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재 활동을 활발하게 한 지 올해가 3년째인가.


예전에는 알라딘에 서재라는 공간이 있는지도, 이렇게 활발하게 운영되는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서재 활동을 좀 하다보니 몇 가지 루틴이랄까 특정한 패턴이 보인다. 어떤 책이 한꺼번에 리뷰나 페이퍼에 등장하는 일이 잦을 때가 있다. 클릭해서 읽어보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라 리뷰가 쏟아지는 경우도 많지만 그 책을 출판사로부터 증정받고 리뷰를 올려야 하는 기간의 마감일이 다가왔거나, 이따금 열리는 리뷰 대회 마감일이 가까워져서 그런 경우도 많았다.


또 한 가지는 알라디너의 선택에 올라가는 글은 보통 글의 '질'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신간'을 소개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나조차도 그다지 잘 쓰지 않은, 아니 글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데, 그저 단순히 신간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알라디너의 선택에 올라간 적이 몇 번 있다. 예를 들어 레이 브래드버리 <멜랑콜리의 묘약> 책 표지 구리다고 쓴 글이나, <수용소군도세트> 관련 글 같은 것들 말이다. '알라디너'가 아니라 '알라딘'의 선택인 것이다.


아주 최근에도 바쇼의 하이쿠가 좋다고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알라디너의 선택으로 올라가면서는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표지가 대표 이미지로 올라가서 읭? 뭔 짓이야! 생각했던 일도 있다. 주객전도된 느낌이었달까. 아마 그 책이 요즘 밀어주는 신간이라서 그랬으리라.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예스24에서 리뷰 대회를 하고 있다. 맨부커상 수상작인데다가 리뷰 대회도 있어서 겸사겸사 읽어보고 있는데, 어떤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쟁문학 특유의 한계가 보인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겸비하고 전장에서 일어날 법한 극한 상황의 묘사 이런 것들이 전형적이고 진부하다. 이제 80쪽 남짓 남았는데, 별 다섯 작품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그의 다른 작품 <굴드의 물고기 책>이 더 흥미로워 보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정말 좋은 작품을 알려주고 싶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끔 나조차도 주객전도된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리뷰 대회 적립금 욕심에 그냥 그랬던 책을 좋다고 쓴 건 아닌지,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본다. 다행스럽게도 정말 아닌 책에 도저히 과한 칭찬을 한다거나 하지는 못하겠더라.


그럼에도 그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진실된 리뷰를 쓰자고 다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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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처드 플래니건의 책 중에
<먼 북>보다 <굴드의 물고기 책>이 더 재밌더군요.

리뷰 대회 때문이라기 보다 궁금해서 사서 보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리뷰 대회라고 하니... ㅋㅋ

뭐 그런 거죠.

잠자냥 2018-02-09 13:49   좋아요 0 | URL
네 관심 있는 책인데 리뷰 대회까지 있으면 그때 맞춰서 읽게 되기는 해요. 어차피 쓸 리뷰니까? 근데 아무리 리뷰 대회가 열려도 안 읽어보고 싶은 책은 패스하게 되더군요. 지금 알라딘에서 하는 몇몇 리뷰대회가 저는 책이 그다지 안 땡겨서 넘기는 경우입니다. 리처드 플래너건은 <굴드의 물고기 책>까지는 읽어볼 것 같아요.

다락방 2018-02-09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선택에 올라가는 글은 최근 3개월이내 신간서적에 추천수 3이상이면 자동적으로 올라갈겁니다. 표지는 그 중 신간으로 올라가게 되고요. 화제의 서재글은 추천수5 이상의 글이어야 하고요. 그게 무슨 시스템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출판사에서 책을 받고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책이 안좋으면 그냥 까더라고요? 그러면... 출판사는....... 저한테 뭘한걸까...싶어서 그냥 그 뒤로는 자유롭게 까기 위해 책 안받고 그냥 제가 제 돈 내고 책 사서 읽고 까요. 아 물론 까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만 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바쇼의 하이쿠 그 글은, 저도 기억하는데, 좋아서 추천하고, 거기서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장바구니에 넣게 된 것입니다. 후훗.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잠자냥 2018-02-09 16:37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다락방 님은 시스템까지 꿰고 있는 분이었군요! ㅋㅋ

깔 책은 까야죠. 그런데 다락방 님 서재에 까이는 글 올라오면 출판사에서 타격이 좀 있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읽으신 뒤 감상평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이 책에서 좀 까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ㅋㅋㅋ 그걸 다락방님도 까실지... 궁금해서리... ㅋㅋㅋ)

any.thing 2018-02-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굴드의 물고기 책> 재밌게 읽었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나 궁금했는데....댓글에 재밌게 읽으신 분이 계시다니 반갑네요 :)

잠자냥 2018-02-09 17:3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책이 더 흥미로워 보이더라고요. 또 재밌다고 하시니 더 궁금하네요.
<먼 북> 읽고 나서 한동안 다른 책 좀 보다가 <굴드> 읽어봐야겠습니다.

cyrus 2018-02-09 18: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의 선택’에 공개되는 글 대부분은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간도서 2권 이상 나열.
* 신간도서에 대한 내용은 본인이 스스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알라딘 책 소개’ 복붙.
* 책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음.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요’를 안 누를 수가 없어요. 알라딘 입장에서는 이런 글이 많이 노출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러면 ‘알라디너의 선택’에 있는 글을 보고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거든요. 저는 ‘알라디너의 선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 쓴 리뷰가 아닌 책을 안 읽고 신간도서를 대충 소개한 ‘페이퍼’가 자주 노출되니까 ‘페이퍼’를 쓴 알라니더는 ‘땡스 투 적립금’을 많이 받는 데 유리해요. 신간도서를 제대로 소개하려면 직접 그 책을 주문해서 읽고 써야합니다.

잠자냥 2018-02-09 18:02   좋아요 2 | URL
역시 알라딘 서재 분석가(?) 다운 글입니다. ㅎㅎ
저도 cyrus 님 의견에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읽지도 않은 책 100자평 테러도 좀 그렇더라고요... ㅎㅎ
 
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피터 싱어 지음, 박세연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지난해 사두었던 피터 싱어의 <더 나은 세상>. 새해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목부터가 왠지 그렇지 않은가? 1월 1일부터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1월에 읽었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새해에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 책의 77번째 이야기는 ‘새해 결심을 지키려면’이다. 슬며시 웃음이 난다. 피터 싱어는 사람들이 새해 결심을 잘 지키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실천하기 힘든 것들만 목표로 삼기’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맞다. 나부터도 올해 크게(?) 마음먹은 것 중 하나가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 벗어나기(산 책은 다 읽고 사자), 굿즈 때문에 책을 사지 말자였는데, 이건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목표였고 고작 2월인데도 이미 그 결심은 망했다. 그놈의 굿즈 때문에 사들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사고, 사고 또 사고 있지 않은가!

피터 싱어는 이렇게 새해 목표를 세우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원래 인간은 그렇다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다독인다. 소크라테스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단다. 사람들이 새해 계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무엇이 좋은지 잘 알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감정이나 욕망에 압도당하게 된다’고 했단다. 문제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내면의 본능적인 측면이 우리의 이성적인 측면을 지배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365쪽). 결국 새해 결심을 잘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본능에 지배당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지금 당신도 바로 할 수 있는 쉬운 방법 한 가지를 제안한다. 피터 싱어는 ‘실천’ 윤리학자로 유명하다. 단순한 ‘윤리’ 학자가 아니라 ‘실천’에 방점을 둔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의 윤리가 이렇다 저렇다 책상 위에 앉아서 그저 철학적 사색을 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들을 제안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와 같은 책에서도 이미 사람들에게 기부를 실천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던 그는 이번에도 역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세계의 빈곤은 과연 누구의 몫인가 물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한다면 우리 사회는 전 세계 빈곤층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중략)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으면서도 소득의 작은 일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부자에게는 기부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는 1퍼센트라는 최소한의 기준조차 지키지 않는 부유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바라봐야 한다. (중략) 세계적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하는 노력이야말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는 믿음을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해야 한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어도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 그 정도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박한 빈곤 문제,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해준다. (195쪽)


자기 소득의 1퍼센트만 기부로, 행동으로 직접 옮겨도 이 세상에서 빈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퍼센트도 아니고 1퍼센트다. 10퍼센트라면 부담스럽다. 지키지 못할 새해 결심처럼 돼 버리기 쉽다. 하지만 1퍼센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쩐지 실천하기 쉬어 보이지 않는가?

피터 싱어는 기부하는 행위 또한 널리 알리라고 말한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꾸준히 접할 수 있던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명인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기부행위를 ‘밝히고서’ 하는 것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숨기고 있던 기부행위가 우연히(!) 밝혀졌을 때 더 찬사가 따라붙는다.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행동에 그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정말 동기가 그렇게 중요할까?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피터 싱어는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부 뒤에 숨겨진 동기의 순수성에 그렇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선행을 실천하기 위해 기부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렇게 선행을 알리는 행위는 장점이 더 많다.


사람들이 자선활동을 결심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다른 사람도 똑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중략) 우리는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침묵하는 기부는 장기적으로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사람들이 기부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돈을 쓰고자 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203~205쪽)


자,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또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올해부터는 자신의 소득에서 1퍼센트라도, 아니 0.5퍼센트라도 누군가를 돕는 일에 써 보면 어떨까? ‘우리는 영웅이 아니어도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 그 정도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박한 빈곤 문제,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해준다’는 구절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2장 ‘동물과 윤리’도 흥미롭다. 부모님 집에서 개 한 마리를 가족 모두가 함께 돌보면서 키울 때는 그렇게까지 동물의 권리에 관심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독립해서 어쩌다 보니 길냥이들을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단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존재, 길냥이들의 척박한 '묘생'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물권이나 인간에 의해 망가지는 그들의 삶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인권보다 동물권이 먼저’냐고. 마치 저 먼 나라에 있는 아이에게 기부를 하면 한국의 결식아동부터 도우라고 비아냥대는 논리와 비슷하다. 피터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외에 수많은 종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삶의 행복을 영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로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74쪽)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심지어 사람들이 고통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쉬운 물고기조차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마치 이 지구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동물들의 종을 나누고는 그들 가운데 어떤 존재는 고통을 느끼고, 또 어떤 존재는 느끼지 못할 것이라 섣불리 판단한다. 그러고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멋대로 죽이고 때로는 학대한다. 피터 싱어는 이런 논리로 일본의 고래잡이도 비판하다.


고래를 잡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래로부터 얻는 모든 것은 잔인한 살육 없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절박한 필요성 없이 무고한 생명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일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며, 고래잡이는 비윤리적인 산업이다. (중략) 고통을 느끼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행동을 특정 문화의 가치로 정당화 할 수 없다. (71~73쪽)


비단 일본만의 문제일까? 위 구절에 ‘고래’라는 단어 대신 ‘개’를 집어넣어보라. 보신탕 먹는 행위, 보신탕을 먹기 위해 ‘개’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행위를 언제까지 ‘우리의 전통 문화’라는 가치로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개뿐만이 아니라, 돼지, 소, 닭 등등 다른 동물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인간을 위해서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할 까닭은 없다. 이런 책을 읽으면 채식을 마음먹다가도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무너지고 마는데(아직은 지키기 어려운 결심;_;) 언젠가는 꼭 채식하는 사람이, 철저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채식주의자나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좋은 자연 환경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87쪽)


5장 ‘섹스와 젠더’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계속 펼쳐진다. 일일이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피터 싱어가 주장한 내용만을 조금 옮겨 본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그 행위와 관련하여 어떤 측면이 비도덕적이라는 말인가? 동성애 금지와 관련된 사안의 핵심은 국가가 법률로 개인에게 도덕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법률은 동성애가 비도덕적이라는 선입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동성애는 비도덕적인가’, 174쪽)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성별을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이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 인터넷 세상에서는 상대의 성별을 모른 채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중략) 성별을 요구하는 관습은 다양한 역할과 지위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으려 했던 시대의 유산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성별을 묻는 관습을 없애면 여성 불평등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또한 육아휴직과 관련해서 남성들이 겪게 되는 부당한 차별도 막을 수 있다.  (‘생물학적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런 책을 읽거나, 피터 싱어와 같은 이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때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희망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 결국 조금씩은 변화해왔다. 동물해방 운동이 처음 태동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에는 어떤 대형 동물보호 단체도 닭장 사육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지 않았다’(63쪽). 하지만 이제는 이 땅에서조차 닭장 사육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소비자는 자연에서 풀어놓고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변화이고 진보가 아닐까? 지난해는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렸고, 요즘은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또한 진보를 향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말했다.

“신중하고 열정적인 시민들로 이뤄진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세상은 지금까지 그렇게 변해왔다.”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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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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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키플링이 단순히 <정글북> 작가로만 널리 알려진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탄식하게 된다. 그가 젊은 시절에 쓴 첫 단편부터 깜짝 놀라게 되더니,읽을수록 이 빼어난 작품들에 감탄하게 된다. 신비롭고 환상적인 단편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 곳곳에 포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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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다가 아무래도 바쇼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였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The Narrow Road to the Deep North』은 마츠오 바쇼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영어판 제목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제목만 인용했나 싶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바쇼를 비롯해 잇사, 부손 등 일본 하이쿠 대가들은 물론 그들의 작품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나카무라와 고토 등 일본군들은 바쇼의 하이쿠가 일본 정신의 상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철도를 위하여. 고타 대령이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일본을 위하여. 나카무라가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천황 폐화를 위하여! 고타 대령이 말했다.
바쇼를 위하여! 나카무라가 말했다.
잇사!
부손! (리차드 플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162쪽)

서로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이쿠를 읊어주었다. 시 자체보다는 시에 대한 서로의 감수성이, 시에 깃듯 천재성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서로의 지혜가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시를 안다는 사실 보다는 시가 자신들과 일본 정신의 고귀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그 일본 정신은 이제 곧 철로를 따라 매일 버마까지 이동할 것이고, 버마에서부터 인도까지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세계를 정복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인 거야. 나카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 거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163쪽)


이 구절을 읽노라니 바쇼의『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이쿠 책을 이따금 보기는 했지만, 바쇼만의 작품이 실린, 게다가 기행문이라는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국내에서는 벌써 10여 년 전에 바쇼의 기행집이 전 3권으로 출간되었더라. 1권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제외하고 2, 3권은 품절이었다. 도서관에서 다행히 세 권 모두 빌릴 수 있었다. 느긋하게 세 권의 책들을 읽으며 조금씩 바쇼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왜, 하이쿠라는 특별한 장르에 서양인들이 그토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동양인인 나조차도 바쇼의 하이쿠에서 이토록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저 서구인의 눈에는 얼마나 신비로워 보였을까.

바쇼가 살았던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세웠던 에도 막부 초창기의 혼란스러움이 진정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인 계급 조닌(町人)들의 문화가 꽃피기 시작할 때였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조닌 문화의 쾌락주의는 무사 문화의 금욕적 윤리와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감각적이면서도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했던 시대에 바쇼는 세상 흐름의 어느 것과도 전혀 다른 삶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 때 오히려 그는 도시를 떠나 멀고 먼 변방으로 고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일본 동북부 지역 ‘오쿠’까지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온갖 자연과 그 속에서 떠오르는 감흥을 5ㆍ7ㆍ5 음률을 가진 17자의 정형시 하이쿠로 읊는다.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의
눈에는 눈물.


바쇼가 처음 여행길에 오를 때 읊은 하이쿠다. 이 하이쿠와 함께 바쇼는 ‘이것을 이번 여행 하이쿠의 필두로 하여 첫발을 내딛었으나, 헤어짐의 서운함에 발길은 더디기만 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길, 바쿠의 하이쿠와 함께 사계절의 흐름과 여행지의 변화를 느낀다. 나 또한 바쇼와 그의 제자 소라와 함께 일본 곳곳을 떠도는 느낌이다.



조용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오쿠로 가는 작은 길』, 92쪽)

가을은 시원타
손에 손에 들고 벗기세
참외와 가지 (『오쿠로 가는 작은 길』, 123쪽)

대합조개가
두 몸으로 헤어져
가는 가을이어라 (『오쿠로 가는 작은 길』,148쪽)


세월은 멈추는 일 없는 영원한 여행객이고, 오고 가는 해 또한 나그네이다. 사공이 되어 배 위에서 평생을 보내거나 마부가 되어 말 머리를 붙잡은 채 노경을 맞이하는 사람은, 그날그날이 여행이기에 여행을 거처로 삼는다. 옛 선인들 중에도 많은 풍류인들이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오쿠로 가는 작은 길』, 16쪽)


바쇼는 애초부터 ‘변방으로의 방랑, 무상한 속세를 떠나 내 몸을 버릴 각오로 떠나왔으니, 설령 여행 중에 죽을지라도 그 또한 천명’(『오쿠로 가는 작은 길』, 55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흔한 살부터 10년 동안 여행과 은둔을 거듭하면서 살다가 쉰하나에 여행지였던 오사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시기적으로 보면 마지막에 해당한다. 이 기행집 전 3권 가운데 가장 끝으로 나왔어야 순서가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첫 번째에 놓은 까닭은 이 책이 바쇼의 하이쿠 세계를 집대성한 완결작이자, 대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쿠에 몸을 두는 사람은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 삼아, 그것을 시로 표현해 간다. 보는 것 모두 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이 아닌 것이 없다. 그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그것을 보는 마음이 꽃이 아니라면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야만인이나 새, 짐승의 지경을 벗어나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보이는 건 모두가 꽃이요』, 16쪽)


2권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와 3권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에서도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 삼은 바쇼의 방랑과 그 정서를 가득 담은 하이쿠들은 아름답게 빛난다.




들판의 해골로
뒹굴리라 마음에 찬바람
살 에는 몸

가을이 십 년
돌아서서 에도를
고향이라네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16쪽)

말 위에서 잠 깨 보니
꿈결인 듯 먼 달 아래
차 끓는 연기런가.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24쪽)

산길 넘어가다가
무엇일까 그윽해라
조그만 제비꽃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56쪽)

여행에 지쳐
숙소 빌릴 시간이여
화사한 등꽃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48쪽)

문어잡이 항아리여
덧없는 꿈을 꾸는
여름밤의 달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72쪽)

죽지도 않은
나그네 길의 끝이여
가을 저물녘(『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147쪽)


‘보는 것 모두 꽃’이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이었던 까닭은 그것을 보는 바쇼의 마음이 바로 ‘꽃’이었기 때문이리라. 속세를 벗어난 방랑의 길, 인생에 달관하여 유유자적하며 그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살아간 자유로운 영혼의 기록에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쇼의 하이쿠를 읊조리며 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이 책들에는 바쇼가 그린 그림도 함께 실려 있어서 여행길의 정취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1권을 제외하고는 품절된 책들이라 구하기 어렵지만 책의 만듦새가 훌륭해서 탐이 나기도 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때문에 읽기 시작한 바쇼의 하이쿠들- 그런데 그 향기에 오히려 더 흠뻑 빠지고 말았다. ‘나카무라’와 ‘고타’가 일본 정신 운운하면서 바쇼의 하이쿠를 읊조리는 것이 문득 꽤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아름다운 바쇼의 하이쿠, 속세를 벗어나 자연 속을 떠돌던 옛 시인의 하이쿠를 읊지만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전쟁터. 침략과 살생이 자행되는 어쩌면 가장 저열한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전쟁터가 아닌가. 그 극명한 대비를 위해 바쇼의 하이쿠를 인용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면서 다시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펼친다. 마치 꿈결 같던 긴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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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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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제임스 설터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인 <어젯밤>부터 소개되었다. 애초에 첫 단편집인 <아메리칸 급행열차>로 독자를 만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어젯밤>으로 먼저 이 땅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어젯밤>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어젯밤>에 비해 읽기도 수월하지 않다. <어젯밤>이 명료하고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렬했다면,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모호하고 흐릿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 그 빈틈에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읽다가 자꾸 멈추게 된다, 문장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다. 내가 놓친 게 많은가? 내가 잘못 읽고 있나? 자기를 탓하게 된다. 그럼에도 아, 역시 설터구나 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새 차나 다름없는 자신의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 (44쪽, ‘인생’)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머릿속에 드리워진 얇은 막 같은 것이 걷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시 한 번 책을 넘기다가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 차나 다름없는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 아, 맞아, 그래.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실린 열 한 개의 단편은 거의 모두가 그런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 차나 마찬가지인 자동차에 움푹 팬 자국이 생기면 처음에는 몹시 신경이 쓰인다. 몇날 며칠은 마음이 쓰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그 자국을 잊는다. 그런 자국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더욱더 그 자국에 둔감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그 자동차를 언제 새 차였냐는 듯이 굴리다가는, 다른 새로운 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마침내 그 차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와 함께 그런 모든 자국들도 잊힌다. 한때 몇날 며칠 마음을 쓰리게 했던 자국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잊는다. 그러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고 해서 그 자국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그런 움푹 팬 자국, 그러나 곧 잊힐 그 미묘한 순간을 설터는 눈 여겨 본다. 거기에 주목하고, 그 미세한 균열의 순간을 포착했기에, 11개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어떤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흘려버리거나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고 간다. 그 자국, 그 균열은 곧 잊히거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이러할 진데 그들의 삶을 엿보는 독자는 더더욱 그 움푹 팬 자국과 균열, 삶에 미세한 틈이 생기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때문에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마치 ‘급행열차’를 탄 듯이 빠른 속도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면 주위 풍경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목적지에 다다른, 조금은 허망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느리게 가더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완행열차를 탄 것처럼 천천히 읽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랄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또는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20분’을 고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 이 책의 서문을 쓴 ‘필립 구레비치’도 ‘20분’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그는 이 작품을 ‘매우 냉혹하고 날렵함, 매 순간 육체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또한 긴박감 넘치는 동시에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마치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20분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써서 들려주는 것 같고, 그 20분 안에 전 인생을 드러’ 냈으며 ‘동시에 압축과 팽창은 흥분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설터의 지혜와 예술을 반영한다(12쪽, 서문)’고 말한다. 맞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실린 단편 가운데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가장 선명하게 독자에게 가닿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20분’보다도 ‘탕헤르 해변에서’나 ‘아메리칸 급행열차’, ‘황혼’, ‘괴테아눔의 파괴’와 같은 작품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탕헤르 해변에서’는 니코와 맬컴 두 연인 사이에 니코의 친구인 ‘잉게’가 불쑥 끼어든다. 잉게 그 자체가 삶의 미세한 균열이자, 움푹 팬 자국이다. 그런데 니코도 맬컴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그들 삶에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균열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어느 순간 아마도 잊히리라.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성공한 두 변호사들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성공만큼 타락도 빨리 찾아온 그들의 삶. 둘은 급기야 여행지에서 한 여자를 공유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들의 삶은 정말 성공뿐일까? 그 두 남자의 어쩐지 공허한 몸짓들이 삶에 움푹 팬 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고급 스포츠카 어딘가에 남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자국을 연상케 한다.

‘황혼’의 중년 여성 ‘챈들러’ 부인은 남편에게도 버림 받은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집을 수리하러 오는 ‘빌’과 한때 은밀한 사이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빌은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고 통보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빌은 화를 낸다. ‘마흔 여섯. 그 세월이 목과 눈 밑에 스며있었다. 그녀의 젊음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애원해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품었던 길었던 여름은 가버렸다.’ (189쪽, ‘황혼’)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된 그녀를, 잠시나마 원했던 빌조차 이제는 가버린 것이다. 작가 나딘은 언젠가 ‘괴테아눔 The Goetheanum’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의미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위대한 행위를 뜻하는 것’(212쪽, ‘괴테아눔의 파괴’)이다. 그런데 괴테아눔은 덧없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마치 나딘이 결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했으며, 땅을 파는 일을 하는 더그 포티스 같은 사람은 경찰관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트레일러 안에서 총을 맞았다. 그녀의 남편 같은 사람은 산터바버라로 가서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었다. (50쪽, ‘20분’)


인생의 위대함을 뜻하는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고 마는 삶. 한때는, 젊었을 때는 재능 있어 보이고, 삶에서 어떤 위대함을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그저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삶. 그리하여 ‘인생의 항해를 시작해본 적이 없’이 그저 ‘해안 근처에만 머물’(168쪽, ‘애크닐로’)고 마는 삶. 그런 삶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에는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리하여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50쪽, ‘20분’)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절감하게 해준다. 삶은 움푹 팬 자국들의 연속, 하지만 그 자국은 잊히고 우린 다시 살아간다고. 설터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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