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성판매 여성들이 성매매방지법에 반대하며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을 때, 나는 그것이 그들의 본심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성산업 업주들의 폭력과 강제에 대해 익히 들었기에, 악덕 업주들이 시위까지 조작하는구나 생각했다. (실제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은 이의 안이한 판단이었다. 성판매 여성들과 함께하는 여성운동가들에게 직접 들은 말로는, 업주가 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생계가 막막해졌다는 생각에 화나서 자발적으로 나선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민주성노동자연대가 출범했을 때 매우 혼란스러웠다. 여성들 스스로 이 일을 노동으로 선택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더욱이 민성노련 쪽이 성매매 근절 운동가들을 ‘부르주아 여성 권력자’로 매도하는 것을 보자, 진정 성판매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려면 탈성매매 여성들을 돕는 여성 단체를 비난할 게 아니라 악덕 업주부터 고발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지금은, 일단 법을 어겨서 ‘단속’ 대상이 되면 범죄자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들이 방지법 제정과 시행을 주도한 단체들을 비난하게 되었으리라고, 이해는 된다.)
그런데 올 1월, 『노동하는 섹슈얼리티』(원제 ‘사는 신체/파는 신체-섹스워크론의 사정’)라는 책의 번역 원고를 만나게 되었다. 성노동 이론서인 이 책의 주장에 나는 당혹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하고 시행한 주체들 중 당사자인 성판매 여성들에게 이 법이 어떠냐고 물어 본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그들 스스로의 앞날이 걸린 문제인데도 정작 당사자인 그들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이들은 멸시(창녀라는 손가락질)나 동정(가난과 성폭력의 피해자)의 대상일 뿐,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니었다. 자기주장을 원천 봉쇄당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또한 섹슈얼리티 자체가 상품이 되어버리거나 모든 상품에 섹슈얼리티를 부여하는(자동차 광고에 섹시한 여성이 필요한 이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규정하는 반면 성판매는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모순. 그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일반’ 여성과 ‘성매매 여성’을 분리하는 차별 의식이 깔려 있지 않나? ‘일반’ 여성과 ‘성매매 여성’을 분리하는 심리적 사회적 장벽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면 나는 왜 여기에 있고, 그들은 저편에 있게 되었는가, 고민해야 하지 않나?
무엇보다, 어찌 됐든 어떤 여성(이나 남성)이 성판매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일자리를 법으로 빼앗는 일보다, 일하는 현장에서 착취와 폭력이 벌어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책의 주장을 넘어서야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운동을 이야기하면서도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를 거역할 수 없는 전제로, 그대로 인정하는 데 있다. 이 책을 갈기갈기 이르집어서, 넘어서고야 말겠다. (그러나 언제? -.-)
- <기획회의> 177호에 기고한 글을 아주 조금 손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