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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막장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한때 잘나가던 연극배우로 엄청나게 큰 돈을 모았으나, 지독한 수전노가 되어서 가족들의 원망을 듣고 있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연극 배우에게 반해서 결혼했으나, 출산 후유증 때문에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다. 첫째 아들은 술고래에 주색잡기로 인생을 망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 선원으로 떠돌아다니다 폐결핵을 얻어 돌아왔다. 술에 취한 첫째 아들은 부모를 노랭이, 약쟁이로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 4명의 가족이 여름 별장에서 보낸 하루 동안의 이야기, 바로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TV와 연극 연출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시드니 루멧의 첫 영화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이었다. 배심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이야기를 다룬 그 작품은 매우 성공적인 데뷔작이었다. 인물과 공간을 다루는 그의 솜씨가 연극 연출에서 기인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밤으로의 긴 여로(1962)'를 비롯해 '갈매기(The Sea Gull, 1968)', '에쿠우스(Equus, 1977)' 만듦으로써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장 찬사를 받은, 주목할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캐서린 햅번은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랄프 리처드슨과 제임스 로바즈, 딘 스톡웰은 공동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들의 불꽃튀는 연기대결뿐만 아니라, 루멧의 연출과 영화적 감각도 눈부시게 빛난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자신이 사후 25년 동안 출판과 공연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오닐이 사망한 후 3년 뒤인 1956년에 출판이 되었고, 루멧은 1962년에 희곡을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50분에 이른다. 뒤틀리고 어긋난 티론 일가의 고통스런 애증의 관계가 처절하게 펼쳐지는데, 루멧은 그것을 결코 단조로운 화면에 담지 않았다. 다양한 쇼트들, 카메라의 위치를 바닥에 둔 쇼트들부터 미디엄, 롱 쇼트, 그리고 여러대의 크레인(crane)을 사용한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카메라 렌즈도 장면에 따라 광각렌즈(wide-angle lens)와 장초점 렌즈(long-focus lens)를 사용해서 복잡한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주로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장면들을 카메라가 매우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단순히 연극 공연을 찍듯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루멧은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그런 몰이해에 굉장히 분노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와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학도에게 더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영화를 분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적인 것'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메리 티론을 연기한 캐서린 햅번은 불안과 회한, 원망이 뒤엉킨 약물 중독자의 모습을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낸다. 가난에 대한 상처와 배우로서 좌절된 경력을 지닌 제임스 티론 역은 랄프 리처드슨이 맡았는데 그의 연기는 다소 '연극적'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과장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첫째 아들 제이미 역의 제임스 로바즈의 연기도 뛰어나다. 그는 브로드웨이 연극 공연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나는 막내 에드먼드 역을 맡은 딘 스톡웰의 연기가 가장 좋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생산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쟁쟁한 연기 경력의 대선배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스톡웰의 강단있는 연기는 그가 칸 영화제 공동 남우 주연상을 받기에 충분했음을 입증한다.


  이 영화의 음악은 앙드레 프레빈이 맡았다. 날카롭고 음울한 음악이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영화 중간 중간 들어가는 피아노 음악은 장면의 전환를 알리는 역할도 한다. 프레빈은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명성이 드높지만, 그의 음악 세계는 클래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재즈 애호가들에게 프레빈은 뛰어난 재즈 피아니스트로 기억된다. 클래식 음악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재즈 음악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음에도 그가 남긴 재주 음반들은 상당하다. 그의 재즈 연주를 듣다 보면 프레빈은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클래식의 심장과 재즈의 심장, 그런 재능을 가진 이는 아마도 그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우디 앨런의 아내 순이 프레빈은 그가 미아 패로와 결혼 기간 중에 입양한 딸이다.


  영화 속 4명의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들추고 과거를 헤집는 모습은 마치 전갈들이 독침으로 적을 찌르며 하이에나가 시체를 물어뜯는 것을 연상케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티론 일가의 오래된 곪은 상처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밤 속에서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막장 가족의 처절한 비극 밑바닥에 혈연의 뜨거운 피와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밤으로부터의 긴 여로'는 피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드리운 고통과 슬픔의 뿌리를 들여다 보게 만든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이어진 그 내력, 그것이 주는 빛과 어두움, 환희와 절망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들리는 고동 소리는 무적(霧笛), 안개가 끼었을 때 선박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나 등대에서 울리는 소리이다. 별장이 자리한 곳은 동부 코네티컷 해안가로 안개가 수시로 끼는 곳이다. 4명의 인물들은 과거의 상처라는 안개 속에 갇혀서 삶의 방향성을 상실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적 소리를 들으며 배들은 충돌을 피할 수 있지만, 티론 일가의 사람들은 서로를 들이받으며 고통스럽게 침몰한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메리는 모르핀에, 가장 제임스와 두 아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술에 중독되어 있다. 이 안개 속의 가족을 시드니 루멧은 흑백의 화면 속에 정교하고 밀도있게 담아낸다.



*영화를 보기 전에 희곡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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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내멋대로 살아왔어.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 대학도 다니다 때려쳤거든. 그러다 '누리'라는 이름의 그 남자를 알게 되었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쿠르드족 출신 전직 마약상. 직업이 좀 그렇지? 그런데, 난 괜찮았어.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구. 남자는 새출발하려고 감옥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어. 뭔가 의지가 있어 보였지. 결혼식장은 교도소 안이었어. 장소 따위가 중요한가? 어쨌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냐? 난 그렇게 생각했어.

  곧 아이가 생겼어. '로코'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착하디 착한 아들. 이제 6살이 된 그 아이는 한 번도 내 속을 상하게 한 적이 없어.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떤 괴로움도 잊을 수 있었어. 내게도 온전히 나만의 것,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내 것이 생긴 거야. 남편도 마음잡고 착실히 잘 살아주었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때론 그런 불안감이 들기도 했지.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일은 드무니까. 
 
  그날도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지. 친구와 만나고 남편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는데, 길이 다 막혀있었어. 경찰차와 경찰들이 그득한 거야. 폭발 사고가 있었대.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어. 그때 직감했어. 불안하게 이어지던 내 행복이 끝났다는 것을. 경찰이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더군. 못으로 만든 사제 폭탄이 온몸을 갈기갈기 다 찢어놓았다는 걸, 나중에 재판정에서 들었어.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죽는 것도 쉽지가 않아. 눈을 떠보니 살아 있었어.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누리와 로코는 왜 죽어야 했지? 경찰은 동유럽 마피아 짓이래. 웃겨, 미리 범인을 다 정해놓은 거 같아. 그날, 로코를 누리에게 데려다 주고 나오는데 백인 여자 하나를 길에서 만났었지. 새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도 않고 어딜 가려고 했어. 도난당할 수 있으니 자물쇠를 채우라고 알려줬지. 좀 이상하게 보였어. 거긴 이민자들이 사는 곳인데, 저런 백인 여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했어. 그 여자,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어. 분명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야.

  변호사가 용의자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알려줬어. 죽지 않고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 그 짐승같은 것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길바닥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지. 내 짐작이 맞았어. 새 자전거에 실었던 건 폭탄이었어. 백인 여자와 그 남편이 저지른 짓이었어. 쓰레기 같은 나치 추종자들. 아무 것도 모른다는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것들의 면상을 죄다 칼로 긁어버리고 싶었지. 나는 참고 또 참았어.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 편이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재판이 이상하게 흘러가. 집에서 나온 마약을 가지고 날 마약중독자로 몰아가고 있어. 여자를 봤다는 내 증언은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악마같은 것들의 변호사 놈은 뻔뻔한 얼굴로 나를 더 몰아붙였고, 난 결국 법정에서 그 짐승들에게 욕을 퍼붓고 말았어. 견딜 수가 없었지.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어. 질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어. 그 악마들이 사건 당시 그리스에 휴가차 있었다는 증언을 그리스 숙박 업자가 했고, 그게 먹혔어. 웃으면서 그것들은 법정을 떠날 수 있었지.

  항소를 하자고 변호사한테서 자꾸 연락이 와. 항소? 그런 게 의미있어? 난 이길 수 없을 거야. 내 방식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어. 사제 폭탄을 만드는 법을 찾아봤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 로코의 찢겨나간 부드러운 살과 혈관들을 떠올려 봤어. 그것들도 그렇게 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모든 걸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거야. 어쩌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 그리스, 거기에 그 나치 패거리들이 있어. 그 더러운 것들이 도피 여행을 떠났더군.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로코를 위해서, 누리를 위해서. 목숨값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줄 참이야.

  결국 난 그 악마들을 찾았어. 그리스 파시스트 놈한테 붙잡힐 뻔 했지만 용케 빠져나왔지. 해변가 캠핑카에 그 짐승들이 숨어있더군. 멀쩡히 잘 살아있었어. 매일 건강을 위해 해변을 달리더군. 난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폭탄은 완벽하게 준비됐어. 그런데, 좀 무섭고 떨려. 왜 그럴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쉬울 리가 없잖아. 그것들이 없는 사이 차 밑에 폭탄을 넣어두었어. 그대로 돌아서서 오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근처 나무에 새 둥지가 있었거든. 아기새를 어미새가 보듬고 있었어. 폭탄이 터지면 새들도 죽겠지.

  해낼 수 있을까? 로코와 누리를 생각해야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구. 저 미친 쓰레기들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난 죽은 거나 다름없어. 난 해야할 일을 할 뿐이야. 되돌려 주는 거지. 내 소중한 모든 걸 앗아간 악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는 거야.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 끝내야 해...


  파티흐 아킨의 2017년작 '심판(Aus dem Nichts, In the Fade)'의 주인공 카티야의 이야기다. 이 글에서 카티야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티야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카티야 역을 맡은 다이앤 크루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에게 있어 영혼을 불사르는 '인생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찾아볼 법 하다. 내 생각에 다이앤 크루거가 앞으로 어떤 배역의 연기를 하든 이 영화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카티야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독일어 제목 'Aus dem Nichts'의 뜻은 '무
()로부터'이다. 영어 제목 'In the Fade'의 의미가 더 명징하게 다가온다. 소멸, 사라짐의 의미이다. 



*사진 출처: cinema.de



*내일은 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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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 솔로(Free Solo, 2018)', 장비 없이 맨몸으로 암벽을 타는 클라이머 알렉스 호놀드의 엘 케피탄(El Capitan) 도전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 다큐를 보면서 받았던 나름의 충격과 감정의 여진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문자 그대로 백척간두(竿頭)의 삶을 사는 그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등반 도중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치명적인 부상 내지는 사망으로 이어지는 그 도전의 여정. 열정인가, 목숨을 건 도박인가, 보는 내내 들었던 여러 생각들은 다큐가 끝나고서도 머릿속에 헝클어진채 있다.


  호주 출신 제니퍼 피돔 감독의 2017년 다큐 'Mountain'에는 알렉스 호놀드 같은 이들이 떼로 나온다(그도 다큐의 초반부에 잠깐 나온다). 자신들을 뒤따르는 엄청난 눈사태 속에서 스키 타는 이들, 윙슈트(wingsuit)입고 협곡 사이를 날아다니는 사람들, 수직 절벽에서 산악 자전거로 낙하하는 이들, 절벽 사이를 연결한 외줄을 타는 사람... 그냥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Mountain'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산에 바치는 영상 찬가이다. '찬가'라는 표현에 걸맞게 음악을 담당한 호주 체임버 오케스트라(ACO)의 연주가 정말 빼어나다.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겨울'이 설산을 내려오는 보더와 스키어들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어 흐른다. 300년 전의 이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이 산을 주제로 한 다큐에 이토록 아름답게 쓰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내레이션을 맡은 이는 배우 윌렘 데포. 영상과 음악이 주가 되는 다큐라서 해설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차분하고도 또렷한 발성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배우는 얼굴 이전에 목소리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와 오케스트라는 촬영된 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현장 녹음을 했다. 다큐 도입부에 그 장면이 나온다. 내레이션과 음악의 역동적인 조화는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다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의 풍경만을 담지는 않는다. 흑백 영상 자료 화면을 통해 산이 외경의 대상에서 어떻게 모험과 스포츠의 현장이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 본다. 드론을 비롯해 다양한 첨단 촬영 기기로 담아낸 기기묘묘한 산의 절경들이 74분 동안 펼쳐진다. 다큐 내내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감독 제니퍼 피돔의 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2015년에 찍은 다큐 'Sherpa'도 역시 산과 그 사람들에 대한 다큐다. 이 감독에게 산이란 어쩌면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평온과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불편해하며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갈구한다. 'Mountain'에 나오는 극한의 모험가들이 그런 이들일 것이다.


  "춤을 추는 이들은 음악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다큐의 시작에 그 문장이 나온다. 과연 'Mountain'의 그 많은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일까? 이에 대해 뇌과학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아드레날린, 도파민과 같은 물질의 폭주하는 연쇄작용은 육체적, 정신적 쾌감의 중독을 가져온다. 이른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즐기는 이들은 그 반응의 역치(threshold)가 일반인에 비해 높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그 연구 결과를 들은 것이 30년 전 일이다. 이제 뇌과학은 세포와 물질의 차원에서 유전자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러니 이 다큐에 나온 이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에 따라 사는 이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가, 온갖 부상과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도전하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등산복의 그 유명한 '북벽' N사의 로고를 발견했다. 어쩐지 다큐에 나오는 등반가들 옷에서 그 상표가 눈에 참 많이 띄었다. 그러고 보니, '프리 솔로'의 알렉스 호놀드도 다큐 내내 그 회사 옷을 입고 나왔었더랬다. 뭐랄까, 이 산악 계통 영화나 다큐 제작에 있어서 'N'사는 꽤나 큰손인 모양이다. 보고나서 기묘하게 씁쓸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하긴 무슨 일이든 돈이 있어야 굴러간다. 어떻게 보면 영화도 외피는 예술의 형태를 띄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은 처절하고 치열한 자본의 세계임을 이 산악 다큐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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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법 책들에 나오는 글쓰기 원칙이란 것이 있기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이런 규칙이다. '정해진 극중의 시간 속에서 주인공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변화, 성장, 깨달음,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어떤 것이든 주인공은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와는 달리 나중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자와 관객들이 그런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 감독의 2016년작 '토니 에드만'의 이네스(잔드라 휠러 분)는 바로 인물의 그 '변화'를 보여주는 괜찮은 예이다. 


  러닝타임 2시간 42분, 꽤나 긴 시간 동안 크게 빵빵 터지는 무언가는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소소한 재미들이 있다. 뭔가 낯설고도 독특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이 코미디 영화의 여정은 정말 기이하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고무공을 따라가는 느낌이 든다. 그 여정의 끝에 만나는 감정은 약간의 평온함과 안도감, 그리고 미소이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인 딸 이네스와 소원한 사이인 아빠 빈프리트. 그는 휴가를 내서 딸이  있는 루마니아로 찾아간다. 딸은 그런 아빠와의 만남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아빠는 잠깐 딸 얼굴 보고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딸 주변을 계속 맴돈다. 우스꽝스런 틀니에 가발까지 쓰면서 자신을 인생 코치 '토니 에드만'으로 소개한다. 이네스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런 아빠를 때론 못 본 척하면서 이 부녀(女)는 나름의 역할극을 해나간다. 아빠는 힘들고 빡빡한 회사 생활에 치이는 딸이 안쓰럽기만 하다. 뭔가 함께 하면서 도움을 주고 싶은데 딸은 그런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과연 '토니'는 딸에게 인생 코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관객들이 영화의 끝에 도달했을 때, 이네스의 변화를 감지한다. 일에 쫓기던 조급하고 팍팍한 모습의 이네스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이네스는 아빠의 분장용 틀니를 끼고 할머니의 모자를 써본다. 그 틀니를 낀 '토니'의 모습을 참기 힘들어 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인생 코치 토니의 조언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그 조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고 잡아둘 것,

  그리고 유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영화는 결국 2시간 42분을 흘려 보낸다. 기이하고도 낯선 코미디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난다. 나름 훈훈한 결말이다. 보고 나서 느낀 것은 그렇다. 괜찮은 영화기는 한데, 이 영화를 둘러싼 평들은 너무 과대포장된 것들이 많다. 세대간의 단절(아버지와 딸의 소통 문제), 직장내의 성차별 문제(이네스를 갈구는 남자 상사),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단면(낙후된 루마니아 회사를 구조조정하는 이네스의 업무), 뭐 이런저런 것들을 분석하고 쪼개고 참 고단하게 영화를 보는구나 싶다. 이 영화에 별점을 준다면 다섯 개 만점에 딱 세 개가 적당하다. 반 개를 더 줄 수도 있겠다. 이네스 역의 잔드라 휠러의 열연,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지는 연기가 눈부시다. 자신만의 감성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를 땐 눈물이 찔끔 났다. 극한 직업 '배우'를 저렇게 보여주는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토니 에드만'은 평범함을 벗어난 괴상한 수작(作)은 될 수 있다. 괴상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유머 감각, 서사의 전개가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힘있게 끝까지 밀고간 마렌 아데의 연출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명작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없다. 도대체 그런 뻥튀기 평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지루하게 보았다는 어떤 관객이 쓴 글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상을 무지하게 많이 받은, 평론가들이나 좋아할 법한 영화.'


  60점짜리 영화를 90점, 100점으로 만드는 평론의 마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 마법을 마구 휘두르다가 정말로 영화의 본질을 놓치고, 영화 평론이 관객과도 유리되는 것은 아닌지 '토니 에드만'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사진 출처: sbs.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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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유한 상류층 출신의 젊은이가 있다. '마리오'란 이름을 지닌 그는 20대 초반에 파리에 들렀다가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게 된다. 여자의 목을 감싼 수갑을 찬 두 손의 이미지였다. 헝가리 사진 작가 André Kertész의 그 사진은 청년 마리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그 사진의 인상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영화를 찍을 카메라를 샀고, 배우와 스태프로 친구와 지인들을 총동원한다. 자기 자신도 배우로 한 장면 출연했다. 그렇게 찍은 2시간짜리 영화에 그는 큰 기대를 건다. 그러나 영화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화는 그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화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이들이 조금씩 생겼다. 그러다 1966년에 브라질 정부에 의해 필름이 몰수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의 영화가 에이젠슈테인과 푸도브킨 같은 러시아 영화 감독들의 영향을 받은, 말하자면 사회주의에 물든 '빨간색'의 영화라는 이유였다. 1964년에 집권한 군부 독재 정권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필름은 어느 대학생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그는 필름 복원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다시 세상에 나와 관객들을 만난다. 영화의 제목은 'Limite(Limit)', 마리오 페이소토(Mário Peixoto)의 1931년 작품이다.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온갖 종류의 영화 기법을 제멋대로 섞어 놓은 것 같다. 루이스 브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에 나오는 그 유명한 눈동자 장면도 비슷하게 나온다. 러시아의 감독들, 에이젠슈테인과 푸도브킨의 몽타주 기법을 따라한 장면들도 있다. 연관성 없는 사물들의 극도의 클로즈업 쇼트들이 정신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실험 영화 같은데도, 나름의 서사는 갖추고 있다. 다만 매우 불친절하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보트에는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타고 있다. 그들은 마치 조난당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 한 명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데, 관객들은 여자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다. 지치고 절망한 표정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남자와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또 다른 여자도 기진맥진한 상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사이이며, 무슨 사연을 가진 걸까? 러닝 타임 2시간 동안 세 사람이 배에 타기 전의 행적에 대한 단서들이 차례대로 조금씩 주어진다. 마치 추리물 같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물과 풍경의 이미지들이 관객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무슨 영화가 이렇단 말인가, 난해함과 지루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의 반응은 양극단으로 나뉜다. 잊혀진 걸작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과대평가된 졸작이라는 혹평도 있다. 브라질 영화사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작으로 손꼽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영화사적 의미도 동등하게 획득했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를 오늘날의 영화과 학생이 찍었다면 온갖 비아냥과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제작된 193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 모든 냉소와 조롱을 방탄복처럼 막아준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 2시간짜리 무성 영화가 펼쳐 보이는 기이한 이미지의 세계를 인내하기란 결코 쉽지않다. 그나마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다채롭게 사용된 클래식 음악들이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모음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세자르 프랑크, 프로코피에프, 보로딘의 음악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귀는 호강하지만, 눈은 파편화된 이미지에 혹사당한다. 보는 동안 쉬었다 다시 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 영화를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외칠지도 모른다.


  "모두 나가주세요. 이 영화는 진정한 영화광을 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광()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그것도 뼛속 깊이 영화로 채워진 진정한 영화광들만이 이 영화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 보고 나서 이 영화에 열광하느냐 또는 실망하고 분노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영화광'이라는 호칭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 'Limite'처럼 일반 관객과 영화광의 한계(limit), 그 경계(border)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scielo.br 사진의 첫번째 이미지가 마리오 페이소토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진 이미지다. 영화의 맨 첫 부분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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