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피터 싱어 지음, 박세연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지난해 사두었던 피터 싱어의 <더 나은 세상>. 새해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목부터가 왠지 그렇지 않은가? 1월 1일부터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1월에 읽었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새해에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 책의 77번째 이야기는 ‘새해 결심을 지키려면’이다. 슬며시 웃음이 난다. 피터 싱어는 사람들이 새해 결심을 잘 지키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실천하기 힘든 것들만 목표로 삼기’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맞다. 나부터도 올해 크게(?) 마음먹은 것 중 하나가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 벗어나기(산 책은 다 읽고 사자), 굿즈 때문에 책을 사지 말자였는데, 이건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목표였고 고작 2월인데도 이미 그 결심은 망했다. 그놈의 굿즈 때문에 사들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사고, 사고 또 사고 있지 않은가!

피터 싱어는 이렇게 새해 목표를 세우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원래 인간은 그렇다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다독인다. 소크라테스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단다. 사람들이 새해 계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무엇이 좋은지 잘 알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감정이나 욕망에 압도당하게 된다’고 했단다. 문제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내면의 본능적인 측면이 우리의 이성적인 측면을 지배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365쪽). 결국 새해 결심을 잘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본능에 지배당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지금 당신도 바로 할 수 있는 쉬운 방법 한 가지를 제안한다. 피터 싱어는 ‘실천’ 윤리학자로 유명하다. 단순한 ‘윤리’ 학자가 아니라 ‘실천’에 방점을 둔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의 윤리가 이렇다 저렇다 책상 위에 앉아서 그저 철학적 사색을 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들을 제안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와 같은 책에서도 이미 사람들에게 기부를 실천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던 그는 이번에도 역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세계의 빈곤은 과연 누구의 몫인가 물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한다면 우리 사회는 전 세계 빈곤층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중략)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으면서도 소득의 작은 일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부자에게는 기부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는 1퍼센트라는 최소한의 기준조차 지키지 않는 부유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바라봐야 한다. (중략) 세계적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하는 노력이야말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는 믿음을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해야 한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어도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 그 정도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박한 빈곤 문제,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해준다. (195쪽)


자기 소득의 1퍼센트만 기부로, 행동으로 직접 옮겨도 이 세상에서 빈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퍼센트도 아니고 1퍼센트다. 10퍼센트라면 부담스럽다. 지키지 못할 새해 결심처럼 돼 버리기 쉽다. 하지만 1퍼센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쩐지 실천하기 쉬어 보이지 않는가?

피터 싱어는 기부하는 행위 또한 널리 알리라고 말한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꾸준히 접할 수 있던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명인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기부행위를 ‘밝히고서’ 하는 것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숨기고 있던 기부행위가 우연히(!) 밝혀졌을 때 더 찬사가 따라붙는다.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행동에 그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정말 동기가 그렇게 중요할까?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피터 싱어는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부 뒤에 숨겨진 동기의 순수성에 그렇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선행을 실천하기 위해 기부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렇게 선행을 알리는 행위는 장점이 더 많다.


사람들이 자선활동을 결심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다른 사람도 똑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중략) 우리는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침묵하는 기부는 장기적으로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사람들이 기부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돈을 쓰고자 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203~205쪽)


자,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또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올해부터는 자신의 소득에서 1퍼센트라도, 아니 0.5퍼센트라도 누군가를 돕는 일에 써 보면 어떨까? ‘우리는 영웅이 아니어도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 그 정도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박한 빈곤 문제,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해준다’는 구절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2장 ‘동물과 윤리’도 흥미롭다. 부모님 집에서 개 한 마리를 가족 모두가 함께 돌보면서 키울 때는 그렇게까지 동물의 권리에 관심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독립해서 어쩌다 보니 길냥이들을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단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존재, 길냥이들의 척박한 '묘생'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물권이나 인간에 의해 망가지는 그들의 삶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인권보다 동물권이 먼저’냐고. 마치 저 먼 나라에 있는 아이에게 기부를 하면 한국의 결식아동부터 도우라고 비아냥대는 논리와 비슷하다. 피터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외에 수많은 종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삶의 행복을 영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로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74쪽)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심지어 사람들이 고통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쉬운 물고기조차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마치 이 지구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동물들의 종을 나누고는 그들 가운데 어떤 존재는 고통을 느끼고, 또 어떤 존재는 느끼지 못할 것이라 섣불리 판단한다. 그러고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멋대로 죽이고 때로는 학대한다. 피터 싱어는 이런 논리로 일본의 고래잡이도 비판하다.


고래를 잡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래로부터 얻는 모든 것은 잔인한 살육 없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절박한 필요성 없이 무고한 생명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일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며, 고래잡이는 비윤리적인 산업이다. (중략) 고통을 느끼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행동을 특정 문화의 가치로 정당화 할 수 없다. (71~73쪽)


비단 일본만의 문제일까? 위 구절에 ‘고래’라는 단어 대신 ‘개’를 집어넣어보라. 보신탕 먹는 행위, 보신탕을 먹기 위해 ‘개’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행위를 언제까지 ‘우리의 전통 문화’라는 가치로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개뿐만이 아니라, 돼지, 소, 닭 등등 다른 동물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인간을 위해서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할 까닭은 없다. 이런 책을 읽으면 채식을 마음먹다가도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무너지고 마는데(아직은 지키기 어려운 결심;_;) 언젠가는 꼭 채식하는 사람이, 철저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채식주의자나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좋은 자연 환경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87쪽)


5장 ‘섹스와 젠더’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계속 펼쳐진다. 일일이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피터 싱어가 주장한 내용만을 조금 옮겨 본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그 행위와 관련하여 어떤 측면이 비도덕적이라는 말인가? 동성애 금지와 관련된 사안의 핵심은 국가가 법률로 개인에게 도덕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법률은 동성애가 비도덕적이라는 선입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동성애는 비도덕적인가’, 174쪽)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성별을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이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 인터넷 세상에서는 상대의 성별을 모른 채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중략) 성별을 요구하는 관습은 다양한 역할과 지위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으려 했던 시대의 유산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성별을 묻는 관습을 없애면 여성 불평등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또한 육아휴직과 관련해서 남성들이 겪게 되는 부당한 차별도 막을 수 있다.  (‘생물학적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런 책을 읽거나, 피터 싱어와 같은 이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때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희망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 결국 조금씩은 변화해왔다. 동물해방 운동이 처음 태동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에는 어떤 대형 동물보호 단체도 닭장 사육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지 않았다’(63쪽). 하지만 이제는 이 땅에서조차 닭장 사육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소비자는 자연에서 풀어놓고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변화이고 진보가 아닐까? 지난해는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렸고, 요즘은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또한 진보를 향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말했다.

“신중하고 열정적인 시민들로 이뤄진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세상은 지금까지 그렇게 변해왔다.” (6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