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다가 아무래도 바쇼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였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The Narrow Road to the Deep North』은 마츠오 바쇼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영어판 제목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제목만 인용했나 싶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바쇼를 비롯해 잇사, 부손 등 일본 하이쿠 대가들은 물론 그들의 작품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나카무라와 고토 등 일본군들은 바쇼의 하이쿠가 일본 정신의 상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철도를 위하여. 고타 대령이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일본을 위하여. 나카무라가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천황 폐화를 위하여! 고타 대령이 말했다.
바쇼를 위하여! 나카무라가 말했다.
잇사!
부손! (리차드 플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162쪽)

서로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이쿠를 읊어주었다. 시 자체보다는 시에 대한 서로의 감수성이, 시에 깃듯 천재성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서로의 지혜가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시를 안다는 사실 보다는 시가 자신들과 일본 정신의 고귀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그 일본 정신은 이제 곧 철로를 따라 매일 버마까지 이동할 것이고, 버마에서부터 인도까지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세계를 정복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인 거야. 나카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 거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163쪽)


이 구절을 읽노라니 바쇼의『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이쿠 책을 이따금 보기는 했지만, 바쇼만의 작품이 실린, 게다가 기행문이라는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국내에서는 벌써 10여 년 전에 바쇼의 기행집이 전 3권으로 출간되었더라. 1권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제외하고 2, 3권은 품절이었다. 도서관에서 다행히 세 권 모두 빌릴 수 있었다. 느긋하게 세 권의 책들을 읽으며 조금씩 바쇼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왜, 하이쿠라는 특별한 장르에 서양인들이 그토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동양인인 나조차도 바쇼의 하이쿠에서 이토록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저 서구인의 눈에는 얼마나 신비로워 보였을까.

바쇼가 살았던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세웠던 에도 막부 초창기의 혼란스러움이 진정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인 계급 조닌(町人)들의 문화가 꽃피기 시작할 때였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조닌 문화의 쾌락주의는 무사 문화의 금욕적 윤리와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감각적이면서도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했던 시대에 바쇼는 세상 흐름의 어느 것과도 전혀 다른 삶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 때 오히려 그는 도시를 떠나 멀고 먼 변방으로 고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일본 동북부 지역 ‘오쿠’까지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온갖 자연과 그 속에서 떠오르는 감흥을 5ㆍ7ㆍ5 음률을 가진 17자의 정형시 하이쿠로 읊는다.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의
눈에는 눈물.


바쇼가 처음 여행길에 오를 때 읊은 하이쿠다. 이 하이쿠와 함께 바쇼는 ‘이것을 이번 여행 하이쿠의 필두로 하여 첫발을 내딛었으나, 헤어짐의 서운함에 발길은 더디기만 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길, 바쿠의 하이쿠와 함께 사계절의 흐름과 여행지의 변화를 느낀다. 나 또한 바쇼와 그의 제자 소라와 함께 일본 곳곳을 떠도는 느낌이다.



조용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오쿠로 가는 작은 길』, 92쪽)

가을은 시원타
손에 손에 들고 벗기세
참외와 가지 (『오쿠로 가는 작은 길』, 123쪽)

대합조개가
두 몸으로 헤어져
가는 가을이어라 (『오쿠로 가는 작은 길』,148쪽)


세월은 멈추는 일 없는 영원한 여행객이고, 오고 가는 해 또한 나그네이다. 사공이 되어 배 위에서 평생을 보내거나 마부가 되어 말 머리를 붙잡은 채 노경을 맞이하는 사람은, 그날그날이 여행이기에 여행을 거처로 삼는다. 옛 선인들 중에도 많은 풍류인들이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오쿠로 가는 작은 길』, 16쪽)


바쇼는 애초부터 ‘변방으로의 방랑, 무상한 속세를 떠나 내 몸을 버릴 각오로 떠나왔으니, 설령 여행 중에 죽을지라도 그 또한 천명’(『오쿠로 가는 작은 길』, 55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흔한 살부터 10년 동안 여행과 은둔을 거듭하면서 살다가 쉰하나에 여행지였던 오사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시기적으로 보면 마지막에 해당한다. 이 기행집 전 3권 가운데 가장 끝으로 나왔어야 순서가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첫 번째에 놓은 까닭은 이 책이 바쇼의 하이쿠 세계를 집대성한 완결작이자, 대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쿠에 몸을 두는 사람은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 삼아, 그것을 시로 표현해 간다. 보는 것 모두 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이 아닌 것이 없다. 그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그것을 보는 마음이 꽃이 아니라면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야만인이나 새, 짐승의 지경을 벗어나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보이는 건 모두가 꽃이요』, 16쪽)


2권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와 3권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에서도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 삼은 바쇼의 방랑과 그 정서를 가득 담은 하이쿠들은 아름답게 빛난다.




들판의 해골로
뒹굴리라 마음에 찬바람
살 에는 몸

가을이 십 년
돌아서서 에도를
고향이라네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16쪽)

말 위에서 잠 깨 보니
꿈결인 듯 먼 달 아래
차 끓는 연기런가.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24쪽)

산길 넘어가다가
무엇일까 그윽해라
조그만 제비꽃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56쪽)

여행에 지쳐
숙소 빌릴 시간이여
화사한 등꽃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48쪽)

문어잡이 항아리여
덧없는 꿈을 꾸는
여름밤의 달 (『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72쪽)

죽지도 않은
나그네 길의 끝이여
가을 저물녘(『보이는 것 모두가 꽃이요』, 147쪽)


‘보는 것 모두 꽃’이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이었던 까닭은 그것을 보는 바쇼의 마음이 바로 ‘꽃’이었기 때문이리라. 속세를 벗어난 방랑의 길, 인생에 달관하여 유유자적하며 그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살아간 자유로운 영혼의 기록에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쇼의 하이쿠를 읊조리며 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이 책들에는 바쇼가 그린 그림도 함께 실려 있어서 여행길의 정취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1권을 제외하고는 품절된 책들이라 구하기 어렵지만 책의 만듦새가 훌륭해서 탐이 나기도 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때문에 읽기 시작한 바쇼의 하이쿠들- 그런데 그 향기에 오히려 더 흠뻑 빠지고 말았다. ‘나카무라’와 ‘고타’가 일본 정신 운운하면서 바쇼의 하이쿠를 읊조리는 것이 문득 꽤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아름다운 바쇼의 하이쿠, 속세를 벗어나 자연 속을 떠돌던 옛 시인의 하이쿠를 읊지만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전쟁터. 침략과 살생이 자행되는 어쩌면 가장 저열한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전쟁터가 아닌가. 그 극명한 대비를 위해 바쇼의 하이쿠를 인용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면서 다시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펼친다. 마치 꿈결 같던 긴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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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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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제임스 설터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인 <어젯밤>부터 소개되었다. 애초에 첫 단편집인 <아메리칸 급행열차>로 독자를 만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어젯밤>으로 먼저 이 땅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어젯밤>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어젯밤>에 비해 읽기도 수월하지 않다. <어젯밤>이 명료하고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렬했다면,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모호하고 흐릿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 그 빈틈에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읽다가 자꾸 멈추게 된다, 문장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다. 내가 놓친 게 많은가? 내가 잘못 읽고 있나? 자기를 탓하게 된다. 그럼에도 아, 역시 설터구나 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새 차나 다름없는 자신의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 (44쪽, ‘인생’)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머릿속에 드리워진 얇은 막 같은 것이 걷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시 한 번 책을 넘기다가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 차나 다름없는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 아, 맞아, 그래.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실린 열 한 개의 단편은 거의 모두가 그런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 차나 마찬가지인 자동차에 움푹 팬 자국이 생기면 처음에는 몹시 신경이 쓰인다. 몇날 며칠은 마음이 쓰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그 자국을 잊는다. 그런 자국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더욱더 그 자국에 둔감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그 자동차를 언제 새 차였냐는 듯이 굴리다가는, 다른 새로운 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마침내 그 차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와 함께 그런 모든 자국들도 잊힌다. 한때 몇날 며칠 마음을 쓰리게 했던 자국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잊는다. 그러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고 해서 그 자국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그런 움푹 팬 자국, 그러나 곧 잊힐 그 미묘한 순간을 설터는 눈 여겨 본다. 거기에 주목하고, 그 미세한 균열의 순간을 포착했기에, 11개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어떤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흘려버리거나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고 간다. 그 자국, 그 균열은 곧 잊히거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이러할 진데 그들의 삶을 엿보는 독자는 더더욱 그 움푹 팬 자국과 균열, 삶에 미세한 틈이 생기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때문에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마치 ‘급행열차’를 탄 듯이 빠른 속도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면 주위 풍경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목적지에 다다른, 조금은 허망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느리게 가더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완행열차를 탄 것처럼 천천히 읽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랄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또는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20분’을 고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 이 책의 서문을 쓴 ‘필립 구레비치’도 ‘20분’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그는 이 작품을 ‘매우 냉혹하고 날렵함, 매 순간 육체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또한 긴박감 넘치는 동시에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마치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20분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써서 들려주는 것 같고, 그 20분 안에 전 인생을 드러’ 냈으며 ‘동시에 압축과 팽창은 흥분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설터의 지혜와 예술을 반영한다(12쪽, 서문)’고 말한다. 맞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실린 단편 가운데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가장 선명하게 독자에게 가닿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20분’보다도 ‘탕헤르 해변에서’나 ‘아메리칸 급행열차’, ‘황혼’, ‘괴테아눔의 파괴’와 같은 작품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탕헤르 해변에서’는 니코와 맬컴 두 연인 사이에 니코의 친구인 ‘잉게’가 불쑥 끼어든다. 잉게 그 자체가 삶의 미세한 균열이자, 움푹 팬 자국이다. 그런데 니코도 맬컴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그들 삶에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균열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어느 순간 아마도 잊히리라.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성공한 두 변호사들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성공만큼 타락도 빨리 찾아온 그들의 삶. 둘은 급기야 여행지에서 한 여자를 공유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들의 삶은 정말 성공뿐일까? 그 두 남자의 어쩐지 공허한 몸짓들이 삶에 움푹 팬 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고급 스포츠카 어딘가에 남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자국을 연상케 한다.

‘황혼’의 중년 여성 ‘챈들러’ 부인은 남편에게도 버림 받은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집을 수리하러 오는 ‘빌’과 한때 은밀한 사이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빌은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고 통보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빌은 화를 낸다. ‘마흔 여섯. 그 세월이 목과 눈 밑에 스며있었다. 그녀의 젊음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애원해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품었던 길었던 여름은 가버렸다.’ (189쪽, ‘황혼’)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된 그녀를, 잠시나마 원했던 빌조차 이제는 가버린 것이다. 작가 나딘은 언젠가 ‘괴테아눔 The Goetheanum’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의미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위대한 행위를 뜻하는 것’(212쪽, ‘괴테아눔의 파괴’)이다. 그런데 괴테아눔은 덧없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마치 나딘이 결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했으며, 땅을 파는 일을 하는 더그 포티스 같은 사람은 경찰관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트레일러 안에서 총을 맞았다. 그녀의 남편 같은 사람은 산터바버라로 가서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었다. (50쪽, ‘20분’)


인생의 위대함을 뜻하는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고 마는 삶. 한때는, 젊었을 때는 재능 있어 보이고, 삶에서 어떤 위대함을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그저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삶. 그리하여 ‘인생의 항해를 시작해본 적이 없’이 그저 ‘해안 근처에만 머물’(168쪽, ‘애크닐로’)고 마는 삶. 그런 삶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에는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리하여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50쪽, ‘20분’)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절감하게 해준다. 삶은 움푹 팬 자국들의 연속, 하지만 그 자국은 잊히고 우린 다시 살아간다고. 설터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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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이 책을 읽었다. 주석을 제외하고도 장장 700쪽이 넘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이 엄청난, 대단한 책을 순식간에 읽어버리는 것은 어쩐지 저자에 대한 또는 루스 베네딕트나 마거릿 미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로이스 배너는 루스 베네딕트와 마거릿 미드를 700쪽 종이 위에 생생하게 살려냈다. 역사와 젠더학을 가르친다는 로이스 배너, 그녀는 루스 베네딕트와 마거릿 미드의 초상을 그리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단 한 번도 그들을 만난 적이 없었을 텐데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루스와 마거릿을 이 순간 어디에선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려놨을까? 마치, 단 한 번도 일본에 가본 적 없으면서도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을 성공적으로 완성했듯이 말이다.

대학 때 처음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읽었다. 문화인류학에 잠시 관심이 있던 때였다. 어떻게 한 번도 일본에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책을 쓸 수가 있지? 놀라웠다. 물론 나중에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지닌 한계도 알게 됐지만, 그럼에도 이 인류학자의 이름은 선명하게 내 뇌리에 남았다. 그 뒤로 몇 해가 지났을까. <사모아의 청소년>이라는 한길사에서 출판된 책을 ‘갖고’ 싶어졌다. ‘읽고’ 싶기 보다는 ‘갖고 싶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마거릿 미드를 잘 몰랐으면서도 그 책은 어쩐지 흥미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모아의 청소년>은 번번이 사기 직전에 포기하게 되는(비싼 책값 영향이 컸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나와는 인연이 없는 책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참에 벌써 2년 전, 2016년 여름쯤 이 책이 출간되었다.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 - 위대한 두 여성 인류학자의 사랑과 학문>이라는 무척 매혹적인 이름으로 말이다. 나오자마자 구매하고는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진도가 팍팍 나가는 책은 아니었다. 특히 맨 처음부터 루스와 마거릿의 조상 이야기가 나와서 곤혹스러웠다. 조금 생뚱맞기도 하고, 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1부인 ‘조상’ 이 장은 읽는 동안 이른바 ‘현타’가 오기도 했다. 대체 내가 왜 이걸 읽고 있지? 난 루스와 미드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고! 얼른 그들을 내 앞에 내놓으란 말이다! 이렇게 외치고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비를 잘 넘기면 드디어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펼쳐진다. 루스와 미드의 유년기 시절, 그 둘이 저마다 대학에 진학해서 이른바 ‘동성 간의 스매시’ ‘걸크러시’ 문화에 빠지고 드디어 둘이 만나게 되는 순간까지-. 숨 가쁘게 읽어가다 보니, 아, 그 ‘조상’들의 이야기가 이래서 필요했던 거구나, 그들의 유년시절, 그들의 정체성과 성격을 형성하고, 그것들이 루스와 미드의 학문적 관심으로 뿌리내리기까지 이런 영향을 끼쳤구나, 끄덕끄덕하게 된다. 때문에 저자의 이런 엄청난 노력, 그러니까 도서관, 교회, 학회 등등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베네딕트 관련 문서를 발굴하고,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루스와 미드의 편지, 서류철을 총망라해서 루스와 미드, 두 사람의 또는 둘만의 ‘전기’를 새롭게 써낸 로이스 배너의 값진 노력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게 된다.

사실 내가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은 마거릿 미드보다는 루스 베네딕트 쪽이었다. 그녀의 사진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텐데, 이토록 고혹적인 미모를 지닌 사람이 20세기 초반, 그 완강한, 남성들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문화인류학자로 살아남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시절,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동성 연인에게 애정과 사랑을 비롯하여 학문적 지지를 굳건히 보냈다니, 그녀의 이 수줍은 듯한, 조용한 외모 안에는 어떤 열정이 숨어 있던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 시작 부분에는 루스와 미드의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생각보다 키가 매우 큰,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 그에 비해 마거릿 미드는 키가 작고 왜소한 소녀 같은 모습이다. 이런 외형적인 ‘다름’은 성격적인 면에서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루스 베네딕트는 그 외모처럼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수줍은 사람이었다. 그런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면서도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미드가 쓴 베네딕트의 전기 <루스 베네딕트>를 보면 거의 며칠 동안 똑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미드는 이렇게 썼다.


소녀 시절에 그리고 그 후에 하나의 전설이 되었던 그녀의 미모는 그 당시 완전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중략) 여러 주가 지나도록 계속 엉성한 모자를 쓰고 칙칙한 색깔의 같은 옷을 입었다. “남자들은 매일 같은 옷을 입잖아. 여자는 왜 그렇게 하면 안 돼?”하고 그녀는 말했다. (마거릿 미드, <루스 베네딕트>, 연암서가, 25쪽)


그에 비해 미드는 언제나 발랄한 소녀 같았고, 여성적이면서도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으며 자신을 꾸미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미드는 언제나 ‘사랑에 빠지는’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922년, 뉴욕 바너드대에서 개설한 인류학 입문과정에서 처음 그 둘이 만나 거의 단번에 서로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지고 마침내 만난 지 2년이 흐른 1924년, 둘은 연인 사이가 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미드는 언제나 남성을 선택했고, 그중 몇몇과는 결혼을 하기도 한다. 물론 루스 베네딕트 또한 스탠리 베네딕트, 즉 남편이 있었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미드는 동성 애인을 여럿 두기도 했다. 베네딕트도 이런 미드 때문에 질투에 시달리기도 하고 고통 받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관계가 되고, 그 자유 안에서 둘의 학문적 교류는 더욱 크게 발전한다.


루스와 마거릿 모두 자유연애를 신봉했다. 이 원칙은 성적 실험에 환호했고, 질투를 배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의 신성함도 믿었고, 경력에 오점이 생길 것을 두려워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났다. 그들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여성이 완성된다는 신념도 공유했다. 루스는 아이를 갖는 데 실패했다. 그녀는 마거릿을 자기 애인으로 여겼지만 그녀를 딸이자 총명해서 돌봐줘야 할 대상으로도 생각했다. 실제로 루스는 마거릿의 연애 행각에 화가 난 만큼이나 그녀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34쪽)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지는 1부 ‘조상’ 부분인데, 왜 그런 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지는 저자 로이스 배너의 주된 집필 목표를 살펴봐야 한다. 그녀는 이 책을 ‘젠더의 지리학’(Geography of Gender)이 루스와 미드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젠더의 지리학이란 두 사람이 정치적, 사회적, 직업적, 가족적, 개인적 인생의 과정에서 헤쳐나간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복잡한 지형을 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각자의 성 정체성을 결정하기까지 거쳤던 심리적 행로 또한 포함한다. 때문에 그들의 성정체성에 영향을 끼쳤을 법한 사람이나 환경 등은 빠짐없이 기술되었고 그러다 보니 조상을 비롯해 그 조상에서 뻗어 나온 두 사람의 가정환경 묘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년 시절부터 자라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연애 관계를 맺거나 결혼했던 남성, 여성 등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렇게 빈틈없이 세밀하게 엮은 자료들을 통해 두 사람 인생의 상호 연관성은 물론, 루스와 미드 두 사람이 사랑과 우정, 욕망, 헌신, 불화의 범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디까지 넓혀갔는지 알게 된다.

이 책을 기준으로 내가 판단하건데 루스 베네딕트는 동성애자에 가까웠다면 미드는 양성애자였지만 그 시절 문화가 차츰 동성애자에게 배타적으로 변해가면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결혼이라는 우산 아래, 이성애자의 가면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루스 베네딕트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성과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미드의 심리를 이해할 만도 하다. 실제로 미드의 전 남편 중 한 사람은 루스와 미드의 관계를 질투하다 못해, 또한 미드로부터 이혼당한 뒤 복수심에 불타올라 미드의 학문적 성과를 하나하나 반박하거나 또는 미드가 동성애자임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녀는 공포를 성 정체성 문제와 연결했다. “온전하게 성별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은 무국적자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다수의 직업 분야에서 성공한 여자들은 남자 같고, 그래서 동성애자로 취급되는 사태에 직면한다고 미드는 말했다. (중략) 미드는 자신의 당시 성향과 시대 풍조 속에서 인생의 주된 동반자로 리오 포천을 선택했다. (439쪽)


이 책에는 이렇게 미드의 못난 전 남편(들)을 비롯해 에드워드 사피어처럼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미드가 자신의 구애를 잘 받아들이지 않자 그녀를 학문적으로 공격하거나 그녀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참으로 찌질한 남성 학자들의 모습도 언뜻언뜻 보인다. 미드와 루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학문적 열정은 그 시절 남성들이 지배하던 학계에 든 반기로서의 의미도 크다. 실제로 해가 갈수록 두 사람의 연구 성과가 두드러지고 마침내 루스 베네딕트가 1930년대에 당대 최고의 인류학자이자 루스와 미드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란츠 보애스를 대신해 인류학과를 이끌 때에도 (남성) 교수 전용 식당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은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인생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이 여성 학자로서 어떤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고, 결국에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 과정 또한 상세히 그려나간다.

1948년 미드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루스 베네딕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루스가 죽자 미드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드는 베네딕트를 몹시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이자, 연인, 언니, 어머니, 선배였던 그녀를 그리워했다. 베네딕트가 없었다면 미드는 결코 그렇게 찬란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미드에게 자신의 통찰력을 확장해보라고 격려했다. 미드는 거기서 영감을 얻었고, 베네딕트의 애정과 지원 속에서 그녀를 뛰어넘는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705쪽) 루스의 죽음 뒤 30년이 지난 1978년 미드는 세상을 떠났다. 77세의 세계적 유명 인사로서였다. 미드는 그렇게 베네딕트의 꿈을 실현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많은 이들의 사랑 또는 연애는 서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북돋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서로 구속하고 통제하고 갉아먹는 관계가 되기 싶다. 루스와 미드 또한 인간이기에 아무런 고통 없이 서로에게 자유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고통 끝에 서로 존중하고 ‘자유’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두 사람을 문화인류학계 거장으로 우뚝 서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의 사랑과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 끝없는 지지를 보며 감동 속에 책을 덮는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모두가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집’이라고 베네딕트가 쓰자 미드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내 삶의 중심은 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에요. 내 존재의 핵심은 당신의 완벽함을 중심으로 마감돼요.” (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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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1-2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둘이 사귀었군요.

잠자냥 2024-01-25 15:24   좋아요 0 | URL
휴 불쌍한 은바오 ㅋㅋㅋㅋㅋ 잠자냥 서재 뒤지느라 식음전폐…… 그런데 그 사실은 나머지 여성들과 공통점이 없습니다.

은오 2024-01-25 15:25   좋아요 0 | URL
에엥 다 검색해보고 왔는데 다 동성이랑 사귀었던데요???

은오 2024-01-25 15:26   좋아요 0 | URL
아무튼 답은아닌걸로..우에에에ㅐ앵

잠자냥 2024-01-25 15:28   좋아요 0 | URL
아아아 진짜야? 유도라 웰티도 그랬다고???!!!!!!!! 나머지는 그런 거 알고 있었지만... 유도라 웰티는 그런 줄 몰랐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사람들... 암튼 마거릿 미드하고, 루스 베네딕트 엮어서 넣었던 것은 이런 답을 내놓을 인간을 위한 함정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뭐야 내가 함정에 빠진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4-01-25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4-01-25 15:28   좋아요 0 | URL
네... 유도라 웰티 한국 문서엔 안나오길래 영어로 검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혼도 안했더라고요

잠자냥 2024-01-25 15:29   좋아요 1 | URL
하 외국 여성들은 이런 함정이 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ㅜㅜ
 













요즘 읽고 있는 <아버지의 편지>에서 재미난 구절이 있기에 옮겨 본다. 이 책은 유성룡, 박세당, 강세황,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 조선의 학자이자 문인들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쓴 편지를 우리말로 옮겨놓았다. 거의 모든 아버지들이 책 읽어라,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 품행을 어찌어찌하라 등 ‘선비’에 걸맞은 그야말로 ‘유교 양반’스러운 편지를 아들들에게 보내고 있는데 그중 단연코 돋보이는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박지원. 박지원의 편지를 읽다가 여기저기서 빵빵 터졌다. 박지원의 편지만큼은 정말 ‘유교를 받드는 아버지’스럽지 않았다. 인간적 냄새가 물씬 나는, 그야말로 편지다운 편지였다. 그의 편지들을 보니 연암 박지원에게 호감이 매우 증폭.

재선(在先) 박제가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試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니, 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놓겠느냐? (197쪽)

ㅋㅋㅋ 박제가 디스 ㅋㅋㅋㅋ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다' ㅋㅋㅋㅋ  심지어 안 빌려 줄 거라고 단정 ㅋㅋㅋ


《박씨가훈(朴氏家訓)》1권은 올라갔더냐? 선조의 휘자(諱字)는 푸른 종이로 가리면 어떻겠느냐? 이 책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중략)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

말린 고기 세 접
곶감 두 접
볶은 고기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200~201쪽)


아놔- 아끼는 책은 절대 다른 사람 빌려주지 말라는 소리에 완전 공감. 박제가가 시필 몇 첩 안 빌려 줄거라고 하더니 자기도 아끼는 책은 안 빌려 줌(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심정을 알리라). 더욱 놀라운 점은 고추장을 직접 담그는 박지원이라니. 상상이 가는가? 역시 실학자야! (응? ㅋㅋㅋㅋ) 요즘 며느리도 못 담근다는 고추장을 박지원은 담갔다! 게다가 그걸 또 시로 지었어요. ㅋㅋㅋ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중략)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2백여 명의 관속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주더구나. (203~204쪽)


이런 틈에도 돋보이는 박지원의 문장력과 표현력.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캬! 손자 사랑 넘치는 다정다감한 할아버지 박지원.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사람 꼴을 제법 갖추었다고 했더구나. 종간(차남 종채)의 편지에서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다.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중략) 전후해서 보낸 소고기볶음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찬거리로 했느냐? 어째서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나는 육포나 장조림 등의 반찬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추장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니,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다오. (206~207쪽)


여기서도 엿보이는 손자 사랑.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왜 자세히 말 하지 않느냐고 투덜투덜 ㅋㅋㅋㅋ 거기다가 다시 또 고추장 맛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투덜 ㅋㅋㅋ 고추장만 담그는 게 아니라, 소고기볶음도 손수 만드는 아버지 박지원, 연암 박셰프. ㅋㅋㅋㅋ


네 이름이 말 위에서 갑자기 생각났는데 궁상맞기 그지없더구나. 이는 박유선(朴諭善) 아들의 이름인데, 나와는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다. 다만 그 몰골이 아주 꾀죄죄하여 내가 그를 몹시 싫어하는데, 네가 어찌 이 이름을 같이 쓴단 말이냐? 이제부터는 종하(宗何)로 행세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자를 가인(可人)으로 하여라. (215쪽)


푸하하, 말 타고 가다가 아들 이름을 문득 생각해보니,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이름과 똑같다고 기분 나쁘니까 언능 이름 바꾸라고 종용하는 아버지 박지원 ㅋㅋㅋㅋㅋ


귀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느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껄껄. (222쪽)


귀봉이는 하인 이름이다. 그런데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니 절대로 손주(효수)를 안게 하지 말라면서 껄껄 웃는 할아버지 박지원. 박지원은 손주 '효수'를 무척 사랑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손주는 죽고 말았다고. 얼마나 슬펐을지...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연암의 편지 가운데 손주의 죽음을 언급한 편지는 없다.



암튼 <아버지의 편지>에서 연암 박지원의 소소한, 인간적인 편지는 단연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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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1-2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시간에 발췌하신 글 보고 한참 웃었어요. 특히 내가 보낸 고추장 왜 맛있단 소리 안하냐고 꾸짖는 부분 너무 재미나요 ㅋㅋㅋ 연암 선생님 무척 귀여운 분이었네요!

잠자냥 2018-01-29 14:35   좋아요 1 | URL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이 구절 정말 웃겨요. 왜 맛있단 소리가 없는지 너무나도 답답한 아버지 ㅋㅋㅋ 이 책 뒤에는 해당 편지 원문이 실려 있는데, 저 구절은 ‘甚泄甚泄‘이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어떤 역자는 ‘무람없다 무람없어‘라고 풀기도 했다는데, 매우 버릇없단 뜻이라고도 합니다. ㅋㅋㅋ

연암이 51세 때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나 보더군요. 어머니 없이 자라는 자녀들에게 고추장도 직접 담가 보내는, 그러고 나서 맛있다는 소리 듣기를 기대하는 귀여운 연암 아버지 정말 인상 깊습니다. ㅋㅋㅋ

akardo 2018-01-2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불출에 다정다감한 아버지라니 연암 선생님 엄청 귀여우시군요. 친근감 듭니다.ㅋㅋㅋ 이런 얘기 좋아해요.

잠자냥 2018-01-29 15:2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연암의 뜻밖의 모습을 발견한 재미난 독서였습니다. ㅎㅎ
 
국화 밑에서
최일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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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젊은 작가 위주의 한국 문학계에서 최일남의 이 소설집은 무척 낯선 경험을 하게 해준다. 64년 동안 글을 쓴 노작가가 전하는 노년의 실존과 삶- 거기에 이런 단어가 다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어 말맛이 진수성찬으로 펼쳐진다. 등장인물의 대화로 엿보는 인문학 지식의 깨알 재미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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