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이래 껀덕지가 없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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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생일이었다. 생일이 되면 치킨과 커피 같은 각종 먹거리들이 바코드 옷을 입고 쏟아져 들어온다. 카톡으로. 21세기의 힘이다. 멋진 신세계.
그러나 이것은 부담이기도 하다. 일단 경조사를 잘 챙길 줄 모르는 살갑잖은 성격을 베이스로 하고, 그 위에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먹튀만은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얹은 후, 마지막으로 백수라는 특수/경제적 양념을 솔솔 뿌리면, 짠- syo의 곤란함 완성.
그런 까닭으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는데, 어떻게든 알게 된 친구들이 늦었지만 축하한다고 난리다. 여러분, 마음은 고맙지만 넣어두세요. 아놔, 또 늙었?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생일날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설의 매콤함과 데시벨이 동시에 커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 그 다정한 성격에 지금 syo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보내고 싶어서 그냥 아주 안달복달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침이 바짝 마르는 건 알겠는데, 정중히 사양합니다. 어어, 거기 클릭하시는 분, 멈추는 게 좋을 거예요. 제 말만 듣는다면 우리는 아무 일 없이 이 순간을 지나갈 수 있어요. 자, 이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뒤둘아 서는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내 눈을 봐요. 그렇죠. 나를 믿어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다 잘 될 거예요.
인간은 인내의 동물입니다. 어떻게든 참아 보시라구요.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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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지만 syo는 30대고 앞자리와 뒷자리 수를 더하면 10입니다. 이런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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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글 올리는 분들 멋있다. syo는 읽는 건 쉬운데 쓰는 건 진짜 어려워서, 이렇게 헛소리로 한 바닥 채우는 데만도 거의 두 시간이다. 한 편의 글을 만드는데 투입된 syo의 노동량이 사회적으로 투입된 노동량보다 크기 때문에, 결국 syo는 경쟁에서 도태되고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할 거라는 것이 마르크스 선생님의 분석이다. 저 선생님은 언제 한 번 나한테 다정하게 군 적이 없다. 근데 나는 왜 좋지? 아, 어쩔 거야, 수염 돼지 페티시…….
둥글고 빨간 얼굴은 단순하지만 눈에 띄기 때문에, 대충만 알짱거려도 사람들 뇌리에 선명하게 박히는 듯하다. 그래서 syo라는 놈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 같지만, 실은 조용한 편이다. 2017년 4월 하순부터 알라딘에서 설치기 시작했으니 이제 만 4년인데 그간 써 놓은 페이퍼가 500개가 안 되고, 심지어 리뷰는 꼴랑 50개에 그친다.
그런 이유로 어제도 썼지만 오늘도 써 보려고 이러는 중인 건데, 아, 도무지 쓸 게 없다. 아침에 일어나 우유를 마시는데 조준을 잘못해서 나랑 티셔츠랑 반반씩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샤워하면서 봄인데 얼굴 털만 밀지 말고 다리털도 한 번 밀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밖에 안 나가면 된다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흡족했다. 떡볶이에 콩나물을 넣어봤다가 한 끼 시원하게 말아먹었고, 푸시업을 잘못했는지 힘만 주면 뒷골이 땡기는 거라 오늘은 그 핑계로 운동을 안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여전히 똥은 잘 나오고 있어서 이거 참 똥 만드는 기계로 태어난 이번 생, 건실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높아졌다. 이게 다다. 이런 인생은 대체 뭘까. 어제는 어제의 쓸 거리가, 오늘은 오늘의 쓸 거리가 생겨야 되는 게 아닐까? 아닐까요? 네?
--- 읽은 ---
131. 에세이 만드는 법
이연실 지음 / 유유 / 2021
『에세이 만드는 법』의 장르는? 에세이다. 이 지점이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이연실 선생님은 말한다. 모든 것을 에세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에세이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에세이를 만드는 법으로 하나의 에세이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에세이 만드는 법』을 읽고 남기는 이 글의 장르는?
물론 똥.
똥이지만, 에세이랑 가장 많이 닮은 똥(……)이라고 해보겠다.
모든 것이 에세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에세이를 쓰기가 쉽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좋은 에세이를 쓰기란 굉장히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소재로 누구와도 다른 글을 써내어 누구나 기꺼이 읽게 만드는 일, 그것은 물론 일차로 쓰는 사람의 일이겠지만, 일차 뒤에 이차, 삼차, 사차…… 아오. 그 여러 차차차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겉표지에 이름이 찍히지 않는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차차차를 통해 독자가 가장 편안하게 읽는 장르, 에세이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주성치 세계의 거리에선 쟁반을 손도 대지 않고 머리에 인 채 배달하는 밥집 아주머니와 앞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건을 던져 정확하게 정리하는 아저씨들이 곳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밥벌이를 한다. 맨날 화내면서 세금과 임대료를 걷으러 다니는 파마머리 아줌마는 '사자후'를 토할 줄 아는 전사고, 메리야스 입은 복부 비만 아저씨는 자신보다 약한 아이와 서민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히어로다. 전혀 우아하지도, 잘생기지도 않았고, 화면 너머로만 봐도 땀냄새 · 발 냄새 · 머릿내 풍길 것 같은 이 평범한 생활인들이 주성치 영화에서는 최고의 무림고수이자 영웅이다.
에세이 편집자의 작가는 도심의 카페와 집필실, 교수 연구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리에, 출근길 만원 버스와 전철에, 시장에, 가게에, 정신 없이 돌아가는 회사에, 이름도 몰랐던 시골 마을에, 세상 방방곡곡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메일함에 꽂히는 완전 원고 너머의 세계에도, 우리가 그토록 차장 헤매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걸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야 하나, 조금은 막막하기도 하고 내 힘과 노력과 용기를 조금 더 쏟아야 하는 곳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툭툭 튀어나온다.
_ 이연실, 『에세이 만드는 법』
132.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엘즈비에타 에팅거 지음 / 황은덕 옮김 / 산지니/ 2013
요 책은 아무래도 조만간 리뷰를 쓸 모양이다. 그래도 그 전에 간단히 말해두자면,
하이데거는 쓰레기처럼 연애하고 아렌트는 망한 연애를 붙들고 망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속이느라 일생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물론 이 말은 제3자의 입이니까 쉽게 튀어나오는 말이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일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연애의 중요한 특징 중 몇 가지의 표본을 만들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타인의 사랑을 비웃고 비난하지는 않겠지만, 비웃고 비난하지 않기 위해 꾹 참아야만 하는 저 사랑이 내 사랑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이런 평을 남기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이미 죽었고 이제 사랑은 살아있는 내가 할 일이니까.
사실 하이데거 그 양반이야 원래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 딱 고대로 연애를 했기 때문에 달리 더 실망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지만, 아렌트의 연애는 오히려 충격. 똑똑해도, 아니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오히려 멍청한 사람들이 하는 실수와 같은 실수를 하면서도 자기 같은 똑똑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게, 그런 게 있나 보다. 모르지, syo는 안 똑똑이니까. 하여간 나처럼 실망하는 사람을 위해 역자 선생님이 후기에 남긴 말.
아렌트의 경우, 하이데거와의 관계에서 시종일관 보여주는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자기모순은 그녀의 사상에 경외심을 품어온 독자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전체주의의 기원, 그리고 나치즘과 파시즘을 포함한 전체주의 체계를 그토록 논리적으로 비판한 이 유대인 사상가가 어떻게 나치즘 이념에 찬동하고, 12년 동안이나 나치당적을 유지한 하이데거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두둔하며,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아렌트에게는 애초에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하이데거는 사랑하는 연인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고, 철학이나 정신(Geist) 그 자체, 혹은 첫사랑이나 순수 그 자체와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_ 엘즈비에타 에팅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솔직히 그냥 하는 말 같다. 한나도 연애할 땐 우리랑 똑같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바보짓을 했다- 라고 했었으면 더 쿨하고 좋았을 것 같다. 사실 사랑할 땐 종종 바보가 되는 우리들도 저런 핑계를 댄다. 걘 달랐어. 걔는 나한테 그냥 여자가 아니었다고. 그리고 끝내 ‘자니?’를 하곤 한다.
133.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
예전에는 참 젊은이들도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말하면 웃긴 게, 사실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역량이 그때 그 젊은이들의 몇 곱절은 된다. 요시다 슈인이 아무리 잘나 봐야 토익 치면 300도 받기 힘들 거고, 사카모토 료마가 아무리 뛰어나도 코딩 한 줄 할 줄 모를 것. 그런데도 20세 근처에서 이미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젊은이들의 시대인 100년 전, 150년 전에 비하면 요즘은 학문, 정치 분야에서 젊어 이름 날리기란 굉장히 어렵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아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도 많은 시대가 더 발전된 시대겠지만, 그래서 이게 지금 더 좋아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서술이 경쾌하고 분량 조절도 나쁘지 않아서 읽기 좋았다. 이 최후의 사무라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권으로 다룬 두꺼운 책들도 많겠지만, 사실 뭐, 바다 건너 여기서 그런 두꺼운 책들까지 읽는 건 취미가 거기에 닿는 사람들의 몫이겠지. 나는 이 책으로 만족.
메이지유신은 그 자체로도 혁명사의 흥미로운 사례다. 거대한 변혁을 수행하면서도 기존사회의 어떤 부분은 잔존시켰고 연속성을 중시했다. 천황제의 온존은 대표적이다. 그 과정은 격렬하지만은 않았고 매우 타협적이었다. ‘연속하면서 혁신’한 것이다. 본격적인 계급투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고, 외세와의 전쟁도 광범한 내전도 회피했다. 민중 대다수는 변혁 과정을 관망하는 데 그쳤고, 막부는 서양 열강과 전쟁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
한편으로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한계와 약점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 강렬한 일본우월주의는 끊임없이 주변 국가인 조선, 중국과 마찰을 일으켰고, 끝내는 전 세계를 적으로 돌려 자멸했다. 우월주의는 콤플렉스의 다른 면이다. 천황에 대한 맹신은 사회 전체를 체계적으로 권위주의화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근대 일본의 눈부신 성취에 비해 아직도 일본 사회에서 초라한 존재다.
_ 박훈,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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