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다에 가고 싶다


그저 허기를 죽이느라 맛도 멋도 없는 밥을 쑤셔 넣은 점심, 조용히 누워 눈을 감고 입 안으로 되뇌어 보았다. 지금은 어두운 밤, 나는 여기 세상 끝자락 어느 바닷가에 오롯이 누워 한 점 빛살도 없는 우주를 아득히 올려다 보고 있다고. 날 달린 쇠붙이에 허리를 깎이는 콘크리트의 비명이, 하루 하루 솟아오르는 거대한 교회의 키만큼 제 살을 파먹힌 하늘이 내지르는 야윈 쇳소리가 자꾸만 내 방 작은 창을 넘지만, 그건 사실 모래를 핥는 파도의 기척이라고. 아스팔트를 긁으며 달려나가는 저 바퀴들은 알고 보면 물 먹은 모래를 더듬어 먹거리를 구하는 작은 바닷게들의 집게발이라고. 봐 봐. 들어 봐. 지금 나는 바다에 있어. 지금 바다는 여기에 있어. 봐 봐. 들어 봐. 그러나 오래 누우면 허리가 절로 아픈 고물딱지 매트리스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 시간은 아무래도 바다와 무관한 시간, 파도와 바닷게가 아련히 멀리 있는 시간, 아무리 열심히 내가 나를 속여도 기어이 내가 나에게 속지 않는 쓸쓸한 시간. 그럼에도 그 자체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그러니까 자기 손을 둘러 자기 몸을 안아주는 것 같은, 딱 그만큼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시간. 


자신을 묶어 둔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여행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관념일지도 모른다. 바다가 아니라 바다라는 추억. 세상 끝이 아니라 세상 끝이라는 낯섬.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진짜 나는 지금의 모자란 내가 아니라, 아직 되진 못했으나 되고자 안달하는 미래의 충만한 나라는 위로. 달콤한 착각. 오늘 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약효가 떨어질 조잡한 플라시보. 그리고 친구들아, 우리는 그걸 오늘 먹었듯이 내일도 먹지. 진짜 바다는 갈 여유도 없지만, 갈 의지도 없고, 어쩌면 갈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는. 우리는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3분만에 땡 하고 완성되는 레토르트식 우울쟁이가 되었지. 같은 건물 같은 지붕 아래 모여 공부하며 서로 돕고 서로 경계하는 열 살도 더 어린 나의 친구들아, 너희들도 벌써부터 나하고 같은 눈을 하고 있더라. 웃는 눈동자 뒤로 노리는 눈동자를 숨겨 놓았더라. 그건 참 슬픈 일이더라. 이해가 될수록 더 슬픈 일이 있더라. 


열흘만이지만, 이런 근황입니다. 

        



 파도.
 그것이 파씨의 표면을 뚫습니다. 파씨는 뒤를 돌아봅니다. 등 뒤에 펼쳐진 바다를 봅니다. 발밑의 모래는 미지근한 거품으로 덮여 있고 수평선은 그저 한 겹의 주름인 듯 흐릿하고도 덤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파씨는 줄곧 바다를 바라보지만, 온다던 파도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파씨는 겁을 먹고 소리를 죽여 우는 것에도 지쳐 다만 바다를 지켜봅니다. 그때 누군가 말합니다. 이번 파도는 너무 작았어, 다음 파도를 기다려. 파씨는 놀랍니다. 바다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올려다봅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이미 왔다니. 가버렸다니. 바다를 돌아봅니다.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버린 파도, 그냥 가버린 첫번째 파도의 규모를 생각합니다. 이미 이전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파도를 기다립니다. 
_ 황정은,「파씨의 입문」, 『파씨의 입문』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무한 경쟁은 결국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종국에 가선, 결국 무엇를 얻기 위함 싸움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달리 별수 없다는 이유로, 어차피 세상에 다른 존재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맹목적인 경쟁의 공간에 숨을 허덕이며 머문다.
_ 목수정, 『월경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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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0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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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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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0 1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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