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연과 손 일병

 

총을 어깨에 둘러 매고 함께 경계 근무를 나갈 선임을 기다리던 손 일병은 생활관 쪽에서 들려오는 어떤 여인의 노랫소리에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생활관 안의 병사들은 이미 모두 영혼이 포획된 상태라 누가 들어오든 말든 그저 TV만 보는 중이다. 붉은 단말머리의 아가씨가 당찬 얼굴로 한 음 한 음을 꾹꾹 눌러 담듯이 묵직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물들어. - 하는 탄성인지 탄식인지가 생활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손 일병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대박. 대박사건. 오거리 표지판마냥 우뚝 서서 멍하니 서 있는 손 일병을 찾던 선임이 화가 난 표정으로 생활관 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이씨, , 손 일병아, 너 지금 뭐 하냐, 근무 안 가ㄴ..........?” 그때였다. 물드으러어어어어~~~! TV 속의 세이렌이 작심한 듯 빵하고 질렀고, 그 마력에 선임 역시 여지없이 포박되어 손 일병의 옆자리에 딱 멈춰 선다. 총을 둘러 맨 두 사람은 누가 더 멍청한 표정을 잘 짓는지 경합하며 쌍봉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노래가 끝나고 여운에 발이 묶여 어렵사리 정신머리를 찾아가던 찰나, 행정보급관이 문을 밀고 들어와 호통을 친다. “, 이 정신 나간 것들아, 교대 안 가냐? 지금 니들 왜 안 오냐고 난린데! 교대 가기 싫으면 어떻게, 다정하게 영창이라도 한 번 갈까?” 그러나 고개를 돌린 손 일병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행정보급관은 흠칫 놀란다. “, . , 뭔 일 있냐? 왜 그래, . 아니, 꼭 영창을 가라는 게 아니라, 얼른 근무 교대를 나가라는 거였지 나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손 일병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행보관님, 전 괜찮습니다. 그냥 물들어서 그래요, 물들어서...... 으흑. 경계하는 자세로 초소를 향해 가는 두 병사는 실은 아무것도 경계할 여력이 없었다. 아, 오디세우스 그 양반이 당최 왜 일을 그런 식으로 했냐 했더니만...... 


초소에 도착하자 교대를 기다리던 초병이 벌컥 화를 낸다.


  초병 : (언성을 높이며) ! ! 미쳤어?

  손 일병 : ....... (고개를 떨군다.)

  초병 : (손 일병과 함께 온 선임을 바라보며) , 강산아. 손 저거 이제 갓 일병 달아서 그럴 수 있다 쳐도, 넌 지금 뭐 하냐? 군 생활 다 끝났냐, 지금?

  선임병 : 아니, 그게 아니라 신 상병님. ..... (손 일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걔 이름이 뭐라고?

  손 일병 : ...... 승연입니다. 손승연.

  선임병 : (다시 초병을 바라보며) , 손승연이랍니다. 걔가 글쎄......

  초병 : , 걔가 누군데. 신병 들어왔냐?

  선임병 : 아니, 그게 아니라. (손 일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그거 제목이 뭐였지?

  손 일병 : ......물들어.

  선임병 : , 맞다. (다시 초병을 바라보며) , 물들어랍니다. 그게 글쎄, 와 진짜......

  초병 : (언성을 높이며) 아 진짜,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지금. 누가 물들었다는 건데. 손승연은 또 누구야? , 니 여동생이냐?

  손 일병 : 아닙니다. 가수......는 아니고, 가수 될려고 하는 애 같습니다. 근데 노래가 진짜 장난 아닙니다......

  초병 : ...... 예쁘냐?

 

저녁을 먹고 전화통을 손에 든 손 일병이 여친에게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자기야, 손승연이라고, 보이스 코리아 나오는 앤데. 장난 아냐. 진짜. 진심 노래 미침. 여지껏 오디션 프로 나온 애 중에서 제일 잘함. 대박......” 손 일병의 여친은 음악 하는 중학교, 음악 하는 고등학교, 음악 하는 대학교, 음악 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음악 하는 음악선생이 된 진성 음악인으로서, 취미가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심사하기>, 음악에 관해서는 용서도 자비도 없는 무시무시한 평가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박정희. 중학교 때 별명은 엄석대. 손 일병은 지금도 가끔 그녀를 임틀러라고 부르는데, 뭐 어쨌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번 들어 볼게.” 라는 여친의 목소리에 어쩐지 왼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안경테를 추켜올리는 습관과 그 습관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검정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사감 선생님 이미지가 떠오르긴 했지만, 손승연이 사감 선생님의 매서운 검증과정을 무난히 통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손 일병은 마냥 즐거웠다. 다음 날 같은 시간, 손 일병의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나온 여친의 말. “, 잘 하더라? 좀 해.” 역대급 특급 칭찬이었다.

 

갑자기 아이유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다. 일종의 위장평화전술이었는데, 다른 병사들이 죄다 시크릿, 나인뮤지스에 환장하는 공간에서 혼자 손승연에 환장한 독특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손 일병은 아이유에 환장하는 척했다. 아니, 이건 손승연한테 사과할 문제인가? 하여튼 군대는 그렇다. 환장하는 아이돌 하나는 있어야 정상인 취급을 받고, 조용히 혼자 김동률 CD를 듣고 있다가 걸리면 차마 입 밖으로 내긴 민망하지만 치명적인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십상이다. 하고 많은 아이돌 가운데 아이유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손 일병이 보기에 아이유는 어쩐지,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루에 두 번씩 의무적으로 자기 뮤직비디오를 보는 손 일병의 멱살을 잡는다거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캐러멜을 사면 따라 나오는 엽서 크기의 자기 사진을 철모 아래 넣어놨다고 손 일병을 고소 고발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은 이미지였으므로. 얼떨결에 골랐지만, 그 선택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내기도 했다. 스물여덟에 일병 된 늙은 아저씨가 이제 갓 스물하나, 스물둘 된 상병, 병장들처럼 섹시한 아이돌을 탐욕스런 눈빛으로 더듬지 않고, 아이유처럼 동생동생한 아이를 오구오구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그림이 또 그 어린 친구들한테는 참신한 장면인거라, , 이런 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삼촌팬이라는 존재로구먼, 역시 덕질에는 장유유서가 없구먼,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진취적인 모습이구먼, 뭐 이런 식의 호응을 불러일으켜 어쩐지 군 생활이 좀 더 편해진 것도 같다. 그러나 멍청한 어린 것들아, 사실 그건 다 페이크였지! 사실 나는 손승연이 좋았다고! 환장한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구장창! 몰랐지, 요놈들아? 으하하하.....

 

손 일병은 제대해서 syo가 되었고, syo와 임틀러는 요즘도 손승연이 노래했다고 하는 음악 프로그램은 꾸준히 찾아서 보고, 듣고, 감탄하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칭찬하다 침이 마르면 에잇, 뽀뽀도 하고 그런다. 금슬에도 도움을 주는 손승연. 말 그대로 손승연은 사랑입니다. 그 시절의 손승연도 대단했지만, 지금의 손승연은 뭐라 얹을 말이 없다. 결점이 없는 보컬. 너무 장점이 많은데, 그 많은 장점 가운데 하나일 뿐인(심지어 가장 큰 장점도 아닌) 고음 때문에 소위 고음형 가수라는 칭찬 같기도 하고 욕 같기도 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한껏 과소평가 되는 가수. 얼른 얼른 자라서 세계로 가자. 그리고 자꾸 예뻐져...... 우리 승연이 오구오구.


그리고,

 

손 일병이 손 상병 되겠다고 분주하던 5월의 어느 날 서울에서는 여친이 2호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흔들흔들 한강을 건너는 중에 때마침 차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쏟아진 햇살이 자기 앞에 앉은 아가씨의 정수리를 때렸는데 아무리 봐도 그 정수리가 아는 정수리 같았단다. 이거, 근래에 마주친 정수린데...... 그 정수리가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눈, , 입이 또 아는 눈, , 입이었던 거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련한 가운데 여친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낯익은 정수리눈코입의 주인이 씨익 웃더란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린 여친은 재빨리 가방을 열었으나, 그날따라 종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펜도 하필 x나미(회사이름입니다. 욕 아니예요.)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 달랑 하나...... 그러나 이렇게 포기하면 임틀러가 아니지. 이가 없다고 고기를 못 씹으면 잇몸은 디스플레이냐. 가방을 이 잡듯이 뒤져 기어이 종이 비스무리한 것을 찾아내어 그 위에 필사적인 스피드로 수성 사인펜을 갈긴다. 정황상 저 사람은 아마 홍대에 내리겠지, 서둘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수줍은 표정으로 그 종이를 내민다. 저기, 이거......


그렇게 가보가 탄생했다.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기 바란다.
누군가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질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수록, 세상엔 좋은 것들이 좀 더 생겨날 것이다.
_ 최민석, 『꽈배기의 맛』


노래는 말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노래로 외쳐 일깨우고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속으로 삼킨 말들을 가락에 실어 흘려보내는 겁니다. 엉킨 삶을 풀어서 꿈을 짜는 겁니다.
_ 홍승찬, 『오, 클래식』


누구에게나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요정은 있다. 다만 자신이 실제로 품었던 소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만이 나중에 자신의 삶에서 그 소원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된다. <겨울날 아침>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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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3-1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맙소사!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손승연 물들어, 오케이, 저도 들어볼게요. 불끈!

syo 2018-03-12 16:25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입니당. 요즘은 노래 더 잘해요.....미쳤어.

psyche 2018-03-1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고 당장가서 손승연 들어 봤어요. 와 진짜 노래 잘하네요. 물들어부터 시작해서 불명에 나왔던거 까지 연속해서 들어보고있습니다. 이렇게 노래 잘하는 가수있는지 몰랐네요.

syo 2018-03-13 01:04   좋아요 0 | URL
그렇죠? 물들어 때는 그래도 아직 가수도 되기 전 꼬꼬마 새싹 느낌인데, 불명에서 불렀던 것들은 뭐 하나 어마어마하지 않은 노래가 없어요....

단발머리 2018-03-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승연은 let it go죠^^
물들어,도 들어보고 결정할까요?!?
근데 김동률은 어떡해요?! ㅋㅋㅋㅋㅋ
나 어제도 들었는데 말이죠.

syo 2018-03-13 14:31   좋아요 0 | URL
여긴 군대가 아니니까 김동률도 괜찮습니다ㅎㅎㅎㅎㅎ

물들어는 손승연이 부른 것 중 제일 못 부른 노래예요. 제일 옛날이니까요 ㅎㅎ

우리 승연이는 이제 학교종이땡땡땡을 불러도 어서 모이고 싶게 만드는 실력입니다....

clavis 2018-04-0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제 꿈을 찾아 여기 까지 오는데에는 기억력이 일등공신였던 듯 하네용

syo 2018-04-02 23:48   좋아요 0 | URL
clavis님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2018-04-03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4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4-0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례하긴요
꿈을 함께 이야기 한다는건 누구와도 아주 즐겁고 중요한 일인걸요♡♡

2019-12-30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