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알고 지내는 수녀님이 나를 수녀원의 '성소자(聖召者)의 날' 행사에 초대하셨다. 그 행사는 수녀원의 성소 모임을 위한 후원 바자회였다. 수녀님들은 직접 만든 음식과 물품들을 바자회에 내놓았다. 물론 수도회의 성소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행사였으므로 특별한 순서도 있었다. 수도회에 입회한 어느 지원자 자매의 아버지가 간증을 하기 위해 연단에 섰다.

  "저의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 수도회에 입회하고 나서, 저는 치유의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토록 저를 괴롭히던 안구건조증이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안과의사들은 이 병을 불치병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불치병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청중석의 맨 뒷줄에서 그 간증을 듣고 있던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소리내어 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자그맣게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의사'임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업 자부심부터 시작해서 지루한 장광설까지 그 사람은 참으로 밉상이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수녀님까지 '아이고, 저분은 좀 너무하시네' 했을 정도였다. 뭐 안구건조증이 나았다고? 그게 불치병이라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안구건조증'이란 질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눈이 좀 마르는 게 뭐 어떻다는 건가 했었다.

  그랬던 내가 안구건조증을 앓아온지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눈안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는듯한 뻑뻑함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안과에서 처방받은 눈물약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았다. 그렇게 한 10년 동안 눈물약을 달고 살았다. 나는 눈물약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 눈물약은 치료약이 아니며, 내가 이 눈물약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눈물약을 끊어버렸다. 대신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눈 청결제로 눈을 닦는 것이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까지 겹쳐서 내 눈에는 늘 눈곱이 끼고 가려웠다. 눈 청결제로 그걸 닦아내면 뭔가 눈이 시원해지고 맑아졌다. 그런데 이것도 쓰다보니 눈물약처럼 하루에 여러 번 닦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물약을 안쓴다고요? 이건 아무리 많이 써도 눈에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중독이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안과의사는 나를 무식한 환자 보듯 바라보며 약간의 조소를 보냈다. 환자에게 말하는 본새하고는... 권위의식과 재수없음이 겹친 의사를 만나는 일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결막낭이 뭔지도 몰라서 대학병원에 가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준 그 안과의사를 나는 더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눈이 붓고 아파서 안과에 갈 일이 생겼다. 염증 때문에 처방받은 안약에는 스테로이드와 항생제가 들어있었다. 안약을 넣으니 염증은 곧 가라앉았다. 신기하게도 안구건조증도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내 눈은 더이상 뻑뻑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건조증이 심해지면 그 안약을 조금씩 넣었다. 그렇게 해서 항염증 성분의 안약과 눈 청결제, 거기에다 눈에 윤활제 역할을 하는 리포직 점안겔을 함께 쓰게 되었다. 뭔가 그런 조합이 건조증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는듯 했다.

  물론 스테로이드 안약의 장기간 사용이 안압을 높인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떻게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이 안구건조증에 작용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거기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이제 안과에서 안구건조증은 단순한 눈물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염증성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심한 안구건조증에 쓰이던 기존의 면역억제제 성분의 안약은 효과가 나타나려면 1달에서 2달이 걸린다.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을 단기간 쓰면서 눈의 염증을 완화시키고, 거기에 면역억제제 성분의 안약을 쓰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가천대 길병원 안과 김동현·백혜정 교수팀의 논문, 출처: 의협신문 2022년 4월 http://www.doctorsnews.co.kr).

  그래서 그랬던 것이구나... 뭔가 작은 의문이 풀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요새는 안구건조증에 IPL을 이용한 레이저 치료도 하고 있다는데, 그 치료의 효과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인 모양이다. 나는 눈에다 레이저를 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무서워서 앞으로도 해볼 생각이 전혀 없다.

  가끔 그 지원자 부친의 간증을 떠올려 본다. 그의 안구건조증은 정말로 완전히 나았을까? 나는 그때 비웃었던 나 자신에 대해 살짝 반성하는 마음도 된다. 그렇다. 나는 이제 안구건조증이 '불치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안구건조증에 효과가 있는지 애매한 오메가 3와 루테인을 나는 끊을 수가 없다. 다음번 안과 정기 검진 때에는 새로운 의사 선생님에게 내 오랜 안구건조증이 좀 나아질 수 있는지 물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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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08 00:19   좋아요 0 | URL
결막염으로...대학병원이라니! 전혀 이 분야 모르는 제가 들었을 때도, 신뢰가 안 가네요. 안구건조증에서 자유로워지시기를...

푸른별 2023-09-08 00:33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 님, 그 의사를 내가 나름 이해해보면 이래요. 그 의사 양반은 망막 전문의거든요. 자신은 외안부인 결막에 생긴 질환은 잘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대학병원의 외안부 전문의한테 가보라고 말한 거구요.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결막의 그 사소한 질환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싶죠. 망막만 열심히 봐와서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쳐요. 내가 화가 치밀었던 건 환자를 대하는 태도였어요. 뒤에 환자 밀려서 더 말할 시간 없다고 말하는데 참... 환자를 존중하지 않는 의사 만나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들죠. 그래도 그 이후에 갔던 안과에서 정말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래서인지 나는 그 의사 양반이 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