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이라서 미안합니다

 

가름하기 애매한 나이가 있다. 스물셋은 이십대 초반인가, 중반인가. 서른일곱은 삼십대 중반인가, 후반인가. 이렇게 애매한 것들은 내 비루한 두뇌를 가동해 해결하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조상님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좋다. 반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겨레가 반만 년도 더 전부터 쓰기 시작했을 우리말에 속에 답이 숨어있다. 숫자를 세는 말의 종성에 시옷이 들어가면 중반이다. , , 다섯, 여섯. 그러나 당신의 나이에 비읍이 들어가는 순간 최소 반만 년의 역사가 당신이 후반에 돌입했음을 선언한다. 일곱, 여덟, 아홉. 근거가 부족해 보이신다고? 아니, 반만 년으로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등바등 살아봐야 꼴랑 백 년 사는 syo가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하여간,

 

syo는 그다지 애매하지 않은 삼십대 중반이지만, 어린 것들로부터는 드실 만큼 드셨으니 이제 차근차근 정리하며 여생을 꾸리라는 말을 듣고(농담이겠지), 언니 누나들로부터는 바야흐로 청춘이 꽃피었으니 뻑적지근하게 누리며 살라는 말을 듣는(농담이시겠죠), 그야말로 애매한 삼십대 중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나이쯤 되니까, 동갑내기 친구들 가운데서도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말해도 섣부르지 않다 싶을 정도의 성공을 한 인간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한다.

 

2 말쯤, 학교가 뽑아서 같은 공간에 몰아넣고 공부시킨 멤버들이 있다. 스무 명이었는데, 지금은 그 중 syo 포함 8명만이 꾸준히 만나고 있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 8명 가운데 일등이와 syo 둘만이 공대 지망이었고, 나머지 6명은 의사가 꿈이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대구에서 공부 못하기로 둘째 가라하면 아이구, 첫째가 아니라 둘째라니 성은이 망극합니다요, 하는 학교였는지라, 우리 8명이 죄다 이과 전교 10등 안에 포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로 간 사람은 일등이 한 명 뿐이었다. syo는 원하는 학교를 가지 못해 재수를 선택했고, 의대를 지망했던 아이들은 공대로 한 명, 수학교육과로 한 명 선회하고, 나머지는 싹 다 syo와 재수동창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재수는 사이좋게 망했고, 아이들은 이곳저곳의 공대와 수학교육과로 흩어지면서, 재수하면서 얻은 거라고는 노래실력 밖에 없으니 우리가 다닌 학원이 실은 실용음악학원이 아니었겠느냐는 뼈아픈 농담이나 주고받았다. 그리하여 스물한 살의 우리 8명은 누구도 뭣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수학교육과로 진학한 놈들은 대구 지역에서 안정적인 정교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공대를 간 놈들은 어찌저찌 하더니 기어이 죄다 의사가 되고야 말았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적 진학을 했던 일등이도 공대 졸업하고 어쩐지 치과 의사가 되었다. 며칠 전 개원한 그를 우리는 이제 장원장이라 부른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비루한 인간이 syo 되겠다. , 분명 어릴 땐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 하나같이 노답이었는데, 왜 니들만 답을 찾았니. 아니지, 왜 나만 답을 못 찾았니......

 

직업 욕심을 낸 적이 없었고, 소득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처음 컴퓨터라는 물건을 접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이미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것 이외의 꿈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그 꿈은 대학이라는 제도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2까지는 학교나 성적 뭐 이런 건 아무래도 좋은 철부지였다. 공대를 택한 것도 이름에 컴퓨터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학과가 공대에 있기 때문이었지, 전망이나 기대소득 같은 건 전망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대학을 갔고, 이미 슬슬 호시절이 끝나가고 있던 공대의 분위기 안에서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의대나 로스쿨로 방향을 고쳐 잡는데도, syo는 마냥 공대 공부가 좋았다. 잘하지 못해도 재미있을 수 있는 것과 만나는 신기한 경험은 그 자체 벗어날 수 없는 매혹이고 풀리지 않는 마법이다. 유학을 준비하며 학점을 만들던 때, 가끔 같이 밥을 먹던 친구는 유학을 다녀와서 몇 살에 교수가 되고, 또 몇 살 때까지는 창업을 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자신의 인생 플랜을 syo에게 암기라도 시킬 작정이었는지, 만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읊어댔다. 그러나 근시안적인 syo는 먼 나라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종이와 기계로 가득 찬 실험실에서 불을 밝혀 어둠을 태우며 책을 읽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고작 1, 2년 후의 자기 모습을 그려보는 것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가 없었다. 친구에겐 성공적인 인생과 최종적인 목표를 위한 통과점에 불과했을 유학이라는 것이 syo에게는 그 뒤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행복할 예감이었다. 갔다 와서? 난 잘 모르겠어. 근데, 거기 가면 열라 끝내줄 것 같지 않냐? 밤새는 게 너무 신날 것 같지 않아? , 시발, 생각만 해도 졸라 설레는데? syo의 말을 듣던 친구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그저 썰어 놓은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 syo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새끼, 이럴 거면 그냥 말고 치즈 돈가스를 시킬 것이지. 그리고 2년 후 그 친구는 유학을 갔고 syo는 군대를 갔다. 잘은 모르지만 그 애는 아마 어느 하늘 아래서 교수가 되어 있거나 되고 있을 것이다.

 

이걸로 끝도 아니다. 군대에서 밤마다 소시지를 손에 들고 syo의 생활관을 찾아와 인생 상담을 청하던 선임 녀석은 지금 당당히 자기 사업을 일구고 있다. syo의 보직을 이어받은 후임 녀석은 서울에서 자기 가게를 열어 맛있는 술을 파는 동시에 트레이너로도 자리를 잡았다는 소리가 들리고, syo를 깍듯이 대접하던 동기 녀석도 경남의 어느 지역에서 두 번째 가게를 오픈하려 한다는 근황을 전했다. 불알친구 중 하나인 빵이는 파죽지세의 공격적 경영과 쉬지 않는 확장 영업 전략을 통해 어느덧 5호점을 물색하는 중이라고 한다. 대구 지역 댄스 아카데미 시장에서는 뭐 거의 술탄에 가깝다는데.

 

며칠 전 친구 콘칩이 자기 결혼식에 축가를 해 주기로 한 syo와 사회를 볼 예정인 친구 챔피언을 불러 회 두 접시를 사줬다. 술잔이 몇 번 채워졌다 비워진 후, 갑자기 콘칩의 입에서 챔피언이 파주 운정 신도시에 36천짜리 집을 가지고 있다는 제보가 터져 나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챔피언의 부동산 투자 강좌가 30분을 이어지더니, 4개의 호재가 동시에 작용해 조금 있으면 억 단위로 오르리라 예측된다는 수원역 근처 어떤 아파트의 브랜드를 몇 번 힘주어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자식, 그냥 평범한 격투 게임 세계 챔피언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챔피언의 머리 위에 보이는 것이 조명이 아니라 후광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여자친구의 슬픈 문자를 받았다. 집에 사정이 생겨 그 동안 모아놓은 것들을 허망하게 날리게 되겠다고. 그 와중에 그녀는 나를 더 살뜰히 챙겨줄 수 없게 되었음을 미안해한다. 남들 다 받는 명품 한 번, 남들 다 가보는 해외여행 한 번 제대로 선물 받지 못하고 청춘을 다 보낸 사람이, 철은 없고 꿈만 있는 남자 만나 어디 기댈 데 없이 저 홀로 온갖 고초를 헤쳐 나와야 했던 사람이, 게으르고 멍청한 남자 뒷바라지 하느라 제가 번 돈도 마음껏 써보지 못했던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 도리어 미안해한다. 다른 남자들처럼 이럴 때 떡하니 내어 놓을 돈 한 푼 없어서 그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 밖에 달리 뭐 하나 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믿는다고, 믿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대답에, 지금까지 언급한 주변의 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느껴야 했던 감정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십 배 거대한 자괴감과 미안함이 일순간 밀물처럼 밀려들었고, syo는 물 아래 숨어 우는 갯벌처럼 축축이 침묵한다. 오늘의 미안함이 어제의 미안함보다 거대해지는 기하급수의 삶을 사는 중이다.

 

참 많이 늦었다.

 




 "좋아." 슈쿠마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루리가 처음으로 함께 저녁을 먹을 갔을 때, 그 포르투갈 식당 말이야, 난 웨이터에게 팁 주는 걸 잊어버렸어.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는 그 웨이터의 이름을 알아내서 지배인에게 팁을 맡겼어."
 "단지 웨이터에게 팁을 주려고 서머빌까지 그 먼 길을 다시 갔단 말이야?"
 "택시를 타고 갔어."
 "웨이터에게 팁 주는 걸 왜 잊어버렸는데?"
 생일 양초는 다 타버렸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그릴 수 있었다. 약간 기울어진 커다란 눈, 도톰한 포돗빛 입술, 두 살 때 높은 의자에서 떨어져 턱에 생긴, 아직도 눈에 듸는 쉼표 모양의 상처. 슈쿠마는 한때 자신을 압도했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날이 시들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불필요하게 보였던 화장품이 이제는 필요했다. 용모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그녀를 또렷이 드러내려면.
 "식사가 끝날 무렵, 당신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어." 그는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처음으로 인정하는 말을 했다. "그게 내 정신을 산만하게 한 것 같아."
_ 줌파 라히리,「일시적인 문제」, 『축복받은 집』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어도 일부러 행복해지지 않을 수도 있지." (276)

_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2』


"나는."
서로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을 거예요. 다른 어떤 남자도 나에겐 아무 가치가 없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나예요."
순간 안개가 걷히듯 머릿속이 맑아졌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그조차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매 순간마다 이게 바로 나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게 진정한 자기 모습이다. ..... 무엇이 옳은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모두 내다볼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 있는 등장인물이나 마찬가지다. 

_ 미카미 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3-17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 확실하다면... 저는 syo님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ㅎㅎㅎ
저는 syo님 나이가 저랑 비슷하거나 한 두살 차이일 거로 생각했어요.

syo 2018-03-17 20:00   좋아요 2 | URL
저는 사이러스님이 저보다 동생인 걸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후후후후후후.

지켜보고 있다......

cyrus 2018-03-17 20:07   좋아요 1 | URL
오늘 따라 syo님의 프로필 사진이 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빅 브라더처럼 느껴져요. ㅎㅎㅎ

2018-03-18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8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8 14: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0대 중반. 아직도 좋은 나이입니다.
예전에 저의 엄니가 70이 다 되서는
내 나이가 50대만 되어도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근데 50대들은 그럴 것 아닙니까? 내 나이가 40대면 좋겠다구요.
100세 된 노인분은 또 90을 부러워하시겠죠.
그러고 보면 인생에 있어 나쁜 나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살아보니 지금의 내 나이를 사랑하는 것 밖엔 방법이 없겠더라구요.ㅠ

syo 2018-03-18 15:52   좋아요 2 | URL
반대로 생각하면 인생의 모든 나이는 나쁜 나이일수도 있지요....100세는 90세를, 50대는 40대를, 30대는 20대를 부러워하니까요 ㅎㅎㅎㅎ

전 그냥 부러운 건 부러워하면서 살려구요. 부러운데 안 부럽다 나도 괜찮다 박박 우겨봤자 결국 부럽더라구요...

stella.K 2018-03-18 16:29   좋아요 2 | URL
ㅎㅎ 말리진 않겠는데요
부러워하건 안 부러워하건 별차이는 없더라구요.
인생이 또 그렇더라구요.ㅋ

나비종 2018-03-1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직원 문상을 가서 대화 중에 ‘국민학교‘얘기가 나왔어요. 우리 테이블, ˝언제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죠?˝ ˝우린 모두 국민학교 세대이니 저쪽 테이블 즈음 되겠네요. 한 30대 중반 즈음?˝ 불쑥 저쪽 테이블로 끼어들고 싶었습니다ㅎㅎ(두 글자로 갈라지는 이노무 격세지감ㅡㅡ;)
‘참 많이 늦었다.‘는 여섯 글자에 담긴 묵직하고 복잡한 마음이 잔상으로 오래 남았습니다. 음..이 말의 저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이루리라는 의지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O,X의 문제가 아니라 O를 전제로 한, 다만 시기의 문제라고. . syo님을 응원합니다.^^

syo 2018-03-18 21:1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는 국민학교에 입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세대입니다. 어느 쪽 테이블에도 낄 수 있거나 혹은 어느 쪽 테이블에도 끼지 못하거나......

응원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이 되었습니다.^-^

AgalmA 2018-03-19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노트나 일기를 보면 와, 이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어 놀랄 때도 있고, 어이쿠, 이렇게 생각하다니! 얕잡아 보게 되는 순간들도 있죠. 나이가 드니 그때의 에너지, 치열함이 덜 한 게 서글프기도 하고 정말 아쉽기도 한데 그 시간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살았고 써 버렸으니 그 지청구를 다시 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지금의 나도 힘드니까. 지금 이 순간 뭘 할까 그것만으로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벅차죠.

힘내요. 눈물 핑ㅡㅜ...

syo 2018-03-19 12:26   좋아요 0 | URL
고시오패스가 되고 있습니다...... 별 거 아닌 것에도 막 욱욱하고 잉잉하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AgalmA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항상 좋은 말씀만 하세요.....

다락방 2018-03-1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참.
여자친구는 여자친구 나름대로 지금 엄청 속상하고 안타깝겠네요. 모으느라 힘들었을텐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런 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잘해줄 수 없어 속상한 마음도 더해졌을거고요.
언급한대로 쇼님은 쇼님대로 속상할테고...

제가 이자리에서 뭘 어떻게 해줄 수는 없지만, 두 분의 상황이 좀 나아지라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면서 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랄게요. 그래도 이렇게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쇼님 다 잘될거예요. 천월이덕이 있지 않습니까!! 좀 늦겠지만, 잘 될겁니다. 기운냅시다!

syo 2018-03-19 12:27   좋아요 0 | URL
천월이덕 하나만 믿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
아, 사주 팔자를 목발로 짚고 걸어가다니, 실사구시에 중독된 공대생이었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ㅎㅎㅎㅎ

서니데이 2018-03-1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다시 읽어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생각이 다시 들어요.
늦은 것도, 늦는 것도 그런 것들이 불확실하니까요.
저도 시험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요.
나중에 잘 되면 괜찮겠지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syo님,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syo 2018-03-19 21:27   좋아요 1 | URL
참 서럽죠. 이놈의 생활 ㅎㅎㅎ

서니데이님은 멘탈 관리 잘 하시잖아요. 저처럼 징징대지도 않으시고, 꾸준히 페이퍼도 쓰시면서 한 발 한 발. 멋있어요.

서니데이 2018-03-19 21: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그래요. 언제 되는지도 모르고요.^^
저도 2월부터는 많이 힘들었어요. 아마도 다들 힘들거예요.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 거고, 그리고 합격하고 나면 그런 이야기를 안해서 그런 거겠지, 싶어요.^^;;


2018-03-20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4-0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우와 죄송하지만 여기까지 읽는 동안 syo님이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게 왠일이래요ㅎㅎ책 읽는 남자 쳐다보는 섬세한 시선에서부터 제 오해가 시작된 듯 하옵니다ㅜㅠ

syo 2018-04-02 23:47   좋아요 0 | URL
그런 오해를 처음 받아본 게 아닙니다 ㅎㅎㅎㅎ 기분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오해입니다.
 


본질을 죽여야 한다

 

본질이라는 단어는 물론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장담컨대, 대개의 경우 본질이라는 단어의 용법은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본질이라는 말은 십중팔구 이런 식으로 쓰인다. “너의 행동은 그 운동의 본질을 왜곡한 거다.” “그 운동의 본질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그건 그 운동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너 같은 사람 때문에 그 운동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나는 그 운동의 본질은 지지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이쯤 되면 본질의 뜻은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본질 : 나와 대립하는 상대방의 견해가 틀렸다고 지적할 때 권위를 싣기 위해 내 말에 뿌리는 금 가루 같은 단어.

 

세상에 국립본질결정위원회같은 것이 존재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본질들을 시시때때 따박따박 정의해준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쓰이는 모든 본질은 실제로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나 해석에 불과하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뭔데. 누가 그걸 정의했는데. 그래도 일반적인 통념이라는 게 있다고? 그렇다면 전체의 몇 %가 동의하면 일반적인 건지? 과반? 8? 만약 그렇다면, 과반/8할이 동의하는지 아닌지 전수조사는 거치셨는지?

 

본질이라는 단어의 가장 큰 무서움은, 미투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는 논거로 본질 운운하고,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은 지지를 위해 본질을 입에 올린다는 데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견해, 객관적인 태도, 논리적인 능력을 갖췄다고 쉽게 오해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본질이 진짜 본질, 본질의 이데아쯤 된다고 믿으며 스스럼없이 본질을 입에 올린다. 결국 본질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논리와 윤리의 결정자임을 주장하는 수백만의 감별사들에 맞서 개념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하여 본질이라는 말은 결국 운동을 밀고나가는 데 이익보다는 해악으로 작용한다. 본질이라는 말이 없었을 때 우리는 운동만 지키면 되었지만, 본질이라는 말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 운동을 지키면서 덩달아 운동의 본질도 지켜야 한다. 한 번도 제대로 합의된 적이 없는 수백만 개의 본질들에 맞서서 기약 없는 싸움을 하느라 기력을 소진해야 한다.

 

syo는 본질이라는 말 자체에 회의적이지만 만일 그런 말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변하지 않는 특성이나 최초의 순수한 상태를 지칭하는 데 쓰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 어떤 고귀한 일에도 크고 작은 부작용은 따른다.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부작용들, 알고 보니 가해자가 아니었던 사람, 실제로 아니었는지는 애매하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가해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증거가 충분치 않은 사람, 장난이거나 관심을 받기 위해서, 혹은 사리사욕을 위해 무고를 저지르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 등등이 생길 확률이 0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부작용과, 그런 부작용을 줄이고 없애나가는 과정, 그러면서도 미투를 외치는 사람들이 겁내지 않도록 힘껏 위드유를 외치는 노력, 가해자의 가족이나 폭로자에게 가해지는 2차적 3차적 폭력을 방지하려는 시도, 그 모든 것들이 통째로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무균 무중력의 티끌 하나 없는 본질이라는 놈이 존재하고, 우리가 지금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지고 오염되고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적받고, 내파되고, 수렴하고, 폭발하고, 먼지가 묻고, 다시 털어내고, 꿈틀꿈틀, 때로는 우르릉 쾅쾅 변화하고 진화하는 전체적 역동성 그 자체가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미투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운동이나 사상을 놓고 보아도 깎이고 재조립되며 탈바꿈하는 과정을 내포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나. 아, 미투 운동의 본질이라니. 미투 운동으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의 최종적인 모양은, 미투의 본질을 지키는, 그러니까 진짜피해자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짜가해자의 행위를 폭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성폭력이 없으므로 미투 운동 자체가 필요 없는 곳이다. 그러니까 미투 운동은 더 커다란, 젖과 꿀이 흐르는 신세계를 찾아 나선 우리가 올라탄 돛단배다. 처음 항구에서 출항할 때, 갑판에는 물 새어나오는 곳이 없고, 돛에는 바느질 자국이 없으며 선원들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친 바다와 맞서 오랜 항해를 해 나가다 보면, 갑판에 땜질도 해야 하고, 누덕누덕 돛도 기워가며 써야 하며, 선원들의 얼굴에 하나 둘 흉터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 상처받고 상처를 고쳐가며 우리는 가야 한다. 진정 당신이 새로운 땅에 찬동하는 모험가라면, 원래 이 배가 얼마나 매끈하고 흠잡을 데 없었는지를 한탄하거나, 배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며 선원들을 흉볼 시간에 망치를 들어야 한다. 나침반을 보아야 한다.

 

당연히 잘못된 일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올바른 방향이라 생각하는 곳을 가리킬 권리가 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본질이라는 거대하고 대적하기 어려운 말을 독점할 권능이 우리 개개인에게는 없다. 그 말은,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태도는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이제는 그만 그 말을 죽일 때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부침은 그대로 다 미투 운동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격이다. 이 안에서 해나가야 한다. 이런 생각이 운동을 나아가게 하고 운동을 고친다고 syo는 믿는다.             




다만 진보에는 순서가 있고 발전에는 근원이 있다는 점을 믿고 있어, 온 나라가 지엽枝葉만을 추구하고 뿌리를 찾는 사람이 전혀 없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즉 근원을 가진 자는 날마다 성장할 것이며 말단을 좇는 자는 전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사교편>
_ 루쉰, 『루쉰 전집 1 : 무덤, 열풍』


"나는 너 같은 소년이 모두 온갖 것을 이것저것 경험하며 성장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훨씬 더 잘 대할 수 있게될 테니까 말이야. 무엇보다 이런 전쟁도 줄어들게 될 거다. 아, 그래. 아마 언젠가는 이런 모든 갈등이 끝나는날이 올 거야. 위대한 정치가나 교회나 이런 단체들로는 그 갈등을 끝낼 수 없단다. 사람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거든. 사람들이 너처럼 바뀔 거란다. 퍼핀. 이런저런 면이 좀 더 섞이게 되는 거지. 그러니 혼혈아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단다. 그건 유익한 거니까."
_ 가즈오 이시구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맏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영광(혹은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_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
_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18-03-15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돛단배 비유 너무 좋습니다. 본질 운운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새겨듣고 갑니다^^

syo 2018-03-15 08:14   좋아요 2 | URL
거대한 말은 쓰기가 쉽지 않고, 운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본질‘같은 말은 깊은 고민없이 함부로 정의하고 쓰기가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쓰기 어려운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를 syo는 잘 믿지 않습니다. ㅎㅎㅎㅎ

cyrus 2018-03-15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질을 단순하게 ‘의의‘와 같은 의미로 이해했었는데, 이 말의 결점을 보지 못했어요.

syo 2018-03-15 08:25   좋아요 2 | URL
추상적인 개념이 논쟁의 판에 끼어들면 실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투여해야 할 에너지가 감소되는 경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의 경우만 해도, 이게 페미니즘이다, 아니다 저게 페미니즘이다, 하는 식의 개념투쟁이 물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무의미한 싸움을 낳거나, 페미니즘을 감별사들이 자신의 ˝객관적이고 높은 지식˝과 ˝치우침 없는 성숙한 윤리관˝을 뽐내는 데나 쓰는 ‘핫한 논쟁거리‘ 수준으로 만드는 해악이 있잖아요?

박기비 2018-03-1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라딘 서재는 알라딘회사의 블로그 같은건가요??

제가 북로그? 나 쇼님 처럼 일기 같은걸 쓰고 싶은데...

쓸 포맷을 지금 구하려는데 혹시 어디를 가장 추천하시나요?

syo 2018-03-19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익명의 님.
생각하시는대로 알라딘 서재는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블로그입니다. 책과 관련한 글을 쓰는데 맞춰진 곳이지요.
저도 경험이 일천해서 어디가 좋다 추천을 드릴만큼 아는 바가 없네요. 알라딘도 좋습니다. 여기는 책 많이 읽으시는 분들, 깊이 있는 독서를 하시는 분들, 심지어 많이 동시에 깊이 읽으시는 분들도 많아서 배우기도 이야기 나누기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단지 글 쓰기에 그다지 잘 만들어진 블로그는 아닌 것 같습니다. 티스토리 같은 전문적 플랫폼에 비하면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네요. 뭐 소소한 것들이긴 하지만요.
알라딘 세상에 들어오신다면 syo가 환영합니다. 제가 뭐 대표자는 아니지만서도......
 


삼재의 화신 vs 귀함의 결정체


며칠 전, 친구 三이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상경하여 syo의 맞은편 방에 짐을 풀었다. 지겹다, 저놈시끼. 서울에서 뛰엄뛰엄 10년쯤 지냈는데 그 가운데 반쯤은 지금 같은 구도로 三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그리고 저놈시끼와 얽히면 그해는 항상 되는 일이 없다. 으이구 징한 내 친구 三. 하필 이럴 때 저 걸어다니는 삼재 같은 놈이 내 옆에...... 죽여서 묻어야 하나...... 뇌를 찌르지 않으면 절대로 죽지 않고 다시 돌아와 들러붙는 walking 三災.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三은 짐을 풀자마자 바로 그날 저녁 군소리 없이 치킨을 시켰다. 그러자 우리 사이의 모든 묵은 원망들이 뜨거운 눈꽃치킨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삼재 같지만 다정한 나의 친구야. 삼재 그까짓 거 다 괜찮아. 니 이마에 부적이라도 하나 붙여 놓으면 되지. 그리고 나는 사주가 아주 끝내주거든. 들어는 보았니, 천월이덕天月二德이라고? 숨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귀함의 소유자. 알고 보니 나였어. 나더라고. 그게 나야. 훗.



원국에 월덕귀인과 천덕귀인이 모두 있는 경우를 천월이덕(天月二德)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천월이덕을 관운무병(官運無病), 흉화위길(凶禍爲吉)이라고 했다. 관운이 따르고 무병장수하며 흉한 기운도 길하게 바꾼다는 뜻이다. 따라서 천월이덕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총애했다. 특히, 일주에 있는 천월이덕을 가장 귀하게 본다.

_ 강헌, 『명리 : 운명을 읽다』


어쩐지 뭐만 써도 이상하게 좋아요 엄청들 눌러주신다 했지. 열라 총애받는 사주. 일주에 월덕 천덕 다 가진 남자. 아, 내 팔자야. 귀하다 귀해. 아, 하느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감당 안 되게. 미치겠다 정말....






잠깐. 근데 난 저 어마무시한 팔자에도 불구하고 지금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거지? 응? 응?? 응??? 으아아아아아아아?





아, 제발 진짜, 엄청난 힘을 가진 국제 범죄단의 두목들이 나를 좋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를 내버려둬요. 엉엉,. 나는 소박한 여자예요.
_ 이유경, 『잘 지내나요?』


같이 아무 말 않고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해지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기는 거북하다. 친구란 아내 비슷하게 서로 곁에 있는 것을 확인만 해도 편해지는 사람이다. 같이 있을 만하다는 것은 어려운 삶 속에서 같이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_ 김현, 『행복한 책읽기』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8-03-1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의 총애를 받는 쇼님!! ❤️

syo 2018-03-13 12:25   좋아요 0 | URL
아이고 내 팔자야....♥️

stella.K 2018-03-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그런 사람 있더라구요.
뭐만 써도 엄청 열라 좋아요 받는 사람.
거 왜 그럴까요? 질투나요! 쇼님도...ㅋㅋㅋㅋ

syo 2018-03-13 14:32   좋아요 0 | URL
팔자소관인가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래

단발머리 2018-03-1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사람들이 syo님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이런거...
저놈식끼와 워킹삼재, 그리고 ..
아, 하나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감당 안 되게. 미치겠다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3-13 14:44   좋아요 0 | URL
이건 다락방 아카데미에서 배운 스타일입니다ㅎㅎㅎ 아시잖아요. 사랑받는 스타일, 락방쌤 스타일.

요건 새발의 피 정도죠ㅋㅋㅋㅋ

다락방 2018-03-13 17:34   좋아요 0 | URL
이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3-13 17: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왜뭐왜?

프레이야 2018-03-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킨에 마음 당장 녹아내리는 거. ㅎㅎ 울 작은딸이랑 같아요. 봄이 오나 봄니다.

syo 2018-03-13 16:25   좋아요 1 | URL
날로 날로 뻗어나가는 우리 치느님의 교세에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름 모를 자매님께 치느님의 매콤달콤한 권세가 항상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세요.ㅎㅎㅎㅎ

긴 겨울이 이제 겨울 끝났네요. 프레이야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18-03-13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8-03-1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스럽게 좋아요에 손이 간다더만..syo님의 그 총애 받는 사주덕분이었군요!! (아하!) 이번에도 이렇게 눌렀네요.

syo 2018-03-14 08:32   좋아요 0 | URL
정말 저도 이럴 줄은 몰랐네요. 나 원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손승연과 손 일병

 

총을 어깨에 둘러 매고 함께 경계 근무를 나갈 선임을 기다리던 손 일병은 생활관 쪽에서 들려오는 어떤 여인의 노랫소리에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생활관 안의 병사들은 이미 모두 영혼이 포획된 상태라 누가 들어오든 말든 그저 TV만 보는 중이다. 붉은 단말머리의 아가씨가 당찬 얼굴로 한 음 한 음을 꾹꾹 눌러 담듯이 묵직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물들어. - 하는 탄성인지 탄식인지가 생활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손 일병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대박. 대박사건. 오거리 표지판마냥 우뚝 서서 멍하니 서 있는 손 일병을 찾던 선임이 화가 난 표정으로 생활관 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이씨, , 손 일병아, 너 지금 뭐 하냐, 근무 안 가ㄴ..........?” 그때였다. 물드으러어어어어~~~! TV 속의 세이렌이 작심한 듯 빵하고 질렀고, 그 마력에 선임 역시 여지없이 포박되어 손 일병의 옆자리에 딱 멈춰 선다. 총을 둘러 맨 두 사람은 누가 더 멍청한 표정을 잘 짓는지 경합하며 쌍봉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노래가 끝나고 여운에 발이 묶여 어렵사리 정신머리를 찾아가던 찰나, 행정보급관이 문을 밀고 들어와 호통을 친다. “, 이 정신 나간 것들아, 교대 안 가냐? 지금 니들 왜 안 오냐고 난린데! 교대 가기 싫으면 어떻게, 다정하게 영창이라도 한 번 갈까?” 그러나 고개를 돌린 손 일병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행정보급관은 흠칫 놀란다. “, . , 뭔 일 있냐? 왜 그래, . 아니, 꼭 영창을 가라는 게 아니라, 얼른 근무 교대를 나가라는 거였지 나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손 일병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행보관님, 전 괜찮습니다. 그냥 물들어서 그래요, 물들어서...... 으흑. 경계하는 자세로 초소를 향해 가는 두 병사는 실은 아무것도 경계할 여력이 없었다. 아, 오디세우스 그 양반이 당최 왜 일을 그런 식으로 했냐 했더니만...... 


초소에 도착하자 교대를 기다리던 초병이 벌컥 화를 낸다.


  초병 : (언성을 높이며) ! ! 미쳤어?

  손 일병 : ....... (고개를 떨군다.)

  초병 : (손 일병과 함께 온 선임을 바라보며) , 강산아. 손 저거 이제 갓 일병 달아서 그럴 수 있다 쳐도, 넌 지금 뭐 하냐? 군 생활 다 끝났냐, 지금?

  선임병 : 아니, 그게 아니라 신 상병님. ..... (손 일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걔 이름이 뭐라고?

  손 일병 : ...... 승연입니다. 손승연.

  선임병 : (다시 초병을 바라보며) , 손승연이랍니다. 걔가 글쎄......

  초병 : , 걔가 누군데. 신병 들어왔냐?

  선임병 : 아니, 그게 아니라. (손 일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그거 제목이 뭐였지?

  손 일병 : ......물들어.

  선임병 : , 맞다. (다시 초병을 바라보며) , 물들어랍니다. 그게 글쎄, 와 진짜......

  초병 : (언성을 높이며) 아 진짜,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지금. 누가 물들었다는 건데. 손승연은 또 누구야? , 니 여동생이냐?

  손 일병 : 아닙니다. 가수......는 아니고, 가수 될려고 하는 애 같습니다. 근데 노래가 진짜 장난 아닙니다......

  초병 : ...... 예쁘냐?

 

저녁을 먹고 전화통을 손에 든 손 일병이 여친에게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자기야, 손승연이라고, 보이스 코리아 나오는 앤데. 장난 아냐. 진짜. 진심 노래 미침. 여지껏 오디션 프로 나온 애 중에서 제일 잘함. 대박......” 손 일병의 여친은 음악 하는 중학교, 음악 하는 고등학교, 음악 하는 대학교, 음악 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음악 하는 음악선생이 된 진성 음악인으로서, 취미가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심사하기>, 음악에 관해서는 용서도 자비도 없는 무시무시한 평가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박정희. 중학교 때 별명은 엄석대. 손 일병은 지금도 가끔 그녀를 임틀러라고 부르는데, 뭐 어쨌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번 들어 볼게.” 라는 여친의 목소리에 어쩐지 왼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안경테를 추켜올리는 습관과 그 습관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검정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사감 선생님 이미지가 떠오르긴 했지만, 손승연이 사감 선생님의 매서운 검증과정을 무난히 통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손 일병은 마냥 즐거웠다. 다음 날 같은 시간, 손 일병의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나온 여친의 말. “, 잘 하더라? 좀 해.” 역대급 특급 칭찬이었다.

 

갑자기 아이유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다. 일종의 위장평화전술이었는데, 다른 병사들이 죄다 시크릿, 나인뮤지스에 환장하는 공간에서 혼자 손승연에 환장한 독특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손 일병은 아이유에 환장하는 척했다. 아니, 이건 손승연한테 사과할 문제인가? 하여튼 군대는 그렇다. 환장하는 아이돌 하나는 있어야 정상인 취급을 받고, 조용히 혼자 김동률 CD를 듣고 있다가 걸리면 차마 입 밖으로 내긴 민망하지만 치명적인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십상이다. 하고 많은 아이돌 가운데 아이유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손 일병이 보기에 아이유는 어쩐지,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루에 두 번씩 의무적으로 자기 뮤직비디오를 보는 손 일병의 멱살을 잡는다거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캐러멜을 사면 따라 나오는 엽서 크기의 자기 사진을 철모 아래 넣어놨다고 손 일병을 고소 고발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은 이미지였으므로. 얼떨결에 골랐지만, 그 선택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내기도 했다. 스물여덟에 일병 된 늙은 아저씨가 이제 갓 스물하나, 스물둘 된 상병, 병장들처럼 섹시한 아이돌을 탐욕스런 눈빛으로 더듬지 않고, 아이유처럼 동생동생한 아이를 오구오구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그림이 또 그 어린 친구들한테는 참신한 장면인거라, , 이런 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삼촌팬이라는 존재로구먼, 역시 덕질에는 장유유서가 없구먼,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진취적인 모습이구먼, 뭐 이런 식의 호응을 불러일으켜 어쩐지 군 생활이 좀 더 편해진 것도 같다. 그러나 멍청한 어린 것들아, 사실 그건 다 페이크였지! 사실 나는 손승연이 좋았다고! 환장한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구장창! 몰랐지, 요놈들아? 으하하하.....

 

손 일병은 제대해서 syo가 되었고, syo와 임틀러는 요즘도 손승연이 노래했다고 하는 음악 프로그램은 꾸준히 찾아서 보고, 듣고, 감탄하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칭찬하다 침이 마르면 에잇, 뽀뽀도 하고 그런다. 금슬에도 도움을 주는 손승연. 말 그대로 손승연은 사랑입니다. 그 시절의 손승연도 대단했지만, 지금의 손승연은 뭐라 얹을 말이 없다. 결점이 없는 보컬. 너무 장점이 많은데, 그 많은 장점 가운데 하나일 뿐인(심지어 가장 큰 장점도 아닌) 고음 때문에 소위 고음형 가수라는 칭찬 같기도 하고 욕 같기도 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한껏 과소평가 되는 가수. 얼른 얼른 자라서 세계로 가자. 그리고 자꾸 예뻐져...... 우리 승연이 오구오구.


그리고,

 

손 일병이 손 상병 되겠다고 분주하던 5월의 어느 날 서울에서는 여친이 2호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흔들흔들 한강을 건너는 중에 때마침 차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쏟아진 햇살이 자기 앞에 앉은 아가씨의 정수리를 때렸는데 아무리 봐도 그 정수리가 아는 정수리 같았단다. 이거, 근래에 마주친 정수린데...... 그 정수리가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눈, , 입이 또 아는 눈, , 입이었던 거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련한 가운데 여친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낯익은 정수리눈코입의 주인이 씨익 웃더란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린 여친은 재빨리 가방을 열었으나, 그날따라 종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펜도 하필 x나미(회사이름입니다. 욕 아니예요.)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 달랑 하나...... 그러나 이렇게 포기하면 임틀러가 아니지. 이가 없다고 고기를 못 씹으면 잇몸은 디스플레이냐. 가방을 이 잡듯이 뒤져 기어이 종이 비스무리한 것을 찾아내어 그 위에 필사적인 스피드로 수성 사인펜을 갈긴다. 정황상 저 사람은 아마 홍대에 내리겠지, 서둘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수줍은 표정으로 그 종이를 내민다. 저기, 이거......


그렇게 가보가 탄생했다.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기 바란다.
누군가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질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수록, 세상엔 좋은 것들이 좀 더 생겨날 것이다.
_ 최민석, 『꽈배기의 맛』


노래는 말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노래로 외쳐 일깨우고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속으로 삼킨 말들을 가락에 실어 흘려보내는 겁니다. 엉킨 삶을 풀어서 꿈을 짜는 겁니다.
_ 홍승찬, 『오, 클래식』


누구에게나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요정은 있다. 다만 자신이 실제로 품었던 소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만이 나중에 자신의 삶에서 그 소원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된다. <겨울날 아침>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3-11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3-1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맙소사!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손승연 물들어, 오케이, 저도 들어볼게요. 불끈!

syo 2018-03-12 16:25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입니당. 요즘은 노래 더 잘해요.....미쳤어.

psyche 2018-03-1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고 당장가서 손승연 들어 봤어요. 와 진짜 노래 잘하네요. 물들어부터 시작해서 불명에 나왔던거 까지 연속해서 들어보고있습니다. 이렇게 노래 잘하는 가수있는지 몰랐네요.

syo 2018-03-13 01:04   좋아요 0 | URL
그렇죠? 물들어 때는 그래도 아직 가수도 되기 전 꼬꼬마 새싹 느낌인데, 불명에서 불렀던 것들은 뭐 하나 어마어마하지 않은 노래가 없어요....

단발머리 2018-03-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승연은 let it go죠^^
물들어,도 들어보고 결정할까요?!?
근데 김동률은 어떡해요?! ㅋㅋㅋㅋㅋ
나 어제도 들었는데 말이죠.

syo 2018-03-13 14:31   좋아요 0 | URL
여긴 군대가 아니니까 김동률도 괜찮습니다ㅎㅎㅎㅎㅎ

물들어는 손승연이 부른 것 중 제일 못 부른 노래예요. 제일 옛날이니까요 ㅎㅎ

우리 승연이는 이제 학교종이땡땡땡을 불러도 어서 모이고 싶게 만드는 실력입니다....

clavis 2018-04-0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제 꿈을 찾아 여기 까지 오는데에는 기억력이 일등공신였던 듯 하네용

syo 2018-04-02 23:48   좋아요 0 | URL
clavis님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2018-04-03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4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4-0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례하긴요
꿈을 함께 이야기 한다는건 누구와도 아주 즐겁고 중요한 일인걸요♡♡

2019-12-30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바다에 가고 싶다


그저 허기를 죽이느라 맛도 멋도 없는 밥을 쑤셔 넣은 점심, 조용히 누워 눈을 감고 입 안으로 되뇌어 보았다. 지금은 어두운 밤, 나는 여기 세상 끝자락 어느 바닷가에 오롯이 누워 한 점 빛살도 없는 우주를 아득히 올려다 보고 있다고. 날 달린 쇠붙이에 허리를 깎이는 콘크리트의 비명이, 하루 하루 솟아오르는 거대한 교회의 키만큼 제 살을 파먹힌 하늘이 내지르는 야윈 쇳소리가 자꾸만 내 방 작은 창을 넘지만, 그건 사실 모래를 핥는 파도의 기척이라고. 아스팔트를 긁으며 달려나가는 저 바퀴들은 알고 보면 물 먹은 모래를 더듬어 먹거리를 구하는 작은 바닷게들의 집게발이라고. 봐 봐. 들어 봐. 지금 나는 바다에 있어. 지금 바다는 여기에 있어. 봐 봐. 들어 봐. 그러나 오래 누우면 허리가 절로 아픈 고물딱지 매트리스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 시간은 아무래도 바다와 무관한 시간, 파도와 바닷게가 아련히 멀리 있는 시간, 아무리 열심히 내가 나를 속여도 기어이 내가 나에게 속지 않는 쓸쓸한 시간. 그럼에도 그 자체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그러니까 자기 손을 둘러 자기 몸을 안아주는 것 같은, 딱 그만큼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시간. 


자신을 묶어 둔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여행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관념일지도 모른다. 바다가 아니라 바다라는 추억. 세상 끝이 아니라 세상 끝이라는 낯섬.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진짜 나는 지금의 모자란 내가 아니라, 아직 되진 못했으나 되고자 안달하는 미래의 충만한 나라는 위로. 달콤한 착각. 오늘 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약효가 떨어질 조잡한 플라시보. 그리고 친구들아, 우리는 그걸 오늘 먹었듯이 내일도 먹지. 진짜 바다는 갈 여유도 없지만, 갈 의지도 없고, 어쩌면 갈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는. 우리는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3분만에 땡 하고 완성되는 레토르트식 우울쟁이가 되었지. 같은 건물 같은 지붕 아래 모여 공부하며 서로 돕고 서로 경계하는 열 살도 더 어린 나의 친구들아, 너희들도 벌써부터 나하고 같은 눈을 하고 있더라. 웃는 눈동자 뒤로 노리는 눈동자를 숨겨 놓았더라. 그건 참 슬픈 일이더라. 이해가 될수록 더 슬픈 일이 있더라. 


열흘만이지만, 이런 근황입니다. 

        



 파도.
 그것이 파씨의 표면을 뚫습니다. 파씨는 뒤를 돌아봅니다. 등 뒤에 펼쳐진 바다를 봅니다. 발밑의 모래는 미지근한 거품으로 덮여 있고 수평선은 그저 한 겹의 주름인 듯 흐릿하고도 덤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파씨는 줄곧 바다를 바라보지만, 온다던 파도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파씨는 겁을 먹고 소리를 죽여 우는 것에도 지쳐 다만 바다를 지켜봅니다. 그때 누군가 말합니다. 이번 파도는 너무 작았어, 다음 파도를 기다려. 파씨는 놀랍니다. 바다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올려다봅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이미 왔다니. 가버렸다니. 바다를 돌아봅니다.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버린 파도, 그냥 가버린 첫번째 파도의 규모를 생각합니다. 이미 이전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파도를 기다립니다. 
_ 황정은,「파씨의 입문」, 『파씨의 입문』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무한 경쟁은 결국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종국에 가선, 결국 무엇를 얻기 위함 싸움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달리 별수 없다는 이유로, 어차피 세상에 다른 존재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맹목적인 경쟁의 공간에 숨을 허덕이며 머문다.
_ 목수정, 『월경독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3-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