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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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 오래된 과거와 눈부시게 변화하는 현재가 공존하는 신비롭고도 열정적인 도시 이스탄불, 그곳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이야기.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마음의 낯섦‘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고 있지 않을까. 보자 장수 메블루트와 함께 이스탄불 곳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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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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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그 사람은 나를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아침마다 보지만 그에게 나는 그 앞을 날마다 지나치는 수백 명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 그 점포에서 물건을 산 적이 있던가? 아, 단 한 번, 정말 목이 말랐던 어느 날 생수 한 병을 산 게 고작이었다. 그 사람은 매우 비대한 몸집으로 작은 상자와도 같은 그곳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다. 비대한 몸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제나 검고 커다란 원피스 차림이다.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종일 지하철 가판대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답답하지는 않을까 공기도 나쁠 텐데, 숨 막히지는 않을까. 미래가 있을까..... 이런 오만한 생각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부디 그 작은 상자 속에 다시 갇히는 일이 없기를, 어디론가 조금은 자유로운 공간으로 날아갔기를. 그녀뿐만이 아니다. 집 전철역 근처에는 신문 가판대와 비슷한 크기의 공간에서 아침부터 구두를 고치는 구두수선공도 볼 수 있다. 한 평 남짓한 그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종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람은 어떤 풍경, 어떤 모습일까.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을 읽노라니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담배 가게 소년>에는 그들처럼 그 작은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며 세상을 배운 소년이 있다. 그의이름은 프란츠 후헬. 엄마의 넉넉한 사랑 속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던 프란츠는 엄마의 부유한 애인의 죽음과 함께 도시로 나아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이 빈의 한 담배 가게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고향을 떠나 대도시 빈에 첫발을 내딛은 프란츠는 악취와 소음 속에 어지럽기만 하다.



“젊은이 어디가 안 좋아요?”
“아니에요.” 프란츠가 얼른 대답했다. “그냥 이 도시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래요. 악취도 조금 나고요. 아마 배수로에서 나는 거겠죠.”
 “악취가 나는 곳은 배수로가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세월이에요. 말하자면 부패한 세월이죠. 부패하고 타락하고 황폐해진 세월!”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 20쪽)


어쩔 수 없다. 도시에서의 생활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살아가야 하므로. 담배 가게 주인 오토 트르스니에크는 프란츠에게 이런저런 일을 가르치면서 한 가지 특별한 임무를 준다. 모든 신문을 샅샅이 볼 것. ‘올바른 신문 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담배 가게 단골들은 가게 주인에게 온갖 적절한 조언과 정보를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신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게 오토의 주장이다.

이렇게 담배 가게에서 프란츠는 신문을 읽고 담배와 신문을 사러 오는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도시 생활에 젖어들어간다. 그러면서 서서히 성장한다. 프란츠가 세상을 배우는 수단이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였다면 현실성은 조금 떨어질 것이다. 신문도 신문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빈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담배 가게 손님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중에는 물론 10대 소년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랑, 주체할 수 없는 사랑도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평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조금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담배 가게 손님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프로이트의 등장에 프란츠도 놀랐겠지만 나 또한 어라? 하면서 자세를 고쳐잡고 읽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소설이 조금은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궁금해진다. 오로지 픽션이라면 좀 싱거울 것 같다(이 책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프란츠는 이 특별한 손님에게 즉각 매료당하고, 프로이트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과 달리 세상에 찌들지 않은 프란츠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첫사랑 아네스카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프란츠는 프로이트 박사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정신분석학자로부터도 뾰족한 답은 얻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조언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담배 가게 소년>은 이렇게 프란츠와 프로이트의 색다른 우정, 프란츠와 아네스카의 사랑, 프란츠와 오토가 운영하는 담배 가게라는 작은 세상을 둘러싸고 서서히 광폭해지는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 등 그즈음 격변하는 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또 광포한 시대를 살아가고 견뎌내는 온갖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 세태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다만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란츠가 뭐랄까 좀 평면적인 인물 유형이라 주인공에게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착하고 순수한 소년이랄까. 어떤 순간에는 좀 뒤틀리기도 하고 내적 갈등도 과하게 겪었다면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물론 아네스카에게 그런 면모를 살짝 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곧 가라앉는다. 아직 미성년인, 덜 갖춰진 예민한 성정의 10대 소년이라면 좀 더 난폭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들, 아니 엄마와 주고받는 편지들도 ‘지나치게 착하고 아름답기만’하니까 어쩐지 낯간지러워지기도 한다.

아네스카에 대한 묘사도 물론 프란츠의 눈으로 그렸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해 보인다. 매우 쉽게 사랑을 주고 또 다른 남자에게로 쉽게 날아가는 보헤미안 여자. 어찌 보면 그저 전형적인 ‘나쁜 여자’ 정도로만 그려진 점도 아쉬웠다. 프란츠의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 느낌이랄까. 프란츠도 아네스카도 조금 더 입체적 인물로 그려졌다면 그들의 삶과 고민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안타깝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이 작품에 그려지듯이 이토록 좋은 사람일까? 이런 의구심도 든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난 왠지 프로이트가 인간으로서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러나 구스타프 융 등 그의 제자들과 있었던 이런저런 일화를 보면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척 성마르고 매우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한낱 시골뜨기 소년 프란츠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따스(?)하게 나온다니 살짝 괴리감이 들었다. 차라리 괴팍한 면이 더 두드러졌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인물의 성격 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부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아마 결말은 좀 예상 밖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담배 가게 유리창 한쪽에 자신이 꿈꾼 내용을 적어 붙였던 프란츠. ‘제라늄이 밤에 밝게 빛난다. 하지만 그건 불이다. 어쨌든 늘 춤을 출 것이다. 빛이 사’ (267쪽) 라는 메모처럼 어두운 현실에서도 희망이 존재함을 이 작품은 조용히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베르트 제탈러의 작품을 읽은 것은 <담배 가게 소년>이 처음이다. 기대만큼 썩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인 <한평생>까지는 읽어볼 계획으로 책을 사두었다. <한평생>은 201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한평생>이 로베르트 제탈러의 대표작인 셈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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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장 소설을 정말 좋아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펑펑 울어댔는지. 그 뒤로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등을 읽으면서 또 가슴 찡했고 로제 마르탱 뒤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중 <회색 노트>같은 것을 보면서도 무척 감동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그렇게 인상 깊은 성장 소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읽을 때도 좋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이 필요없을 듯.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성장 소설’인 데다가 슬퍼서 눈물이 펑펑 난다니. 정말 딱이구나 싶었다. 서른 살이 넘어 이 책을 읽고 펑펑 울었다.

주인공 모모(모하메드)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엄마도 아빠도 누구인지 모르는 버려진 소년. 심지어 자기 나이도 그냥 짐작해서 알뿐이다. 자신이 열네 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된다. 그가 자라는 곳은 모모처럼 버려진 창녀의 자식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파리의 빈민가. 거기서 모모는 창녀 출신의 유대인 로자 아줌마의 손에 의해 길러지면서 자기처럼 최하층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자란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 하얀 피부를 가진 진짜 ‘프랑스인을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모모가 사는 지역에는 아랍인, 흑인, 유대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모는 자신도 언젠가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은 책을 쓰리라고 늘 생각한다.

실제로 모모가 화자인 <자기 앞의 生>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무척 우울할 것 같지만 웃기기도 하고, 엄청 슬프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에 따뜻한 불이 확 켜진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늘 생각한 소년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통해 사랑의 진짜 의미, 삶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전하는 가슴 찡한 메시지다.

폴 오스터 <공중 곡예사>

제목 그대로 이 책은 공중부양능력을 지닌 월트라는 소년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능력을 지닌!’ 이라는 대목에서처럼 만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폴 오스터는 허무맹랑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잘 써내려간다. 물위를 걸어 다닐 수 도 있고 공중에 떠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원더보이 월트- 이 소년이 그렇다고 태어날 때부터 이런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월트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가난하고 비참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예후디라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또 그를 사부로 모시면서 갖은 고생과 고된 훈련 끝에 공중부양능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중부양능력을 지닌 원더보이 월트로 서서히 이름을 날리면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다. 그래서 월트가 행복하게 살았냐고? 월트가 그 특이한 능력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아마 이 소설은 동화 혹은 만화 같은 소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월트의 삶의 여정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주인공이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내가 살아온 인생, 또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들에 대해 다시금 되짚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들었다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알 듯 모를 듯한 감동. 그게 바로 <공중 곡예사>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뜻한 방향으로 가도록 한번쯤은 노력해 볼 만 하다고 원더보이 월트는 말한다.

아멜리 노통브 <사랑의 파괴>

주인공은 일곱 살 난 꼬마다. 베이징의 외인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꼬마는 그곳의 각국에서 날아온 아이들과 공동의 적을 만들고 전쟁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고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를 가진 성장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처음엔 정찰병으로 전쟁놀이를 가장 즐기고, 말을 타며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소녀에게 한눈에 반하는 장면을 보고 이 꼬마가 분명 남자 아이려니 했는데, 그 꼬마 또한 여자 아이이다. 즉 이 소설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이야기다. 노통브가 저자 후기에서도 밝혔지만 자신이 베이징에서 겪은 일을 한 치의 거짓 없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소설 속 이탈리아 소녀는 노통브에게 ‘몇 가지 사실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항의했다는 후문도 적혀있다.

어린 시절에는 보통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주위 친구들을 동경한 경험이 한두번쯤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꼬마 역시 이탈리아 소녀 엘레나의 황홀한 외모, 도도한 태도에 열을 올렸으리라. 이 일곱 살, 여섯 살 소녀들의 사랑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또 그와 반대로 잃을 수 있는지 등등 사랑에 관해 알고 싶고 정의내리고 싶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해서도 이 책은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연합군을 만들고 동독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 다시 동독 아이들과 연합하고 또 다른 적을 찾아 나서는 과정 등등이 어른들이 벌이는 진짜 전쟁의 모습 그대로를 축소하여 보여준다. 전쟁과 사랑에 관한 일곱 살 꼬마의 시선이 놀랍도록 통찰력 있고 영악해서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노통브의 소설은 읽고 나면 뭔가 가슴이 쿵하는 강렬함이 있다


위기철 <아홉살 인생>

별 생각없이 읽었다가 좋은 기억으로 남은 책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막 웃었고,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 여민이의 허풍쟁이 친구인 신기종의 뼈있는 거짓말에 공감하면서 이 소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읽었을 법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여민이는 제제처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제대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아이고, 또 제제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숲을 갖고 있다. 물론 제제의 현실이 더욱 비참하지만.....

이 작품에서 무척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다면 주인공 여민이보다 그의 친구로 나온 허풍쟁이 신기종이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은 거짓말 같고 유치해 보이지만, 사실 삶의 진실(사람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월급기계라고 부르거나, 이 월급기계가 하는 일은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구분하는 일이라거나, 싸움은 늘 힘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이긴다거나 등등. 이 꼬마 허풍쟁이의 말에는 너무 뼈아픈 삶의 진실이 숨어있어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한편으로는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라는 골방철학자의 말이 왜 그렇게도 가슴에 와 닿던지!

성장 소설들이 큰 감동을 주는 까닭은 어린 아이들의 눈에 비친 고달픈 삶의 현실이, 인생은 정말 살기 만만하지 않구나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이 세상은 한 번쯤 뜨겁게 살아볼 만하다는 희망을 던져주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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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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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던 일상에 찾아오는 작은 균열의 순간을 잘 포착한 단편들. 그리고 그 균열에는 늘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갈등이 따른다. 주인공들은 잠시 극렬하게 갈등하지만 그 선택은 늘 안정적이다. 그렇기에 더 현실적이다.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스케치하듯 그려낸다‘는 단편 미학을 잘 살린 수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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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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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일이다. 그 기억은 유년 시절 내내 또렷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말 리어카’라는 것이 있었다. 아저씨가 말이 매달린 리어카를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코흘리개들한테 100원씩 받고 10분 정도 말을 태워주는 그런 거였다. 요즘 이 말 리어카는 좀처럼 볼 수 없고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옛 시절을 그리는 장면 속에 추억처럼 등장하고는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말 리어카를 보면 나는 어김없이 어린 날의 공포가 떠오른다. 나는 이 말 타기를 좋아해서 동네에 말 리어카가 오면 신나게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초등학생 정도만 되도 덩치가 커져서 이 말은 작게 느껴진다. 때문에 초등학생이 이 말을 타는 것은 어쩐지 좀 우스워진다. 나 또한 초등학교 입학 전에만 말을 탔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동생들이 말을 탈 때면 조금 부러운 눈으로 그 주위를 맴돌곤 했다.

그런 오후 중 하나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말 리어카를 봤다. 아홉 살 즈음이었다. 그 말 리어카에는 풍선, 정확히 말하자면 비치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타다가 손으로 그 풍선을 툭툭 치고는 한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말을 타지도 않으면서 그 풍선을 툭 쳤다. 리어카 앞을 지나가다가 위에 매달린 풍선들을 하나씩 툭툭툭 친 것이다. 말을 타지 못해서 심술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저 장난이었을까.

그런데 이윽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말 리어카 아저씨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들더니 나에게 던지려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가운데도 어쩐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못하던 나였지만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얼마쯤 위협하다 말겠지 했던 아저씨는 계속 돌을 들고 쫓아왔다. 나도 내리 달렸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한테 풍선 좀 쳤다고 저 큰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풍선을 친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죽기 살기로 달렸더니 어느 순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워낙 말이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어도 집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뒤로 더 이상 그 리어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말 리어카가 보이면 멀찍이 돌아오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그즈음에야 그 아저씨가 그토록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정신지체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그가 보통 어른들과는 달리 판단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공포는 또 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그 돌덩어리를 내게 던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묘하게도 어린 시절 말 리어카 아저씨와의 작은 소동(?)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툭툭 쳐댔던 풍선. 순간 몹시 화가 난,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자의 난폭한 행동. 이런 작은 우연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와 그 순간 정말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방향으로 달라졌을까? 그리고 또한 그 아저씨의 인생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돌덩어리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삶에는 이렇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 아니 조금 맹랑한  실수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말로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어찌 알았으랴. 아이로서 자기 의사를 확고하게 밝히고 싶었던, 마음대로 뭐든 결정해 버리는 부모님에게 작은 복수 또는 반기를 들고 싶었던 그 생각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줄이야. 더욱이 자기 삶만 바뀐 게 아니다. 부모님은 물론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서 책장을 숨 가쁘게 넘긴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로는 루시의 삶과 그 부모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어서 먹먹해진다. 삶이 다 이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 곳곳에서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몹시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는 아닐지언정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른다. 루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유형지에서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없이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삶의 길을 잃어버린, 방향을 상실한 루시 앞에 우연히도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루시를 만나게 된다. <루시 골트 이야기>는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레이프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레이프처럼 진짜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린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의 길을 잃고 스스로를 유폐하는 형벌을 내린다. 어디 루시만 그러할까. 그녀의 부모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이런 영향을 끼치게 한 ‘그 사람’도 길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 어둡고 쓸쓸한 길에도 과연 빛은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루시 골트 이야기>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한 번 꺾여버린 인생은 쉽사리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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