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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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이 남성들로 인해 어떻게 산산이 파괴되어 가는지 낱낱이 해부한 책. ‘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448쪽). 여성혐오 범죄의 본질을 집요하게 추적한, 가슴 아픈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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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악마 창비세계문학 27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조혜경 옮김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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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바다에서는 끊임없이 보물이 나온다. 물론 보물을 건지는 일은 전적으로 탐험가의 손에 달렸다. 탐험가가 보물이 파묻힌 곳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보물을 건질 확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을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서 보물이 있을 만한 지역을 골라본다면 러시아는 절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널리 알려진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이름을 나열하는 일이 지금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러시아 작가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당신 또한 적지 않은 이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표도르 솔로구프. 이번에는 이 이름을 그 바다에서 건졌다. 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가장 큰 소감은 ‘러시아라는 바다, 문학의 보물창고’ 와도 같은 그곳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런 작가가 숨어(?) 있었다니! 아니, 숨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을 테니까. 이 새로운 작가를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뒤표지에 쓰인 문구 때문이었다. ‘인간 내면의 비열한 악마성과 추악한 현실 속, 악의 형상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잇는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


책장을 펼치자마자 의미심장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난 사악한 여자 마법사를 불에 태우고 싶었다.’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착한 소설, 감동으로 독자를 감화할 작품은 아니라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1장부터 <허접한 악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고약한 소설’이다. 시작부터 인간의 온갖 비열하고 추접한 근성이 여과 없이 폭로된다. 아니, 폭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어떤 장소에 이런 인간들만 모여 있다면 정말 단 한 시간이라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런 속성을 지니지 않았던가? 단지 그러지 않은 척, 잘 포장하고 있을 뿐.


그런데 <허접한 악마>의 인물들은 그런 포장을 모른다. 악하고 못된 모습 비열하고 야비하고 저속하고 이기적인 온갖 모습을 ‘그냥’ 드러낸다. 주인공인 중학교 교사 ‘뻬레도노프’는 그중 단연 독보적이다. 이 인간은 장학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꿈이다. ‘그는 어찌 되었든 간에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고 사람들을 싫어했으며 자신의 이익 및 만족과 연관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19~20쪽)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책이 보이도록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어떠한 견해도 없었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88쪽)은 그런 인간이다. 다음과 같은구절을 읽노라면 그의 인간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뻬레도노프는 천상에서 전해지는 이런 낯선 풍경 가운데 더럽고 무기력한 지상의 거리들과 집들이 풍기는 나른함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지쳐갔다. 그는 숭고함도 지상에서의 어떤 위로도 찾지 못했다. 지상의 고독 가운데에서 두려움과 애수에 지친 악마처럼 죽은 자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은 무뎌졌고 그의 인식은 타락과 파멸의 수단이 되었다. 그가 인식하기 이전에 그에게 도달하는 모든 것은 비열하고 더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 그는 깨끗하고 곧은 기둥 옆을 지나갈 때면 그것을 구부리고 더럽히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그 기둥을 뭔가로 더럽힌 것을 발견할 때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깨끗하게 씻은 중학생들을 증오했고 그들을 괴롭히고 싶어 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더 잘 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물건도 없었다. (143쪽)


뻬레도노프는 자기 능력으로 장학사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비열한 인간은 생긴 건 또 반반한지 여자들이 줄을 선다.  늙고 못생긴 ‘바르바라’ 또한 그런 여자 중 하나이다. 바르바라는 뻬레도노프의 장학사 자리를 꿰차고 싶어 하는 그 속물근성을 훤히 꿰고 있다. 공작부인과의 확인되지 않은 친분을 이용해 ‘공작부인이 자신과 결혼하면 당신에게 장학사 자리를 약속’하셨다고 뻬레도노프를 흘린다. 뻬레도노프는 그 이야기에 물론 솔깃하고, 바르바라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이런 그들 사이에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보통 다음과 같다.



“주근깨 아가씨요? 개구리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입이 큰 아가씨죠.”
바르바라는 점점 악의에 가득 차서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너보다 아름답지. 그 여자를 택해서 결혼할 수도 있어.”
뻬레도노프가 말했다.
“그 여자와 결혼한다면 그년의 눈깔에 염산을 확 뿌려버릴 거야!”
바르바라는 분노에 가득 차서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면서 말했다.
“네게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데.”
뻬레도노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뱉지 마!”
바르바라가 소리쳤다.
“뱉을 건데.” (33쪽)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연인(?)의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작품 속에서 내내 거의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결혼 상대자로서 1순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뻬레도노프는 장학사 자리를 노리는 게 가장 크고, 바르바라는 늙고 못생긴 외모로 누구 하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처지에 뻬레도노프 정도의 남자를 ‘장학사’ 카드로 낚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쉽사리 그를 포기하지 못한.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는 과연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뻬레도노프라는 인물 그 자체에 있다. 이 인간은 교사라는 직분을 그저 중학생들을 괴롭히는데 쏟는다. 가정 방문까지 하면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부모 앞에서 해당 학생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그 학생이 부모에게 혼나는 광경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즐긴다! 게다가 바르바라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있는 고양이도 곧잘 학대한다. 이렇게 혐오스러운 캐릭터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면서도 이 인간은 바르바라가 자신을 독살할지 모른다는 망상, 동료가 자신의 지위를 노려 자기의 치부를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날마다 시달린다. 가학과 피학 성향은 물론 비루한 속물근성에 병적일 정도의 피해의식까지! 정말 인간의 온갖 나쁜 습속은 그 안에 모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모습을 두루 갖춘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 속에서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허접한 악마>에 생생함을 불어넣는데 큰 역할을 한다. 온갖 악랄함을 사랑하는 뻬레도노프 그 자신이 바로 ‘허접한 악마’일 텐데,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이 인물에 크게 감탄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한편 <허접한 악마>는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로 대변되는 온갖 저열한 세계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뻬레도노프의 제자인 중학생 소년 싸샤와 자유분방한 아가씨 류드밀라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류드밀라는 한때 뻬레도노프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는데, 청순한 미소년 싸샤를 보고는 반해버려 그를 타락의 길로 이끈다. 싸샤는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타락한 인간 뻬레도노프와 반대되는 인물로 순수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도 시간이 갈수록 류드밀라와의 유희 속에서 점차 그 순수함을 잃어간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엇갈리듯 교차하다가 막판에 가면무도회라는 ‘난장판’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그러면서 인간 세계에서 순수함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속되고 허망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각자 전개해나가다가 하나로 모아서 폭발시키는 작가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허접한 악마’인 뻬레도노프를 그저 미워할 수많은 없는, 독특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인물이 곁에 있다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싫을 것 같은데, 작품으로 그의 행동을 엿보고 있노라면, 이 가련하고 허접한, ‘악마’조차 되지 못하는 비루한 인간에게 묘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이 세계를 살아가노라면 한두 번쯤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생각했을 수밖에 없는 속물적인 보통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가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랴, 누구에게 혀를 끌끌 차랴….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병적인 인물들과 함께,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의 침대를 떠날 줄 모르는 남자 ‘오블로모프’- 그리고 표도르 솔로구프의 허접한 악마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이 창조한 가장 잊기 힘든 주인공일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인물을 발견하고, 그런 인물들이 엮어나가는 온갖 사건 속에서 생의 진실을 마주하는 행운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러시아 문학을 읽는 일은 무척이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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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 귀하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긴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당신은 제게 편지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쓴 수많은 편지들을 읽고 답장을 할 수밖에 없더군요. 더욱이 당신의 일기까지 모두 읽어버린 지금, 그토록 사적인 당신의 일기와 편지를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고백할 의무를 느낍니다. 올해 가장 첫 책으로 당신의『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는 당신의 일기와 편지를 읽었군요. 어느 해를 한 작가, 그것도 당신과 같은 작가의 글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는 것은 제게는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덮을 때쯤,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다는 그 문장 ‘이것은 비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제 얼굴에는 미소와 함께 반짝이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진실로 그러했지요. 그리고 며칠 전 어느 늦은 밤, ‘요즘 몹시도 피곤하다’, ‘이처럼 심한 피로를 느낀 적은 없다’면서 ‘옷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다음 불을 끄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는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느닷없이 당신의 일기가 끝나버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펑펑 울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니 왠지 또 눈물이 흐릅니다.

당신은 그 일기를 끝으로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래 전 이미 이 세상을 등진 당신이었는데도 당신의 일기를 읽던 지난해와 올해 내내 당신은 제 주변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때문에 그렇게 일기가 끝나자 정말로 당신이 제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 마구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1월에도 12월에도 당신은 저를 울리는군요. 절대 모르시겠지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과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당신이 지내던 공간과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느 독자가 당신의 마지막 작품과 일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리라고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그 누구도 아닌 ‘존 치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겠지요.

당신의 일기와 편지를 비롯해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팔코너』같은 작품들을 10년 전의 제가, 아니 그보다 더 일찍 읽었더라면 제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봅니다. 스무 살 즈음에 당신을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까요? 8~9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제 오랜 벗 가운데 당신의 ‘다리 위의 천사’를 최고의 단편으로 꼽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주홍빛 이삿짐 트럭』이라는 오래된 책에서 그 작품을 읽고 전율했다고 합니다. 그 책은 구할 수가 없어서 저는 당신의 단편 선집이 발간된 뒤에야 그 작품을 만났습니다. 솔직히 그때의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그토록 찬탄 받는 작품이라는데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지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두 제 이해부족 탓이겠지요.

그 작품을 알려준 친구는 단편의 미학을 탐닉하는 이였고, 좋은 책을 보는 눈 또한 지녔던 터라 그를 한 번 믿어보고 당신의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편 선집 4권을 비롯하여 당신이 혹평을 받고 괴로워했던 『불릿파크』 등을 읽었습니다. 고백컨대 『불릿파크』 또한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갔고, 어느덧 저는 당신의 글이 이 땅에서 계속 출간되기를 바라고 있더군요. 그런 제게 지난해 주어진 당신의 일기와 편지는 말 그대로 축복이었습니다. 일기로 당신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된 뒤에 ‘다리 위의 천사’를 다시 읽어보니 작품 속 가족은 어쩌면 당신과 당신의 형,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높은 곳, 사람들, 천둥, 부, 명성’을 두려워했던 당신의 가족 말입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저는 서른이 넘은 뒤늦은 나이에 문학을, 훌륭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지요. 이번에 당신의 편지로 알게 된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먹고살기 위해 카피라이터에 도전하기도 했고, 젊은 시절에는 영화사 의뢰로 책을 읽고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을 하기도 했더군요.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제 눈이 반짝했습니다. 저 또한 한때 그러한 일들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살아가던 중 저도 모르게 문학을 하고 싶다는, 당신의 단편과도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이미 작품으로 성공하고, 존 치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그 나이쯤에 다다른 저는 여전히 읽고 쓰지만 한없이 모자람을 느낍니다. 작은 문학공모전에서 간혹 몇 번쯤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들으면 피식 웃을지도 모를 그런 대회이지만 그래도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아마 당신도 문학을 통해 재능을 확인하고 인정받고 또 사랑 받는다는 그 느낌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늘 좋은 작품을 쓰고자 노력했겠지요. 물론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단 몇 편이라도 좋으니 당신의 작품과도 같은, 그런 글을 쓸 날이 과연 올까요?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읽으면서 혹시 당신이 스케이트를 즐겨 타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그렇더군요. 어쩌면 그래서 당신의 마지막 작품이 그토록 감동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 타락한 세상에 남은 유일한 천국과도 같은 공간인 그 연못을 지켜내려던 남자 ‘레뮤얼 시어스’. 그의 모습에서 존 치버 당신을 봅니다. 낡은 하키 스틱으로 나뭇조각들을 치며 스케이트를 타던 연못, ‘이곳이 바로 나의 피난처이며, 기쁨’이라고 말하던 당신 말입니다.

어린 시절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던 기억과 함께 별빛으로 인해 자극받았던 힘과 용기와 목적의식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났다.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나의 열정은 약해지고 별빛도 어릴 때와 달리 그저 은은하게만 타오르는 듯하지만, 얼음판 위의 어두운 하늘에 그 별들이 떠 있다는 사실에서 내가 느끼는 크디큰 기쁨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존 치버의 일기』 213쪽)

당신은 투명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두려움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당신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삶이 어쩌면 얼음판 위와 그 아래의 삶으로 나눠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작가로서의 성공과 명성, 사랑하는 아이들과의 생활이 속한 찬란한 삶. 그것을 얼음판 위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반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 알코올중독, 아내와의 불화로 인한 고독과 외로움 등은 얼음판 아래의 어두운 삶이 아닐까요. 물론 글쓰기에 대한 실패, 혹평에 대한 두려움도 여기에 속하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삶이라는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타기를,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이 모두 공존하는 연못의 얼음판 위에서 두려움에도 스케이트를 즐겨 타던 당신. 이 세상에 주어진 마지막 천국인 그 연못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시어스’를 보면서 당신은 삶이 당신에게 가져다준 행복한 것들, 그러니까 가족,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 그리고 글쓰기를 지켜내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 던지는 온갖 고통 속에서도 ‘그럼에도 노력했다는 것, 바로 그 자체가 내게는 성과인 듯하다’ (『존 치버의 일기』 887쪽) 이렇게 말하는 당신을 보면 더욱 그렇게 믿게 됩니다.

그런 당신의 작가로서의 삶 앞에 숭고한 감동을 느낍니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평온했던 당신. 마흔여덟이 될 때까지 괜찮은 책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당신. 50세가 되어서도 영원히 글쓰기를 꿈꾸던 당신. 자신을 나이가 아니라 작품으로 평가하기를 바랐던 당신. 당신의 그런 삶의 태도를 평생 닮고자 합니다.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글을 시작’하거나 ‘마음을 쏟지 못하고 친숙하게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잘못된 태도’(『존 치버의 편지』95쪽)라는 당신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 틀에 박힌 구성, 폐쇄돼 있는 것들, 막혀버린 문장들.’(『존 치버의 일기』180쪽)을 빠져나오기를 애쓰며 언제나 ‘진실과 빛을 바라보도록’(『존 치버의 편지』464쪽) 노력하며 저 또한 당신처럼 영원히 글쓰기를 꿈꾸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나 우리 모두 “문학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의 구원”이며 또 문학이 “사랑하는 이들과 패배로 낙담한 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아마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존 치버의 일기』908쪽)임을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일기를 지난 2년 동안 머리맡에 두고 아껴 읽었듯이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놓은 채 글쓰기에 지치거나 그 외롭고도 보답 받지 못할 작업에 어쩐지 맥이 빠져 고독해질 때면 다시 펼쳐들고 읽겠습니다. 제 삶의 영원한 경구로 아로새기면서 말입니다.

당신은 편지를 항상 다 내버린다고 하셨지요? 편지란 ‘어제 핀 장미, 어제 한 키스, 어제 내린 눈과 같다’면서 말이지요. 당신 말대로 ‘편지를 간직하는 건 키스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도 읽고 태워버리세요.

어딘가 하늘의 연못, 또는 이 우주의 연못에서 자유롭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을 당신을 떠올리며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당신의 충실한 독자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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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6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6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17-12-27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비록 알라딘 블로그는 버려두고 있지만, 잠자냥님 리뷰는 다 읽고 있어요. 이 리뷰... 책으로 구원받았단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은 적 있는 독자라면 다 찡한 감정 느낄 것 같아요. 정말 잠자냥님 응원합니다. 언제나.

잠자냥 2017-12-27 12: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건강 잘 챙기시고요...

건수하 2024-02-22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년 전의 리뷰를 이제 읽었네요. (뭉클) 🥺

잠자냥 2024-02-22 20:22   좋아요 1 | URL
하핫;; 😂 그때는 건수하 님이 알라딘 안 하던 시절…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 매그레 시리즈 21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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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구두와 야한 빛깔 넥타이. 벤치에서 만나던 의문의 사나이 등등 뭔가 흥미진진 잘 나가다가 결말이 참 허무하네. 이런 결말은 추리 소설에서 반칙 아닙니까? 조르주 심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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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악마 창비세계문학 27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조혜경 옮김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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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 이러니 러시아문학을 사랑할 수밖에! 이런 작가와 작품이 숨어(?)있다니.. 이 작품은 인간이 얼마나 저열하고 비천하고 속물적이며 악한 존재인지 낱낱이 보여준다. 주인공 뻬레도노프는 이 모든 속성을 갖추고도 모자라 서서히 미쳐가기까지한다. 그 과정을 압도적으로 그려낸 엄청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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