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알고 지내는 수녀님이 나를 수녀원의 '성소자(聖召者)의 날' 행사에 초대하셨다. 그 행사는 수녀원의 성소 모임을 위한 후원 바자회였다. 수녀님들은 직접 만든 음식과 물품들을 바자회에 내놓았다. 물론 수도회의 성소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행사였으므로 특별한 순서도 있었다. 수도회에 입회한 어느 지원자 자매의 아버지가 간증을 하기 위해 연단에 섰다.

  "저의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 수도회에 입회하고 나서, 저는 치유의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토록 저를 괴롭히던 안구건조증이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안과의사들은 이 병을 불치병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불치병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청중석의 맨 뒷줄에서 그 간증을 듣고 있던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소리내어 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자그맣게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의사'임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업 자부심부터 시작해서 지루한 장광설까지 그 사람은 참으로 밉상이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수녀님까지 '아이고, 저분은 좀 너무하시네' 했을 정도였다. 뭐 안구건조증이 나았다고? 그게 불치병이라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안구건조증'이란 질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눈이 좀 마르는 게 뭐 어떻다는 건가 했었다.

  그랬던 내가 안구건조증을 앓아온지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눈안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는듯한 뻑뻑함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안과에서 처방받은 눈물약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았다. 그렇게 한 10년 동안 눈물약을 달고 살았다. 나는 눈물약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 눈물약은 치료약이 아니며, 내가 이 눈물약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눈물약을 끊어버렸다. 대신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눈 청결제로 눈을 닦는 것이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까지 겹쳐서 내 눈에는 늘 눈곱이 끼고 가려웠다. 눈 청결제로 그걸 닦아내면 뭔가 눈이 시원해지고 맑아졌다. 그런데 이것도 쓰다보니 눈물약처럼 하루에 여러 번 닦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물약을 안쓴다고요? 이건 아무리 많이 써도 눈에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중독이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안과의사는 나를 무식한 환자 보듯 바라보며 약간의 조소를 보냈다. 환자에게 말하는 본새하고는... 권위의식과 재수없음이 겹친 의사를 만나는 일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결막낭이 뭔지도 몰라서 대학병원에 가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준 그 안과의사를 나는 더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눈이 붓고 아파서 안과에 갈 일이 생겼다. 염증 때문에 처방받은 안약에는 스테로이드와 항생제가 들어있었다. 안약을 넣으니 염증은 곧 가라앉았다. 신기하게도 안구건조증도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내 눈은 더이상 뻑뻑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건조증이 심해지면 그 안약을 조금씩 넣었다. 그렇게 해서 항염증 성분의 안약과 눈 청결제, 거기에다 눈에 윤활제 역할을 하는 리포직 점안겔을 함께 쓰게 되었다. 뭔가 그런 조합이 건조증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는듯 했다.

  물론 스테로이드 안약의 장기간 사용이 안압을 높인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떻게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이 안구건조증에 작용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거기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이제 안과에서 안구건조증은 단순한 눈물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염증성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심한 안구건조증에 쓰이던 기존의 면역억제제 성분의 안약은 효과가 나타나려면 1달에서 2달이 걸린다.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을 단기간 쓰면서 눈의 염증을 완화시키고, 거기에 면역억제제 성분의 안약을 쓰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가천대 길병원 안과 김동현·백혜정 교수팀의 논문, 출처: 의협신문 2022년 4월 http://www.doctorsnews.co.kr).

  그래서 그랬던 것이구나... 뭔가 작은 의문이 풀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요새는 안구건조증에 IPL을 이용한 레이저 치료도 하고 있다는데, 그 치료의 효과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인 모양이다. 나는 눈에다 레이저를 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무서워서 앞으로도 해볼 생각이 전혀 없다.

  가끔 그 지원자 부친의 간증을 떠올려 본다. 그의 안구건조증은 정말로 완전히 나았을까? 나는 그때 비웃었던 나 자신에 대해 살짝 반성하는 마음도 된다. 그렇다. 나는 이제 안구건조증이 '불치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안구건조증에 효과가 있는지 애매한 오메가 3와 루테인을 나는 끊을 수가 없다. 다음번 안과 정기 검진 때에는 새로운 의사 선생님에게 내 오랜 안구건조증이 좀 나아질 수 있는지 물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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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08 00:19   좋아요 0 | URL
결막염으로...대학병원이라니! 전혀 이 분야 모르는 제가 들었을 때도, 신뢰가 안 가네요. 안구건조증에서 자유로워지시기를...

푸른별 2023-09-08 00:33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 님, 그 의사를 내가 나름 이해해보면 이래요. 그 의사 양반은 망막 전문의거든요. 자신은 외안부인 결막에 생긴 질환은 잘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대학병원의 외안부 전문의한테 가보라고 말한 거구요.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결막의 그 사소한 질환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싶죠. 망막만 열심히 봐와서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쳐요. 내가 화가 치밀었던 건 환자를 대하는 태도였어요. 뒤에 환자 밀려서 더 말할 시간 없다고 말하는데 참... 환자를 존중하지 않는 의사 만나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들죠. 그래도 그 이후에 갔던 안과에서 정말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래서인지 나는 그 의사 양반이 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답니다.
 

 

  가끔씩 찾아서 보는 무당의 유튜브 채널이 있다. 이 젊은 여자 무당은 어린 아이 때부터 무업을 시작했다. 이 무당의 친할머니도 무당이었다. 말하자면 그 집안에는 신가물, 즉 집안에 신을 모셔왔던 내력이 흐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신기가 있다, 신병을 앓았다, 하는 말을 할 때의 그 무당들을 강신무(降神巫)라고 한다. 내가 샤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시절에 들었던 종교학 강의에서부터였다. 무당을 미신이나 무속으로 폄하하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종교학에서는 '무교(巫敎)'라는 단어를 쓴다. 나의 그 무교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 학문적인 데에 있었다.

  젊은 무당은 스스로를 '**보살'로 불렀다. 보살은 불교에서 말하는 그 보살(菩薩)이 맞다. 한국의 무교는 불교와 많은 부분이 '습합(習合)'되었다. 어찌보면 그 '보살'이란 단어가 무당에게 잘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위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자. 샤먼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보살핀다. 물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어떤 이에게 무교의 모든 것들은 용인할 수 없는 이교도, 잡귀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그 젊은 보살의 유튜브를 관심있게 찾아보는 이유는 무당이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그 보살은 이런 주제로 유튜브를 업데이트했다. '조심하면 나쁜 일은 피할 수 있나요?' 참으로 흥미있는 주제이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들 가운데에는 '다가올 액운을 막는 것'도 있다. 무당에게서 안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정도에 따라 1. 부적을 쓰거나, 2. 치성을 드리거나, 마지막으로 3. 굿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안좋은 일에도 처방의 급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 보살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무당에게서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하면 과연 액운을 피할 수 있는가?

  나에게는 뭔가 무당의 영업비밀을 살짝 알려주는 느낌 같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막을 수 없단다... 내가 그 보살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젊은 무당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무당으로 살아온 삶의 이력을 바탕으로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선에서 사람들의 인생사를 풀어낸다. 아니, 그럼 무당을 찾아가서도 안좋을 일을 미리 막을 수 없다면 도대체 치성이며 굿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살은 거기에 이렇게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면 액운의 정도가 덜해진다고. 다음은 내가 생각해낸 예시이다. 누군가 낙상 수(落傷數)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무당을 통해 신에게 정성을 들이면 두 다리를 다칠 운이 다리 하나만 부러지는 데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간절히 빌고 애원해서 결국 다리 하나만 다친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그 보살의 말대로라면, 인간에게 다가올 불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우리 인간들은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빌고 또 빌어야만(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이 그 역할을 대행한다) 불운을 조금이나마 비껴갈 수 있다. 부적과 치성, 굿을 통해서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미신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보살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믿는 종교의 실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신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의탁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오래전, 나는 성당의 성체조배실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다가 기도 게시판에 붙은 무수한 종이들을 보고 놀랐다.

  '우리 아들이 대학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붙게 해주세요.'
  '건물을 내놓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쪼록 좋은 가격에 팔리도록 도와주세요.'
  '***가 몸이 아파서 입원했습니다. 빨리 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게시판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누군가를 시험에 붙게 해주는 입시 브로커, 부동산 매물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게 도와주는 중개업자, 현실의 명의를 넘어서는 위대한 치유자, 아무튼 어떤 의미에서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나는 그 기도 게시판에서 신도들의 절실함 보다는, 소원 자판기로 전락한 신의 존재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린지가 어느덧 석 달째이다.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있지만 이게 언제쯤 나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먹고 있는 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그저 통증을 막아주는 진통제이다.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약도 그렇게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병을 앓고 있는 나는 내가 믿는 신을 원망해야 할까? 낫게 해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려 볼까?

  지금의 나에게 닥친 '병마'라는 불운을 나는 막아낼 수가 없다. 나는 요즘 구약 성서의 '요나서'를 읽다가 내가 큰 물고기(고래가 아니다)에게 잡아먹힌 요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나는 자신이 있는 곳을 '죽음의 뱃속(공동번역 성서 요나서 2장 3절)'이라고 묘사한다. 요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은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어내게 한다(요나서 2장 11절).

  성서는 요나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신 것처럼 쓰여져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 부분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해야만 하는 때에 그 일을 하셨을 뿐이다. 그분에게 요나는 죽음의 뱃속에 있어야할 이유가 있었다. 요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한계와 약함, 비루함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물고기의 뱃속 깊은 곳에 있게 된 요나는 고통을 겪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병고를 통해서 나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들여다 보고 있다. 요나가 그러했듯, 정해진 때가 되면 이 어두운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저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요즈음의 내가 하고 있는 기도는 그러하다. 불운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신을 믿는 인간은 그 불운이 가져다준 고통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신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에게 종교의 의미는,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그런 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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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왜 그렇게 뭘 자꾸 흘려요?"
  "먹다 보면 좀 흘릴 수도 있지. 얘는 그걸 가지고 그러네."

  요새 들어서 엄마가 음식을 옷에 흘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가제 수건을 엄마의 목에 둘러주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좀 어색해하시는 것 같았다. 손바닥만한 작은 가제 수건을 두르고 엄마는 매일의 간식인 핫도그를 맛있게 드신다. 문득 노인 관련 다큐나 프로그램에서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요양원 같은 시설의 노인들은 식사 시간에 모두들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식판 옆에는 늘 작은 물병이 있다. 그것도 빨대가 있는 물병이다. 나이가 들수록 씹거나 삼키는 기능이 떨어지게 된다. 밥을 먹을 때 물을 조금씩 마시면 음식물을 삼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물병은 식사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엄마에게 간식을 챙겨드릴 때 꼭 물컵을 같이 놓게 되었다.

  가제 수건을 매번 옷에다 고정하는 일은 불편하다. 어제는 생각난 김에 엄마의 턱받이를 하나 사야겠다 싶었다. 쇼핑몰의 검색창에 '턱받이'라고 써넣으니 두 종류가 뜬다. 하나는 유아용, 또 다른 하나는 어른용이다. '성인용 턱받이'로 다시 검색어를 입력해 본다. 그렇게 했더니 얇은 천 턱받이와 실리콘으로 된 제품이 나온다. 실리콘 턱받이는 내구성은 좋아보이는데, 나름 무게감이 있어보였다. 아랫부분에 길게 홈이 패인 그 턱받이는 마치 소의 목에다 거는 여물 주머니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방수처리가 된 폴리에스테르천 턱받이가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 턱받이를 클릭하고서는 상품평을 주욱 읽어보았다.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필요해서 사보냈어요. 요양보호사가 좋아하네요.'
  '한꺼번에 넉 장 샀습니다. 번갈아가면서 쓰면 좋아요.'
  '부모님 간병할 때 이거 쓰면 정말 편합니다.' 

  그 상품평들을 읽고 있노라니 뭔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턱받이를 하고서 식사를 해야하는 노인들은 대개가 고령에, 몸이 아프고 불편한 이들이다. 나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턱받이를 한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품평을 쓴 이들 가운데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겼다.

  '너무 길어서 진짜 환자용 같아요. 괜히 샀어요.'

  그렇구나. 내가 원한 건 그 정도 사이즈는 아닌데, 그보다 좀 작은 건 없을까? 그런데 이 제품에는 선택할 수 있는 사이즈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단일한 사이즈만 있을 뿐이다. 나는 체크 무늬가 있는 턱받이 2개를 골랐다.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나름 무난해 보이는 색이었다. 나는 그 2개를 장바구니에 넣고는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그냥 주문 화면의 창을 닫아버렸다.

  어떤 감정의 파고가 잔잔하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서글픔'이었다. 단지 엄마에게 턱받이가 필요해졌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늙음'이란 단어가 던지는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왜 늙는다는 것은 슬픔과 괴로움을 안겨주는가?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에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하다가 자꾸만 음식을 옷에다 흘린다. 화장실이 급해서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속옷에다 실수를 해버린다. 잘 걷고 싶은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질질 끌게 된다... 그렇게 노인들은 신체능력이 떨어지면서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힘들게 된다. '늙음'은 인간을 무력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연약한 아기들을 보살피는 일은 수고로워도 가치있는 일인 반면, 아픈 노인을 보살피는 일은 대개는 무의미한 중노동으로 여겨진다. 물론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care work)'도 돈으로 충분히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는 엄마의 턱받이 하나를 주문하려다가 '늙음'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서글프고 괴롭고 싫은 것. 그 늙음을 어떻게 잘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없다. 그건 마치 폭풍우 속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걸어가는 방법을 찾는 일과도 같다. 그저 이 악물고 젖은 옷으로 비바람 맞아가면서 신발 잃어버리지 않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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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변두리 동네의 어느 작은 주점. 주인 여자는 마흔을 좀 넘겼을까? 얼굴은 곱상한데 어딘가 그늘이 져있다. 여자는 나이든 동네 영감들 추근대는 것도 일상이라는듯 눙치며 받아넘긴다. '은희네'라는 가게 이름은 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자는 이 자리의 가게를 인수해서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가게 내부의 인테리어는 낡고 촌스럽다. 군데 군데 얼룩이 있는 자주색 소파며, 터진 가죽 의자는 튀어나온 스펀지 조각도 보인다. 어쩌면 유행에 뒤처진 그런 촌스러움이 오히려 사람들을 복작거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 가운데에 주인 여자의 정확한 나이나 고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그려본 이 주점은 가수 방실이의 '서울 탱고(1990)'에서 영감을 받았다. 방실이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노래 속 여인에 대한 애잔함 속에 1990년대 서울의 주변부 풍경이 선연히 겹친다. 나름의 꿈을 가지고 서울에 왔지만 인생의 불운이 겹쳐서 영락해버린 중년의 술집 여자. 이 여자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부서진 꿈의 잔해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웃음과 술을 팔 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심을 내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술이나 드시고 가라'고 부드럽게 말한다.

  방실이의 '서울 탱고'가 보여주는 좌절과 관조의 정서는 이 노래를 향유하는 이들의 연령대와 겹친다. 중년의 청자들에게 인생은 더이상 이룰 꿈이 있거나 뭔가 대단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매일의 일상을 허덕이며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편안한 동네 술집에서 한잔 술에 그날의 피로를 잊는 것이 소소한 삶의 기쁨이 된다. '서울 탱고'에는 닳아버린 꿈의 자락을 붙잡고 살아가는 여자가 전면의 풍경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소시민이 '손님'이라는 배경으로 포개어져 있다. 이 노래의 정서에 공명하는 이들은 주점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서울 탱고'가 나오기 2년 전인 1988년, 조용필은 자신의 10집 앨범에 '서울 서울 서울'을 싣는다.
이 노래에서 1988년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의 잔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올림픽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중진국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려주는 국가적 행사였다. 조용필은 올림픽 개최 도시 서울에 세련된 도회지 남성의 애수를 덧입힌다. 노래 속 화자로 등장하는 남자는 해질 무렵 도시의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이 남자는 적어도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된 주변부 하층민은 아니다. 남자는 여유있게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지나간 사랑을 회상한다. 아름다운 서울의 거리는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만든다.

  당시 서울의 풍경은 '서울 서울 서울'의 노래 속 아름다운 거리로 각인될 수 없었다. '달동네'로 부르는 전형적 서민의 주거지가 서울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김동원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1988)'은 조용필의 노래가 보여주지 않는 서울의 그늘진 뒷모습을 직시한다. 그 다큐는 올림픽 때문에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이들의 고통과 울분을 기록한다. 도시 개발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통제되지 않은 공권력은 서민의 삶을 짓밟았다. 상계동에서 내쫓긴 주민들은 경기도 부천으로 갔으나, 그곳마저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대중가요 속 서울의 이상화된 모습은 '서울 서울 서울'이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길옥윤이 작사 작곡하고 패티 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1969)'는 그야말로 관제 가요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노래 속 화자는 서울의 거리에서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연인들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곳에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화자에게 서울은 꿈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서울은 헤어진 연인만저도 다시 돌아와야할 매력적인 도시로 그려진다.

  이미자가 1968년에 발표한 '서울이여 안녕'은 어떤 면에서 '서울의 찬가'와 극도로 대비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노래의 화자는 아마도 시골에서 올라온듯한 앳된 아가씨이다. 여자는 서울에 간다며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서울에 왔다.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이미 돌아섰다. 변심한 연인에게 상처받은 여자는 서울을 떠나며 눈물을 흘린다. 노래는 서울에 오기까지 여자의 쉽지 않은 여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이 시골 아가씨에게 결국 서울은 애달픔을 안겨준 비정한 도시가 된다. 서울은 가진 것 없는 이 시골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의 차가운 이미지는 '이별'이라는 상실의 사건과 겹쳐지며 증폭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발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서울'이란 도시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강렬하게 투사된 곳이었다. 이미자가 노래한 '서울이여 안녕' 속의 아가씨는 1970년대 서울의 버스 차장, 여공, 가정부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방에서 상경한 하층민들은 서울의 시민이 되기 위해 분투했다. 1980년대에 서울은 이제 들끓는 물질적 욕망의 전시장이 된다. 서울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부동산 광풍의 진원지였다. 마민지의 다큐 '버블 패밀리(2017)'는 감독 자신의 가족사와 1980년대 서울의 부동산 개발사를 선명하게 겹쳐놓는다. 김운경 극본의 TV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은 서울의 밑바닥 인생들을 처연히 응시한다. 한석규가 열연한 '홍식'이란 인물의 비극적 최후는 서울이란 도시의 계층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서울은 여전히 서민들에게는 힘든 생존의 터전이다. 자이언티(Zion.T)의 '양화대교(2014)'는 소년의 목소리를 빌어 그 삶의 고단함을 노래한다. 노래 속 화자인 어린 소년은 '양화대교'를 가슴저리는 추억의 장소로 회상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 기사이다. 늘 집을 혼자 지키는 어린 소년은 돈 버느라 바쁜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면 아버지는 '양화대교'에 있다고 말한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고 다짐하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그 다리를 지나간다. 그와 그의 가족은 그렇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았다. 노래 '양화대교'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회색 도시에 소시민적인 행복, 가족애라는 따뜻한 색채를 덧입힌다.

  올해 서울시에서 새롭게 내놓은 서울의 시정 브랜드는 '서울, 마이 소울(Seoul, my soul)'이다. 언젠가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영혼의 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서울의 방 한 칸'에 대한 끈질긴 근원적 욕망을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소울은 너무나도 물질에 매몰되어 있으며, 그런 면에서 나에게 서울의 새로운 브랜드는 기묘한 울림을 준다.                  




*본문에 언급된 노래들의 가사


방실이- 서울 탱고(1990)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 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https://www.youtube.com/watch?v=ZqLrPLiqgGE


이미자 - 서울이여 안녕(1968)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그리운 님 찾아 바다 건너 천리 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 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아득한 옛날 어려운 일 이기고
백년을 같이 하자 맹세를 했는데
세월이 님을 앗아 나 혼자 울고 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https://www.youtube.com/watch?v=DHNnpIL-JJ8


조용필 - 서울 서울 서울(1988)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손
그 언제쯤 나를 볼까 마음이 서두네 나의 사랑을 가져가 버린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차한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눈물 속에서 멀어져가는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패티 김 - 서울의 찬가(1969)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얼굴
그리워라 내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보라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하여도 내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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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비싼 사탕이 아니냐?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사탕 참 맛있구나. 엄마 어렸을 적엔 이런 사탕이 어딨어? 명절 때나 친척 어른들이 용돈 좀 주면 그걸로 뭘 사먹을 수 있었지. 동네 문방구에 가면 커다란 유리병에 눈깔사탕이 잔뜩 들어있었어. 그거 한 봉다리 사와서 조금씩 아껴먹었더랬지. 사탕이 얼마나 큰지 입에 넣으면 아주 오랫동안 먹을 수 있었거든. 그거 먹고 있으면 애들이 엄청 부러워했어. 애들은 조금만 떼어주라고 막 조르고 난리야. 그럼 사탕을 콱 깨물어서 조각을 내. 그걸 친한 애들한테 나눠주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비위생적이냐. 그런데 그땐 그게 더럽다는 생각도 못했어. 그냥 사탕 얻어먹을 수 있어서 애들이 좋아했더랬지.

  모든 게 다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사탕보다 더 귀했던 건 껌이었어. 애들 중에 누가 껌을 씹고 있으면 가서 그러는 거야. 나도 좀 줘. 그럼 씹던 껌을 조금씩 떼어서 주곤 했지. 남이 씹던 껌 나눠 씹으면서도 애들이 다들 즐거워했어. 원래 껌이 색색가지로 물이 들어있잖니. 근데 오래 씹으면 그 물이 다 빠지잖아. 그러면 어쩌는 줄 아냐? 크레파스로 껌에다 칠을 해서 씹었단다. 그렇게 몇 시간을 씹고 나서도 버리지 않아. 내 방의 벽에다 붙여놓고 다음날에도 또 씹었지. 아휴,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지했던 시대였지 뭐냐. 그래도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즐거운 추억이 많아.

  물론 가난한 애들은 무척 많았어. 고아원에서 학교 다니는 애들도 꽤 있었구. 걔들은 뭘 잘 못먹고 다녔던 것 같아. 엄마는 집에서 농사를 크게 지었으니까 먹고 사는 걱정은 안하고 살았지. 그래도 시내 애들하고는 사는 형편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 언젠가 한번 시내에 사는 애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 장사를 하는 집이었던 것 같은데 집이 꽤 잘 살았어. 걔네 집에서 뭘 차려줘서 밥을 먹고 왔는데, 밥상이 우리집하고는 다르더라. 생활 수준의 차이란 게 느껴지더라고. 어린 마음에도 뭔가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 아,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 아이하고는 더 가깝게 지내질 않았지. 거리감을 느껴서 그랬던 거 같아.

  여름만 되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있어.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아이스케키라고 들어봤니? 설탕 넣어 얼린 얼음 과자 말이다. 그걸 애들이 팔았거든. 체구는 조그만 애들이 지들 몸의 반만한 커다란 나무 상자를 어깨에 메고 다녔지. 그 애들은 학교도 안가고 그렇게 여름 한철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거야. 한여름 대낮이 좀 더우냐.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아이스케키 사요, 아이스케키'하고 외치는 거야. 애들 얼굴은 더위에 빨갛게 익어버리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이야기 하면 마음이 좀 아파.

  오늘이 몇일이냐. 아이구, 벌써 그렇게 날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내일이 9월 1일이지. 오늘은 바람도 불고 날도 그렇게 덥지 않구나. 이제 여름도 다 가고 가을이 오겠구나. 좀 있으면 추석이네. 엄마 어렸을 적엔 추석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강강수월래를 했었어. 동네에 가장 잘 사는 집이 있었거든. 그 집 마당이 엄청 컸어. 거기 다들 모여서 명절날 저녁에 강강수월래도 하고 놀았어.

  그 집엔 엄마 친구도 살았어. 복순이라고. 정말이지 너무나도 착한 친구였어. 그렇게 마음씨 고운 애는 없었단다. 근데 그 친구 생각하니까 막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왜 그러냐고? 걔가, 그러니까 복순이가... 중학생 때쯤에 복순이 귀가 멀어버리더라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갔던 것 같아. 정말 착하고 좋은 애였는데. 어찌 그리 되었는지. 시집은 가서 잘 살았을까? 근데 엄마도 그 후 소식은 몰라.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아무튼 복순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슬퍼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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