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볼까 하다가,
책을 사두고 아직 시작하지 않으신 분들을 읽고 싶게 만들고자 공유한다.
군인들의 묘사를 보다보면 기시감이 많이 느껴진다.
55.
특히 주의를 끈 것은 기묘하게도 양면적인 정서였다. 이들 텍스트는 강렬한 관심과 냉정한 무관심, 공격성과 숭배, 중오, 공포, 소외와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71.
여성과의 관계는 융해되어서 남성의 새로운 태세로 변신한다. 정치적 입장, 올바른 행보에 대한 깨달음 등으로 승화한다. 이런 식으로 여자는 흐릿하게 사라지고 남자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파시즘 문학은 종종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원자재가 "변신"을 거쳐 진정한 남자로 완성되는 과정에는 언제나 성적으로 순결한 여성의 융해적 육체가 있다.
92.
여자를 향하는 정서는 늘 같은 방식으로 방어된다. "여성에게 향하는" 움직임은 돌연 중단되고 폭력적 행동과 연관된 이미지나 생각이 소환된다. 그러므로 "여성"을 상상하면 언제나 "폭력"의 상상이 뒤따른다.
108.
이제껏 살펴본 바에 따르면 군인 남성들의 "사랑"은,
- 독일 국민, 조국
- 고향의 가자미, 고향 마을, 고장
- 군용 코트 (군복)
- 다른 남성들 (동료, 상관, 부하들)
- 부대, 교구, 혈족과 고향 동지들
- 무기, 사냥, 전투
- 동물 (특히 말)
사랑 대상물로서의 여성에게 맞서 방어할 때 동원한 것들이다.
이들 남성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강변함으로써 여성과의 대상 관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121.
성애적 남성 - 여성 관계 - 난폭하고 냉혹한 여성 - 남성에 대한 위협 - 저열성과 비속함 - 창녀 - 프롤레타리아 여성 - 공산주의
132.
"남근을 갖춘 여자"가 발현된 또 다른 형태가 "총잡이 빨갱이 년"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헝가리의 정신분석학자 게자 로하임은 마녀가 "남근을 갖춘 여자"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설명한다. 성애적 여성, 오르가슴을 아는 여성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표현한 방어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엘리아스 카네티에 따르면 마녀의 "진짜 죄악"은 "악마와의 성적 결합"에 있다.
146.
군인 남성의 판타지와 정서가 "꽂히는" 곳은 역사-사회-정치 공간이다. 하지만 이 공간으로 가려는 충동은 진정한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회피 행동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거대 정치에 탐닉한다. 언제나 대의에 몰두한다. 조국의 운명을 논한다. 니벨룽 서사시가 일상다반사보다 더 가깝다. 인종과 인류의 운명에 몰두한다는 것은 한편 작고 가까운 미시사를 부정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거대하고 공적이며 사회적인 것을 추구한답시고 사적이며 개별적이고 고유한 것을 도외시한다.
156.
어머니, 간호부, 백작부인이 한 사람이다. "좋은" 여성의 성스러운 삼위일체인 셈이다. 그녀는 절대 창녀가 아니다. 절대 거세하지 않으며 남자를 지켜준다. 그녀에게는 남근이 없다. 더 나아가 성별조차 없다. 그녀의 몸은 "흰 앞치마로 완전히 가려져 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새하얀 간호부 모자로 단정하게 각 잡혀 있다."
162.
대체 왜 아들은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려는 걸까? 어머니와 아들 관계는 마치 백색 간호부와 부상병의 관계처럼 무해해 보일지라도 이면에는 어머니를 향한 은폐적 공격성이 위장되어 있다. 어머니에게 어떤 죄가 있을까? 성적인 혹은 다른 종류의 죄일까? 아들이 보기에는 그것 때문에 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173.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자유군단 문학은 아들의 문학이다. 모든 것은 아들의 관점에서 관찰된다. 아들은 세상에 적응하고 어머니를 다루고자 한다. 또한 "누이들"에게 대처하고자 한다.
자유군단 문학에서 아버지는 논외의 문제다. 영웅도 아니고 호적수도 아니다. 아버지는 의미심장하게도 그냥 묵살된다. ... 군인 남성들은 아들 입장에서 치욕스럽게 퇴위당하고도 살아남은 빌헬름 2세라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이제 실수를 바로잡을 작정이다. 아버지는 실패자다. 아들이 대신 어머니 독일을 물려받아서 싸운다. 가부장제는 파시즘을 거쳐 "아들의 폭정"이라는 형태로 지배력을 확보했다. 세상천지에 온통 아들 놈들이 판을 쳤다. 히틀러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197.
이제 우리는 "순백의 간호부"가 심리적 안전 장치로 군인 남성에게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모든 성애적/위협적 여성성을 회피하게 해주는 핑계다. 그녀는 누이 근친상간 금지를 유지해준다. 그리고 관능을 초월하는 어머니 상의 보살핌을 제공한다.
228.
노동자 여성과 군인 남성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노동자 여성의 상대적인 성적 자유분방함이 군인 남성의 허약한 자신감과 대치됐다. 그 결과 군인들이 기존에 지녔던 여성에 대한 주관적 위협감만 더 강화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타지에 형체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253.
중요한 점은 마르크스조차 남성을 "당연한 성별"이며 반대로 "여성"은 특정 성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적 영역에서 발언한 내용이라는 점이 더 흥미롭다. 공적 영역이었다면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했을 리 없다. 성별 관계의 본질적 핵심은 바로 공공연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당연시되는 곳에 숨어 있다. 편견은 공공연한 이론 속에 숨어서 의심과 통제를 받지 않고 작동한다.
269.
따라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어머니/누이의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테러는 기본적으로는 정당방위다. 여성이 가하는 위협이 너무 큰 나머지, 무성애적/보살피는 여성과 성애적/위협적 여성으로 쪼개는 대응책만으로는 부족하다. 위협적인 부분은 멸절해야 한다. 또한 "좋은" 부분도 온전히 살려둘 순 없다. "좋은" 여성은 비생명화된다. 육체가 없는 듯한 존재로 만든다. "사악한" 여자는 때리거나 죽여버린다. 정당방위에 작동하는 정서는 바로 공포와 욕망이다.
280.
여성 살해의 묘사에서 언제나 두드러지는 점은 언제나 "드디어 이 땅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투의 해방감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이전 상황에 대한 혼란감과 현재 상황에 대한 공포감이 배경에 깔려 있다. 여기서 지배적인 정서는 격노하는 욕망이다. 욕망의 대상이 파괴되어 거꾸러질 때까지 멈추지를 못한다.
294.
"메두사의 머리"가 끔찍한 이유는 그것이 "물린" 자국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물어뜯기 떄문이 아닐까? 모든 작품에서 이 점은 명백하다. 뱀 머리카락 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것은 활짝 벌린 입이다. 메두사의 머리는 거세 상처가 아니라 사나운 아가리다. 그래서 군인 남성은 공포에 질려 돌처럼 굳어버린다. ... 뱀 머리카락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세당한 상처일까? 정반대다. 메두사 머리에 달린 수많은 남근 모양의 형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무엇인가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빼앗아서 가졌기 때문이다. 바로 여성적 가능태를 억압하려는 모든 남근을 빼앗았다. 이것이 여신 아테나의 순결이 주는 공포다. 그녀는 가능태를 아직 빼앗기지 않았다. 감히 덤비는 남자는 무사하지 못하다. 그의 남근은 노획물로 간직될 것이다. 그녀가 잘라서 빼앗은 남근의 숫자는 머리카락만큼이나 많다. 메두사의 머리는 프로이트가 주장하듯 거세된 듯 보이는 어머니의 성기가 주는 공포가 아니다. 오히려 여신의 거세되지 않은 무서운 성적 가능태 앞에서 남성들이 느끼는 공포의 상징인 것이다. 심지어 수많은 남근이 그녀에게 매달려 있다!
메두사 머리에 대한 공포는 총잡이 빨갱이 년이 지닌 거세하는 "남근"에 대한 공포와 연관되어 있다. 그녀 역시 노획물을 빼앗아 지니고 다닌다. 총잡이 계집이 버젓이 혁대에 차고 다니는 것은 여느 남근이 아니라 궁극적 남근이다. 말 달리던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계집"을 떠올려보자. 벌거벗고 비루먹은 말을 타면서 머리카락을 펄럭이던 그녀는 양손에 쌍권총을 들었다. 이는 "메두사"의 현신이었다.
300.
그들은 피에 흠뻑 젖기를 원한다.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일" 정도로 정신이 나가길 원한다. 그들은 이성과 결합하길 원한다. 아니면 성 그 자체와 결합하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이름 따위는 없는 상대를 원한다. 자기 자신이 융해되고 상대 이성을 폭력으로 해체하는 그런 관계를 원한다. 군인 남성들은 삶과 따뜻함, 핏속으로 삽입되기를 원한다. 이들은 프로이트 방식의 별 볼 일 없는 "제 어미와 붙을 놈" 오이디푸스보다 훨씬 더 뜨겁고 위험하고 끔찍한 인간들이다. 만약 그들이 근친상간을 원한다 치면, 최소한 어머니 대지를 욕보이는 근친상간을 저지를 인간들이다. 이들이 저지르기를 욕망하는 폭력적 "근친상간"은 어머니를 꿰뚫어 함께 공중에서 폭파되는 것이다.
312.
들뢰즈와 과타리가 보기에 "근친상간" "아버지 살해 욕망" "거세 욕망"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왜곡이다. "욕망을 욕망하는" 무의식의 생산력이 충분히 강하게 억압되어 사회적/가정적 속박이 될 때 욕망에 이러한 명칭이 붙는다. 욕망은 "오이디푸스"라는 꼬리표를 사후적으로 얻는다. 욕망의 이름과 "무의식"의 구조는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이름과 구조는 사후적으로 죄악과 수치를 개인에게 떠넘긴다.
법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어머니와 결혼해서는 안 돼, 아버지를 죽여서도 안 돼." 그래서 우리, 온순한 신민인 우리는 말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바라고 있던 그것이구나!"
이렇게 무의식은 허락받지 못할 것들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억압이 일부러 촉발된다. 이 작업의 결과 무의식이라는 곳은 더 혼란스럽고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프로이트 후기 이론의 내용은 유감스럽게도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막아선다.
315.
인간의 생산은 일반적으로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장인의 생명 넘치는 손재주는 나무를 탁자로 바꾸어놓는다. 노동자의 손길은 쇠에서 공구를 뽑아낸다. "어머니"의 생기 넘치는 보살핌은 갓난아기를 어엿한 사람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군인 남성들의 일은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다. 그들은 사회가 생산한 것을 없앤다. 인간을 물건처럼 다룬다. 모든 것에 스며 있는 생명을 빼앗는다. 전쟁 때에는 특히 그렇다. 군인의 생산력이라는 것은 삶을 죽음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해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