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정리 글. 새해 연휴가 끝나기 전에 부랴부랴 올려본다. 올해 140권쯤 읽었다. 2020년 상반기에 좋았던 책은 따로 골랐기에, 7월 이후 하반기에 읽은 책들 중 좋았던 책을 골라봤다. 남들은 한 해 동안 좋은 책 고르는데, 나는 이렇게 상/하반기로 나누는 까닭은, 좋은 책 고르기 참 어려운 일이라서, 이런 꼼수를 쓴다는 ㅋ

소설


1. 레몽 크노, <문체 연습>
이 책을 소설에 올려야 할지, 비소설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소설에 넣기로. 대단한 책이다. 한 가지 사건을 99가지 문체로 변주한 그 아이디어와 재치, 기지에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느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떤 글에서는 박장대소, 어떤 글에서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또 글로 풀어냈을까 경탄했다. 전설이 되고도 남을 작품이랄까. 레몽 크노는 천재다. 게다가 이 책은 옮긴이에게도 박수를 쳐주고 싶어진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불어를 의역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보이는데 그렇게 의역을 하더라도 레몽 크노의 의도를 살려준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시간 때우기 용 읽을거리로 생각하는 독자가 아니라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2. 마거릿 애트우드, <증언들>
사실, <시녀이야기> 이후 또 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잘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그러나! 전작을 뛰어넘는 후속작이 여기 있다. 이 책을 집어드는 순간 이 기막힌 스토리에 누구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보지 않고서는 책을 덮을 수 없을 것이다. 놀랍도록 잘 짜인 이야기. 이혼이 범죄이고, 낙태도 범죄이며, 출산의 역할을 다하지 않은 여자의 몸은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소름끼치는 문제작.



3. 시어도어 드라이저, <시스터 캐리>
가진 것 없는 18살 아가씨 캐리가 고향을 떠나 도시인 시카고에 터전을 잡으면서 벌어지는 일들. 허영과 욕망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그리며 19세기 미국 사회의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600쪽을 이틀 만에 해치울 만큼 흥미진진한 작품. <시스터 캐리>가 처음 출간된 1900년 무렵, 이 작품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캐리가 정말 도덕적이지 않은 인물인지,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자 가차 없이 사람을(남자들을) 이용하는 팜므파탈이자, 타락의 여신으로 그려지는지 궁금증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캐리 인생이 예상 밖으로 흐르는 점이 신선하다.



4. 엔도 슈사쿠, <바보>
 이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어? 이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코웃음을 치다가도 바보 같은 이 남자, 인간의 나약함과 모자람에 한없는 연민의 마음을 품고 그 못난 인간을 끝까지 믿어보고자 애를 쓰는 이 바보 가스통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남들이 다 무시할 만큼 어리숙한 인간, 그럼에도 그 약함을 짊어지고 열심히 제 나름대로의 삶을 아름답게 꾸려가려는 가스통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다가 끝내 이 가스통의 모습이 신이 인간에게 품는 마음과 같다면, 신의 아들 예수가 인간을 향해 품은 마음과 같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한번쯤 조용히 믿어 봐도 괜찮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내 마음속에도 희미한 믿음 같은 게 싹트기도 한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의 힘은 늘 이처럼 조용조용 속삭이는데도 깊고 강렬하다.



5. 조이스 캐롤 오츠, <인형의 주인>
의외로 좀 조용히 묻힌 감이 있어서 안타까운 책. 일단 실린 단편들이 무지하게 재미나다. 스멀스멀 섬뜩한 공포 분위기 조성도 탁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그 어떤 유령이나 귀신, 환상이 빚어낸 공포보다도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바로 ‘인간‘임을, 나약한 인간 속에 깃든 비뚤어진 정신과 욕망임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총기 사고, 사이코패스, 인종차별, 가정해체 등등 현대 미국 사회의 끔찍한 초상이자 이 세계의 초상을 보여주는 수작.



6. 존 스타인벡, <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
존 스타인벡 소설 오랜만에 읽었는데, 역시, 그 마초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자연에서 성장하는 소년 조디의 이야기 <붉은 망아지>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한 남자를 그린 <불만의 겨울> 두 편이 실려 있다. <불만의 겨울> 읽는 내내 화자인 이선에게 삐딱한 감정이 드는데, 그의 위선과 이중적 태도를 그가 가장 우습게 봤던 딸이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게 통쾌하다. 첫 번째 작품 ‘붉은 망아지’가 조금 더 좋았다.



7. 글로리아 네일러,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책 읽었을 때 리뷰 써서 좀 알렸어야 했을 작품. 1960년대 미국 북부 도시의 빈민가 ‘브루스터플레이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다양한 이유로 이 낡은 아파트에 살게 된 일곱 명의 흑인 여성들 삶을 다루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20대에서 60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어머니와 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으로 다양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성차별, 인종차별 문제를 날카롭게 제시한다. 그중 차별 받는 이들 사이에서조차 소외되는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는 진짜 말도 못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 서늘한 시선이 돋보인다. 이 작가 책 더 읽고 싶은데 딱히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



8. 이언 매큐언, <스위트 투스>
1970년대 초 영국 보안정보국 MI5을 배경으로, 문학이 도구로 쓰였던, 부드러운 냉전 시대를 이야기한다.  단순한 첩보 스릴러 같지만, 결국에는 문학 창작에 관한, 그리고 회한 어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소설광이라고 부를 만한 세리나가 바로 그 문학에 대한 탐닉 때문에 보안요원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평생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세리나와 톰은 사랑에 빠지면서 서로 소소한 견해 차이는 있지만 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작가가 좋아, 저 작가가 더 좋아, 이 작품 읽어 봤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이 책 읽는 사람들은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절로 감탄하면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 걸?   



9. 옌렌커, <레닌의 키스>
인민공사라는 거스를 수 없는 국가 체제를 벗어나려는 어느 마을과 ‘레닌’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주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혁명과 자본을 동시에 비판한 한편의 희비극적 우화. 독특한 형식도 흥미롭고, 의외로(?) 700쪽이 넘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읽다 보면 아주 날카로운 비판에 통쾌함도 느껴진다. 중국 문학 딱히 안 좋아하는 나조차도 옌렌커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든 작품이랄까.



10.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진짜 색다른 스릴러. 스릴러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전혀 스릴러 같지 않다, 그런데 스릴러이긴 한 매우 독특한 작품. 전통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뛰어난 탐정이나 수사관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살해당한 이들의 공통점은 누가 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데다가 주인공 노년 여성은 점성학에 빠져서 무슨 말만 하면 별자리 운운, 점성학을 들이대며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낯선 전개 속에서 자연과 인간,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소외된 이들의 연대를 노래한다. 아주 재미있지는 않은데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비소설



1. 김지은, <김지은입니다-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내게는 비소설 부문 올해의 책이다. 알라딘 올해의 책으로 꼽히기도 했음. 거기에 나도 일조했다. 투표 기간 동안 매일 들어가서 오직 이 책에만 투표했다. 그만큼 이 책이 올해의 책에 선정되길 간절히 바랐다. 왜? 안희정, 박원순 같은 권력형 성범죄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런 이들을 맹목적으로(또는 자기 이익 때문에) 쉴드 쳐주는 인간들이 큰소리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왜 수많은 여성들이 여러 권 책을 사서 주변에 나눔을 했는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게 된다. 나 또한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싶다. 특히 진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민주당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에게 2차 가해 급급한 이들에게.



2. 데릭 젠슨, <문명과 혐오>,

자본과 성장을 기반으로 한 인류 문명 자체가 파괴와 착취, 혐오를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분석한다. 저자는 ‘가장 덜 세련된 사람들만이 혐오를 그대로’ 드러낼 뿐 대부분의 경우 ‘자기이익, 전통, 경제, 옛날 종교’와 자신의 혐오를 뒤섞어버린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어떤 형태의 혐오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지, 안 보이는 형태의 혐오는 얼마나 많은지 질문한다. 다양성은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라는 말, 하나의 대상에서 개개인이 개성과 인격을 갖춘 한 사람으로, 생산 도구가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지구에 혐오는 더 이상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인류 모두가 곰곰 생각해 봐야할 듯.



3. 미셸 투르니에, 에두아르 부바, <뒷모습>
50장이 넘는 이 빼어난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에두아르 부바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인간의 뒷모습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런 순간이나 피사체를 담고자 애써왔음을 절로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사진에 시(時)와 같은 글귀를 덧붙인 미셸 투르니에는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뒷모습을 예찬한다.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한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내게로 오는 것을 보고 난 뒤에 그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음을 얼마나 여러 번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다. (....) 뒤쪽은 진실이다.’ 이 책은 50 여개의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을 통해 바로 그 등 뒤의 진실을 탐색한다.



4.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끈이론>
‘끈이론’이라는 제목보다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라는 부제가 더 매력적이다. 테니스 좋아하고 테니스를 잘 했던 사람이 쓴 애정 넘치는 테니스 에세이. 특히 마지막에 실린 ‘살과 빛의 몸을 입은 페더러’는 작가 자신이 얼마나 테니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과 특징을 잘 알고 있는지, 또 그리고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페더러에 관한 에세이는 테니스 에세이 고전 중 고전에 속하지 않을까. 테니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을 책.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테니스 한번 배워볼까 싶어지게 만드는 책.



5. 마사 C.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사람들은 불확실한 삶 앞에서 쉽사리 두려움이란 감정에 잠식당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종종 타인(기득권 또는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 분노, 비난과 뒤섞인다. 마사 누스바움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철학자들의 사상과 현대 심리학자들의 언어를 빌려 두려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또 그 두려움이 어떻게 혐오와 분노라는 나쁜 감정으로 번져 가는지, 냉철하게 진단한다. 혐오의 원인을 두려움에서 찾는 시선이 신선하다. 두려움, 분노, 혐오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와 그 해결법으로 제시하는 사랑까지, 혐오 문제를 감정에 초점을 두고 철학적으로 접근, 설득력 있게 풀어나간다. 이해와 공감하기 쉬운 내용들. 마사 누스바움에 처음 다가가는 이들에게 알맞은 책.



6. 비 윌슨, <식사에 대한 생각>, 어크로스
음식의 양은 많아졌는데 전 세계 사람들은 비만, 당뇨, 심장병 같은 성인병으로 지구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이다. 저자는 잡식동물인 인간의 식사가 이토록 망가진 원인을 조목조목 파헤친다. 음식은 넘쳐나는데 정작 허기진 오늘날 식문화를 되돌아보면서 ‘자신만의 달콤하고 푸른 잔디’를 찾아내는 법까지 명민하게 제시한다. 그저 먹고 마시는 식문화를 돌아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풍요 속의 빈곤인 현대인의 삶도 돌아보게 되는 점이 신선하다.



7. <내 이름은 말랑/샤이엔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이 책들은 두 권을 하나로 묶어서 추천한다. 각각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이들의 이야기를 무겁고 어둡지 않게, 핵심 정보는 쏙쏙 들어오게 잘 담고 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는 성전환이나 성소수자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몰랐거나 오해한 부분을 수정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트랜스젠더 및 성소수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조금은 바꿀 수 있기를. 이 책을 보면 이 지구에 얼마나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이 존재하는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말랑, 샤이엔 이 두 권은 중고등학교마다 구비해 둬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8.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나쓰세 소세키 팬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이 책은 ‘청년 시절-영국 유학 시절-도쿄대 교수 시절-아사히 신문사 시절-만년’으로 세분화된다. 청년 시절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루고, 영국 유학 시절에는 아내나 장인 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자주 보인다. 친구나 문하생 및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한없이 다정하고 좋은 스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소세키가 문하생이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그 따스한 위로와 격려에 나도 모르게 힘을 얻는다. 인간 소세키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



9.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마니에르 드 부아르>
국내에서 드물게 볼 만한 신문이라고 생각해서 오랫동안 정기 구독했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올해부터 문화/인문/사회를 아우르는 계간지를 발간했다. ‘사유하는 방식’이란 뜻의 <마니에르 드 부아르>는 현대사회 주요 이슈부터 역사, 위대한 사상가들의 생애, 목소리, 작품들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생생한 사유의 장을 만날 수 있다. 첫 호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저자가 무려 에릭 홉스봄,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랑시에르 등등 난리도 아니다. 다가오는 1월에 나올 겨울호는 주제가 ‘문학’이라 더 기대된다.



10. 오드리 로드, <블랙 유니콘>
흑인이자 레즈비언이며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 로드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황량하고 거친 사막과 같은 흑인 여성의 삶이 진솔하게 그려지면서도 그저 그 고통을 울부짖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마주하고, 그 삶이 평화롭고 윤택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끊임없이 소망한다는 점에 있다. 폭력과 억압 아래 수없이 상처받고 한때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지만 그런 자신을 껴안고 보듬고 나아가 다른 이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음을 시로써 증명한 기록이 바로 <블랙 유니콘>이다. 이런 로드의 시는 ‘눈물을 떨어뜨릴 땅’조차 없던 여성들에게 한줄기 아름다운 위로이자 연대를 위한 뜨거운 외침으로 다가온다.




올해의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빅토리아 토카레마, <티끌 같은 나>
나는 이 한 권으로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열렬한 팬이 되었으며 러시아 문학을 더더더 사랑하게 되었다. 러시아 문학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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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0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는데 사둔 책은 몇 권 있어서 격려가 됩니다(????) 올해도 좋은 독서로 이끌어주세요! 노안을 비비며 따라가 볼랍니다.

잠자냥 2021-01-02 10:35   좋아요 1 | URL
하하하, 사둔 책에 있다니 기분이 좋네요. 읽어보시고 평도 남겨주세요. 2020년 막판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읽느라 참 고생하셨어요. ㅎㅎㅎㅎ 마거릿 미첼... 으이그, 으이그, 이 여자여.

페넬로페 2021-01-02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파워블로거님들이 올리시는
여러가지 좋은 책들이 많지만~~
아무리 좋다하셔도
그것이 제 취향이 아니면 절대 손이 안가거든요 ㅎㅎ
잠자냥님께서 올려주신 위의 책들은
다 읽고싶어요~~
왠지 제가 읽고 감동받을 수 있을것 같아요^^
그리고 항상 제가 덧붙이는 말을 해야하네요^^
언젠가는 꼭 읽겠습니다**

잠자냥 2021-01-02 11:06   좋아요 2 | URL
아니, 새해부터 이렇게 기분 좋은 말씀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ㅎㅎㅎ
제가 소개한 책들을 다 읽고 싶어진다는 말만큼 듣기 좋은 칭찬도 없을 거예요. 흐흣.
페넬로페 님이 읽고 싶다고 찜하신 책들 언젠가 꼭 읽어보세요~

coolcat329 2021-01-0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지만 정말 다 읽고 싶어지네요. 소설 7번은 저도 갖고 있는데 이 마저도 기쁩니다.
잠자냥님~~글 감사합니다 🙂

잠자냥 2021-01-02 11:59   좋아요 1 | URL
ㅎㅎ 7번 갖고 계세요?! 그것부터 읽어보세요. 일단 재미있어서 금방 읽으실 거예요. 물론 좀 심적으로 힘겨운 부분도 있지만요.
항상 저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앤드 2021-01-02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책은 이렇게 정리하는거 자체가 저한테는 대단해보이세요.
몇몇권에 눈이 가서 올해 읽을책 목록에 포함시켰습니다.

잠자냥 2021-01-02 12:20   좋아요 1 | URL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머리에서 내용도 쉽게 날아가는데, 이렇게 정리해 놓으면 저 스스로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더라고요. 리뷰 쓴 책은 더 그렇고요.
앤드 님 독서 리스트에 제가 추천한 책이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다락방 2021-01-02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 장바구니나 보관함을 보면서 그리고 책장의 책들을 보면서 가끔 ‘이거 왜 샀지?‘, ‘이거 왜 여기 담겨있지?‘ 의문을 갖곤 했는데, 잠자냥 님의 이 페이퍼를 보니 아... 한꺼번에 이해되고 있네요. 잠자냥 님 글들 때문이었어요. ㅎㅎ

저는 잠자냥 님의 이 페이퍼랑 몇 권 겹치네요. 히히. 겹치는 거 쫌 씐나요. 티끌같은 나, 문명과 혐오, 김지은입니다 겹쳐요. 물론 아직 안읽었지만 제가 이미 사둔 책도 여기에 몇 권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년에도 열심히 읽고 써주세요. 내년 연말에는 잠자냥 님의 결산 페이퍼를 읽고 어머, 다 제가 읽은 책들이네요?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하.
해피 뉴 이어!!

잠자냥 2021-01-02 15: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다락방 님을 제가 좀 낚은 겁니까? 부디 그 낚인 책들이 다락방 님 눈과 마음에도 쏙 드는 그런 책이 되길 바랍니다~

다락방 님도 내년에도 열심히 읽고 또 써주세요~ 락방 님도 해피 뉴 이어!

Falstaff 2021-01-02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로리아 네일러는 심지어 죽었어요. ㅠㅠ
끈이론....하면 팬티 잡아떼는... 2021년 파리오픈은 꼭 옐레나 오스타펜코가 우승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확률은 거의 제로)
공 칠 때 내뱉는 신기한 기합소리가 넘 예뻐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1-02 16:1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안타깝습니다.
나달 팬티 끄집어내는 솜씨는 명불허전이죠. ㅋㅋㅋㅋ 오스타펜코는 2917년에 우승할 때만 하더라도 그랜드슬램은 그냥 다 씹어먹을 거 같더니 그 뒤로 걍 그렇네요. ㅎㅎ

난티나무 2021-01-02 16: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 네 권, 사둔 책 두 권 있네요!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저도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너무 슬퍼서 ㅠㅠ 아직도 떠올리면 가슴아파 합니다. 책 읽고 다른 책 찾아본 것도 같아요. 없더라고요.ㅠㅠ

잠자냥 2021-01-02 17:02   좋아요 1 | URL
<브루스터플레이싀 여자들>은 담담하게 재미나게 읽다가 갑자기 가슴이 아려오는... 흑. 그 장면은 정말이지 너무 멍했습니다. 휴..... 이 작가 책이 더 없다는 게 또 가슴 아프고요.

han22598 2021-01-0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감가는 책들이 많네요 ^^ 2021년에 차근차근 한번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뷰 감사해요. 최근에 테니스 배우면서 한참 재미를 느끼고 있는데 연결지어 알기된 “끈이론” 책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ㅎㅎ

잠자냥 2021-01-03 20:10   좋아요 0 | URL
테니스 배우고 계시면 <끈이론>은 더 재미나게 공감해서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오 헨리 - 휘멘의 지침서 외 55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8
오 헨리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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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이 양반 반전을 너무 좋아해서 거의 모든 작품마다 반전을 넣는데, 좀 읽다 보면 너무 식상해진다. 아, 이런 반전이 있겠구나 예측까지 할 수 있어짐. 번역문장 별로라는 평에 동감. 다른 책은 그렇게 번역하신 분이 아닌데, 의외였다. 심지어 원문과 대조했을 때 숫자 틀린 부분도 종종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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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2020-12-3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채에서 출간한 김욱동 교수님 번역본을 읽었는데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0-12-31 12:33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이 책 번역하신 분이 옮긴 E.M.포스터 작품들은 정말 좋았는데, 이 책에서는 의외였어요. 다른 분이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는. ㅎㅎ

Falstaff 2020-12-31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펭귄판 오 헨리 단편집 읽었는데요, 놀랍게도, 오 헨리 좀 읽은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을, 진짜로 읽은 건 하나도 없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집 한 권으로 오 헨리 졸업장 받은 걸로 결정했습니다. 21세기 독자들은 이미 까질만큼 까져서 작가가 꼬불쳐 둔 트랩과 지뢰가 눈에 훤히 보여서요. ㅋㅋㅋㅋ
전, 이 책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고정아 > 김욱동에 한 표 던집니다. 이유는 묻지 마세요. ㅎㅎㅎㅎ
이런 글 좋아요. 관심 있었지만 앞으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평 또는 리뷰.

잠자냥 2020-12-31 12:59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이 현대문학판 한 권으로 오 헨리는 더 읽지 않으려고요. 오 헨리가 미국 문학사에서 저평가 받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저는, 이 책 읽다 보니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하하;;

저도 개인적으로는 고정아>>>> 김욱동입니다만, 이 책 번역은 정말 의외였어요. 다른 분이 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2-31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골라주신 책들 눈팅만으로도 너무나 배부르고 즐거운 한 해였어요. 내년에는 재미있는 책이야기 더 많이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많이많이 받으세요!! 남으시면 저도 좀 나누어 주시구요!!

잠자냥 2020-12-31 23:55   좋아요 0 | URL
네~ 단발머리 님~ 새해에도 재미난 책 이야기 많이 나눠요~ 복 많이 받으세요! 제 복 남으면 보내드릴게요~~ ㅎ

coolcat329 2020-12-3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갖고 있는데...오히려 큰 기대 안하고 읽으면 좋을 수도 있겠어요.^^

잠자냥 2020-12-31 23:56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기대 안 하면 더 좋을 책! 쿨캣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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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많이 했나. 처음부터 지루했는데 중반 넘어가면 재밌다고 해서 계속 읽었는데 끝까지 지루했다. 여기저기서 본 이야기들의 잡탕. 그 대사들은 다 어쩔.... 대사가 너무 확 깬다. 어떤 영화도 생각나고(영화 제목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 밝히지는 않겠음). 암튼 꾸역꾸역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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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30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이거 너무 좋았는데요 흑흑 울면서 읽었다능 흑흑 ㅠㅠ

잠자냥 2020-12-30 08:28   좋아요 0 | URL
ㅎㅎ 다락방 님하고 유부만두 님 평 보고 읽기 시작했다는! 취향 차이겠지요. 전 문목하보다는 김초엽쪽이요. ㅎ

유부만두 2020-12-30 08:50   좋아요 0 | URL
전 옴머머 하면서 읽었고요. ^^

잠자냥 2020-12-30 09:42   좋아요 0 | URL
아마 두 분 극찬이 아니었다면 안 읽었을 책 ㅎㅎ 암튼 덕분에 이 책 인기의 비결(?)이랄까 궁금증은 풀었습니다. 그저 저랑 맞지 않는 책이겠지요.

2020-12-30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년에 좋았던 책을 정리하기에 앞서 실망스러웠던 책을 먼저 꼽아 보았다. 그렇다고 여기 언급된 책이 정말 형편없느냐고 묻는다면 100%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책일 수도 있을, 지극히 개인적인 평.


페르난도 데 로하스, <라셀레스티나>
출근길에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아침부터 짜증 폭발해서 중간에 읽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작품. 기괴한 표지도 그렇고 ‘스페인 최고(最古) 소설’ ‘만일 스페인에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대신 그 영광을 누렸을 작품’이라는 문구에도 혹했는데, 나와는 영 궁합이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뚜쟁이 이야기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문학 작품에서 좋게 말해서 사랑의 메신저, 나쁘게 말해서 뚜쟁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간교한 술수나 온갖 중상모략을 써서 원치 않는 상대와 다리를 놓아주는 오지랖 역할을 많이 한다. 나는 현실에서나 문학에서도 그런 사람들 좀 많이 싫어한다. 남의 일, 다른 사람 연애사에 참견 말라는 주의랄까. 그런데 이 작품은 뚜쟁이 ‘셀레스티나’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뭐 그렇다고 이 작품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할멈의 활약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 할멈은 남자들이 콕 정해주는 상대를 찾아가 온갖 말로 여자를 구슬려서 그 남자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대가로 당연히 돈을 받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처녀성을 잃어버린’ 여자들에게는 또 처녀막 재생수술을 해주면서 돈을 번다는 점이다. 이 노파로 인해 ‘처녀성을 잃었거나 다시 얻은 여자가 무려 5천 명 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설정부터 짜증이 솟구친다. 물론 이 작품 배경은 15세기, 아주 먼 옛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21세기에 처녀성 상실이니, 처녀막 재생수술이니 이런 글을 읽고 있자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게다가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 명문가의 미남자 칼리스토’는 사냥 중에 우연히 ‘멜리베아’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데, 이게 과연 사랑이냐? 내내 의문이 든다. 칼리스토가 찬양하는 멜리베아의 덕성이란 온통 외모뿐이다. 칼리스토가 멜리베아를 칭송하는 표현을 보라. “초록색 눈동자의 큰 눈에 긴 속눈썹, 가느다랗고 올라간 눈썹, 중간 크기의 콧매, 작은 입, 희고 가지런한 이와 빨갛고 탐스러운 입술, 둥글기보다 약간 갸름한 얼굴, 봉긋한 가슴, 둥글고 자그마한 젖꼭지들, 누가 그 황홀한 모습을 그대로 너에게 전할 수 있겠느냐. 이것들을 보는 남자는 모두 정신을 놓고 말 거다. 살결이 어찌나 매끄럽고 빛나는지 흰 눈을 어둡게 만든다니까.” 등등 난리도 아니다. 둥글고 자그마한 젖꼭지들이라니. 이게 칭송이냐? 이렇게 칼리스토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이 외모만 보고 반해서는 그녀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래놓고는 자기 사랑이 대단하다는 듯이 멜리베아를 찾아가 고백하는데, 멜리베아는 소름 끼친다는 듯이 단호하게 거절한다(이 설정도 나중에 가면 정말 기막히게 바뀐다). 그리하여 결국 뚜쟁이 셀레스티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칼리스토. 뚜 노파는 온갖 말로 멜리베아를 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토록 고집스레 거부하던 멜리베아는 사실 칼리스토를 너무나 깊이 흠모하고 있었고, 자기 정절을 잃을까봐(아이고야.......) 그렇게 거부하는 척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진심으로 이 책을 던지고 싶었으나 내 전자책이라 참았다.

<라셀레스티나>는 21세기에는 사장되어 마땅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한다는 게 고작 외모와 몸매, 거기에 준한 것뿐이다. 처녀성에 정절에 처녀막에 아주 난리도 아니다. 더욱이 멜리베아의 갑작스러운 고백은 공감도 가지 않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여자가 거부하는 것은 사실 튕기는 것이라거나, 좋아하면서 괜히 그러다는 등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칼리스토 입장에서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의 폭력적인 신화까지 재생산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끝은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래도 읽을 분을 위해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에 공감이 간다면 그래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아닌 오직 육체적 욕망만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시대에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의 욕망에 충실하겠다는 설정이려니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런 욕망을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이라고 주장하니 21세기 독자가 읽기에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구나.


레오 페루츠, <9시에서 9시 사이>
얼마 전 레오 페루츠의 <스웨덴 기사>를 읽었다. 레오 페루츠 작품은 <9시에서 9시 사이>로 처음 만났다. 이 작품은 좀 짜증났는데, 그래도 이 작가는 작품이 출간되는 족족 읽을 것 같기는 하다. 뭐랄까, 그의 작품은 읽을 만한 가치는 있는데, 어떤 미묘한 지점에서 나랑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일단 레오 페루츠 작품은 잘 읽힌다.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재미는 있다. <9시에서 9시 사이>도 그렇다. 한쪽 팔을 망토 속에 감춘 채 이리저리 전전하는 가난한 대학생 뎀바가 주인공인데, 왜 그가 한쪽 팔을 감추고 다니는지, 궁금증에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 친구와 뎀바의 관계에 있다. 뎀바는 여자 친구가 갑자기 이별을 선언하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가난이 실연의 이유라고 생각하고는 여자 친구를 데리고 멀리 여행을 떠날 생각에 돈을 구하러 돌아다닌다. 그깟 여행으로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러고는 전 여자 친구의 직장에 쫓아가서 행패를 부리며 으름장을 놓질 않나, 그렇게 싫다는데도 여행 가자고 반 협박을 하지를 않나, 지 제멋대로 돈을 구하러 다니질 않나 등등 헤어진 여자 친구한테 하는 짓이 스토커나 다름없어서 지켜보노라면 불쾌해진다. 주인공을 응원할 마음도 들지 않고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연민은커녕 공감하기도 어려워 몰입이 떨어졌다. 뎀바의 여자 친구를 묘사하는 시선도 매우 낡았다. 돈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생각 없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대상일 뿐.

레지나 오멜버니, <광기와 치유의 책>
꽤 기대했던 책인데, 용두사미의 전형인 작품. 여자가 의술을 알면 마녀 취급받던 시대, 의사로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소개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아, 이 여성이 그토록 어려운 시대에 의술을 펼치면서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가 보다 예상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정작 책을 펼치니 주인공은 ‘아버지 찾아 삼만리’를 할 뿐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여성이 홀로 의사로 활동할 수 없었기에 의사인 아버지를 찾아와야만 다시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지만 환자와 여의사의 이야기를 기대한 내게는 좀 당황스런 전개였다. 무엇보다 결말이 정말 못마땅하다. 독립적인 여의사의 활약기를 꿈꾸며 책을 펼쳐든 사람에게 완전히 엿 먹이는 결말이랄까. 아버지 찾아 나섰던 여자가 고작 남편감 찾아 돌아오는 이야기라니 진짜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분노가 책장을 태울 기세로 활활 몰아친다. 이 작품은 나를 치유하는커녕 광기로 몰아갔다.



존 윌리엄스, <오직 밤뿐인>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의 초기작은 어땠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하, 읽지 말 것을, 괜히 존 윌리엄스에 대한 편견만 생겼다. 이 작품은 대도시 호텔에 머물면서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는 예민하고도 무기력한 청년 아서 맥슬리의 하루를 쫓는다. 근데 이 청년 정말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기 혼자 세상의 모든 고민과 고통은 짊어진 것처럼 우울하고 예민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죽지는 않아).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짜증이 솟을 때쯤 그 이유가 밝혀지기는 하는데, 그 이유도 사실 공감이 안 가고, 그저 중2병 걸린 청년 이야기로 느껴져서 한숨만 나온다. 그러다가 결국 막판에는 이 중2병 청년은 아무 이유도, 잘못도 없는 여자에게 폭력까지 행사한다. 이런 작품을 과연 읽을 필요가 있을까.  





김은국, <순교자>
기대 많이 했던 책이다. <순교자>라는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제목 때문에 번번이 읽기를 미루다가 올해 드디어 읽었는데, 휴... 그냥 계속 미룰 걸 그랬다. 죽을 때까지 미룰 걸 그랬다. 이 작품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이념의 대립이 만들어낸 열두 명의 ‘순교자’를 둘러싼 진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파헤친다. 북한 공산당에 체포된 14인의 목사 가운데 12인이 전쟁이 일어난 당일 처형되고 두 사람만 살아남는다. 이 살아남은 목사를 사람들은 배신자라 욕하는데, 실은 죽은 12인의 목사가 도리어 공산주의자들의 고문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처신했던 것. 그런데 살아남은 두 목사 중 신 목사는 자신이 신을 배반한 죄인인 것을 참회하면서 12인의 목사를 순교자로 찬양하는 데 앞장선다. 미스터리 설정이라 초반에는 읽을 만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목사들뿐만 아니라 악역을 자처하는 인물도 하나같이 너무 전형적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기독교 홍보 소설 같다는 것. 엔도 슈사쿠 작품은 아무리 읽어도 종교를 홍보하는 소설로 느껴지지 않는데, 이 작품은 왜 그랬을까. 기독교 믿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듯.



하루키, <일인칭단수>
하루키 책은 가끔 읽고 싶어진다. 오랜만에 하루키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에세이인지, 그 옛날 단편 재탕인지. 여전히 동그란 젖가슴에 집착하는 주인공. 하루키는 이제 일흔이 넘었을 텐데, 작품은 여전히 20대 초중반 그즈음에 머물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청춘의 증거라고 좋게 읽힐 수도 있겠으나, 내겐 거기서 성장을 멈춘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하루키 소설과는 정말 안녕을 고하게 만든 책.








아무튼 이렇게 정리한 걸 보니 나는 주로 형편없는 여성관을 갖고 있거나, 공감이나 몰입하기 어려운 캐릭터, 전형적인 이야기에 실망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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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뚜쟁이 특유의 오지랖이 너무 싫어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도 싫어해요. 그 책 읽으면서 얼마나 짜증났던지 ㅎㅎ

그런데 이 페이퍼에서는 무엇보다 ‘존 윌리엄스‘의 책을 읽지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게 되네요. 온갖 세상 고민 끌어안은 남자 젊은이 보기 싫어서 그만... 저는 그런 남자, 유약한 남자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제일... 으으...... 그런 남자들은 민폐쟁이라는 편견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으...

잠자냥 2020-12-29 14:10   좋아요 0 | URL
세상에 뚜쟁이 때문에 이뤄지는 사랑이 사랑입니까? -_-;;암튼 뚜쟁이 문학 싫어요; ㅋㅋㅋ

<오직 밤뿐인>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짜증 치미는... 휴, 암튼 다른 분들은 몰라도 다락방 님은 여기 제가 올린 책 중에 읽고 좋아하실 책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다락방 2020-12-29 14:21   좋아요 0 | URL
어..저기..그러니까.... 저는 그렇지만 남동생과 올케를 제가 소개해주었습니다. (둘다 싱글이라 해줬지만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난답니다? ㅎㅎ)

그럼 이만.
=3=3=3=3=3=3=3=3=3=3=3=3=3=3=3=3=3=3=3

잠자냥 2020-12-29 14:22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 예외도 있겠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1-01 0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진 책 정리하기!!! 이런 시도 아주
좋습네다.

<라 셀레스티나>는 어느 다른 책(당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에서 보고서는
부러 구해다가 읽어 보아야 하나 할 정도
였었는데... 안 읽길 잘했네요 참말로.

존 윌리엄스의 케이스는 설터의 경우처럼
작가의 모든 책들이 좋지 않더라는 -

<순교자>는 리뷰 대회 참전을 위해 다시
읽었었는데 쫌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에
만났을 적에는 대단한 소설이다라고 생각
했었답니다. 그것도 이미 십 수년 전에...
그런데 올해 다시 만난 <순교자>는 순한
맛이 들더라구요.
충격으로 리뷰도 쓰질 못했네요 세상에나...

그나저나
엔도 슈사쿠의 서사는 넘사벽이었습니다.

잠자냥 2020-12-29 15:09   좋아요 0 | URL
푸하하, 충격으로 리뷰 쓰지 못하셨다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12-29 15:10   좋아요 0 | URL
참, 그리고 <라 셀레스티나>는 희곡이라서 대사가 정말 길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0-12-29 15:47   좋아요 0 | URL
ㅋㅋ 충격으로 리뷰를 못 쓰셨다니🤣🤣

유부만두 2020-12-3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사놓은 거 저기 있는데....

잠자냥 2020-12-30 09: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자꾸만 하루키 읽을 의지를 꺾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ㅎㅎㅎ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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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거닐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글이 쓰고 싶어지는 책. 다만 진 리스, 울프, 상드 등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그리면서 정작 지은이 자신은 가기 싫었으면서도, 파리를 떠나기 싫었으면서도 남자친구 따라서 도쿄로 가고, 거기서 불만 가득한 글을 쓴 건 진짜 어처구니 없다. 확 깬달까. 그 장은 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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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12-2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자의 태도나 (딱 유럽 동경하는 미국 여자 - 아, 그런 여자 캐릭터로 넷플릭스에서 코메디 나온 거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엇어요) 인종 문화 차별적 일본 체류 이야기는 너무 싫었어요. 책에 소개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 읽은 것에 만족했어요.
책 다시 생각하니까 거닐고 싶어요. 마스크를 쓰더라도 카페에 앉아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싶고요. 그게 파리라면, 뉴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잠자냥 2020-12-27 18:50   좋아요 0 | URL
도쿄 이야기는 진짜 뭥미 싶더라고요. 여성 예술가 이야기는 재미난 부분 많았습니다. 진 리스 이야기도 모르는 부분 더 알게됐고요. 진짜 마스크 없이 카페에 앉아 있고 싶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