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막바지에 읽은 앨리스 워커의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은 심정적으로 무척 힘든 작품이다. 읽는 동안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인간에 대한 환멸, 세상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고 나서도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과연 사랑이 가능한가. 아니, ‘Man’이라 이름 붙이고 스스로 인간이라 칭하는 그들- 그러니까 남자들에게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의 능력이 가능한가. 여자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순간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마는, 그리고 제 자식들마저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여자에게 과연 사랑이란, 로맨스란 무엇인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출산보다도 훨씬 더 여성 억압의 주축”(<성의 변증법>, 183쪽)이라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말도 떠오른다. 그럼에도 세계는 이성애 로맨스를 만병통치약인 듯 권한다.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오, 로맨스 천국이여. 넘쳐나는 짝짓기 프로그램을 보라. 그런데 정말 로맨스는 지상 최고의 것인가?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로맨스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에서 그려지는 사랑만큼은 만병의 근원이다.
때는 1920년대 미국 남부 조지아주- 노예제는 이미 60여 년 전에 폐지되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전히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흑인 소작농 그레인지 코플랜드는 백인들의 목화밭을 일구며 나날을 노예나 마찬가지로 살아간다. 자신의 삶이 이토록 구질구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저 모든 백인들 때문이라고 백인을 향한 증오와 자괴감에 빠져 아내와 아들을 방치하다시피 한 그는 새로운 삶을 꿈꾸며 북부로 떠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이 ‘그레인지 코플랜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흑인 남자보다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브라운필드’로, 그레인지의 하나뿐인 아들이다.
브라운필드의 어린 시절은 어찌 보면 가엾다고도 할 수 있다. 무력감에 젖은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방치하다시피 하며 정서적으로 학대했고, 그레인지 부부는 가정의 불화를 서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소한다. 그레인지는 그레인지 대로 다른 여자들을 품고 다니고, 아내 또한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다른 남자의 품에서 또 다른 남자의 품으로 옮겨 다닌다. 그러다 사생아까지 낳았으니, 어린 나이에 이 동생까지 챙겨야 했던 브라운필드의 삶도 가련하기는 하다. 그런데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서 엄마는 이 사생아와 목숨을 끊어버리고, 아버지는 북부로 떠난다. 이제 그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다. 엄마와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백인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까지 지닌 브라운필드- 그래도 외모는 괜찮았는지 자신이 점찍는 여자의 마음은 손쉽게 얻는다.
그런데 이 증오덩어리가 하필이면 ‘멤’이라는 흑인 소녀를 마음에 두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니 멤이 이 증오덩어리에게 마음을 주면서 자신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아버지 그레인지와 살을 섞고 살던 여자 ‘조쉬’와 또 살을 섞으며 살고 있던 브라운필드는 조쉬의 조카인 ‘멤’을 보고 그녀를 열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낭만적인 로맨스를 그리는 작품들에서는 브라운필드의 이 열망을 ‘첫눈에 반했’다든가 ‘영혼의 동반자를 만났다’든가 뭐 그런 개똥같은 미사여구로 포장할 것이다.
그러나 글쎄. 브라운필드가 멤을 알게 될 무렵 그녀는 학교를 다니고 있다. 글을 알고 쓸 수 있으며, 조쉬를 비롯해 조쉬의 딸 등 브라운필드가 손쉽게 육체를 탐할 수 있던 여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런 육체적인 쾌락과 향락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듯이 정신적 삶에 몰두하고 홀로 산책을 다니는 특이한-브라운필드가 보기에 아무런 목적 없이 산책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소녀이다. 브라운필드는 멤이 홀로 산책을 다닌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신비감과 호기심을 느끼고, 그녀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욕망에 끓어오른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 또한 그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멤은 급기야 브라운필드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고, 그런 멤 앞에서 브라운필드는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멤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오, 여자여, 제발 도망쳐! 그놈은 언젠가 네가 읽고 쓸 줄 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널 때릴 거야! 나도 모르게 외치게 된다.
이 예상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순진한 소녀 멤은 하필이면 이런 증오&열등감 덩어리에게 속아서 그와 결혼하게 되고, 이 열등감 덩어리는 자신이 매혹당한 그 지점, 그러니까 멤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그녀를 학대한다. 욕하고 상처 주는 것도 모자라 구타가 일상이 된다. 그는 그녀를 처절하게 짓밟으며 기뻐한다. 폭력을 즐긴다. 밖에서는 백인이고 흑인이고 어떤 남성에게도 자신의 남성성을 제대로 발현하지조차 못하는 이 찌질하기 짝이 없는 열등감 덩어리는 집안의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자신의 남성성에 도취된다. “누군가가 ‘여성’이 되어야만 흑인 남성이 ‘남성’이 될 수 있기 때문”(<성의 변증법>, 178쪽)이라는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집 안의 여성을 학대하면서 그때야 자신이 남자임을 확인하는 비열한 남성. 앨리스 워커도, 파이어스톤도 이 지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브라운필드가 얼마나 악랄하게 아내를 학대하는지 내 손에 총이 있다면 책 속으로 들어가 그의 머리통에 총알을 갈겨주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구겨진 자존심과 뭉그러진 자아는 멤이 선생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질질 끌어냈다. 그녀의 지식은 읽고 쓸 수 없는 남편에게 극도의 불명예일 뿐이었다. 그녀를 백인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위대한 투지였다. 그는 그녀를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그녀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로 하여금 다른 남자, 즉 흰둥이들에게 꼬리 쳤다고 억지 부리며 아내를 두들겨 패게 한 것은 바로 그 자신과 그의 인생과 그의 세계에 대한 분노였다. 그의 분노와 그의 노여움과 그의 절망이 그를 지배했다. 분노는 그가 모든 것을 그녀 탓으로 돌리게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녀는 자신의 짐과 더불어 그의 짐까지 모두 받아 들고는 더 넓은 마음과 더 높은 지식으로 그것들을 짊어졌다. 그는 그녀의 더 넓은 마음은 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더 높은 지식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힘에,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102쪽)
멤에게는 해결책이 없다. 달아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사이 아이들을 여럿이나 낳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아이들은 하필이면 딸들이다. 저 혐오스러운 브라운필드는 아내를 학대하듯이 제 자식들도 학대한다. 사랑과 임신, 로맨스가 멤이라는 여성에게 가져다준 것은 대체 무엇인가? 자력으로 가난한 흑인들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멤은 추락한다. 추락은 끝이 없다. 그 잠깐의 로맨스 때문에, 달콤함 때문에 몇 번의 뜨거운 섹스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이다. 게다가 로맨스의 결과물인 딸들의 인생 또한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앨리스 워커는 이렇게 쓴다. “‘가난한 문화’를 거의 탈출할 뻔했던 멤과 같은 여자에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남편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였지만 나중에는 정말 명사나 동사나 복수나 단수가 기억나지 않아 옛날에 쓰던 사투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105쪽) 멤이 다시 어벙한 얼굴로 사투리를 쓰는 장면에서는 비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아이들은 그녀를 더 옭아맨다. 멤은 지독하게 학대당하면서도 아이들을 생각해 묵묵히 일한다. 그녀가 지녔던 온화함은 무감각이 되고, 무감각은 다시 공포, 비참, 결국엔 증오가 된다. 이 비열한 인간 브라운필드는 멤의 비참함을 즐긴다. 비참함 속에는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바라볼 하늘도 전혀 없는 멤은 무기력 속에 빠져들고 브라운필드는 그녀의 몰락을 지켜보며 낄낄 거리며 웃는다. 이것이 과연 사랑인가? 브라운필드는 비참함보다 멤의 증오를 더 참을 수 없어 하는데, 멤이 혹시라도 용기를 내어 그에게 저항하면 더 심한 구타와 폭력이 뒤따른다. 그런 멤도 지독하게 마음을 먹고 브라운필드에게 총을 들고 반항해 권력이 역전되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여자는 또 한 번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브라운필드에게 빼앗기고 만다. 브라운필드는 여성이 언제 약해지는지를 알고 그 기회를 철저히 노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임신! 아아, 사랑과 출산이 얼마나 여성에게 구렁텅이가 되는지 이 작품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으리라.
더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아니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브라운필드는 멤과 딸들이 자신이 소유물이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고 그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면서 ‘진정한 상남자’라도 된 듯이 기뻐한다. 여기서도 파이어스톤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남성에게 소유와 지배를 의미한다. 사랑은 전에-그녀가 그의 질투심을 원했을 때- 절대 보이지 않았던 질투심을 의미한다. (그의 소유가 된 후에는 그의 소유물, 그의 연장된 자아가 위협당했기 때문에 그는 격렬한 정력가, 진정한 상남자가 된다.)”(<성의 변증법>, 210쪽)는 말…. “우리는 사랑이 불평등한 권력 상황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으로 상호 간의 상처를 요구한다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이상화, 신비화, 찬사를 통해서 여성의 계급적 열등감을 무화시키는 남성의 시각이 교체하는 과정일 뿐”(<성의 변증법>, 191쪽)이라던 파이어스톤의 신랄한 지적은 멤과 브라운필드의 관계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브라운필드가 과연 멤을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미리 가지고 있던 환상에 맞게 그녀가 연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그녀를 들여보낸 것”(<성의 변증법>, 205쪽)일 뿐이리라.
멤에게는 파멸이 기다릴 뿐이다. 그녀의 딸들에게도 밝은 미래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북부에서 오랜 시간 떠돌다 돌아온 그레인지 코플랜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손녀이자 멤의 딸인 ‘루스’를 저 악귀 같은 브라운필드로부터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한들 어쩐지 때는 이미 늦어 보인다. 게다가 그레인지 코플랜드, 이제 와 선함을 행사하려는 당신, 그런데 당신이 이 모든 원죄의 시초는 아니었냐고 나는 되묻고 싶어진다. 손녀에게 제 아들을 일컬어 “네 아비도 그래. 백인들 때문에 그런 오두막에서 살아야 했어. 짐승처럼 마누라와 아이들을 두들겨 팬 것도 백인들 탓이지. 그래야 자기가 똥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있거든.”라고 신랄하게 말하는 그에게 당신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앨리스 워커는 이 못난 흑인 부자(父子), 그레인지와 브라운필드의 생을 통해 백인에게 억압받는 흑인 남성이 또 어떻게 흑인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지, 흑인 여성들의 이중고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러나 어디 흑인 여성만이 이렇게 이중으로 고통을 받을까. 대다수 여성들이 이런 이중의 고통을 로맨스라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여기 이 땅만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아래 오늘도 죽어가는 여자들이 또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다. 그것은 인물, 나무, 그림, 관념을 존중하고, 알며, 반응하고, 확인하고, 누리는 행위이다. 또한 생명을 주며, 상대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활동이다. 아울러 자신을 새롭게 하고 확장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소유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하고 감금하며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활동이 아니라 억누르고 약화시키고 숨 막히게 하고, 죽이는 행위이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숨기기 위해 둘러대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 <소유나 삶이냐/사랑한다는 것>, 55~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