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몸이 좋지 않아서 종합병원에 다니고 있다. 올해 들어 여기저기 병원에 다니다 보니 이래저래 몸이 지치고 힘이 든다. 병원에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어딜 가나 환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예약 시간에 가도 환자들이 밀려있어서 제 시간에 진료받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막상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 얼굴을 보면, 실제로 말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뒤에 기다리는 환자들에 대한 압박감은 의사는 물론 환자인 나도 느낀다. 그러니 나도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하게 증상을 말하려고 한다. 진료실에서 나오면 다음 진료 예약과 원무과 수납, 그리고 약국 방문이 이어진다. 이렇게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뭔가 진이 다 빠지는 느낌마저 든다.

  진료를 위해 대기하는 시간 동안, 나는 작은 책자를 좀 들여다 보다가 방문객들을 관찰하곤 한다. 신경과 옆에는 신경외과가 자리하고 있다. 내 앞의 의자에서 기다렸던 젊은 엄마와 아이가 신경외과 진료실에 들어갔다. 한 10분 쯤 지났을까? 그 엄마와 아이가 진료실에서 나온다. 남자아이는 초등학교 3, 4학년 쯤으로 보였다. 아이 엄마는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병이 뇌의 기능적인 문제라면 엄마도 아이도 좀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신경외과를 찾은 또 다른 환자는 80대 할머니이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처음에는 그 여자가 딸이나 며느리인가 생각했는데, 들리는 말소리를 들으니 그런 관계는 아니다. 아마 요양보호사나 임시로 동반하는 일을 맡은 사람인듯 했다. 여자는 노인에게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썼다. 노인이 무슨 서류에 대해 여자에게 말하니, 여자는 그건 아드님이나 따님에게 부탁을 해야한다고 알려준다. 옷매무새가 깔끔하고 꼬장꼬장한 말투의 그 할머니는 그래도 병원에 데려올 사람이 있으니 상황이 나은 편이다.

  수납 창구에서는 노부부가 수납 직원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할아버지는 몸 여기저기가 아픈데 어느 과로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인이 처음에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직원은 정형외과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노인은 가슴 쪽도 아프다고 말을 보탰다. 그건 흉부외과 같은데요? 아, 허리도 아파 죽겠어. 그러면 어르신, 여기 진료 예약번호를 적어드릴 테니까 전화로 상담을 하고 예약을 하세요. 노부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겨우 수납 창구에서 돌아선다. 많은 노인들에게 종합병원의 예약, 진료 시스템은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병원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약국을 방문한다. 그리 넓지 않은 약국 내부는 이미 환자들로 가득 찼다. 나는 서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의 관찰기는 계속 된다. 약국에서 일하는 사람은 네 명. 주인 약사와 관리 약사, 이렇게 두 명의 약사가 있다. 직원도 2명이다. 처방전을 든 환자들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나는 이 약국의 월매출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다. 약을 지은 약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70은 훌쩍 넘은 할아버지가 약을 받아가는데, 6개월분의 약이 커다란 종이 쇼핑백에 담긴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런저런 지병으로 고생하셨던 부친은 때가 되면 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오셨다. 아버지도 저 노인처럼 그 많은 약을 받아오셨겠구나 싶었다.

  인사성은 밝지만 그리 친절하지 않은 여자 직원이 중년의 남자 손님에게 묻는다. 몇 개 과의 진료를 보신 거에요? 3개요. 남자는 처방전 세 장을 건넨다. 체격은 건장해 보이는데 어디 아픈 데가 많나 보네. 내 차례가 되어 약을 받고서 약국을 나선다. 병원에 올 때는 모처럼 해가 났었는데, 어느새 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나는 가방 속에서 우산을 꺼냈다. 이 우산은 몇 년 전, 커피 회사의 이벤트에 응모했다가 당첨이 되어서 받은 것이다. 빨강색의 이 우산에는 송중기의 사인이 인쇄되어 있다. 인기절정의 남자 배우는 이제 애아빠가 되어 있다.

  약국에서 걸으면 10분 정도의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내가 타려는 버스는 20분 뒤에야 왔다. 버스 노선에는 중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마침 하교 시간이라 아이들이 버스에 우르르 탄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내릴 때 미리 뒷문에 가있어야겠네. 내리는 문 옆에는 앳된 표정의 남학생이 서있다. 그 남학생은 내가 내리려는 기색을 비치자 미리 자리를 비켜주려 애를 쓴다. 착한 아이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약부터 챙겨서 입에 털어넣는다. 통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다음 진료는 2주 후에 있다. 그때까지는 몸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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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는 시나리오 소재가 하나 있었다.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주연 배우도 나름 생각해 두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완성되어서 영화화될 수 있다면 유해진과 송중기를 캐스팅해야지. 여배우는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서 아직까지 정해놓지 못했다. 물론 나는 아직 그 시나리오의 첫 문장도 쓰지 않았다. 대충 시놉만 짜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상세하게 구상해놓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은 스페인을 배낭 여행 중이고, 여자 주인공은 멀리 떠난 그 남자를 그리워한다.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에 음악 신청을 한다. 그렇게 라디오 디제이에게 선곡이 되어 흘러나오는 노래는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이다.


  1992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가요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수 박정운은 남자 가수로는 흔하지 않은 매우 청아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가사도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언젠가 박정운을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박정운은 이 노래의 작곡 배경을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과 떨어져 외국에서 지내던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에 담았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오늘 같은 밤이면'은 그해에 국어학자와 평론가들이 뽑은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에 선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튜브에서 내가 이 노래를 들을 때 선택하는 영상은 올림픽 공원에서 그가 라이브로 부른 버전이다. '토요 대행진'이라는 가요 프로그램인데, 박정운은 어스름이 깔린 여름 저녁 무렵 탁 트인 잔디밭에서 노래를 부른다. 의외로 관객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 영상에서 박정운은 그야말로 가수의 절창(絕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만의 절절한 감성에 뛰어난 가창력이 어우러진 노래는 여름 저녁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야외 무대의 그리 좋지 않은 음향 상태 따위는 이 가수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박정운은 오로지 자신이 부르는 노래만으로 진정한 가수 그 자체임을 입증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990년대는 우리나라 가요계의 제자 백가 시대와도 같았다.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이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들을 들고 나왔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참으로 행복하게 대중가요를 향유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댄스 음악의 열풍 속에서도 발라드의 아성은 참으로 견고했다. 박정운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발라드 가수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노래에는 다른 발라드 가수와는 차별되는 그만의 감성과 애절함이 있었다. 대표곡 '오늘 같은 밤이면'과 '먼 훗날에'를 들어보면 이 가수가 지닌 강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가끔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면 1980년대와 90년대에 활약했던 발라드 가수들이 트로트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히트곡을 가진 이진관, '젊음의 노트'를 부른 유미리도 트로트 가수로 진로를 바꾸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발라드적 감성을 지닌 그 가수들의 모습과 TV 화면 속 트로트 가수로 변한 모습이 서로 이질적으로 충돌하고 겹쳐지는 것을 목도한다. 가수도 직업인이며, 먹고 사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발라드를 들어주던 팬들은 다른 새로운 음악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1990년대의 가수들은 2000년대에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그룹의 파고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박정운은 그 속에서 서서히 잊혀진 가수가 되었다.

  몇 년 전인가? 나는 박정운의 근황이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를 아는 누군가가 박정운이 기획사를 차려서 아이돌 그룹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써놓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새로운 음악 인생에 승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제 가수로서의 박정운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어떻게든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가수로서,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고달픔은 그를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데려가 버렸다. 작년 가을, 나는 인터넷 뉴스로 그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향년 56세, 참으로 안타까운 나이였다.    

  가끔, 나는 그가 올림픽 공원에서 라이브로 부른 '오늘 같은 밤에는'을 듣는다. 이제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그가 부른 그 노래가 들어있다. 언젠가 나는 나의 그 머리를 땅속에 누이게 될 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생에서 가수의 노래는 사라지겠지만, 그 노래를 듣는 누군가에게서 노래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가수에게 있어 영생(永生)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운했던 가수 박정운, 그가 지금 있는 그곳에서 평안히 쉬길 기도한다.  


*가수 박정운이 1992년 5월, 올림픽 공원에서 라이브로 부른 '오늘 같은 밤이면'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fiGVZAHJ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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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내 이메일의 받은 편지함에는 정기구독하는 뉴스 레터들이 쌓인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잡지들 가운데에는 미국의 과학 학술지 'Science'도 있다. 그 잡지는 과학적 연구부터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과 과학 정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이번 주 뉴스 레터에서는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일본인 아마추어 천문학자 이타가키 코이치(Koichi Itagaki)씨가 그 기사의 주인공이다.

  올해 75세인 이 노인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초신성을 발견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떻게 그는 아마추어로서 그런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기사는 이타가키 씨가 '렌즈'라는 도구에 매혹되었던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렌즈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망원경으로 옮겨갔다. 이타가키 씨는 1963년에 이케야 카오루(Kaoru Ikeya)라는 일반인이 혜성을 발견한 뉴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아마추어 별 관찰자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그의 생업은 따로 있었다. 고교 졸업 후에 제과 회사에 취직한 그는 일본에서는 최초로 소포장 믹스 너트(한번에 먹을 만큼의 미니 견과류를 포장하는 형태)를 고안해내었다. 이후에 이타가키 씨는 자신만의 회사를 차렸고 회사는 잘 되었다. 예순이 되던 해에 그는 회사를 세 아들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별 탐구에 나섰다.

  천문학에 대한 이 영감님의 열정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일본 내에서 천체 관측이 용이한 지역을 답사해서 세 군데의 산 정상에 자신만의 미니 천문대를 세웠다. 다양한 관측 장비도 사들였다. 그런 그가 중점적으로 관찰한 대상은 초신성(supernova)이었다. 그는 처음에 혜성을 연구했지만, 곧 초신성으로 관찰 대상을 바꾸었다. 혜성 탐색은 여러 국가와 거대 천문대의 주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열정적인 탐구자로서 이타가키 씨는 새로운 초신성을 계속 발견해 나갔다. 그렇게 그는 아마추어 천문학자로 점점 이름을 알려갔다. 그는 자신의 미니 천문대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매일 출근해서 별을 관찰하는 일상을 보낸다.

  이 아마추어 천문학자의 이야기는 나에게 소박한 감동을 주었다. 렌즈에 매혹되었던 중학생은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초신성 발견의 대가가 되었다. 이타가키 씨는 그저 별을 바라보는 일 자체가 즐겁고 좋다고 말할 뿐이다. 그렇게 그의 생애를 추동한 원동력은 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돈이나 명예에 초연해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온전히 기쁨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이타가키 씨가 운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꾸렸던 사업체가 잘 되었고, 그것이 나중에 천문학에 투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은퇴했다 하더라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아마추어 천문학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타가키 씨의 삶을 특징짓는 별에 대한 매혹과 열정은 과학 발전이라는 고귀한 명제와 조화롭게 어울린다. 아마추어 천문가로서 이런 행운을 누리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러는 어떤 것에 매혹된 이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인생을 지난한 고통 속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영화가, 이 요사스러운 것이 결국 내 인생을 망치고야 말았지."

  만년의 오손 웰스(Orson Welles)는 오래전, 내가 본 그의 다큐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을 하는 웰스는 애써 눈물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으로 영화사에 위대한 각인을 새긴 명감독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나는 젊은 시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눈물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The Starwatcher'. 이번 주 Science 뉴스 레터에서 이타가키 코이치 씨를 다룬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 속 사진에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마추어 별 관찰자가 있다. 매혹과 열정이 순전한 기쁨으로 감응하는 삶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될 뿐이다. 나는 나름 감동적인 과학 기사에서 기이하게도 오손 웰스의 회한에 찬 눈빛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사진 출처: science.org     이타가키 코이치 씨가 매일 출근하는 자신의 미니 천문대



**해당 기사 링크:
 https://www.science.org/content/article/amateur-astronomer-may-worlds-top-supernova-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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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유리 조각과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면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까? 빠른 시간 안에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제거는 가능하다. 하지만 유리 조각의 경우는 투명해서 더러는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만난 2명의 안과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올 봄의 일이다. 책상 스탠드의 전구를 갈다가 그것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튀어서 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다니던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유리 조각을 빼내었다. 그런데도 눈에는 이물감과 통증이 지속되었다. 아무래도 미처 제거되지 않은 유리 조각이 남은 것 같았다. 거기에다 눈 안쪽 가장자리에는 작은 수포 같은 것도 생겼다. 다시 안과에 갔다.

  "일단 현미경 상으로는 유리 조각은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유리 조각이 있을 수도 있겠죠. 염증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눈 안쪽에 생긴 건 나도 잘 모르겠네요. 난 망막 전문이라 외안부 질환은 안봅니다. 진료 의뢰서를 써줄 테니 대학병원에 가보시죠."

  이 의사는 대학 병원 안과 교수로 10년을 넘게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눈에 생긴 작은 뾰루지 같은 것이 뭔지 모른다는 말이 나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무슨 중대한 질환도 아니고 진료 의뢰서를 들고 대학 병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나는 그 의사가 웬만하면 외래에서 치료할 수 있는 것을 귀찮아서 안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이렇게 병원 한번 왔다 가는 일도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힘이 들어요. 저는 선생님이 볼 수 있는 거면 그냥 치료받았으면 하는데요. 이걸 가지고 또 대학 병원에 가보라니 내 입장에서는 좀 무책임하게 들리네요."
  "뭐가 무책임하다는 겁니까? 내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결막에 난 게 진짜 뭔지 모른다니까요. 난 망막만 본다구요. 우리 병원은 망막 전문 병원입니다. 지금 환자들 기다리고 있어서, 환자분하고 더이상 이야기 할 시간 없습니다."

  의사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고 진료 의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내 뒤로는 환자들이 열 명도 넘게 밀려있었다. 이 의사는 환자가 말을 길게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전부터 나는 이 의사의 진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있기는 했다. 내가 눈에 대해 뭔가 물어보려고 하면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진료실에서 빨리 내보내고 싶은 눈치였다. 나이든 노인 환자가 눈 영양제에 대해 말하니까 큰소리로 면박을 주는 것도 들었다. 이 병원의 진료실 문은 열려져 있어서 의사와 환자의 대화 소리가 다 들린다. 뭔가 환자에 대한 응대가 썩 좋지 않은 의사구나 생각은 했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의사여서 병원은 환자들로 언제나 미어터졌다. 나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구, 3분 커트 진료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버시구려.'

  나는 그렇게 속으로 화를 삭이면서 병원을 나왔다. 그 의사가 써준 진료 의뢰서를 가지고 대학 병원 안과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안과 전문 병원을 알아보고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예약하기 전에 그 병원에서 결막 질환을 보는지 물어보았다. 문의한 병원의 안내 데스크에서 의사에게 물어보고 진료를 본다는 답을 주었다. 그 병원에는 세 명의 안과 전문의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병원의 홈페이지를 둘러 보았다.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의사의 경력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그렇다. 그런 경우에 나는 의사의 관상을 본다... 병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들 가운데 한 의사가 환자를 보는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다. 젊은 의사가 진중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의사한테 진료를 보기로 예약했다. 

  마침내 예약한 날에 병원에 가서 의사를 보았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의사는 마치 대학생처럼 보였다. 나는 진료 의뢰서를 보여주며 병원에 오게 된 이유를 짧게 요약해서 말했다. 이제는 의사를 만날 때 말을 간결하게 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가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 병원 진료가 괜히 3분 커트, 5분 커트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것저것 묻는 환자는 곧 짜증이 뚝뚝 떨어지는 우거지상 얼굴의 의사를 보게 된다. 나에게 진료 의뢰서를 써준 안과 의사도 그랬다.

  "유리 조각이 눈에 들어간 거면 큰 사고를 겪으셨네요. 그럼 어디 한번 눈을 볼까요?"

  의사는 세극등 현미경으로 내 눈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혹시 남아있는 유리 조각이 결막에 남아있는지 면봉으로 쓸어내리면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의사는 결막 안쪽에 난 수포는 결막낭인데, 제거를 해도 재발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제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사가 마취 안약을 내 눈에 점안하고 주사 바늘로 그걸 터뜨리는 데에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 다시 안과에 가서 보니 다행히 결막낭이 재발하지 않고 깨끗이 나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적으로 눈의 이물감과 통증을 느꼈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하자, 의사는 현재로서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말했다. 나는 이 의사가 환자를 보고 대하는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 선생은 환자인 내 이야기를 주의깊게 경청했고, 진료 내용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도 잘해 주었다. 이 의사에게는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눈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걱정을 상당부분 덜어주었다. 적어도 이 의사한테 진료를 보면 아픈 눈이 다 잘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심 속으로 이런 좋은 의사도 다 있네, 하고 감탄했다.

  나는 대학 병원에 가보라며 나를 진료실에서 떠밀어낸 3분 커트 의사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의사의 문전박대 때문에 좋은 의사 선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3분 커트 의사는 내 눈에 생긴 수포가 결막낭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 아니, 대학 병원에서 10년 넘게 교수로 구른 사람이 젊은 의사가 단번에 보고 아는 결막낭 질환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나? 망막만 보는 의사는 그런 사소한 외안부 질환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가? 아마도 그건 의사 본인만이 아는 일이겠지. 내가 분노하는 건 그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는 환자를 존중하지도 않았고, 환자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서 공감하는 능력도 없었다. 안과 의사로서 눈을 보는 실력이야 출중할지 몰라도, 나는 그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교 체험 극과 극' 프로그램처럼 나는 눈 때문에 두 명의 안과의사를 만나보았다. 한 사람은 의사로서 참으로 별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정말로 괜찮은 의사 선생이었다. 어쩌면 의사도 진정한 재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공부 머리가 좋고, 환자 치료를 잘하는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아픈 환자의 마음을 살피는 일. 심의(心醫), 의사로서의 최고 경지는 그렇게 환자의 불안한 마음까지 보듬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의사를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진료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환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환자가 조금만 이야기를 길게 하거나 뭘 물어보면 의사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의사도 개인 사업자이니, 의사들이 입만 열면 성토하는 현행 의료 수가 체계에서는 의사가 어떻게든 환자를 많이 보아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술이 돈과 효율로 환산되는 이런 현실은 매번 마주할 때마다 씁쓸함을 남긴다. 아마도 내가 알게 된 그 좋은 안과 의사도 언젠가 명의가 되어 3분 커트로 환자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사 선생이 심의(心醫)로서의 마음가짐만큼은 오래 지켜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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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약도 먹지 말고, 연고도 바르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올해 1월의 일이다. 나의 왼쪽 엄지 발톱은 한 달 넘게 자라지 않았다. 발톱 주변은 빨갛게 붓고 아팠다. 진통제와 항생제 연고를 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피부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발톱 무좀인지도 모른다고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무좀은 아니었다. 종종 발톱이 안자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 경우 발톱이 빠질 수도 있고, 다시 자랄 수도 있으니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런데 병원에 다녀오고 2달이 지나고서도 발톱의 통증과 부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질 뿐이었다. 약이나 연고를 쓰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플 때마다 소염진통제를 먹었고, 항생제 연고를 발랐다. 그쯤 되니 나는 이건 단순한 발톱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다시 피부과를 방문했다. 대기 환자로 미어터지는 피부과에서 2시간을 기다려서 의사를 보았다. 내가 아파서 혼자 약도 먹고 연고를 발랐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의사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의사는 내 발톱을 건성으로 들여다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분의 문제는요, 의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데에 있어요. 나는 피부과 의사로서 전문적으로 수련을 하고 오랫동안 많은 환자를 봐왔단 말입니다. 내가 소염제나 연고 쓰지 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환자분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가처방으로 이거 저거 썼죠? 그냥 내버려 두면 해결될 수도 있는 거에요. 환자분이 그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요. 자꾸 아프다고 하시니까 어쩌면 피부과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정형외과나 신경과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진료 의뢰서를 써드릴 테니 대학병원에 가보세요."

  의사는 더이상 길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가 역력했다. 자신의 진료 컴퓨터 창에 대기 환자가 9명으로 떴다며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모멸감과 불쾌함을 느끼며 진료실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빨갛게 붓고 욱신거리는 발톱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을 했다. 왜 내 발톱은 자라지도 않고 이렇게 아픈가? 나는 검색창에 입력어를 달리 해가며 검색을 해보았다. 마침내 나와 같은 증상으로 고생을 하다가 결국 끝(!)을 본 블로거의 글을 읽었다. 그 블로거도 나와 증상이 같았다. 발톱이 자라지 않았고, 통증과 부기에 염증까지 생겼다. 그는 피부과에서 내성 발톱 진단을 받고 발톱 일부분을 절제하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형외과에도 가서 주기적으로 염증 치료도 받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고생을 하다가 궁리 끝에 그는 대학 병원의 족부 전문 클리닉을 찾아갔다.

  의사는 그에게 제대로 자라지 못한 발톱이 겹겹이 쌓인 상태라고 했다. 치료법은 '발톱을 뽑는 것' 뿐이어서, 그는 결국 발톱을 뽑았다. 1년에 걸친 고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블로거가 쓴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새로 자라고 있는 발톱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아니, 발톱을 뽑아야 한다고? 정말 그 방법 밖에 없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나는 인터넷 검색을 이어갔다. 마침내 영어로 된 의학 논문들 사이에서 내 발톱의 진단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Retronychia. 우리말로 번역하면 '역행(逆行) 발톱' 쯤 되겠다. 찾아보니 이건 정확한 한글 진단명도 없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위로 자라야할 발톱이 발톱 뿌리 쪽을 파고 들면서 생기는 병이었다. 외상이나 다른 충격에 의해 발톱 뿌리의 성장판에 문제가 생기면, 발톱은 정체된 상태로 있게 된다. 문제는 그 발톱 밑에서 계속 새로운 발톱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마치 떡판이 쌓이듯 겹겹이 쌓인 발톱은 그 밑의 피부를 압박하며 통증과 염증을 유발시킨다.

  그럼 이 Retronychia의 치료법은 무엇인가? 초기에는 발톱에 고농도의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당한 시일이 지난 경우에는 '발톱을 뽑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다. 내가 본 블로거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Retronychia가 생기는가? 그 주요한 원인으로 꼽는 것은 '외상'이다. 발톱 뿌리 부분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은 발톱의 성장판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작년 12월 경에 엄지 발가락에 무거운 물건이 떨어졌던 적이 있었다. 

  결국 발톱을 뽑는 방법 밖에 없단 말인가? 발톱 뽑는 수술은 정형외과에서나 할 텐데... Retronychia에 대한 영어 논문들을 읽고 나니 나는 무척이나 심란해졌다. 뭔가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지 나는 희망을 가지고 검색해 가며 구글신의 가호를 빌었다. 그리고 최신 논문 하나를 찾아냈다.

  "Retronychia 치료의 새로운 지견: 발톱을 뽑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논문은 발톱을 뽑는 것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효과적인 치료방법이지만 환자에게 매우 큰 고통과 불편을 줄 수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그렇게 발톱을 뽑고 나서도 병이 재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논문은 Retronychia 환자들에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지속적으로 발톱을 갈아내는 것이 효과적임을 입증했다.

  "뽑지 않아도 된다. 갈아내라!"

  그것은 내게는 마치 거룩한 계시처럼 여겨졌다. 그래, 발톱을 갈아내 보자. 나는 그 논문에 실린 환자들의 발톱 사진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발톱의 어떤 부분을 갈아낼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러니까 제일 겉부분의 발톱을 갈아내면 그 아래에 자라고 있는 새로운 발톱이 올라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무려 한 달 넘게 발톱을 조금씩 갈아내었다. 그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두꺼워진 발톱을 갈아내는 일은 처음엔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얇아지면 피부와 닿게되면서 고통을 유발한다. 도구도 여러가지를 썼다. 손톱 손질용 버퍼부터 전동 네일 드릴, 나중에는 공업용 줄세트까지 사야했다. 발톱이 쉽게 갈리게 만들기 위해 티눈액도 중간중간 썼다. 사용한 기구의 소독은 철저히 했다. 그렇게 해서 발톱의 상당 부분을 갈아내었다. 그 이상은 고통스러워서 더 할 수도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발톱을 갈아내면서 발톱 주변의 통증과 부기가 가라앉았음을 발견했다. 아마도 자라지 않고 피부를 누르는 상층부 발톱이 주는 압박이 덜해지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리하여 어제, 나는 발톱이 자라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7개월 동안 자라지 않던 발톱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Retronychia가 뭔지도 모르는 피부과 의사한테 갔다가 무려 7달 동안 생고생을 했다. 내가 화가 치미는 것은 환자에 대한 그 의사의 태도에 있다. 환자가 지속적인 통증을 호소하고 분명히 염증 소견이 존재하는 데도 그 의사는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갖고 있는 임상적 경험만을 내세웠을 뿐이다. 의사가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환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청취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환자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굳이 그 의사의 입장을 이해해 본다면 Retronychia가 피부과의 임상 현장에서 최근에서야 주목받고 있는 질병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 병을 보고한 영어 논문은 1999년에서야 나왔다. 그 이후에도 피부과 학회지에서는 드문드문 언급되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Retronychia는 오랫동안 오인되고 무시된 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 Retronychia는 발톱색의 변형을 동반한다. 노랗게 변한 발톱색 때문에 종종 이 질환은 발톱 무좀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다. 더러는 내성 발톱으로 오진된다. 그러므로 환자들은 효과도 없는 무좀 치료와 내성 발톱 치료를 받다가 발톱은 물론 발가락의 변형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이 글을 발톱이 자라지 않는 문제로 고생하는 Retronychia 환자들을 위해서 남겨둔다. 자라지 않는 발톱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니 우선은 피부과 진료를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약 발톱 무좀도 아니고 내성 발톱도 아니라면, 외상에 의한 발톱 뿌리의 손상으로 생기는 Retronychia일 수 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 따라야 한다. 나에게는 그 행운이 비껴갔다. 만약 그대가 Retronychia로 고생하고 있다면 부디 그 행운을 붙잡아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Retronychia에 대한 해외 피부과 학회 영어 논문을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6106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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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디 2024-03-12 08:23   좋아요 0 | URL
글로 남겨주시니 감사합니다^^저도 고생하다가 발톱을 뽑으니 해결되네요ㅠ보라*병원,아*병원의 피부과 교수님들도 원인을 모르니 답답했네요ㅠㅠ하루빨리 우리나라도 Retronychia에대해 알려져서 환자들이 고생하지않았으면 합니다..제경험상 발톱부분에 충격을 주거나,압박스타킹이나 발목조이는 양말을 지속적으로 신으면 피가 잘 안통해서 그런지.. 제경우는 생기는거같아요ㅠ그로인해 4~5년마다 동네정형외과에 가서 발톱을 뽑아달라고 합니다ㅠ이번에도 발톱뽑으러 가기전에 이글을 보게됬네요..이렇게 글을 접하니 반가운마음이 들고 감사하네요^^

푸른별 2024-03-12 19:55   좋아요 0 | URL
아이쿠, 스탠디님은 큰 병원 2군데를 다니면서 고생했군요. 기록으로 남긴 제 글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작은 발톱 하나가 그렇게 사람을 고생을 시키더군요. 모쪼록 쾌유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