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달라는 말을 잘 못했을 때, 나만 외로운 줄 알았다. 하지만 부탁하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었는지.
건강해진 나는 주변에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반드시온 마음을 다해 고마움을 표현한다. "엄마 없으면 어쩔 뻔했어!" "어머님 덕분에 푹 쉬었어요." "자기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런 말들은 마음을 더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 때보다 더 사람답게 사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도 병에 의지하지 않고 도와 달라는 말을 하고싶다. 그렇게 주저 없이 손을 내밀고, 나 역시 누군가 내민손을 잡아주고 싶다. 서로의 곁을 내주는 건강한 거래를오래도록 계속해 나가고 싶다. - P65

몸이 아프고 마음이 힘들면 좋은 말도 곱게 듣지 못하게 된다. 장미꽃을 받아도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과 같다.
꽃을 보는 대신 가시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로를 하고 싶을 땐 차라리 ‘점이라도 찍을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주면 어떨까? 당신이 건넨 장미 향기를맡으며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만. - P79

하지만 나를 대하는 근심 어린 얼굴들을 보고 깨달았다. 상대방이 걱정될수록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게 먼저라는 걸. 갯벌에 숨은 조개를 찾듯 마음속에서 진심을 캐낼 필요는 없다.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대로 둔다. 우선은 그 사람이 보여 주고 싶은 만큼만 믿어 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큼만들어 주면 된다.
이제는 걱정된다는 이유로 내 멋대로 상대의 마음을 가로지르지 않으려 한다. 머리로 하는 걱정보다 행동하는 배려가 중요하다는 걸 기억하면서. - P86

누구에게나 보살핌은 필요하다. 특히 몸과 마음이 약해졌을때 보살핌은 더욱 간절해진다. 이때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보살피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마음이 뭘 원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그걸 먼저 알아줘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에게 짜증을 걷어내고 제대로 원하는 걸 말할 수있다.
마음이 한껏 비뚤어질 때, 나에게 물어 본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 P96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남은 친구들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명한 원칙이 생겼다. 모든 관계에서 나를 최우선에 둔다는 것이다. 밖으로 안테나를 세우는 대신 예민하게 내 감정을 살핀다. 이기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서로가 편안해지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행복해야만 타인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세 번 양치질하듯 규칙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내 안에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로는 누구를 만나도 즐거울 수 없으니까. - P114

‘나를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 여러 사람을 좋아하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몇몇을 끔찍이 사랑할 수 있다고. 나를 가장 사랑해야만 다른 사람에게 온기를 나눠 줄 수 있는 거라고. - P115

타인의 불행의 무게에 따라 내 행복이 결정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시소에서 내려오는 중이다. - P123

스스로 ‘늙은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노년의 삶을 거저 얻은 보너스쯤으로 여기지 않기에 누구보다 젊다.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젊은이‘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P143

"남한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애쓸 필요 없어요. 내가 그런거면 그런 거예요.누가 그걸 옳다,그르다 할 수 없어요.내가 나를 좀 더 인정해 주면 어떨까요?" - P152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내 삶의 다른 중요한 것들을 꾸깃꾸깃 접어 버리고 싶지도 않다. 대신
크고 작은 일에 도전하면서 결과가 어떻든 도전한 나를
응원하면서 살고 싶다. - P189

목적지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자 즐거워졌다. 어디에 도착하려고 애쓰지 않았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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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 나의 육아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꿀짱아에게 함께 사는 할머니가 없다는 것, 그것이 의
미하는 거대한 빈 구멍을 내가 인식한 날이었다. 아이
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
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존재들이 함
께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살지 않는다. 내 딸에게 꼭 필
요한 어떤 것이 없다면, 내가 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는 꿀짱아의 엄마지만, 절반은 할머니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 P162

지금은 할머니의 그 허술한 ‘장혀‘가 바로 ‘과정을
칭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부모님이 보기엔 겨우 빈둥거리고 신경질
부리면서 하루를 보냈을 뿐이지만 할머니가 보기엔 해
야 할 많은 일들과 뜻대로 되지 않는 나 자신 사이에서
부대끼며 보낸 힘든 시간이었다. 나 자신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울퉁불퉁한 시간을 보낸 뒤에 할머니가 ‘장하
다‘고 하시면 까칠했던 마음의 결이 나도모르게 부드
럽게 가라앉았다. - P164

할머니의 ‘장하다‘는 어른이 되어가는 사춘기 청소년기의 부대낌
이나 입시 같은 특정한 일들을 넘어서 살아간다는 것의
고달픔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나 보다. 할머니가 특별
히 눈이 밝아서 나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낱낱이 목격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긴 인생을 먼저 살아가신
현명한 한 어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통째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니 내 눈앞의 너 또한 힘든 순간이 있
었을 것을 미루어 아셨을 것이고 각자의 길 앞에 놓인
장애물을 건너뛰기 위해 발버둥친 너의 보이지 않는 노
력들이 장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 P165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
겠지만 그중 가장 차원 높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편안
함‘이라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여
러 가지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것. 부담 없는 편안함.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 좋은 것, 훌륭하고 귀한 것
을 해주는 것이 물질적 응원이라면 부담 없는 편안함은
아이가 받은 것들을 가지고 마음껏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내면적 지원이다. 친구는 대학원 진
학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업을 눈앞에 두었을 때 아버지
에게서 "거 뭐 될 필요없다"라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용기를 얻었다. 많은 부모가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아이의 성공과 성취를 빌겠지만, 아이의
마음이 편안해져서 제기량을 마음껀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신의 한 수를 둘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진짜 좋
은 부모‘들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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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머니의 다섯 단어를 새로이 명심하고 꿀짱아
에게 할머니처럼 말하기를 실천한 뒤로 우리 관계는 천
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올
리고 까칠했던 아이가 할머니의 말씀들 앞에서는 조용
하게 가시를 내렸다. 나는 꿀짱아에게 그래, 안 돼, 됐
어, 몰라, 어떡해, 다섯개중 하나를 골라 내밀었고 언
제나 그 마법 같은 효과에 내심 놀랐다.
꿀짱아의 사춘기는 이후로도 길었지만, 할머니의 다
섯 단어는 단 한 번도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다. - P117

"혹시 나 데려다주실 수 있어요?"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 행사에 늦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해야 최소한의 일관성을 지키는 일이겠지만, 나
는 또 "알아서 한다며! 네가 다 알아서 한다며!!"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
열쇠를 챙겨 들고 번개보다 빨리달리기 시작했다. 이
게 사춘기 아이의 엄마다. 우리는 서로 앞뒤가 전혀 맞
지 않는 말과 행동을 주고받으며 서로 이해하지 못해
미쳐 돌아가는 환상의 짝꿍들이다. - P134

그에게 지금웃을 수 있는 일이라곤 휴대폰 게임밖에 없지만, 천천히 회복되면 다른 기쁨들을 찾아내려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사이 몇 년이 흐를 수도 있다.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길고, 다른 기회를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일이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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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한 말, 사람 이름, 전화기를 어디에 두었는지, 어마어마하게 큰 다리를 건넜는지 안 건넜는지 등이 생각나지 않는 첫 번째이유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나지 않는다.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기억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 P42

신체기능을 요구하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더 많은 신경세포가 연결되고, 뇌의 더 많은 부분이 해당 근육기억에 할당된다는 이야기다.
무엇이든 반복하면 뇌는 달라지고, 뇌가 달라지면 몸을 움직이는 방식도 달라진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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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산꼭대기중에 꼭대기 사는 나에게 동생이 생겼다.
동생이란 다 귀찮은 존재인지 알았는데 내동생은 제법 귀여워서 돌도 되지않았을때부터 나는 동생을 업고 다니는 아이가 되었다.


1978년
영주의 생일이 내일이다.
엄마는 장을 봤지만 뭐든 트집잡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또 난리를 치셨고 아버지까지 보태서 생일전날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래도 할머니와 아빠 몰래 엄마는 잰 솜씨로 떡과, 나물을 동네사람들에게 돌렸다.


1979년
나는 글을 잘읽지못한다.
학년이 바뀔때마다 선생님들이 내가 글을 쓰고읽지못하는 것에 대해 엄마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지만
집에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3학년담임 박영은선생님은 달랐다.
방과후 나와함께 국어공부와 함께 비밀도 나누고, 떡볶이도 나눠먹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기 며칠전 나는 선생님이 써주신 편지를 가족들앞에서 읽는데 성공했다.
식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고 나또한 선생님의 무한한 믿음과 애정에 눈물이 왈칵 났다.


1980년
나는 4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괴팍하기 그지없는 분이였다.
주리삼촌이 왔다가서 그나마 더이상 내게 관심을 안가져주는게 감사할 따름이다.

80년대.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1981년
찬바람을 이기는 강인함과 작은 돌팔매질에도 무너지던
내 여리디여린 어린시절이여 안녕.
이제 다시 돌아오지못하겠지만 섭섭해 하지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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