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사라지는 숲이야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종이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 - 종이, 자연 친화적일까? 세계를 누비며 밝혀 낸 우리가 알아야 할 종이의 비밀!
맨디 하기스 지음, 이경아 외 옮김 / 상상의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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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인간은 자신의 코앞에 닥친 일에만 급급할 뿐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기만 하다. 물론 여기에는 나부터가 포함되어 있다. 일전에 읽은 책에서는 식탁에 오른 참치 통조림의 참치가 어디에서 잡혀 우리의 식탁에까지 오른 것인지 그 연원을 거슬러가고 있었다. 무심히 먹고 있는 참치와 크래커, 그리고 무수한 많은 사무용품들이 세계를 돌고 돌아 나에게로 온 것이란 사실을 그 책을 통해 알게 된 후 사물을 절대 단편적으로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훈련이 부족한가 보다. 종이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조차 없으니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막연히 아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의 간극은 크기만 하다. 물론 간접체험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엄청난  간접 체험을 하게 된 셈이다. 이번에 내가 느낀 놀라움과 죄책감은 나뿐 아닌 다른 이들도 모두 느껴주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그리고 내가 이 기억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에 별표 다섯 개를 보낸다. 한 권의 책이 가진 힘이 크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부디 이 책의 힘은 좀더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우리 주변에는 종이가 넘쳐난다.  그러나 종이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 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물을 아껴써야 한다는 이야기 뒤에 물부족 국가에 사는 우리에 대한 걱정과 물의 낭비에 대한 경고를 담겨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종이를 아껴써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돈을 아껴써야 한다는 말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계기로 처음으로 나무와 종이를, 숲과 종이를 연관지을 수 있었다. 아침에 달콤한 원두 커피 한 잔을 내려 먹기 위해 썼던 여과지와 화장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썼던 화장지, 걸레 빨기 귀찮음을 밀쳐두고자 사용한 물티슈 한 장과 잘못 출력했던 A4용지들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나의 소비 때문에 베어진 나무는 모두 몇 그루였을까? 이 책은 종이로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숲에 대한 이야기를 그야말로 처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국가별로 하루에 소비하는 종이의 양이나 한 사람이 평생 쓰는 종이의 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엄청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마 킬로그램이나 그램이라는 단위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실감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 자료로 제시된 종이의 종류와 그 양을 보았을 땐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왔다. 한 장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컵의 물이,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욕조 한가득의 물이 든다고 한다. 무지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나름대로 종이를 아껴써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종이를 아낌으로 인해 물을 아끼고 전기를 아끼고 나무를 살리고 숲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유한 킴벌리 크리넥스 선전에 나오는 근사한 숲을 보며 '아 저런 환경이 우리에게 화장지를 주는구나'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저 환경을 해치라고 저 화장지를 사는구나'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4월 5일 식목일에 나무 심으러 가서 불을 내고 돌아오는 사람을 욕하긴 해 봤지만 종이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 역시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열대지구의 원시림이 베어지고 지구의 허파가 사라지는 것에 막연히 걱정하기만 했지 시베리아의 아한대림이 사라지는 것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나무농장이 숲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단일 수종으로 이루어진 나무가 생태계에 저렇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공부하며 살아왔고, 학교는 우리에게 저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무엇을 가르쳤단 말일까?  그토록 책을 사랑한다 부르짖던 내가 종이에 대해서는 어쩜 이렇게 무심할 수 있었던지 모르겠다. 이 얼마나 단순한 뇌구조인지...이제껏 종이에게 아니 나무와 숲에게 못 할 짓 한 것이 많아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필자와 별 다를 바 없이 우울한 심정으로 글을 읽던 내게 호주의 원주민 출신 '니콜 라이크로프트'의 말은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게 정말 기분이 좋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나 역시 기분 좋게 했다. 출판사를 상대로 재생용지를 쓰게 하여 점차적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고 숲을 살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를 짜릿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생용지로 출판된 해리포터가 살린 숲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전율이 일기까지 했다. 멀리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이렇게 흥분되는데 직접 그 일을 실천하고 그것으로 바뀌어지는 세상을 보는 그녀들의 기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할까. 힘없이 보이는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나아가다 보면 큰 물결이 되는 것을 또 한 번 목격한 셈이다. 한 권의 책만큼 한 사람의 힘도 크리라 믿는다.  

세상을 바꾸자 했으나 세상을 바꿀 수 없었고 사회를 바꾸자 했으나 사회를 바꿀 수 없었으며 가족을 바꾸자 했으나 가족을 바꿀 수 없던 사람이 마지막 숨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바뀌면 가족이 바뀌고 가족이 바뀌면 사회가 바뀌며 사회가 바뀌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지금 나의 생각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거창하고 근사한 방법으로 세상 모든 나무를 살릴 수는 없겠지만 나무를 위해, 숲을 위해 책에서 소개해 준 방법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직장에서 컵은 이미 사용하고 있으니 가방 안에 텀블러 하나를 넣어둬야겠다. 그리고 분리수거할 때에는 종이에 붙은 테이프나 이물질이 섞이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보지 않는 카달로그부터 끊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다. 이렇게 실천하다 보면 적어도 나로 인해 살릴 수 있는 나무가 있을 테고, 내 주변까지 동참한다면 작은 숲 하나는 너끈히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근사한 일이다. 지금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당신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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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 - 쇼펜하우어의 재발견
랄프 비너 지음, 최흥주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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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라니. 어쩜 요즘은 이렇게 제목도 잘 짓는지 모를 일이다. 길어서 지루해 보일 듯한 제목인데도 확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꺼려하는 철학이야기를 이렇게 구미 당기게 묘사할 수는 없으리라 싶다. 거기다 쇼펜하우어의 장난스러운 사진까지 매력을 보태는데 한 몫하고 있다. 요즘 나오는 철학서는 저마다 너무나 깊이있고 재미있고 거기다 쉽기까지 한지라 이 책에도 그런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책 서문에 번역하는 이에게 일침을 가한 아들의 소개를 보더라도 이 책에는 뭔가 재미있는 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라... 이 책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한다. "캬!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이번엔 철학서인거야?" 철학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그조차도 쇼펜하우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염세주의자'인 모양이다. 물론 그가 내뱉은 '캬~'라는 감탄사에 포함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여튼 지독히도 자신을 사랑한 쇼펜하우어는 여러 방면에서 독설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好, 不好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의견을 그 정도까지 뚜렷이 제시할 수 있을 만큼 다방면에 박학다식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에게 상처입은 이들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대단한 그의 모습이 나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삼키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두루뭉술한 기치 속에 나의 생각을 삼킨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겠는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정말 비극적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쇼펜하우어가 근사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p57  전체적이고 일반적으로 개관하여 단지 가장 중요한 특징들만을 놓고 보면 모든 개인의 삶은 항상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희극적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일상의 분망과 고통, 순간순간의 끊임없는 당혹, 한 주간의 희망과 걱정, 항상 장난칠 기회만을 노리는 우연으로 인해 매시간 일어나는 사고 등은 전부 희극적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다. 인생은 비극이란 그의 결론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지금 이순간만큼은 무릎을 치며 듣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쇼펜하우어의 말과 행동에 대한 한두 문장의 설명이 덧붙여진 채 진행되고 있는데 각각의 부분이 명쾌하기 그지없다. 망설임 없는 자의 언변은 자신감을 내비치기 마련이니 말이다. 모든 결론과 진리를 아는 것은 자신뿐이란 자만에 가득찬 그의 모습이 또 다른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의 그런 매력을 알아가는 중간중간 나의 가슴을 탁탁 막히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이건 원서의 잘못인지 번역의 잘못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탓만 하는 나의 독해력의 잘못인지 알 수가 없다. 

   
 

p62 그는 금전적인 이해관계를 폐지하라고 항상 요구했다.  

문학과 철학을 통해서는 돈을 벌 수 없도록 함으로써 그것들 자체를 중요시하는 사람들, 즉 그것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만이 그것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것들을 위해 매우 좋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길고 긴 한 문장 안에 그것이 자그마치 네 번이나 등장한다. 여기서 모든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문학과 철학'이다. 이 정도로 겹쳐진 그것들의 범람 속에서 서술어는 도대체 어느 주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이다. 이리하여 책을 읽는 내내 쇼펜하우어의 잔혹하리만큼 독한 촌철살인에 감탄하기보다 겹쳐지고 안긴 수많은 문장의 해독에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모든 문장이 그런 것도 아닌데 실컷 달리다가 한 번씩 걸리는 문장들은 나의 독서의욕을 저하시키기에 충분했다. 책을 읽긴 했는데 내용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글자를 읽은 듯한 이 기분. 문장을 적당히 자르고 이어서 읽기 쉽게 번역을 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이 글을 찬찬히 읽어봐야 하는데 선뜻 손이 갈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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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에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서울, 북촌에서 - 골목길에서 만난 삶, 사람
김유경 지음, 하지권 사진 / 민음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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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굽이굽이 들어간 곳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내 또래들에게조차 이렇게 아련한 기억이라면 요즘 세대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기억일 것이다. 굽이굽이 돌아 가던 미로같던 골목길은 숨바꼭질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집집마다 끼니 때가 되면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곳도 골목이었고, 친구 불러 손잡고 학교 가던 곳도 골목이었다. 그런 골목이 언제 이렇게 넓은 도로로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숨바꼭질하던 아이는 사라지고 이제는 잘 갖추어진 기성품과 같은 알록달록한 놀이터에서 너무나 세련된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아이들만 보인다. 된장 냄새 풍겨 오던 골목길의 정겨운 풍경 역시 사라지고 없다. 때가 되면 놀이터 앞에 멈춰 서는 자가용만이 바뀐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이 순식간에 고요해진 느낌만 무성한 어스름녘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사이 생소하다는 느낌도 없이 이런 풍광에 젖어들었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쫙쫙 뻗어있는 도로며 넓어진 대로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이젠 아이들과 손잡고 숨바꼭질을 하기보다는 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 더욱 많아져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 있을 때는 구질구질하다고 여겨졌던 좁디좁은 골목길이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나에게도 세월의 더께가 앉고 있는 모양이라고 나름 생각해 본다.

필자도 이런 마음에서 작업을 시작했던 것일까? ‘서울 북촌에서’란 글을 통해 필자는 서울 골목 구석구석을 훑어내고 있다. 기억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던 골목과 기와집, 궁궐터와 역사적인 사건을 장소를 통해 더듬어가는 그의 작업은 참으로 지난해 보인다. ‘5년의 저술, 20년의 취재, 그리고 600년의 이야기’란 책 선전 문구가 딱 알맞다 싶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한옥 동네의 정겨움이 어떻게 훼손되고 지켜졌는지, 그곳을 면면히 지켜가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이제는 마트라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쌀집과 떡집, 목욕탕이 이 책에서는 정다웁게 옛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간혹 차라도 마시러 갈 때 본 삼청동이 마냥 내 눈에는 이국적인 듯하면서도 전통적인 곳으로 느껴져 좋기만 했는데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그게 다가 아닌 듯하다. 그 모습은 서둘러 사라진 전통 속에 어설프게 생겨난 신식문물이 혼재되어 있는 불완전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전통에 대한 감식력이 없는 나는 그것을 그냥 훑어본 것에 그쳤던 것이다. 전통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개발만 외치다 시멘트 더미에 묻혀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야 조금 실감한다. 깨끗함을 가장하여 들어선 큼지막한 건물 뒤로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의숨결들이 사장되었던가! 그때 나는 도대체 무엇에 감탄하고 있었던가! 안타까움을 하소연해도 모자랄 판에 겉보기에 번드르르한 그 모습을 좋아했던 철없던 내 모습을 씁쓸하게 돌아본다. 대학 동기들과 적은 값에 술자리를 나누던 피맛골이 현재 저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숭례문이 불탄지 1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하루가 다르게 잊혀지고 있는 것들을 돌아볼 새도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첨단기기 속에서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갈수록 나에겐 여유 시간이 남아야 하건만 어찌 된 것이 갈수록 마음이 바쁘기만 하다. 첨단 장비가 벌어다 준 우리의 시간은 도대체 누가 도둑질해 간 것일까?

버스에서 지나치며 보았던 숭례문을 거쳐 종로에 다다르면 보였던 보신각 종이 좁은 틈새나마 늠름히 서 있는 것이 마냥 좋았었는데 어느 샌가 그곳에 발길이 잘 닿지 않게 되었다. 청계천이 복구되고, 광화문도 새 단장을 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마음은 이리 휑하기만 한 것일까? 전통을 복원한다는 기치가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어찌 본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러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멈춘듯이 서울에 자리잡고 있는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운형궁, 자수궁 등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과거의 발자취를 나는 몇 번이나 더듬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성돌이까지 시작하진 못하겠지만 예전에 돌아보다 관두었던 궁 탐방이나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아야겠다. 수 백 년 전에 우리의 조상이 더듬었던 길을 나 역시 더듬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모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면야 더욱 좋겠지만 잃어버린 것을 부여잡고 울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더 이상 훼손됨이 없도록 두 눈 부릅뜨고 우리의 문화를, 전통을 우리가 지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시멘트가 덕지덕지 엉겨붙은 문화재를 전통이랍시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야기를 읽다보니 괜스레 막걸리 한 사발 생각난다. 오늘 같은 날에는 나 역시 피맛골에 주저 앉아 생선 구이나 빈대떡을 안주 삼아 막걸리라도 한 사발 하면 좋을 듯 하다. 부디 이때 내 눈에 띄는 것이 인사동 ‘별다방’이 아니라 오래 된 ‘돌확’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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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 - 사랑했으므로, 사랑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권문수 지음 / 나무수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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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끝나지 않는 화두……

국민학교 6년(요즘은 초등학교지만),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까지 내가 받은 정규교육만 하더라도 16년이다 거기다 가정교육에 사회생활에서 받은 교육까지 따진다면 난 참으로 오랜 시간 어마어마한 양과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사랑이 무엇인지, 맛난 만남을 위해 우리가 서로에게 해야 할 행동과 말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운 기억이 없다. 그렇기에 또래들 간에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속설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일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사랑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닌가?

물론 태어나기 전부터 받은 부모님의 사랑이라든지 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고 받은 사랑, 형제 사이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동료 사이에서 주고 받은 우정 또한 사랑의 범주에 들어갈 테지만 그 누구도 입 밖에 끄집어 내어 구체적인 사랑의 정의라든지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해 준 이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인류는 요즘도 저리 방방 뛰고 있는 것일 테지만. 물론 요즘이야 안면식도 없는 전화 상담원들마저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외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랑이 우리가 바라는 사랑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발될수록 어째 나는 사랑에 굶주린 느낌이 든다. 그래서 대중가요도 사랑을 노래하고, 드라마도 사랑 타령이며, 연인들도, 친구들도, 가족들도 저마다 사랑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사랑학 강의라도 할 만한데 아직 그런 움직임은 없는 듯하다. 초등학교에서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중학교에서는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고등학교에서는 사랑을 나눠가는 법을 배운다면 세상은 분명 더욱 따뜻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의 저자는 ‘사랑 그까이거 뭐 별거 아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별 것이다.’라고 대거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랑병(Lovesick)’도 따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테라피스트로 살아가며서 자신에게 상담을 의뢰한 사라의 90% 이상은 사랑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으로 오는 사람이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뉴스에서 연일 나오는 살인사건도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고, 말다툼이 폭력으로 번지는 이유도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던가! 이 책의 글쓴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상사병’과 엄연히 다른 ‘사랑병’을 언급하며 그것에서 파생된 여러 병명을 파트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해 상처에 무뎌지고자 무감각을 처방한 사람들.

다시 사랑이 오지 않을까 불안해 하는 사람들.

사랑을 얻고자 했으나 오히려 사랑을 상실한 사람들.

바람둥이들처럼 이성에 대해 편력을 지닌 사람들.

사랑에 중독된 사람들.

금기시되는 사랑.

트라우마로 인해 사랑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

오해 속에서 어긋나는 사랑들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이별을 극복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짧은 글 속에는 참으로 많은 양상의 사랑이 등장한다. 글쓴이는 이성 간의 사랑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나 사랑의 속성상 이는 어떤 관계의 사람에게든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노희경씨는 ‘사랑하지 않은 자 모두 유죄’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한 죄인이란 사랑에 발을 담궜다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해 사랑에 거리를 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않는 자들이 얻는 것은 안일한 삶일 테지만, 도전하다 실패한 자들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자신감을 얻게 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일 듯 하다. 상처가 두려워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냥 그런 단조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지만 사랑하다 실패한 자들은 인생의 단맛과 쓴맛, 떫은 맛과 신맛 등 참으로 다채로운 세상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따진다면 결국 ‘사랑에 실패했다’라는 말은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랑에 실패란 없으니까 말이다. 마지막 장에 등장한 스님의 말처럼 그냥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무엇일까? 책은 여기서 막을 내렸는데 어디에도 분명한 답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의 글쓴이는 우리에게 화장실 갔다가 일을 덜 보고 온 듯한 찝찝함을 선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찜찜함이 남아 있는 한 저 화두는 우리에게 계속 같은 질문을 던져줄 것이다.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사.랑.은.계.속.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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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교양강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손자병법 교양강의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2
마쥔 지음, 임홍빈 옮김 / 돌베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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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8

「손자병법」을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없을까요?

당시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정치가 마키아벨리의 말 한 마디로 자네 물음에 답하겠네. 병법을 일상생활에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일상생활을 지옥에 끌어들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네.”

 
   


  책을 덮고 나니 이 문단 하나가 가슴에 와서 박혔습니다. 소용없는 책이어야 할 이 책을 거듭 읽고 배우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반복해서 읽는 고전이란 무엇이며 고전을 고전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어 그 가치가 인정되는 책이 바로 고전이 아닐까 혼자 묻고 혼자 답해보았습니다. 흔히 우리들이 고전이라 일컫는 책은 여러 분야에 존재합니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고전이고,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고전일 테지요. 이렇듯 아주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인데도 늘 새롭게 다가오며 또한 늘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 바로 고전의 요건인 듯 싶습니다. 그 중 이번에는 군사전략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손자병법’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실제 전쟁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전략에나 어울릴 법한 고대 중국의 병법서가 여태껏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더니 이 책을 읽고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무작정 앞뒤 가리지 말고 무기를 들고 엉겨붙는 것이 전쟁이라 믿었던 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게 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손자병법’은 너무나도 유명한 책입니다. 간혹 ‘그게 무어냐’며 묻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란 표현을 한 번쯤 못 들어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생활 깊숙히 침투한 병법서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마쥔’이 조목조목 풀이해 주는 병법의 구절과 그 속뜻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입 안에서 감탄사를 머금게 했습니다. 활이나 칼과 같은 무기에서 총이나 핵을 이용한 전쟁으로 그 양상이 바뀌긴 했으나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는 전쟁의 기본적인 생각이나, 어떠한 기만술을 쓰더라도 전쟁에서는 이겨야 한다는 냉혹한 진리는 변함없는 전쟁의 진리이니 말입니다.

‘손자병법’에서 최고의 군사경지에 오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知, 全, 先, 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복잡하긴 하지만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뜻 글자인 한자의 이점일 테지요? 여튼 여기서 고위 지휘관이 갖추어야 할 知를 설명하는 이러한 구절이 있더군요.

  p96

마음의 지혜는 시야를 결정하고 시야는 구체적 짜임새를 결정하며, 구체적 짜임새는 운명을 결정하고 운명은 미래를 결정한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하루의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저는 이 부분을 읽고 뜨끔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사는 거지 인생 뭐 있어?’라고 호기롭게 외친 제가 얼마나 無知했던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래서 지혜로운 자들은 인생에서 ‘우연’은 없다고 하는가 봅니다. 하나를 살피고 나를 살피면 남이 보이고, 세계가 보이며 그때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또한, 전쟁에 임할 때는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도 새롭게 새겨들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 책이 손자병법인 모양입니다.

  p149

즉, 사람은 어떤 뉴스를 접했을 때 아무래도 자기가 듣고 싶지 않은 일, 보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하는 쪽으로 기우니까요.

  여기에 이르러서는 손자병법은 병법서가 아닌 심리학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일들과 외면하고 싶은 부분까지 콕 집어 주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설파하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에 연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책 덕분에 ‘손자병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실제 사례를 통해 참으로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손자병법 교양강의’는 한문 독해력을 갖추고 있다면 ‘손자병법’의 원서를 직접 독파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입문서이자 해설서였습니다. 아마 원 저자의 능력과 옮긴이의 역량도 한몫을 한 셈이겠지요. 누군가가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더냐고 묻는다면 특정한 부분을 지목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만큼 전반적인 내용 모두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 손자병법을 좀더 몸으로 익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역자가 한 마디를 덧붙이더군요.  

p318

병법을 일상생활에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일상생활을 지옥에 끌어들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네. 

그렇군요. ‘손자병법’은 군사전략인데 이를 현실에 적용하겠다는 소리는 현실을 전쟁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군요. 진실과 정의로 손을 맞잡고 나아가야 할 우리가 기만과 술수로 이 상황을 모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제가 잠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따끔한 충고를 듣고서도 손자병법의 전술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아마도 이미 내 주위가 적자생존이라는 이름하에 戰場이 되어버린 때문은 아닌가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손무의 가르침을 십분 벤치마킹하여 전쟁같은 현실의 허와 실을 파악하여 우리가 원하는 따뜻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의 세상으로 적개심을 유인해 내서 격파해야 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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