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내 집의 거실에서 연예인 A가 미니 세탁기로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배수구가 없다보니 세탁기의 물이 흘러나와 거실은 물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 A가 우리집에 머무르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군식구처럼 A는 턱하고 거실을 차지하고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A는 내가 싫어하는 연예인이다. 큰 덩치의 그는 다소 험한 인상의 사람이다. 나는 물바다가 된 거실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A에게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의 행짜를 두고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젠 우리집에서 머물 수 없어요. 그러니 짐 싸서 나가주면 좋겠어요."
  "날더러 나가라고? 내가 왜?"

  A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영 기분 나쁜 꿈은 그렇게 끝났다. 꿈에서 깨어서 생각을 해보니 어딘지 모르게 짚이는 데가 있었다. 오랫동안 나의 꿈에서 '집'은 나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미지였다. 무언가 신경쓰이는 일이나 걱정이 있으면 집과 관련한 꿈을 꾸곤 했다. 낡고 어수선하게 살림살이가 널브러진 집에는 낯선 사람들이 출몰하곤 했다. 나는 그런 꿈을 편치 않은 내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A가 나오는 그 꿈도 마찬가지다. 왜 내가 싫어하는 외부인이 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거실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그곳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강하게 A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고작 말 몇마디를 했을 뿐이고, A는 내 말을 들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꿈에서 깬 뒤에 나는 그것이 아픈 내 몸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달 넘게 원인불명의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A는 침입자였고, 병마였다. 꿈에서 나는 A를 내쫓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2020년 9월에 방영된 클래스 e에서는 신화학자 고혜경이 출연해서 강의를 들려주었다. 콩쥐팥쥐, 빨간신, 나무꾼과 선녀 같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전래동화를 중심으로 신화학, 심리학, 영성학적인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졌다. 나는 처음에는 좀 심드렁하게 들었더랬다. 그러다가 강의 중반부에 가서는 정말 재미있어서 끝까지 열심히 시청했었다. 그 강의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착취적인 연인에게 고통받은 젊은 여성의 이야기가 예로 나왔다. 그 여성은 꿈에서 무서운 남자를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여성은 남자를 피하고 도망쳐 다녔다.

  "그 남자가 누구겠어요? 현실에서 그 여성을 괴롭히는 연인이지요. 여자가 그 남자에게 겁먹고 얼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요. 꿈속에서라도 대항하고 싸워야 해요. 그래야지만 그 여성은 현실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꿈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압도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대상에게 저항하는 것이 의지적으로 가능할까? 신화학자가 일러준 조언이 나에게는 아주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마음에 꽂혔다. 그 뒤로 나는 꿈에서 낯선 사람과 감정적으로 대립하거나 싸우게 될 때, 크게 소리를 내고 지지않으려고 했다. 놀랍게도 꿈에서도 인간의 의지가 발현되는 부분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오늘도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진통제를 한무더기로 지어왔다. 도대체 이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할까? 의사는 먼저 찍은 곳과는 다른 부위의 MRI를 찍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게 다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얼마 전의 그 꿈대로라면 그냥 이 원인불명의 통증과 당분간 동거생활을 하는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한다. 또 다시 내 꿈속에서 A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든 A와 맞서서 그를 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의사는 지금으로서는 진통제를 먹으면서 통증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의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아마도 이 의사에게 나는 골칫덩이 환자일지도 모른다. 의사가 이런저런 진통제를 쓰자고 하면 나는 싫다고 하고, 무슨 검사를 하자고 해도 버티다가 받는다. 의사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이 통증이 어쩌면 심리적인 것에서 기인했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독여야만 지금의 병이 좀 더 빨리 낫지 않을까 싶다. 내가 싫어하는 낯선 사람이 기거하는 꿈 속의 내 집은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처진다. 한 달치의 약을 다 먹을 즈음에는 나를 괴롭히는 통증이 가실까? A가 없는 정갈한 거실에서 내가 편안히 쉬는 꿈을 꿀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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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병원에 자주 다녔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원인불명의 통증 때문에 지난달부터 신경과 진료를 받고 있다. 통증은 잡히질 않고, 이제는 다른 곳까지 아프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안과, 오늘은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내가 다니는 안과의 선생님은 정말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있다. 환자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아픈 눈도 잘 보아준다. 오늘 이비인후과에 다녀와서 생각해 보니 이런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은 로또급의 행운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종합 병원은 언제나 그렇듯 환자들로 북새통이다. 귀와 목이 한 달 넘게 아파서 종합 병원 이비인후과에 예약을 했다. 그런데 이 병원의 이비인후과는 세부 진료 과목이 귀와 목, 코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귀와 목이 아프면 두 명의 의사에게 예약을 하는 시스템이다. 고민을 하다가, 귀 보다는 목이 더 많이 아프니까 목을 보는 의사한테 예약을 했다. 내가 예약한 의사는 두경부와 목을 잘 본다는 평이 있었다.

  폭염의 버스 정류장은 무슨 찜질방 같았다. 배차 간격이 25분인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이 무더위에 괴롭기 짝이 없었다. 힘겹게 버스에 타서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서 수납을 하고 예약접수증을 이비인후과 접수대에 냈다. 이 병원의 이비인후과는 초진 환자는 예진을 하는데, 그걸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한다. 나는 왜 환자의 병력 청취를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하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래도 진료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 예진을 하고 나서는 30분 넘게 기다렸다. 환자가 밀려서 예약된 시간은 이미 훌쩍 넘어 버렸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증상에 대해 의사에게 말을 하는데, 2분이나 지났을까? 의사가 내 말을 끊는다.

  "그래서 환자분은 도대체 어디가 아파서 여기 온 거에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나는 언제 통증이 시작되었고, 그 통증의 양상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는 대뜸 그런 식으로 되묻는다. 환자의 병력 청취를 그따위로 하는 의사와는 더이상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귀와 목이 아프다구요!"

  의사는 후두내시경으로 1분 남짓한 시간에 목을 들여다 보았다. 목에는 이상이 없고, 편도선이 좀 부은 것 같으니 약을 처방해주겠단다. 얼른 진료실에서 내가 나가주었으면 하는 의사의 뜻이 노골적으로 전달된다. 그렇게 나는 진료실에서 떠밀리듯 나왔다. 진료에 걸린 시간은 5분이 좀 넘은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귀를 봐달라는 말을 못한 것이 떠올랐다. 간호사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좀 기다려 보라고 한다. 의사는 다른 환자의 초음파 검사 때문에 검사실에 갔다가 10분 뒤에 왔다. 내가 대기실의 의자에서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의사한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난 귀는 안봐."

  그 말을 하고서는 의사는 진료실로 쌩, 하고 들어가 버린다. 목 전문 이비인후과 의사의 굳은 신조를 목격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 그래. 귀는 안본다구요? 속으로 기가 차지만 별 수가 없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레지던트 선생한테 귀를 볼 수 있게 해준단다. 좀 기다렸다가 레지던트가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는 예진할 때 병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줄 알고 뭔가 더 말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이 레지던트 왈,

  "환자분은 왜 말을 안하고 진료에 협조를 안합니까?"

  아니, 예진 시스템은 어디에 밥 말아 먹었나? 내가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해야된다는 건가? 참으로 이 병원 이비인후과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군요. 진료 과정 내내 쌓여있던 나의 불만이 터져나온다.

  약국에 들러서 약을 지어 집에 돌아오니 세 시간이 지났다. 병원이란 공간이 환자들에게 유쾌한 곳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런데 거기에 권위 의식과 불친절이 뼛속까지 절은 의사까지 만나고 나면 기분은 더 바닥을 친다. 저런 의사들에게 환자란 어떤 존재일까? 3분 컷, 5분 컷으로 빨리빨리 진료실에서 내보내야 하는 짐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기본적인 병력 청취는 무 자르듯 잘라먹고, 환자의 고통에는 1도 공감하지 못하는 의사를 만나는 일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내가 오늘 만난 이비인후과 의사를 떠올려 보니, 기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진료하는 기계. 지금 다니는 안과의 의사 선생을 만나기 전의 불친절 끝판왕 안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AI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 '의사'라는 직업은 인공지능으로 좀처럼 대체가 어려운 직업으로 맨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AI 의사를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의사들마다 가지는 비균일한 임상 경험과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오진의 가능성은 AI가 의사라는 직업군에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을 넓혀준다. 이미 의료계의 여러 영역에서 AI는 실험적으로 적용되고 있고, 그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적어도 AI 의사는 불친절과 권위 의식을 보여주는 일은 없겠지.

  내가 오늘 만난 진료 기계 이비인후과 의사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환자에 대한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는 의사를 만나는 일은 교통사고와 같다. 이런 저런 언론지에 실린 인터뷰며 사진발은 헛껍데기일 뿐이다. 막상 그 의사를 만나보면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성의를 눈꼽만큼이라도 보여주는 의사에게 감지덕지해야하는 건가? 이비인후과 진료를 보고 가시지 않은 울분을 쏟을 곳이라고는 이 글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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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1+1 세일 행사에서부터였다. 분쇄 원두 하나를 구매하면 판매 중인 분쇄 원두 상품 하나를 더 보내준다고 했다. 거기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기는 했다. 판매자는 랜덤으로 보내주는 원두는 유통 기한이 촉박한 상품이라고 적어놓았다. 뭐 유통기한이 좀 촉박해도 두어 달 정도 남은 것이었다. 어, 이건 괜찮은데. 3만원 이상을 구매해야 무료 배송이 되는지라, 나는 장바구니에 원두를 채워넣고 3만원을 넘겼다. 주문한 원두 상품은 4개, 어떤 분쇄 원두가 랜덤으로 올 것인지 약간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배송을 기다렸다.

  내가 택배 상자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 나름 총알 배송이었다. 택배 상자에는 8개의 원두가 차곡차곡 담아져 있었다. 그런데 랜덤으로 온 원두는 죄다 유통 기한이 가장 촉박한 제품이었다. 그보다 유통 기한이 조금 더 남은 걸 보내주어도 좋았을 텐데, 싶기는 했다. 그래도 원두 4개가 공짜로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걸 언제 다 먹지, 하는 생각도 잠시. 200g 짜리 8개의 원두 봉지가 다 비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름에는 커피 내리기가 귀찮아서 그냥 원두 냉침으로 해서 먹는데, 이게 생각보다 원두 소모량이 꽤 많다. 1달이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원두를 구매할 때가 되었다.

  먼저 구매했던 세일 가격을 떠올리니, 다시 이 원두를 구매하는 것이 비싸게 생각되었다. 판매 가격은 이전의 정상가로 적혀있었고, 물론 1+1 행사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다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3개 이상을 사면 머그컵을 증정한다고 했다. 스*** 로고가 새겨진 하얀색의 머그컵은 꽤나 예쁘게 보였다. 그래, 머그컵 하나에 만원이라 퉁치면 그리 나쁜 선택도 아니다. 배송비를 내지 않기 위해 이번에도 원두 상품 4개를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는 머그컵이 하나 생겼다. 막상 그 머그컵을 받아보니 좀 실망스러웠다. 비매품의 이 머그컵은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그리 예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 컵을 찬장에 처박히게 만든 것은 '무거워서'였다. 그랬다. 컵은 나에게 무거웠다. 이걸 들고 커피를 마셨다가는 한 달 안에 내 손목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물론 좋은 도자기 컵은 원래 무겁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때 도자기 제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은품에 눈이 멀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흰색의 머그컵은 찬장의 장식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원두 산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이 원두를 사다먹기 전에는 대형 마트의 PB 상품인 원두를 구매했었다. 그걸 구매한 이유는 오로지 '가성비'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생두를 사다가 집에서 볶아 먹을 정도로 커피에 진심이었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번거롭고 귀찮다. 커피맛이라는 게 커피 전문점의 그 비싼 기계로 고압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다 거기서 거기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원두 비싼 거 사봤자 집에서는 그 맛을 온전히 내기도 어렵지. 나는 '가성비' 좋은 원두를 사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게는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어떤 맛과 향 때문이 아니라, 아침에 기계적으로 뇌를 흔들어 깨우는 의식이 되는 것 같았다. '가성비' 원두, 아니 사실은 '저렴이' 원두의 맛은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가끔 커피 관련 뉴스를 보면 원두 가격은 계속해서 치솟고 있었다. 기후 변화, 커피 재배 지역의 분쟁, 커피 나무에 생기는 병충해까지, 원두 가격은 도무지 내릴래야 내릴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냥 이 원두로 쭉 가자. 그러던 생각이 전번에 산 원두 때문에 바뀌고야 말았다. 전번에 산 원두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맛이 없었다. 그것은 커피가 아니라, 그냥 쓰디쓴 시커먼 물이었다.

  나는 1+1 행사로 산 스*** 원두를 내린 커피에다가 '저렴이' 원두로 내린 커피를 대충 섞어서 먹으면서 1kg이 넘는 원두를 소모할 수 있었다. 맛이 괜찮은 커피를 섞으니, 맛없는 커피도 대충 먹을만한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비싼 건 다 비싼 이유가 있네. 나는 양이 많은데 가격도 싸다고 먹었던 그 PB 상품 원두를 더이상 사고 싶지 않았다. 가격으로 치면 스*** 원두는 저렴이 원두의 4배 가격에 해당되었다. 그럼에도 중량과 가격을 비교하며 내 선택을 합리화하는 일은 뭔가 구차스럽게 느껴졌다.

  싼 게 비지떡. 이 단순한 삶의 진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 명료하게 다가온다. 가격 비교 사이트를 찾아보는 일도 이제는 피곤하다고 느낀다. 터무니 없는 가격이 아니라면, 상품에 매겨진 가격과 그 상품의 질이 비례한다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그래 이 맛이야. 예전에 배우 김혜자 씨가 조미료 광고에서 했던 말을 나는 '가성비' 원두에서 탈출하고 나서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1+1 행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엌 찬장에 처박힌 겉멋든 머그컵을 쓰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커피를 마실 때만큼은 합리적 구매란 '가격'이 아니라 '맛'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야지만 나는 이 커피를 계속 마실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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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msay Hunt syndrome. 이 질병은 안면부에 발생하는 대상포진으로 안면마비와 청각 손상이 주요한 증상이다. 슬상신경절에 잠복해 있던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면역 시스템이 약해진 틈을 타서 안면신경과 귀 주변의 신경을 침범해서 극심한 통증과 염증을 일으킨다. 8년 전, 나는 뜻하지 않게 Ramsay Hunt syndrome 환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보름이 넘게 머리가 쪼개지는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오른쪽 얼굴은 마비되었다. 눈은 감기지 않았고, 입은 비뚤어져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내가 겪은 대상포진 바이러스는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물을 마시면 그대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마비된 얼굴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싶은 두려움이 입원 기간 내내 나를 엄습했다. 거기에다 대상포진의 엄청난 통증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뉴론틴(Neurontin). 1973년에 나온 이 약은 원래는 뇌전증(예전에는 '간질'이라고 불렀던 질병) 치료제로 개발되었다. 그러다가 뉴론틴은 신경병적 통증에 효과가 부수적으로 입증이 되면서 당뇨병으로 인한 신경통을 비롯해 대상포진 치료에도 사용되었다. 극심한 대상포진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원 기간 동안 나는 고용량의 뉴론틴을 복용해야만 했다. 뉴론틴을 콩알 먹듯이 먹어도 도무지 통증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가톨릭 재단의 병원이었다. 나는 병실에 있는 것이 답답하면 성당에 가서 앉아있곤 했다. 뭐라고 기도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얼굴 반쪽이 마비된 내 상태가 믿기지도 않았고, 이 상태로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고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신자였기 때문에 원목실의 수녀님이 병실로 찾아와서 기도를 해주었다. 시간이 되면 원목실에 와서 차라도 마시라고 수녀님은 말했다. 딱히 병실에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다음날인가, 원목실로 수녀님을 찾아갔었다. 수녀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수녀님은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한 환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환자는 암환자인데 자궁에 생긴 암이 난소까지 침범해서 결국 자궁과 난소를 모두 절제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둘, 대학생이에요. 많이 걱정되어서 자주 살펴보고 있는데, 어떻게 잘 이겨낼지 모르겠어요."

  나는 수녀님이 내온 녹차를 마시면서 계속 흘리고 있었다. 비뚤어진 오른쪽 입 때문이었다. 나는 얼굴 반쪽이 돌아간 나의 고통과 22살 암환자 아가씨의 고통을 속으로 비교해 보았다. 과연 어느 고통이 더 괴로운가? 만약 이 얼굴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남은 생을 감기지 않는 눈과 비뚤어진 입매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2살 아가씨는 자궁과 난소없이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고통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는가? 그것을 정량화된 수치로 계산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얼굴도 모르는 22살 아가씨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그 아가씨의 고통이 나의 것보다 심하고 무거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나는 퇴원했다. 마비된 얼굴은 점차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6개월 정도가 지나자 내 얼굴은 마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물론 완벽한 회복은 아니었다. 신경 손상은 비가역적(非可逆的)이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청신경을 침범해서 내 청각에 문제가 생겼다. 이명과 청각과민증은 좀처럼 낫질 않았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최근에 몸이 좋질 않아서 병원을 오가고 있다. 몸이 아파서 그런가? 나는 문득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투병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기억 속에는 22살 아가씨의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8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그 아가씨는 서른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잘 살고 있을까? 질병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상실은 불안과 절망을 가져다 준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명제이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 아가씨가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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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의 일이다. 어머니를 산책시켜드리고 오는데 사고가 생겼다. 뒤에서 따라오던 어머니가 발을 헛디뎌 손목이 골절되었다. 정말이지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임을 실감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의 수술은 잘 되었고 이제는 깁스도 풀었다. 사고 당시에는 그저 당황스럽고 속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사고가 있기 일주일 전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나는 커다란 대바구니에서 엄청나게 큰 뱀을 꺼내었다. 그걸 본 어머니는 놀라서 뒤로 넘어지셨다. 참으로 불길하고 이상한 꿈이었다. 어머니는 심한 뱀 공포증을 갖고 계신다. 그런 어머니가 꿈에서 뱀을 보고 그렇게 놀랐으니 결코 좋은 꿈은 못되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야지...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내 모친은 손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7월 1일의 일기에는 그날 새벽에 꾼 꿈을 적어놓았다. 내 이가 흔들거리며 빠지려는 꿈이었다. 이런 꿈도 역시 좋은 꿈은 아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꿈, 예지몽. 그로부터 20일 넘게 몸이 아프고 좋지 않다. 병원을 오가며 약을 먹고 있지만 좀처럼 낫질 않는다. 이게 얼마나 더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좀 좋은 꿈 좀 꾸어봐. 로또 복권 당첨될 것 같은 꿈."

  내가 꾼 그 두 개의 꿈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려주자 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좋은 꿈은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안좋은 일에 대한 예지몽은 기가 막히게도 잘 꾼다. 그런데 한편으로 어떤 꿈은 슬프고 아련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발인(發靷) 날 아침, 나는 잠깐 졸다가 꿈을 꾸었다.    

  그것은 마치 동양화의 풍경 같았다. 어슴푸레한 새벽 무렵이었다. 한복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가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자의 앞쪽으로는 높다란 산들이 물결치듯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는 허허로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 남자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아, 아버지가 저렇게 길을 떠나시는구나.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그 꿈이 생각나곤 한다. 잘 계시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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