みさおとふくまる さようなら、こんにちは (單行本)
伊原 美代子 지음 / リトルモア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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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고양이 사진집이 많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 사진집은 울컥하고 마음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아마도 고양이와 할머니가 모두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게 아닐까. 비록 후쿠마루는 2016년, 할머니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할머니 곁에서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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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출간된 책 가운데 좋았던 책들을 정리해봤다. 나는 문학을 많이 읽는 터라 거의 문학 책이다. 



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지난해 가장 좋았던 책을 꼽으라면 단연 첫 순위에 놓는 책이다.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에는 보물 같은 책이 많은데, 그레이엄 그린의 <정원 아래서 외 52편>도 그중 하나다. 그레이엄 그린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극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이미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과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권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우울증과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절망의 결과물들이 바로 이 찬란한 작품들이다. 고통에서 빚어낸 결과물. 그렇기에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진실’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알렉시 / 은총의 일격>
이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언급한다. 지난해의 (뒤늦은) 발견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별 기대 없이 펼쳐 들었다가 전율했다. 그의 문체에 홀딱 반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이라니! 읽는 내내 황홀하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언어가 없음을, 언어조차 금지되어 있음을,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성애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결국 장애물 또는 덫에 걸리고 마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편지 ‘알렉시’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전한다.



이반 부닌,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이 책 표지에 있는 이반 부닌의 얼굴과 참 닮았다. 뭔가 섬세하고 조용하고 예민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느낌.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책. 아무리 아름다운 책이라도 언젠가는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함을 알듯이,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늘 끝이 있음을. 그러기에 삶이란 어딘가 슬픈 빛을 띠고 있음을 이 책은 전한다. 부닌이 써내려간 아주 길고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한편의 서정시. 이 작품의 문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삶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담담히 전하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 <내 마음의 낯섦>
이스탄불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이야기.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마음의 낯섦’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고 있지 않을까. 주인공 메블루트는 큰 부를 얻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어떤 성공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기나긴 인생을 지켜보노라면 이 소심하고 나약한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일구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 어떤 숭고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이라는 혼동과 변화의 도시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바로 ‘사랑’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온갖 마음의 낯섦조차도 모두 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 맨>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낸 연인을 잃은 한 중년 남자의 하루, 그 단 하루를 따라가면서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고독과 상실, 남겨진 이의 쓸쓸함 등 삶의 온갖 단면을 그려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스스로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는 <싱글 맨>- 이 작품의 슬픔이, 때로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진실로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싱글 맨’ 조지가 이 작품을 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분신, 아니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셔우드는 조지가 자신의 모습은 아니라고, 조지 같은 인물을 정말 존경하지만 그처럼 기댈 곳이 없다면 자신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조지’와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이셔우드 그 자신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산책자>를 통해 만난 로베르트 발저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고독한 시인이었고, 작고 미미한 것들,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누구보다 제대로 볼 줄 아는 세심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그러므로 발전과 진보와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 지구라는 세계와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결국 미쳐버리고만 가엾은 영혼이었다. 그래서 <산책자>를 덮을 즈음에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로베르트 발저, 그는 걷는다. ‘아무것도 아닌 세계로’ 그는 또 걷는다. ‘보잘것없고, 보잘것없는 그런 미미한 세계로’ 그러나 그 걸음걸음에서 시가 탄생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태어났다. 단편 소설일수도 있고 산문일수도 있고 때로는 시일수도 있는 그 모든 글에서 발저는 이렇게 말한다. ‘작고 미미한 것으로 돌아가라’-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
전쟁이 휩쓸고 간 두 도시, 히로시마와 느베르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광기와 욕망, 과거와 현재, 폐허와 재건. 무엇보다도 기억과 망각을 노래한다. 문학과 영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 ‘그녀’의 이야기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충격으로 전율하고 마음이 몹시 아파온다. 전쟁의 폐해를, 그 참상을 이런 시나리오로 이렇게 그릴 수도 있다.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건조한 문체와 뚝뚝 끊어지는 대화,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도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샬럿 대커, <조플로야>
‘욕정, 불륜, 질투, 치정, 살인’ 모든 것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욕망에 충실하다. 주인공 빅토리아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는 한 남자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순결한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갈망한다. 이 무렵을 다룬 작품 가운데 이토록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여성을 본 적이 있었던가?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여성의 미덕은 ‘순결, 경건, 순종, 가정’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샬럿 대커는 그 시절에 15세기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빅토리아’와 빅토리아의 엄마 ‘라우리나’처럼 자기 욕망에 완전히 충실한 캐릭터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녀들을 통해 말한다. ‘여자들이여, 그대들도 이렇게 살라’고-



플래너리 오코너, <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의 첫 장편 소설. 읽는 동안은 불쾌한 기분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는데, 읽고 난 뒤 한참 지나고 나서도 떠오르는 기묘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주인공 ‘헤이즐 모츠’를 비롯해 누구 하나 좋아할만한, 호감 가는 인간이 없다. 극단적 편집광이자 사회 부적응자, 돈을 벌기 위해 가짜로 눈이 먼 맹인, 순수와는 거리가 먼 소녀, 가짜 목사와 거짓 선지자, 폭력 경찰관 등등. 이렇게 뒤틀린 인간 군상들이 우글거리는 ‘톨킨햄’을 배경으로 죄와 구원의 문제를 극한에 치달을 때까지 밀어붙인다. 한 번은 더 읽어봐야 할 작품.



김승옥, <뜬 세상에 살기에>
그의 수필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일단 한없는 기쁨을… 김승옥을 비롯해 김현, 김치수, 염무웅, 최하림, 서정인 그리고 이청준과 김광규 등 문학동인지 <산문시대> 관련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울컥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 시절이 어쩌면 우리 문학계의 벨에포크 시대는 아니었을까…. 이 수필에 수록된 삽화들은 김승옥이 직접 그린 것들이다. 심지어 그림까지 잘 그리는 인간이라니! 이 책을 복간하게 된 사연도 꽤 흥미롭다. 1977년 지식산업사 초판본은 김승옥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윤성근 작가가 녹번동 재개발지역 책 더미 속에서 발견한 뒤 간직해온 자신의 소장본을 선뜻 기증해준 덕분에 이 책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새삼 그에게 고맙다. 이 사람, 녹번동 재개발지역 책 더미 속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심장이 두근두근했을까! 그야말로 보물을 건진 심정이 아니었을까?



시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에단 호크가 감독한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Seymour: an introduction>를 보고 시모어 번스타인의 팬이 되고 말았다. 순전히 이 할아버지에 대한 팬심으로 산 책. 영화와 비슷한 부분도 많은데 책을 읽다보면 좀 더 자세히 그에 대해 알게 된다. 단순히 음악가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인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슴으로, 영혼으로 느끼게 해준다.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라는, 그의 이야기. 좀 더 아름답게 살고 싶어지고,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널리스트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책.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겉보기에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글은 매력이 그리 크지 않다. 문장만 미문이라고 그 글이 정녕 아름다울까? 거기에 제대로 된 생각이 담겨 있을 때 글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자 헤밍웨이가 쓴 글들이 바로 그랬다. 신변잡기나 당시 사회를 가볍게 다룬 기사 속에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보는 헤밍웨이의 통찰력은 빛난다. 이 책에 담긴 글들로 만난 ‘기자’ 헤밍웨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글도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끊임없이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헤밍웨이를 다시 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겐 고마운 책. 한쪽에 영어 원문이 함께 실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이반 자블론카, <레티시아>
2011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레티시아 사건’을 주제로 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이 남성들로 인해 어떻게 산산이 파괴되어 가는지 낱낱이 해부했다. ‘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저자는 레티시아 사건을 통해 여성혐오 범죄의 본질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끔찍한 범죄를 다룬 책은 흔히 ‘범죄자’ 중심으로 사건을 기술하기 마련인데, <레티시아>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바로 세웠다. 이 책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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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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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 (<레티시아>, 448쪽)


새해 들어 처음으로 읽기를 마친 책, <레티시아>가 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물론 이 책은 지난해 말에 읽기 시작했던 터라 굳이 새해에 읽고자 집어 들었던 책은 아니다. 새해 첫 책으로 골랐다면 아마 조금은 밝고 희망적인 책을 읽지 않았을까. 그런데 <레티시아>는 어둡고 암담하며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레티시아>는 좋은 책이다. 지난해 여름에 사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017년에 읽었다면 2017년의 좋은 책 목록에 올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레티시아>는 2011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레티시아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 문학이다. 열여덟 살 소녀가 실종되었고 잔인하게 죽임 당했다. 범인은 곧 잡혔지만 죽은 소녀의 시체를 찾는 일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티시아>는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이반 자블론카’가 그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온갖 관련자를 인터뷰하여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완성해냈고 이 책으로 2016년에 프랑스 메디치상, 르몽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가 떠오른다. 그 작품 또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인터뷰하고 기록하면서 써낸 르포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카포티의 그것과 다른 점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죽임을 당한 소녀 ‘레티시아’와 더불어 그녀의 쌍둥이 언니 ‘제시카’의 삶을 그리는데 더욱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면 미디어는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중심으로 그/그녀가 얼마나 흉악한 인물인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요즘 이 땅을 뒤흔든 몇 건의 끔찍한 사건들- 십대가 유치원생 아이를 납치해 잔혹하게 살인한 사건, 이영학 사건, 자신의 아이를 친부가 죽여 놓고도 마치 살아있는 듯 연기를 하며 급기야 실종 신고까지 한 사건을 보라. 피해자는 사라지고 범죄를 저지른 이의 가정환경, 생활형편, 평소의 취미 생활 등등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그들이 얼마나 엽기적이고 잔혹하며 흉악한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래야만 대중의 분노와 함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전율하면서 읽었지만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카포티는 범죄자들의 인간 내면을 묘사하는데 놀랍도록 치밀했다. 그들을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미화하기도 한다. 특히 ‘페리 스미스’에게는 카포티가 틀림없이 개인적 감정(그것이 연민이든 사랑이든)을 가졌으리라 짐작되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잔혹한 범죄자가 때로는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레티시아>에도 레티시아를 죽인 끔찍한 범죄자 ‘토니 멜롱’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니 멜롱 또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청소년기에 작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로 말미암아 감옥을 드나들게 되고,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렇게 범죄와 술, 마약으로 이어지는 생활에 젖어들면서 정상인의 삶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끝내 한 소녀를 잔혹하게 납치하고 살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선은 감정을 배제한 기록에 가깝다. <레티시아>의 주인공은 절대로 가해자 ‘토니 멜롱’이 아니라 피해자 ‘레티시아’임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있다.


이반 자블론카는 ‘내 책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 레티시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녀에게 갖는 관심은 마치 은총으로의 복귀처럼,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 줄 것’(9쪽)이라면서 이 책이 ‘토니 멜롱’이 아니라 ‘레티시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녀가 죽은 뒤에도 미디어의 희생자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에 처박혀서 마치 없는 듯이 지내는 레티시아’(11쪽)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독자는 <레티시아>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한 소녀의 안타까운 삶에 더 주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레티시아 사건을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낸 사건으로 정의 내린다. 남성(들)에 의해 삶이 무너지고 파괴되다가 끝내 잔혹하게 죽임 당한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한다. 이반 자블론카의 이러한 주장은 ‘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레티시아(그리고 제시카)의 삶에는 ‘세 가지 부당함이 있었다. 하나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기만적인 위탁가정 양부 사이에서 보낸 유년기, 다른 하나는 18세의 나이에 맞은 잔혹한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사고 기사, 즉 죽음의 구경거리로의 전락이 그것’(193쪽)이다.


레티시아와 제시카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인 ‘프랑크 페레’는 술에 취해 툭하면 아이들과 아내를 학대하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였다. 때로는 레티시아와 제시카를 던져버리기(!)도 하고, 아내를 협박할 용도로 아이들을 이용한다. 그런데다가 아내에게는 잦은 폭력과 강간이 이어졌다. 결국 레티시아와 제시카의 엄마인 ‘실비 라르셰’는 심리적인 죽음을 맞이하고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프랑크 페레는 감옥까지 드나들고 엄마는 아이들을 돌볼 상태가 전혀 되지 못하고…. 이런 상태에서 쌍둥이 자매는 위탁가정에 맡겨진다.


그런데, 그 위탁가정에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 가정은 평화로웠고, 좋은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는 또 하나의 끔직한 비극이 숨어 있었다. 위탁가정의 양부로부터 두 자매는 온갖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제시카의 경우가 특히 더 심했다. 제시카는 이 가정에 완전히 입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양부의 성추행을 묵묵히 견딘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동생은 살해당하고, 위탁가정은 해체되고, 양부의 범죄를 털어놓은 죄 아닌 죄로 위탁가정의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제시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동생, 입양가정, 순결, 삶의 기쁨, 익명성 그리고 평온을. 그녀는 동생이 죽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파트롱 씨의 노리개였다는 걸 알게 된 가족이 위기를 맞은 후에야 침묵을 깨기로 결정했다. 청소년기 내내 그녀는 가족의 사랑과 안정적인 생활, 그리고 어딘가 있을 곳에 대한 바람의대가로 위탁가정 아버지의 추행을 견뎠다. 약간의 애정과 자신의 몸을 맞바꾼 것이다. (398쪽)


<레티시아>를 읽다보면 레티시아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범죄자인 토니 멜롱의 가정, 그리고 레티시아의 아버지였던 프랑크 페레의 가정 등 거의 모든 집안에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 받는 어머니 구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레티시아의 위탁가정 또한 결국 그 집안의 가장인 ‘질 파트롱’의 지속적인 성추행(위탁가정으로 왔던 소녀들은 레티시아와 제시카만이 아니었다. 질 파트롱은 나머지 다른 소녀들에게도 성추행을 지속적으로 해왔음이 밝혀졌다)이 있었다. 이반 자블론카는 이렇게 프랑스의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학대받고 죽임 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폭로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폭력은 반복되는 모욕, 위협적인 행동, 희롱, 정서적인 협박, 심리적 압박, 아이들에 대한 위협, 강제적인 성관계, 따귀 때리기, 구타, 가혹 행위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목적은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것이다. (.......) 프랑스에서는 교살되거나 총에 맞아 죽은 가정주부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십 통의 욕설 문자메시지의 표적이 되었다가 끝내 맞아 죽은 전처들,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은 여성들이 해마다 100명 이상이나 나온다. (36쪽)


레티시아는 유년기 때부터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내에서 친부와 양부에게 구타와 학대 성추행 등 온갖 폭력을 당하다가 끝내 사회에서 만난 남자에게 납치되어 잔혹하게 살해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반 자블론카는 명백히 레티시아의 죽음이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죽임까지 당하고 마는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티시아는 구타당하고, 칼에 찔리고, 목이 졸렸다. 그녀의 시신은 금속 톱에 의해 토막이 났고, 쓰레기통에 담겨 있다가 물에 던져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 몇 시간 만에 생기발랄한 소녀가 살덩어리, 피투성이가 된 사지, 잘린 머리, 시멘트 블록이 달린 몸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소멸이, 중단된 구강성교로부터 시작된 시퀀스를 매듭지었다. 그녀의 내면에 굴복해야 할 여성이, 깔아뭉개고 파괴되어야 할 여성이 있다는 점에서 레티시아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처벌이자 동시에 복수이기도 한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 혐오 범죄이다. (429쪽)


<레티시아>를 읽노라면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저 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어진다. 이런 사건은 전 세계 여성,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임을 알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 못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게 어떻게 여성 혐오 범죄이냐고 묻는다.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범인은 그 화장실에 들락거린 수많은 남성들은 그냥 둔 채 한 여성만을 죽였다. 더더군다나 그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레티시아를 죽인 토니 멜롱 또한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No’라고 말한 순간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욕망이 레티시아의 거절과 함께 좌절되자 더 이상 그 소녀를 지배할 수 없음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토니 멜롱의 어머니가 만일 자신이 아들에게 ‘No'라고 했다면 아들은 자신조차 죽였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점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남성들의 폭력성에 이반 자블론카는 크게 분노하고 개탄한다.


남성적인 의미로서의 인간은 더 나쁜 존재다. 가끔 내가 제시카의 곁에서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고, 그녀가 살아오는 내내 남자들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 분란이 생기면 커터 칼로 해결하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이 들고 있어야 하는 키친타월에 정액을 쏟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을 칼로 찌르는 것도 닭의 목을 자르듯 당신의 목을 자르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쾌락의 대상, 노리개일 뿐이다. 또한 장관들, 지도자들, 텔레비전에 나와서 떠드는 사람들, 알고, 명령을 내리고, 옳은 사람들, 당신에 대해, 당신의 위에서, 당신의 속에서, 당신을 통해 말하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다. 결국 언제나 남자들이 이긴다. 그들은 당신을 자기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까닭이다. 처음으로 나는 나의 성이 수치스러워졌다. (445쪽)


책을 덮고 나서도 ‘레티시아’나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범죄자인 ‘토니 멜롱’이나 ‘질 파트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알라딘에서 이 책과 관련한 리뷰들을 보다가 그만 ‘레티시아’의 사진을 보고 말았다. 정말 앳된, 평범한 소녀의 웃는 얼굴에 더 마음이 시렸다. 열여덟 짧은 생을 남성들의 온갖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참혹하게 죽은 소녀. 그녀가 이제는 정말 평온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남겨진 쌍둥이 제시카의 앞으로의 인생은 부디 폭력에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레티시아>는 이렇게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바로 세운다. <레티시아>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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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번역한 외국 책들만 읽어서 요며칠 한국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2017년에 나온 책 가운데 반가운 마음에 사두었던 <한국현대희곡선>과 저렴한 가격에다가 굿즈에 끌려서 사두었던 <웃는 남자> 이 두 권이다. <한국현대희곡선>은 매일 희곡 한 편씩 읽고 있다. 지금까지 4편을 읽었다.

'토막'_유치진 / '산허구리'_함세덕 /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_오영진 / '불모지'_차범석 이렇게 4편.

수록 작품들은 뭐, 하나 같이 우리나라 현대 대표 희곡인지라 역시 잘 썼다, 감탄하면서 읽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이 모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시대 배경이 그래서 그런 탓일지도 모르는데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가난/가족/밑바닥 삶/부재하거나 제 능력을 상실한 장남/ 가족의 몰락' 거의 이렇다.

가난에 허덕이거나 가난하지 않더라도 결국 몰락하는 집안과 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그 집안의 맏이는 거의 아들인데, 이 장남들은 끌려갔거나 유학 갔거나 소식을 알 수 없거나 등등 가족 내에서 사라진 상태이고, 그 어머니들은(또는 가족은) 장남의 부재를 고통으로 여기고 이제나저제나 소식을 들을까 기다린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 장남이 가족과 함께 있더라도 전쟁터에서 돌아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불모지'). 그러다 결국 가족을 파멸로 몰아간다.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장남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 또는 제 구실을 못하는 장남을 안쓰러워하는 어머니-그리고 주변인과도 같은 나머지 자식들. 아버지와 장남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표현을 달리하느냐의 차이지 거의 희곡 4편의 중심을 이룬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앉은 자리에서 계속 이 책을 다 읽으라면 숨이 막힐 것 같다.

어젯밤 집어든 <웃는 남자>도 한몫한다. 늦은 밤에 읽기 시작했던 터라, 좀 긴 편인 황정은의 '웃는 남자' 대신 김숨의 '이혼'부터 읽었다. 하...... 새벽 1시 넘어서 이 작품 읽다가 가슴을 턱턱 쳤다. 하 답답하다.

이혼을 준비중인 여자의 관점으로 이혼을 했거나, 하려고 하거나, 할 뻔했던 여자들의 삶이 묘사된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남자들이- 특히 주인공의 아버지- 하나 같이 개썅놈인 거라.......... -_- 아 욕나와. 너무나도 폭력적인 아버지는 주인공의 엄마를 하루가 멀다하고 두들겨패고, 그런 엄마를 대신해 이혼 서류까지 만들어 오지만, 엄마는 이미 뭔가를 잃어버려서 자신이 이혼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조차 판단을 못한다. 그 주인공은 이제 자신의 남편과 이혼을 준비 중인데, 이 쌍놈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주인공은 시인인데, 그런 그녀에게 이 따위 말을 한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하....... 뭐 이런 ㅂ ㅅ 같은 놈이 다 있지?



'이혼'의 주인공은 부모에 이어서 자신 또한 이혼을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문제는 남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게 단순할까? (왠지 모든 작품이 다 이럴 것 같아서 <현남 오빠에게>는 읽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새벽 1시 40분이 다 되어서 다음 작품은 읽지 않고 책을 덮었다. 아니, 더 못 읽겠어서 덮었다.

아, 한국문학........ 가족, 가족, 가족, 가부장, 가부장, 가부장....... 가족 안에 갇힌 세계.....

한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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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마술적 리얼리즘'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도 아직 읽지 않았다.

내 주위 친구들은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면, 깜짝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좀 읽는다는 사람 치고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근데 바로 내가 그렇다.......

그만큼 중남미 마술적리얼리즘과 잘 맞지 않았던 나.....


그러데 드디어 <백년의 고독>을 읽을 때가 된 것 같다.


얼마 전 리커버 한정판이 발매된 것이 아닌가..... 그것도 표지가 꽤 이쁘다?!



민음사에서 나온 <백년의 고독> 리커버 한정판.



안타깝게도 이 리커버 한정판은 알라딘에서는 구매할 수 없...; 다.

저쪽 다른 동네에서만 판매중이다.

표지도 예쁘지만 합본이라 더 좋다....


사실 이 책을 사기 전까지 여러 번 망설였다.

친구가 다 읽고 준 <백년 동안의 고독>이 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걸 읽으라구!!!



"집에 있는 걸 읽어!" "집에 있는 걸 읽으라구!!" 여러 번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난 리커버 특별판을 사고야 말았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역자가 '안정효'이던데 그렇다면 영어 중역??

아, 그래, 그래 스페인어 전공자가 옮긴 책으로 읽어야지..... 암, 그래 그래-

이딴 생각(핑계)으로 리커버 판을 주문한 것이다.


책을 받아보니 그 만듦새에 일단 만족했다.


자, 이제 드디어 <백년의 고독>을 읽어야지-


어쨌든;; 새해에는 책을 한동안 사지 않겠다던 결심은 작심삼일은 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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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0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르케스의 소설 꼭 완독하길 바랍니다. ^^

잠자냥 2018-01-06 15:49   좋아요 0 | URL
네, cyrus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꼭 완독하고 리뷰도 쓰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1-08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의 고독>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저도 안정효 번역을 읽었고, 다시 읽어볼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8-01-08 12:14   좋아요 0 | URL
네, 보통 제 주변에서 이 책 읽은 친구들은 10대나 20대 때 읽었다던데, 전 이렇게 완전한 성인이 되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라고 ㅋㅋㅋㅋ 믿고(위로하고?) 있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