫동안 좋았는데, 십 오년을 좋았더니 슬슬 울림이 덜하다. 제일 큰 문제는 그가 거장이라는 것, 따라서 하루키의 라이벌은 어제의 하루키라는 데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루키의 역량이 내 눈에 가장 빛나 보였던 때는, 해변의 카프카를 시작점으로 하고 1Q84를 마침점으로 하는 선분 위의 어느 지점인 것 같다(해변의 카프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당길 것이다). 물론 그때 이후로도 하루키의 필력은 절대적 기준에서 보면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보아도 여전히 하루키는 문학 마라톤의 선두주자임을 의심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작가들과 다른 독자들의 보폭이 하루키의 것보다 더 넓다. 거리는 자꾸 좁혀질 것이다.

 

욕(?)을 하자는 마음이라 해놨지만, 솔직히 좋은 책이다. 600페이지 종이 뭉텅이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하는 능력은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다. 하루키에게는 여전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루키만의 하루키가 있다. 신작이 언제 발매 되어도 장바구니 맨 앞칸에 들어갈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고양이의 서재 / 장샤오위안 / 이경민 옮김 / 유유

 

보시다시피 표지가 어마어마하게 사랑스럽다. 한 손에 머그컵을 든 고양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이 무려 생선책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표지에만 나온다. 손헌수 닮은 영감님(장샤오위안 선생으로 추정된다) 무릎에 앉은 고양이 사진 하나 덜렁 있긴 한데,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걸까? 제목이 고양이의 서재인데?

 

장샤오위안 선생은 현지에서 유명한 책벌레인 듯한데, 역시 이름 드높은 책벌레들이 공유하는 유년기의 경험, 그러니까 어린 시절 거의 무한한 양의 책을 공급해주는 도서관이랄지, 아버지의 서재랄지, 하다 못해 친구 아버지의 서재랄지, 그런 뭔가가 꼭 있고, 이상하게도 반드시 그 책을(번호가 붙어있는 책들은 꼭 번호 순으로) 몽땅 읽어본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삐꾸 같은 부분도 더러 있는데 이를테면, 진정한 책벌레이지만 외모가 극히 볼품없는 L의 불모지같은 청춘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L은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다. 그는 내게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여성은 무척 적다고 말한다. 지금은 많은 여성이 스스로 '독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돈이다. 물론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할 뿐이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에게 '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해야 한다.'라고 요구하는 것 말이다. (236)

 

L은 책벌레라는 것 말고는 외모도, 돈도, 명예도 가진 것이 없다(성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피소드를 보면 괴짜 기질이 다분히 있다). 근데 왜 독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여자는 그런 L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야 하는가. 남자를 돈으로 판단하는 여성에 대해 분개해놓고, 막상 자기는 여자의 외모로 가치를 매긴다. 다음 문장에서.

 

자기 책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일은 자기 책이든 아니든 세상의 모든 책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는 친구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흠을 발견하면 나서서 손보는 이가 있다.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책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책 정리를 한다. 누군가 책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걸 본다든가 책이 잘못될 가능성만 느껴도 그러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좋은 말로 말린다. 그들에게 좋은 책이 더럽혀지거나 부적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미인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아서 아름다운 것을 아끼는 마음에 보호하려 드는 것이다. (188)

 

이런 사람들을 놓고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더 더러운 말을 할 수 있지만, 정갈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자.

 

그러나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잘하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 책을 많이 읽었지만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책에서 얻었지만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을 나는 곧잘 마주치곤 한다.

_이유경,『독서공감, 사람을 읽다』34-35

 

채링크로스 84번지 / 헬렌 한프 / 이민아 옮김 / 궁리

 

어쩐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옛 서점들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진다. 2차대전 직후전승국인 영국 국민들이 식량이나 나일롱 양말을 배급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전후를 겪은 사람들의 경험을 담은 책을 읽고 싶어진다. 다른 책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아 주는 책에 별점을 매기면 다섯 개 미만이 나올 수가 없다.

 

따뜻하게 편지와 소포를 주고 받는 모습을 읽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쩍 눈물이 나는 것은 왜일까. 나는 편지도 잘 못 쓰고 선물을 주는 일도 드물지만 편지와 선물이 아름다운 삶을 위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야말로 실용적 용도로 쓰였으므로 오히려 아름답다. 작위적인 아름다움이나 불필요한 가식이 전혀 섞일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서점 점원과 고객이라는 그야말로 비즈니스적 관계를 따뜻한 끈으로 바꾸어 이어나가는 그 마음들. 한없이 따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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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8-16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 단 한 권도 여태 읽지 못 했지만, 예전 책까지 찾아 꺼집어 읽고 싶어지는 리뷰입니다. ^^

syo 2017-08-16 23:1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그보다 북다님께서 하루키를 한 권도 안 읽으셨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입니다. 워낙에 많이들 읽으시는 작가잖아요. 그래서 부러 피하신걸까요?

다락방 2017-08-1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의 서재... 뭐죠? -_-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돈이다.... 뭐여.......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돈 필요없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자기들도 돈 벌자고 일하면서, 돈으로 살아가면서, 그러면서 왜 돈이 필요하고 돈이 좋다고 말하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가혹할까요? 어처구니.
저는 돈을 사랑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제가 돈을 버는 이유는 쓰기 위해서입니다.
흥!!

syo 2017-08-17 09:47   좋아요 0 | URL
정갈한 책과 일갈의 댓글ㅎㅎㅎ

cyrus 2017-08-1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책의 구절에 공감합니다. 제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늘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잊을 때마다 경솔한 발언을 합니다.

syo 2017-08-17 13:53   좋아요 0 | URL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몰랐어요. 제게 cyrus님은 실수를 모르는 서평머신같은 이미지인데 말이죠.

레삭매냐 2017-08-1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은 두번 째 권 읽다가 말았어요...
다른 책들이 너무 재밌어서 말이죠.

하루키가 아닌 다른 작가가 같은 내용으로
썼어도 그렇게 히트를 쳤을 지 모르겠네요.

syo 2017-08-18 11:10   좋아요 0 | URL
일본 현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긴 하네요. 일본보다 한국에서 하루키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봄밤 2017-08-2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종종 들러 읽고 있습니다. 로긴할 힘이 없어서 이렇게 씁니다만은
이 리뷰에서 <기사단장 죽이기>표지 배치하신 것을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알라딘 쓰기 툴은 매우 조악한데도 이렇게 멋진 레이아웃이라니...
다음엔 좋은 서평에 ‘좋다‘라는 말을 잘 해보겠습니다.
 

1

 

엄마는 책이었다. 엄마는 책 한 권 읽지 않지만 아들이 가장 자주 펼치는 책이었다. 가장 함부로 읽는 책이었다. 아들은 자라며 엄마의 여백에 아들의 생각을 휘갈겨 놓거나 밑줄을 치거나 귀퉁이를 접어 놓거나 했다. 그 모든 일이 무심하게 이루어졌다. 아들에겐 아들만 있었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한 책이었다. 묵묵하고 깊었다.

 

종이로 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돌아와서야 아들은 엄마가 책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조심스러운 미소 안에서 언젠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어 놓은 밑줄들을 보았다. 아들은 제가 그은 그 밑줄들을 '세월'이라고 읽고 싶었지만 이내 그것을 '상처'라고 읽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접어 놓은 귀퉁이가 허리와 무릎에서 여전히 접혀 있었다. 아들이 펴 놓았어야 할 것들은 아들이 펴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도 펴지 않은 채 남았다. 엄마는 책이었다. 아들이 가장 함부로 읽어 이제 더는 아무도 읽지 않는 빛 바랜 책이었다. 자기가 새긴 글자들은 바스라져 시간의 어느 자리에 가라앉히고, 이제는 아들이 휘갈겨 놓은 아들의 말, 아들의 행동, 아들의 생각, 아들의 이름만을 담고 있는, 아무도 읽지 않으려 하는 책이 되었다.

 

아들은 오늘 시간이 우연히 펼쳐 놓은 그 책의 어느 낱장을 읽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그 위를 훑고 지나가도 바스라질 것 같지 않은 제 이름이 보였다. 그 순간이 날카롭고 따뜻한 펜이 되어, 아들의 책장을 열어젖히고 처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아들은 책이었다. 종이로 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돌아와서도 제가 책인 줄 몰랐던 아들은, 엄마가 책이었음을 깨닫고 비로소 저도 책이 되었다.

 

 

 

누구든 빌린 책에서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만난다면, 거기에 밑줄을 그은 사람과 그 감정에 대해 잠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_ 이유경,『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2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_ 박준,「별의 평야」,『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산을 타고, 자갈 위를 달리고, 진흙 속을 뒹굴며 며칠을 보낸 뒤의 저녁이었다. 몸과 군장은 첫날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가벼워진 것은 마음 뿐이어서 우리는 마음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철원의 밤은 10월부터 추웠다. 추운 10월의 밤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면 더웠다. 덥다 싶을 때쯤 쉬었다. 쉬다 보면 다시 추웠다. 땀이 몸을 가지고 놀았다. 한번 내려 놓으면 다시 메고 싶지 않을까봐 우리는 등에 멘 군장을 풀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쉬었다. 담배를 태우거나 소변을 보는 이는 군장을 벗었지만 철모는 벗을 수 없었다. 병장은 철모를 벗을 수 있었다. 병장은 이 길을 다 걸으면 이틀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철원은 10월에도 밤이 추운 곳이지만, 아직 별이 많은 곳이므로 하늘을 자주 보라고 했다. 이등병은 철모를 벗을 수 없었다. 철모가 익숙치 않아 고개를 들자 목이 확 꺾였다. 별이 눈으로 확 들어왔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별이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다시 걷는 동안 이등병은 하늘을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지휘관 몰래 망막에 박아 훔친 별들이 앞서 걷는 이의 뒷꿈치에 묻은 진흙으로, 채 다 털지 못한 엉덩이의 모래알로 남아 하나하나 셀 수도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모두 서로의 뒷모습에서 별을 세는 것 같았다. 금학산 어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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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1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쇼 님이 이제는 거의 작가‘가 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syo 2017-08-15 19:36   좋아요 0 | URL
설마요... 그래도 곰발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기쁩니다. 사실은 힘 줘서 썼거든요. 아니다, 힘 빼서 쓴건가...

독서괭 2017-08-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는 책이었다. 이 글 정말 좋네요. 하트 100개입니다.

syo 2017-08-15 19:38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ㅎ
하트는 짝수번 누르면 0개가 됩니다ㅎㅎㅎ
독서괭님의 마음만 기쁘게 받습니다^^

단발머리 2017-08-1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다,는 말 말고 좀 더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syo님처럼 멋지게 말하고 싶은데... 부족한 저의 표현력을 탓합니다.
syo님은 더 많이 써야 해요~
더 많이 쓰고 이렇게 알라딘에 올려줘야 해요~

syo 2017-08-15 22:16   좋아요 0 | URL
ㅠㅠ 과찬이시고 과공이세요. 많이 써야 한다는 말씀보다 더 근사한 말이 어딨겠어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8-16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엄마를 들이기 위해 전 엄마를 중고서점에 판 저는 불효자였습니다. ㅎㅎㅎ

syo 2017-08-16 10:53   좋아요 0 | URL
고려장......
 

1

 

내가 생애 최초로 쓴 글은 시였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지, 초등학교 4학년 때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교내 백일장에 나가 금상을 먹고 공책 일곱 권을 획득했다. 기억 나는 부분은, 시제는 가을이었고, 내가 평생 처음 쓴 글의 첫 구절은 "빨강빨강 산에는/빨강 비가 내렸나" 였다는 것. 4343 리듬에 썩 읽는 맛이 있는 발음이, 지금 보아도 썩 귀여운 도입부라고 하겠다.

 

이 세상 중 2의 사분의 삼은 반드시 시를 쓴다. 시는 중2병의 가장 대중적인 증상이다. "내 안의 흑염룡이 날뛰고 있어" 라는 발언을 현실 세계에서 듣는다면, 아 저 놈이 지금 미쳤거나 시를 읊었거니, 라고 할밖에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나도 중2에 시를 썼다. 공책이 풍년이었다. 기억할 만한 작품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다. 

 

중2병은 완치되지 않는다. 고 2때쯤에는 네이버 블로그를 열어 본격적으로 시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가끔 친구들이 찾아와 칭찬의 댓글을 달아주곤 했다. 쓴 놈이나 읽은 놈이나 다들 미친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도 세상은 어지러웠지만 나는 내 시에 집중하느라 세상에 도통 관심을 두지를 않았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 시가 세상보다 더 어지러웠기 때문에 도통 세상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쓰는 손보다 읽는 눈이 더 빨리 성장하면서, 내 눈에 내 시는 점차 구려졌다. 구려서 도저히 참고 봐주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고 때는 이때다 싶었다. 시국에는 장님이었으면서도 마치 시국을 비관하는마냥 재빨리 절필을 선언했다. 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다니. 밝은 세상이 올 때까지 다시는 붓을 들지 않으리. 그러나 세상은 경제대통령의 출현에 들떠 내 절필에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복수심 때문이랄지 나 또한 경제대통령과 그의 전공이라는 경제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시를 잃고 경제력도 잃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중 하나를 포기하면 나머지 하나는 얻던데.

 

 

2

 

생각의 전환이 중요했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야. 그 즉시 스스로의 비루함이 뒤로 물러나고 다채로운 세상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블로그에는 시의 시절이 가고 일기의 계절이 왔다. 시에 비하면 일기는 의외로 호평이었다. 천직은 일기스트였나, 잠시잠깐 나는 오만하고 방자했으나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깨달음은 내부에서 저절로 왔다. 일기는 본시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므로,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쓰면 쓸수록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쓰다가도 생각하게 된다. 오늘은 짜장면을 먹었다->짜장면은 맛있다->내 입에 맛있는 것만 좋아하지 마라->인종차별은 나쁘다(!?) 이런 개똥논리라도 일단 쓰고 나면 인종차별에서 최소 한 뼘은 더 멀어지는 그런 놀라운 매커니즘이 일기에는 숨어있다. 그야말로 매직이었다. 물론 일기에 써 놓은 그만큼의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쓰지 않았더라면 말도 못하게 답 없는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침내 내게 쓰기란, 가끔씩 세상이 투척하는 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골프우산과 섬유탈취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직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의,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열심히 잘 쓰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 '열심'이 어떤 가치를 낳는가를 물어야 한다. 밤이고 낮이고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은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수록 위험하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_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3

 

 

 옛날, 옛날, 옛날

 (뭐든지 세 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 있는 느낌)

 

 어둠을 반으로 가르면

 그게 내 일곱살 때 음부 모양

 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 있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

 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

 

 연필을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다

 등허리를 쩍, 소리 나게 맞았고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했지 여러번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죽은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연기처럼 흐르다 박혔고

 그렇게 글자를 배웠지

 

 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

 

 나는 종종 큰 보자기에 싸여 버려졌고

 쉽게 들통났고,

 맹랑했지

 (끝내 버려지는 데 실패했으니까)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 가다

 견디지 못하면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 이라고 믿었지만

 

 일곱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지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_ 박연준,「베누스 푸디카」,『베누스 푸디카』

 

시인의 글자를 시라고 하자. 시는 아픔에서 왔다. 시는 꿈, 사랑, 희망이 한낱 소리일 뿐이며 그 의미는 겪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외워야 한다는 진실을 가르쳐 준다. 그 진실은 슬프지 않다. 슬픔은 떠난 사람이 잠옷처럼 남기고 간다. 사랑의 의미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피를 다 말렸으나 사랑은 그저 그늘로 밀어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미 슬픔을 알았기 때문에 더 슬퍼지지는 않는다. 이미 슬픔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더 알아갈 것이 없다. 가진 슬픔을 헐어내며 살아야 한다. 

 

시인에게 쓴다는 것은 이렇게도 아리는 일일까.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할 것 같다.

 

 

 

4

 

 

 

 내가 가족이다

 나는 '그러므로'와 화목하다. 어디서든 자세하게 앉는다. 하지만

 

 방파제로 운다

 주문진과 바다 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몰래는 왜 자꾸와 함께 닫혀야 했나

 

 당신의 열린 핸드백처럼

 

 그것은 립스틱과 핸드백에 담긴 한꺼번이었을까. 이제는 더이상 겨울과 걷지 않을 것이다. 겨울과 걷지 않는다

 

 내가 산책이다

 빨리를 당신과 함께 떠나보내야 한다. 아무도 몰래

 

 나는 어떻게 알았나

 

 항구가 모래사장하지 않았다. 햇빛이

 폭풍우와 아니었다. 무작정과 도무지를 당신과 함께 떠나보내야 한다

 

 어떤 자작나무에서 아무도 몰래 쏟아지는 하얗다

 

 당신아, 나는 어떻게 알았다. 그리고와 함께 다시 당신을 만나러 간다.

 

_ 한인준,「종언_없」,『아름다운 그런데』

 

시인은 말을 어지럽히려 쓴다. 읽힐 듯 읽히지 않는 시를 짓는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의미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가 섞인다. 원래 누구의 말을 다른 누군가 다 알 수는 없다. 서로의 말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한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고 시인이 말한다. 나는 당신이 어지럽혀 놓은 자리를 정리해야 하나, 아니면 내 속에 정리되어 있는 당신을 어지럽혀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그것은 오래 해야 하는 고민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오래 시를 쓰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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