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병원에 자주 다녔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원인불명의 통증 때문에 지난달부터 신경과 진료를 받고 있다. 통증은 잡히질 않고, 이제는 다른 곳까지 아프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안과, 오늘은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내가 다니는 안과의 선생님은 정말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있다. 환자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아픈 눈도 잘 보아준다. 오늘 이비인후과에 다녀와서 생각해 보니 이런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은 로또급의 행운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종합 병원은 언제나 그렇듯 환자들로 북새통이다. 귀와 목이 한 달 넘게 아파서 종합 병원 이비인후과에 예약을 했다. 그런데 이 병원의 이비인후과는 세부 진료 과목이 귀와 목, 코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귀와 목이 아프면 두 명의 의사에게 예약을 하는 시스템이다. 고민을 하다가, 귀 보다는 목이 더 많이 아프니까 목을 보는 의사한테 예약을 했다. 내가 예약한 의사는 두경부와 목을 잘 본다는 평이 있었다.
폭염의 버스 정류장은 무슨 찜질방 같았다. 배차 간격이 25분인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이 무더위에 괴롭기 짝이 없었다. 힘겹게 버스에 타서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서 수납을 하고 예약접수증을 이비인후과 접수대에 냈다. 이 병원의 이비인후과는 초진 환자는 예진을 하는데, 그걸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한다. 나는 왜 환자의 병력 청취를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하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래도 진료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 예진을 하고 나서는 30분 넘게 기다렸다. 환자가 밀려서 예약된 시간은 이미 훌쩍 넘어 버렸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증상에 대해 의사에게 말을 하는데, 2분이나 지났을까? 의사가 내 말을 끊는다.
"그래서 환자분은 도대체 어디가 아파서 여기 온 거에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나는 언제 통증이 시작되었고, 그 통증의 양상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는 대뜸 그런 식으로 되묻는다. 환자의 병력 청취를 그따위로 하는 의사와는 더이상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귀와 목이 아프다구요!"
의사는 후두내시경으로 1분 남짓한 시간에 목을 들여다 보았다. 목에는 이상이 없고, 편도선이 좀 부은 것 같으니 약을 처방해주겠단다. 얼른 진료실에서 내가 나가주었으면 하는 의사의 뜻이 노골적으로 전달된다. 그렇게 나는 진료실에서 떠밀리듯 나왔다. 진료에 걸린 시간은 5분이 좀 넘은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귀를 봐달라는 말을 못한 것이 떠올랐다. 간호사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좀 기다려 보라고 한다. 의사는 다른 환자의 초음파 검사 때문에 검사실에 갔다가 10분 뒤에 왔다. 내가 대기실의 의자에서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의사한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난 귀는 안봐."
그 말을 하고서는 의사는 진료실로 쌩, 하고 들어가 버린다. 목 전문 이비인후과 의사의 굳은 신조를 목격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 그래. 귀는 안본다구요? 속으로 기가 차지만 별 수가 없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레지던트 선생한테 귀를 볼 수 있게 해준단다. 좀 기다렸다가 레지던트가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는 예진할 때 병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줄 알고 뭔가 더 말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이 레지던트 왈,
"환자분은 왜 말을 안하고 진료에 협조를 안합니까?"
아니, 예진 시스템은 어디에 밥 말아 먹었나? 내가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해야된다는 건가? 참으로 이 병원 이비인후과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군요. 진료 과정 내내 쌓여있던 나의 불만이 터져나온다.
약국에 들러서 약을 지어 집에 돌아오니 세 시간이 지났다. 병원이란 공간이 환자들에게 유쾌한 곳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런데 거기에 권위 의식과 불친절이 뼛속까지 절은 의사까지 만나고 나면 기분은 더 바닥을 친다. 저런 의사들에게 환자란 어떤 존재일까? 3분 컷, 5분 컷으로 빨리빨리 진료실에서 내보내야 하는 짐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기본적인 병력 청취는 무 자르듯 잘라먹고, 환자의 고통에는 1도 공감하지 못하는 의사를 만나는 일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내가 오늘 만난 이비인후과 의사를 떠올려 보니, 기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진료하는 기계. 지금 다니는 안과의 의사 선생을 만나기 전의 불친절 끝판왕 안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AI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 '의사'라는 직업은 인공지능으로 좀처럼 대체가 어려운 직업으로 맨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AI 의사를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의사들마다 가지는 비균일한 임상 경험과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오진의 가능성은 AI가 의사라는 직업군에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을 넓혀준다. 이미 의료계의 여러 영역에서 AI는 실험적으로 적용되고 있고, 그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적어도 AI 의사는 불친절과 권위 의식을 보여주는 일은 없겠지.
내가 오늘 만난 진료 기계 이비인후과 의사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환자에 대한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는 의사를 만나는 일은 교통사고와 같다. 이런 저런 언론지에 실린 인터뷰며 사진발은 헛껍데기일 뿐이다. 막상 그 의사를 만나보면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성의를 눈꼽만큼이라도 보여주는 의사에게 감지덕지해야하는 건가? 이비인후과 진료를 보고 가시지 않은 울분을 쏟을 곳이라고는 이 글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