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찾아서 보는 무당의 유튜브 채널이 있다. 이 젊은 여자 무당은 어린 아이 때부터 무업을 시작했다. 이 무당의 친할머니도 무당이었다. 말하자면 그 집안에는 신가물, 즉 집안에 신을 모셔왔던 내력이 흐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신기가 있다, 신병을 앓았다, 하는 말을 할 때의 그 무당들을 강신무(降神巫)라고 한다. 내가 샤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시절에 들었던 종교학 강의에서부터였다. 무당을 미신이나 무속으로 폄하하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종교학에서는 '무교(巫敎)'라는 단어를 쓴다. 나의 그 무교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 학문적인 데에 있었다.

  젊은 무당은 스스로를 '**보살'로 불렀다. 보살은 불교에서 말하는 그 보살(菩薩)이 맞다. 한국의 무교는 불교와 많은 부분이 '습합(習合)'되었다. 어찌보면 그 '보살'이란 단어가 무당에게 잘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위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자. 샤먼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보살핀다. 물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어떤 이에게 무교의 모든 것들은 용인할 수 없는 이교도, 잡귀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그 젊은 보살의 유튜브를 관심있게 찾아보는 이유는 무당이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그 보살은 이런 주제로 유튜브를 업데이트했다. '조심하면 나쁜 일은 피할 수 있나요?' 참으로 흥미있는 주제이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들 가운데에는 '다가올 액운을 막는 것'도 있다. 무당에게서 안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정도에 따라 1. 부적을 쓰거나, 2. 치성을 드리거나, 마지막으로 3. 굿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안좋은 일에도 처방의 급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 보살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무당에게서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하면 과연 액운을 피할 수 있는가?

  나에게는 뭔가 무당의 영업비밀을 살짝 알려주는 느낌 같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막을 수 없단다... 내가 그 보살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젊은 무당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무당으로 살아온 삶의 이력을 바탕으로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선에서 사람들의 인생사를 풀어낸다. 아니, 그럼 무당을 찾아가서도 안좋을 일을 미리 막을 수 없다면 도대체 치성이며 굿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살은 거기에 이렇게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면 액운의 정도가 덜해진다고. 다음은 내가 생각해낸 예시이다. 누군가 낙상 수(落傷數)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무당을 통해 신에게 정성을 들이면 두 다리를 다칠 운이 다리 하나만 부러지는 데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간절히 빌고 애원해서 결국 다리 하나만 다친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그 보살의 말대로라면, 인간에게 다가올 불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우리 인간들은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빌고 또 빌어야만(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이 그 역할을 대행한다) 불운을 조금이나마 비껴갈 수 있다. 부적과 치성, 굿을 통해서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미신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보살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믿는 종교의 실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신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의탁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오래전, 나는 성당의 성체조배실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다가 기도 게시판에 붙은 무수한 종이들을 보고 놀랐다.

  '우리 아들이 대학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붙게 해주세요.'
  '건물을 내놓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쪼록 좋은 가격에 팔리도록 도와주세요.'
  '***가 몸이 아파서 입원했습니다. 빨리 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게시판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누군가를 시험에 붙게 해주는 입시 브로커, 부동산 매물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게 도와주는 중개업자, 현실의 명의를 넘어서는 위대한 치유자, 아무튼 어떤 의미에서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나는 그 기도 게시판에서 신도들의 절실함 보다는, 소원 자판기로 전락한 신의 존재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린지가 어느덧 석 달째이다.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있지만 이게 언제쯤 나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먹고 있는 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그저 통증을 막아주는 진통제이다.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약도 그렇게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병을 앓고 있는 나는 내가 믿는 신을 원망해야 할까? 낫게 해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려 볼까?

  지금의 나에게 닥친 '병마'라는 불운을 나는 막아낼 수가 없다. 나는 요즘 구약 성서의 '요나서'를 읽다가 내가 큰 물고기(고래가 아니다)에게 잡아먹힌 요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나는 자신이 있는 곳을 '죽음의 뱃속(공동번역 성서 요나서 2장 3절)'이라고 묘사한다. 요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은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어내게 한다(요나서 2장 11절).

  성서는 요나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신 것처럼 쓰여져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 부분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해야만 하는 때에 그 일을 하셨을 뿐이다. 그분에게 요나는 죽음의 뱃속에 있어야할 이유가 있었다. 요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한계와 약함, 비루함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물고기의 뱃속 깊은 곳에 있게 된 요나는 고통을 겪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병고를 통해서 나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들여다 보고 있다. 요나가 그러했듯, 정해진 때가 되면 이 어두운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저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요즈음의 내가 하고 있는 기도는 그러하다. 불운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신을 믿는 인간은 그 불운이 가져다준 고통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신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에게 종교의 의미는,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그런 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