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우체국>처럼 ‘헨리 치나스키’가 주인공이고 <여자들>에서 그는 ‘우체국’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우체국>의 치나스키가 30대라면 <여자들>의 치나스키는 50을 훌쩍 넘었고, 작가로서 어느 정도 밥벌이를 하고 살 정도가 되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도 상당하고 시를 쓰는 치나스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낭독회를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치나스키는 집세도 내고 좋아하는 술도 마음껏 사마시면서 살 수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정말 야하다.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매 페이지마다 ‘섹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이쯤 되니 ‘섹스’라는 단어나 여자 및 남자 성기를 일컫는 그 단어가 ‘안녕’이라는 단어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부코스키의 <여자들>을 읽노라니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어떤 여자들은 정말 ‘작가’라면 환장을 못하는 것인가? <여자들>의 서문에 부코스키는 이 작품은 허구이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글쎄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냥 부코스키의 분신인 치나스키가 여자들을 만나고 그녀들과 끊임없이 사랑(???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섹스)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수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모두 치나스키를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몇 년 이상씩 거쳐 간다. 치나스키가 묘사하는 여자들은 조금씩 달라 보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똑같다. 바로 그녀들이 치나스키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여자들은 모두 치나스키 작품을 좋아하고, 치나스키 글에 반했고, 그래서 치나스키에게 편지를 쓰거나 집으로 찾아오거나 낭독회에 왔다가 치나스키에게 번호를 주고 자기 집을 알려준다.

대부분 치나스키가 ‘작가’라는 사실에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를(정확히는 ‘몸을) 던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의 글을 좋아한다.’ ‘당신 작품이 마음에 든다.’라더니 악수를 하듯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듯 섹스를 하고 치나스키 곁에 머물다 떠나간다. 치나스키는 부코스키와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렇게 치나스키(부코스키)를 거쳐 간 여자들 중에는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여자들도 있다.

어떤 여자들은 부코스키 책을 훔쳐가 경매에 올려놓기도 하고, 어떤 여자들은 부코스키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경매에 내놔 돈을 벌기도 했고, 어떤 여자는 부코스키 두상을 본떠서 여기저기 경매에 올려놔 돈을 벌기도 했고, 또 어떤 여자는 부코스키와의 관계를 글로 써 돈을 벌기도 했단다. 이런 걸 노리고(?) 접근한 여자들도 있을 테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여자들은 그렇게 ‘작가’라는 직업에 약한 것일까? 부코스키 뿐만이 아니라 조르주 심농을 보라. 그는 뭐 만 명 이상의 여자와 잠을 잤다지 않나? 심농이 만약 작가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많은 여자를 이른바 ‘낚을’ 수 있었을까?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여자들은 예술가에게 약한 것 같다. 록 스타에겐 여자들이 줄줄 따르지, 피카소 같은 화가에게도 여자가 많았지, 아! 홍상수 영화만 보더라도 ‘영화감독’이라니까 불나방처럼 몸을 던지는 여자들이 숱하게 나온다.

모든 여자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여자들은 ‘예술가’가 좋은 걸까? 아니면 그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의 한 부분이 되고 싶나?(실제로 부코스키 작품에 보면 몇몇 여자들은 ‘나중에 나와의 이런 이야기를 쓸 것이냐?’라거나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뭐 물론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면 그냥 ‘유명인’이 좋은 걸까? 명품을 좋아하는 심리처럼 사람도 일단 유명해야하고, 유명한 사람을 만나야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진심으로 치나스키(부코스키)를 좋아한 여자들도 많았겠지만 처음에는 그의 글 때문에 치나스키(부코스키)에게 반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이 꼭 그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거짓말로 꾸며댈 수 있는 것도 글이다(물론 부코스키의 글은 너무할 정도로 솔직하다). 글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글이 곧 사람’이 되고마는 그 사고의 과정이 여전히 궁금하다. 만일 부코스키가 계속 우체국에서 우편배달부'로만' 일했다면 이렇게까지 여자를 쉽게 얻을 수 있지는 않았을 텐데(물론 이 또한 나의 편견일 수 있다)…. 난 아무리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해도 그 글이 좋을 뿐이지, 글쓴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드물던데.... 부코스키의 '여자들'은 정말 신기하다.




언제나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낭독회를 했다고...ㅋㅋㅋㅋ Henry Charles Buko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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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1-1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돌아이 작가 찰스 부카우스키,
정말 못 말리는 작가였네요.

열책에서는 어케 표지를 색깔만 바꾸어서리
세 권을 날로 잡숫는지 대단한 신공이었습니다.

호밀빵도 사두기만 하고 못 읽고 있네요.
빨랑 읽어야겠습니다.

잠자냥 2018-01-17 17: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슈퍼돌아이‘에 웃었습니다. ㅋㅋㅋㅋㅋ 적절한 비유입니다. 호밀빵 재밌어요! ㅋㅋ 요즘 이책저책 읽느라 정신 없으신 것 같던데 ㅎㅎ 조만간 호밀빵도 추가요!!

Falstaff 2018-01-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코스키, 구라일 확률 90%에 만원 겁니다.
ㅋㅋㅋㅋ 저렇게 술 마시고 그리 많은 여자와 밤을 지냈지요. 그냥 잠만 잔 거예요!!!
그리고 심농의 최하 만 명의 여자와? 흐흐흐... 1/10 정도도 믿지 않습니다. 남자새끼들 그런 방면에 구라 때리는 거, 못말려요. ㅎㅎㅎ 만 명의 여자들과 단 하루 씩 자더라도 하루도 쉬지 않고, 부모님 제사도 안 모시고 꼬박 27년이 넘게 걸리는데요, 그렇게 해대다가는 제 명에 못 죽습니다. ㅋㅋㅋ
˝작가˝라는 타이틀에 매혹을 느끼고 그게 사랑인줄 오해하는 거 아닐까 합니다.
잘 생긴 남자에 홀랑 넘어가는 거나, 돈 많은 놈한테 넘어가는 거나 뭐 비스무리...

잠자냥 2018-01-18 18:00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 같은데 .... 그럼 역시 대단한 작가들이네요 ㅋㅋㅋㅋ 왕구라쟁이들 ㅋㅋㅋㅋㅋㅋㅋㅋ
 
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심심한 두부 맛의 책. 간장을 찾았지만 끝까지 찾을 수 없었다.... 사람과 공간, 공간과 추억, 그 기억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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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는 다이어리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12월 알라딘 굿즈 중 스누피 다이어리가 심히 눈에 밟히더라. 결국 그 다이어리 때문에 책을 샀다. 쓰지 않으려고 했던 다이어리면서도 빨강 파랑 모두 예뻐서 둘 다 갖겠다고 책을 최소 10만원은 넘게 샀다. 물론 한 권은 누군가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서재의 달인에 선정되는 바람에 다이어리가 또 생겼다. 그 다이어리도 곧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갈 예정이다.


내가 그토록 탐이 나서 결국 갖고 만 빨간 다이어리에는 아직 이렇다 할, 어떤 글자가 적히지 않았다. 1월에 태어난 친구의 생일,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Nothing But Thieves의 내한 공연 정도가 메모되었을 뿐이다. 아주 오래 전,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던 시절에는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새해 계획’ 같은 걸 쓰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이어리에 이런 것, 그러니까 ‘새해 계획’ 또는 ‘결심’ 따위를 쓰지 않는다. 그런 결심 같은 걸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적지도 않는 것이다. 문득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새해 결심이나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아, 그래도 올해는 ‘책을 굿즈 때문에 사지 않는다.’는 결심을 했으니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 들어 버린 것은 아니려나.

2018년 1월도 어느덧 보름이 지나갔다. 그런데 나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변화 없이 살아가고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새해라는 구분이 참 우습기도 하다. 시간은 연속으로 흐르는데 그걸 마치 선을 긋듯, 나누어서 여기서부터는 새해야, 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편리 아닌가.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가정을, 조직을, 사회를 리셋해서 다그쳐야 하는 계기가 필요한 건 아닐까. 그러니 모두가 ‘새해’라는 실체 없는 기준을 마련하고 ‘새해 결심’ ‘새해 계획’ ‘올해 목표’ 등을 세우고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여전히 게으름을 피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는 문득 이런 구절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불쌍한 인류를 괴롭혀온 개인적, 사회적 재앙을 줄줄이 몰고 다니는 환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각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러한 정신적 이상상태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에 거룩한 후광을 씌웠다.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9쪽)


 고대 로마시대의 노예상인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교육을 후원했습니다. 노예라는 인간상품 가운데 상대적으로 더 똑똑한 부류에게 의학, 철학, 그리스 문학, 음악, 과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교육을 받은 노예는 시장가치가 올라갔습니다. 요리 전문가가 된 노예는 의사, 철학자, 문학가가 된 노예보다 값이 더 비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인문학 분야의 교수에게 지급하는 보수보다 부유한 자본가가 자신의 수석 요리사에게 지급하는 보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교수가 학술원 회원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노예상인들과 달리 오늘날의 자본가들은 오로지 지적 능력의 자격을 갖추려는 의도에서만 교육의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합니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164쪽)


예전에 읽었던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마찬가지로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1930년대에 쓰인 저자의 에세이들을 묶어 놓은 것이라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러셀이 살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끊임없이 회유하게 된다.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현대 사회의 획일성/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유/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등의 에세이들로 묶여져 있다. 전체 에세이들은 각각의 주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큰 줄기는 결국, 인간이 ‘일’이라는 ‘강제 노동’을 통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원래 갖고 있던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함을 촉구한다.

적당한 정도의 노동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야하며, 부(富)가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나눠 쓸 수 있고- 그래서 많이 남는 여가 시간에는 ‘책을 쓰고’, ‘철학을 하고’,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되게 다듬고’, ‘예술적인 창작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잃어버린 인간 본성을 찾아야 한다고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이다.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 선전하는 일을 담당하는 계층의 태도는 세계의 지배 계층들이 소위 ‘정직한 무산자’들에게 늘 설교해 온 것과 거의 똑같다. 근면하라, 절주하라,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일하려는 의욕을 가져라. 심지어는 당국에 순종하라는 것까지.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맹목적으로 부지런하지는 않은가? 과연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 근면함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부지런함은 개인의 미덕이자 사회의 미덕이기에 모두가 자발적으로 따른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처해있다. 오히려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보면서 게으르다고 질책하고 비난한다. 이 사회는 대체 뭘 위한 성장인지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피곤하다. 모두가 돈벌이에 조금만 덜 부지런하고 좀 더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덜 각박해지지 않을까.

새해 결심, 계획 목표 따위가 적히지 않은 다이어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런 거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없을수록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게으름 피우는 자의 변명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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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획 목표를 많이 적어두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이 느껴져요. 괜히 내가 목표대로 잘하고 있는지 걱정하기도 하고... 작심삼일이 될까 봐 스스로를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죠. 이것도 나름 스트레스가 되더군요. ^^;;

잠자냥 2018-01-16 12: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ㅎㅎ 자기가 자기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죠. ㅎㅎㅎ 뚜렷한 목표가 많으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틀림없이 부정적인 면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케이 2018-01-17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래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계획 같은 건 안세우고 열심히 하루하루 살다보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되었네요 . ㅎㅎㅎ
계획을 안세워서 그런걸까요?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아서 여전히 계획 같은 건 안세우지만요.
(북플 디자인이 깔끔해져서 보기 좋습니다!)

잠자냥 2018-01-17 16:56   좋아요 0 | URL
ㅎㅎ 뭐 꼭 뭔가가 되어야만 잘 사는 인생인가요! ㅎㅎ 저도 회사원일뿐입니다! ㅎㅎㅎ
(디자인은 저도 보기 좋네요. ㅋㅋㅋㅋ)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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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책을 읽다가 곧잘 울었다. 눈물이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불쌍한 것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부터 맺혔다. 지금도 대책 없이 울 때가 있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여느 사람들과 좀 다르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눈물이 솟구치는 때가 많으면서도 유독 ‘사랑’이야기에는 울지 않는다. 특히나 감동적이기를, 순애보이기를, 신파이기를 작정하고 쓴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팔짱을 끼고는 비판하는 태도로 읽으니 더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꽤 감동하면서 읽었다는 사랑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린 일은 드물고, 그런 작품을 좀처럼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 내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읽으면서는 울컥 무언가가 치밀더니 정말 뜨겁게 울어버렸다. ‘라이프 에펜디’ 그의 회한과 그의 어리석음. 그의 절망과 그의 한숨. 그의 고통과 그의 눈물이 모두 나의 것인 듯 느껴져서 걷잡을 수 없었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그녀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한없이 가엾어서 눈물이 났다. 라이프와 그의 마돈나 ‘마리아 푼데르’ 두 사람 모두 애처로워서 더 슬펐다. 아, 이 어리석은 사람들….


터키 문학은 아직까지는 내게 낯선 영역이다. ‘오르한 파묵’ 정도나 알까? 그런데 나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대단한 작가임은 알겠는데, 왠지 내 취향에는 잘 맞지 않는 그런 작가 있지 않은가. 오르한 파묵이 내게는 그렇다. 그러던 터에 ‘사바하틴 알리’ 그를 이렇게 뒤늦게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 아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찾아왔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라이프가 마리아의 자화상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탕달 신드롬’과도 같은…. 그런데 내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읽으면서 라이프가 마리아의 자화상을 보면서 받았던 그런 충격을 고스란히 느꼈다면 과장일까.


사바하틴 알리, 그는 왜 이토록 늦게 찾아왔을까? 감시와 검열이 심한 체제, 터키 정부로부터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온갖 억압을 당하던 그는 조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자, 국경을 넘어 불가리아로 망명을 결단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터키 정보국 소속으로 짐작되는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때는 1948년.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출간한지 5년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고 시신 또한 죽은 지 두 달이 지나서야 발견되었지만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반세기 이상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 터키 출판 시장에서는 여러 해 1위 자리에 올랐으며 2016년에는 영미권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11월,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보면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라는 제목은 독자가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치명적인 여인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다가 결국은 어쩐지 버림 받는, 왠지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을 한 불쌍한 남자의 시점으로 그려진 이야기일 것 같다. 나조차도 제목과 책표지를 봤을 때는 이런 예상을 했고 그런, 어쩌면 진부한 사랑이야기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는 터라, 처음에는 이 작품을 외면했다. 그런데 알라딘 추천 시스템이 자꾸만, 이 책 한 번만 눈여겨 봐달라고 들이미는 게 아닌가. 아, 정말 귀찮게 하네, 어떤 작품이기에 그러는지 자세히 정보를 읽다 보니,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를 소개하는 글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발동했고, 미리보기로 책을 몇 장 넘겨 읽다 보니, 왠지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단 몇 쪽 만으로도 문장이라든가, 그 문장 곳곳에 담긴 의미가 ‘그저 단순한 사랑이야기’는 아닐 듯싶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예상은 꼭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절반쯤 읽었을 때 이미 올해의 발견이다, 발견, 이런 흥분에 휩싸였다.


은행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한 나(‘라심’)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번번이 퇴짜만 맞고 곧 완전히 곤궁한 상태가 되고 만다. 이때 우연히 만난 옛 친구 ‘함디’의 도움으로 새 일자리를 얻게 되고 그곳에서 동료로써 ‘라이프 에펜디’를 알게 된다. 그를 지켜볼수록 그가 남들과는 무척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라심. 어느 날 그가 그린 그림을 우연찮게 보고 나서는 ‘라이프 에펜디’에 대한 호기심은 호감으로 변한다. 그렇게 서서히 ‘라이프’와 가까워지면서 그가 어쩌다 그토록 삶에 무심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하여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존재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그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라이프가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음을 열게 된 존재인 라심에게 자신의 노트를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 노트를 통해 라심은 라이프의 지나간 삶을 만나게 된다. 그 노트 속에서 라이프와 마리아의 통렬하고도 절절한 사연이 펼쳐진다. 이렇듯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액자식 구성인데, 중심 이야기인 라이프와 마리아의 사연은 말할 것도 없고, 액자 밖 이야기 라이프와 라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처음에 라심은 라이프를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아간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의 남들과 조금 다른 면모(삶을 초월한 듯한 태도)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호기심 및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라이프와 마리아의 관계에서도 조금 모양을 달리할 뿐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라이프가 마리아를 우연히 알게 되고 호감을 느끼는 장면들이 라심이 라이프에게 느끼는 그것과 강도만 다를 뿐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가련하고, 심지어 가장 바보 같은 사람도 깜짝 놀랄 만큼 복잡한 영혼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러한 내면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섣불리 이해하고 손쉽게 판단’하고 만다. 라심이나 라이프나 그들 모두 그렇게 라이프를, 또는 마리아를 쉽사리 자신의 잣대만으로 판단하고 다가선다. 어쩌면 마리아 또한 라이프에게 그러했으리라. 이렇게 시작된 관계는 그들 인생에 저마다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라심에게 라이프가 그러했고, 라이프에게는 마리아가, 마리아에게는 라이프가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시선으로 호감을 느끼며 다가서고, 인간관계를 맺어서 그 관계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 그들은 행복감에 젖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하지만 그 관계가 틀어지는 것 또한 이처럼 섣부른 자기만의 판단(오해 또는 망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라이프가 바로 그런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결백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배신이며, 그러한 죄악을 저지른 나는 절대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291쪽)을 비로소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유폐해버리지만 이미 너무나도 늦었다.

‘라이프’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이 바보! 하면서 가슴을 치게 된다. 그 가운데 압권은 그가 다시 터키로 돌아가기로 하는 장면이다. 진심으로 이 답답한 사람을 어이할꼬 싶어진다만, 동양 그것도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 남자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마리아와 그런 면에서 또 한 번 좁힐 수 없는 차이 또는 간극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바로 그 장면에서 대부분은 그의 선택을 말리고 싶어지리라. 왜냐하면 그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사건은 결국 운명이 우리를 희롱하는 ‘진부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임을 모두가, 어쩌면 라이프 그 자신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진부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에 희롱당하는 장난감일 뿐이며, 진짜 삶은 이런 평범하고 하찮은 사건 조각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우리의 논리와 세상사의 논리는 절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여자가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창틈으로 석탄 부스러기가 날아와 눈에 들어가고, 여자는 무심하게 눈을 비빈다. 이렇게 평범하고 사소한 사건들이 맞물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다. (250쪽)



라이프가 그토록 마리아를 사랑했음에도 끝내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불멸의 그 마돈나를 잃고 마는 까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멀게 하는’ 그 평범하고 사소한 사건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 삶 또한 그러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통렬하게 가슴을 울린다. 그 어느 누구에게나 삶에서 한 번쯤은 ‘마돈나’와 같은 존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한 순간의 ‘석탄 부스러기’와도 같은 사소한 일들로 그런 존재를 가졌다가도 놓쳐버리고 만다. 거기에서 삶의 온갖 비애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단순한 ‘러브스토리’로만 읽히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의 ‘마돈나’와도 같은 존재를 단 한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던 사람,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행복하게 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125쪽) 이런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바하틴 알리의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절대로 쉽게 읽고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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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1-2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어도 눈시울이 따뜻해지는데요... 맘도요...

잠자냥 2018-01-24 14: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ㅎ 그런데 책은 아마 훨씬~~ 좋으실 거예요.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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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 정말 이토록 슬프고 통렬하게 아픈 이야기는 진심 오랜만이다... 이렇게 좋은 작품이 이제야 찾아왔다는 데 안타까움을, 아니 이제라도 찾아와주었음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말이 필요없는 ‘불멸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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