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쓴 책의 인세로만 살아갈 수 있는 소설가는 몇 명이나 될까? 내가 그 숫자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공지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올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나는 공지영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읽었다. 이 책은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에세이를 표방한 소설이 맞다. 책에는 작가인 '나'의 시골집을 찾아온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세이로 생각하고서 읽다 보면, 여기에 나온 이야기가 진짜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만큼 인물들 각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나 내밀하고 솔직해서이다. 책의 말미에서야, 공지영은 자신이 약간의 소설적 설정과 변형의 형식을 취했노라고 말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좀 김이 빠진달까, 이거 소설이잖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법한 책이다.

  공지영의 그 책에 대한 완성도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드는 필력이었다. 나는 솔직히 공지영의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지영의 글이 가진 놀라운 흡인력이랄지, 독자를 자신의 글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만은 상당히 부럽다. 공지영의 글은 쉽게, 잘 읽힌다. 이건 공지영의 문체가 가진 강점이다. 공지영의 문제는 그런 장점을 가졌음에도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장정일은 평론집 '독서 일기'에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공지영은 문제적 소설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그러니까 그 말은 공지영이 자신이 가진 작가로서의 역량을 감상적 차원에서 소모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장정일의 그러한 비판에 동의했다.

  독자가 글을 읽게 만드는 것. 그것도 재미있게. 아, 그것이야말로 글로 먹고살아 갈 수 있는 작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독자가 작가의 글을 술술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걸까? 그런 면에서 한 작가의 문체는 작가의 고유한 각인인 동시에 영업비밀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비밀을 알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작가는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였다. 특히 그의 단편 '여학생'은 어찌나 글이 빼어난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저런 소설 하나만 쓰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작가 '이문열'은 한국 문단에서 이제는 잊힌 뒷방 노인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 그가 내놓은 중단편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특히 '하구(河口)' 3부작으로 일컫는 그의 사소설은 매우 빼어나다. 그 시절에 이문열이 써내는 글을 따라서 쓰고 싶었던 문학청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문열은 나중에 창작 레지던시를 열어서 문하생을 두었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는 한다.

  이문열의 문체가 화려하고 거침이 없었다면, 박완서의 글은 그와는 아주 다른 지점에 있었다. 박완서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사회적 접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쉽게 읽히지만, 그 쉬운 문체 속에 내재된 인간에 대한 탐구는 가히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박완서의 문체를 따라 하고 싶어 했다. 독자를 힘 있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말하고 함께 걸으면서 글 속으로 초대하는 것. 박완서의 소설은 나에게 그러했다.

  어제, 나는 ChatGPT에다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입력했다. 그랬더니, 이 척척박사는 내가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는 소설 작법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흥미 있는 도입부를 쓰고, 그 글을 읽을 독자를 생각해야 하며, 중간중간 독자의 관심을 이끌만한 대목을 배치해야 한다고. 그리고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기성 작가의 문체를 모방해 가면서,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결국 작가에게 글쓰기란, 자신만의 '문체(style)'를 갈고 닦으면서 그 문학적 틀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다.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그 많은 작가의 글들은 멋진 관광 안내서와 같다. 나는 이제 그 안내서를 덮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짐을 싸서 진짜 먼 곳의 풍광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나의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야말로 내가 이런 잡문이라도 꾸준히 써내면서 글쓰기 수련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열심히."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답한 ChatGPT의 마지막 조언은 그러했다. 한글 번역기를 뚫고 나온 그 한마디에 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글쓰기의 비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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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自費) 출판. 말 그대로 자기 돈을 들여서 책을 내는 것을 일컫는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쓴 영화 리뷰가 470여 편 정도 된다. 그 정도 편수의 글이 쌓이고 보니, 나는 그걸 책으로 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무슨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평론가'라는 직함도 없는 블로거의 영화 리뷰를 쌍수 들어 환영해 줄 출판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있기는 하다. 내 돈 들여서 책을 내면 된다. 자비 출판을 하는 거다.

  물론 그냥 생각만 그렇다. 자비 출판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자비 출판 이거, 생각보다 꽤 흥미롭다. 나는 자비 출판으로 소설책 세 권을 펴낸 사람의 경험담을 읽었다. 자비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가 있으며, 초판본으로는 대개 200부에서 300부 정도를 뽑는다고. 인세에 관한 부분이 일반 출판사와 좀 다르다. 일반 출판사가 저자에게 통상적으로 인세의 10%를 지급한다면, 자비 출판은 40% 정도를 저자에게 지급한다. 예를 들어 자비 출판으로 낸 책값이 1만 원이라면, 4천 원을 저자가 받는 셈. 나머지 6천 원은 출판사의 몫인데, 출판사도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그 돈을 먹는 건 아니다. 인쇄비는 물론 물류, 마케팅비도 거기에 들어간다. 자비 출판한 책을 누가 읽냐고? 읽는 사람이 없지는 않단다. 출판사가 마케팅 수완이 좋으면 이런저런 유통망 통해서 책이 서점에 깔릴 수도 있다.

  자비 출판으로 소설책을 세 권 낸 그 저자는 출판사의 인세 삥땅(?)을 막기 위해서 책 판매 부수 장부를 써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자신의 지인 누가 어디 서점에서 책을 샀다고 하면, 그걸 꼬박꼬박 기록했다고. 나중에 그렇게 합산한 책 부수의 인세 금액을 출판사에서 자신에게 지급한 액수와 비교해 보았단다. 그랬더니, 차액이 꽤 커서 출판사 대표에게 증빙자료 보내고 나머지 인세 금액 돌려받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인세와 관련한 분쟁은 대형 출판사와 저자 사이에도 있는 일이니, 자비 출판의 경우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자비 출판 저자는 책 한 권 펴내는데, 돈을 얼마나 썼느냐 하면 300만 원이다. 누군가 그 글의 댓글에 이런 글을 달았다. 그 출판사 어디요? 나는 알아보니 500 부르던데. 자비 출판 경험자의 여러 글을 읽어보니 대략 300에서 500만원 사이의 금액인듯 하다. 자, 그럼, 돈을 마련해서 책을 낸다고 하자. 그런데 책 300권을 찍어서 대체 어떻게 하지? 나는 새삼 영상원 졸업 논문집 찍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논문집을 20부 찍었던가? 도서관에 논문집 제출하고,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렇게 20부를 겨우 다 소진했다. 그런데 300부를 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물론 내가 한 100부 정도 가져오고, 나머지 200부는 출판사의 마케팅 역량을 믿어보는 방법도 있다.

  이제 그 100부를 쪼개어 보자. 20부는 내가 아는 지인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30부는 내 블로그의 독자들 가운데 원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나머지 50부는... 나는 궁리 끝에 전국의 도서관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 여러 공공 도서관에 내 책을 기증하는 거다. 그것도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내 독자를 만나기 위한 투자 말이다. 아, 나는 자비 출판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그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뭔가 기분이 땅 밑으로 한없이 꺼져가는 것만 같았다.

  자기 이름으로 낸 책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자비 출판이라는 나름의 루트는 일종의 대안을 제공한다. 돈이 좀 든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책만 찍어내는 것이 끝이 아니다. 그 책이 생명력을 갖고 보다 많은 독자와 만나야 한다. 자비 출판은 그런 면에서 커다란 구멍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 독자, 내 책을 읽어줄 독자를 무슨 수로 어떻게 만나냐는 문제 말이다.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진 부자가 빌딩 위에서 지폐 다발을 뿌리듯, 책을 여기저기 나누어주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비 출판에 대한 서글픈 상상을 멈추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자신의 글에 대한 상품성을 입증하기. 나름 이름있는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해 저자가 갖추어야 할 제1의 요건이다. 어떻게든 시장에서 팔리는 글을 써야한다. 당연히 출판사는 자선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다. 저자가 상품성 있는 글을 써낼 수 있는 역량. 내가 그렇게 팔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데 시장에서 잘 팔리는 글은 대체 뭘까?

  "그냥 매일 쓰는 글이나 꾸준히 써."

  내가 자비 출판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냥 쓸 수밖에 없구나. 내 글을 팔아서 먹고사는 일은 정말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일은 좋아하니까. 무언가를 써내는 일은, 씨앗을 심는 일과도 같다. 내가 펜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작은 글 싹들은 자라날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 글이 만들어낸 숲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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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3 05:30   좋아요 0 | URL
정말, 세상에 공짜는 없는 모양입니다. 출판사는 돈을 벌기 위해 자비출판이란 미끼를 던지는 듯해요.ㅠㅠ 저도 지금껏 무척 많은 제안을 받아왔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뭐 자랑질하려고 책을 냅니까? 이게 제 생각이었어요.

푸른별 2023-12-13 08:34   좋아요 0 | URL
아, 호시우행님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언젠가는 호시우행님의 글을 알아봐주는 좋은 편집자를 만나서 책을 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글이 세상의 더 많은 독자를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니까요.

호시우행 2023-12-13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그렇게 꿈을 꾸고 나면 매일 쓰는 일기에 기록을 해둔다. 내가 꾸는 꿈들 가운데 사실 기분 좋은 꿈은 별로 없다. 대개는 꿈에서 깼을 때, 기분이 나쁜 꿈이 많다. 좀 신기하게도 그런 안 좋은 꿈은 그날이 아니더라도 며칠이 지난 후에 꿈땜을 하는 수가 있다. 누구와 다툰다거나, 기분 상하는 일이 있다거나, 작게나마 다치는 일이 있다든가 하는 것들. 12월 들어서 내가 쓴 일기들을 살펴보니, 연달아 악몽을 꾸어서 그걸 적어놓았다. 안좋은 꿈을 꾸면,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조심하는 게 좋아요. 내가 가끔 들러서 살펴보는 젊은 무당의 유튜브 채널에서 들은 말이다.

  그렇다면 안 좋은 꿈의 기준은 뭘까? 나의 경우엔 꿈에서 깼을 때, 기분이 나쁘면 안 좋은 꿈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생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꿈의 이미지도 있다. '반복몽(recurring dream)'이 그것이다. 이 항목에 대한 영문 wikipedia를 읽어보면 반복몽에 대한 다양한 예시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꿈도 있다. 나에게 화장실 꿈은 기분 나쁜 반복몽이다. 최근에는 화장실에 물이 들어차는 꿈을 꾸었다. 역시 안 좋은 꿈이다. 그리고 오늘, 그 꿈에 대한 꿈땜을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기분이 상당히 더럽다.

  11월에는 아주 흥미로운 꿈을 꾸었다. 꿈에서 임영웅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악수를 하는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임영웅의 팬이 아니다. 참으로 희한한 꿈이었다. 아마도 콘서트장이었나, 임영웅이 나를 알아보고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꿈에 나오는 건 좋은 꿈 같은데... 막내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거 정말 좋은 꿈 같다. 네가 이 꿈 사라. 혹시 아냐? 내년에 회사에서 승진할지 모르잖아. 내가 30만 원만 받을게."
  "돈 없어."

  동생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아휴, 저 바보. 이게 얼마나 좋은 꿈인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23년 5월에 임영웅과 대화하는 꿈을 꾸고 20억 복권에 당첨된 모녀에 대한 기사도 있다. 나도 복권을 사야 할까?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복권이란 건 사본 적이 없다. 좋은 꿈을 꾸었다고 딱히 복권을 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나마 동생한테 꿈을 팔아 소소한 용돈이라도 마련할 수 있나 했는데 글렀다. 그냥 그 꿈은 먹다 남은 위스키를 keeping 해두듯, 그냥 내 꿈의 창고에 넣어두어야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꿈에도 유효기간이란 게 있나? 11월에 꾼 좋은 꿈이 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내 경험상, 기분 나쁜 꿈은 대개 열흘 안팎으로 뭔가 사달이 난다. 그런데 임영웅 꿈은 꿈을 꾼 지 1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런 경사(?)스러운 일이 없다. 아마도 내가 임영웅의 찐팬이 아니라서 효과가 없는 모양인가 보다, 뭐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래전, 소설 창작 수업을 강의했던 작가 선생에게 길몽은 '똥 꿈'이었다. 선생은 자신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 큰 상금이 걸린 공모전에 입상할 때마다 '똥 꿈'을 꾸었노라고 말해주었다. '똥 꿈'이라니... 언젠가 복권 당첨자들의 꿈을 분석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도 '똥 꿈'이 나오기는 한다. 그런 걸 보면, 사람마다 꿈에서 재현되는 길몽과 흉몽의 이미지들이 참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12월 들어서 꾼 안 좋은 꿈들의 꿈땜은 오늘로 끝났으면 싶다. 예전에는 그렇게 꿈땜을 하고 나면, 참 재수가 없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만하길 다행이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다. 뭔가 안좋은 기운들이 서로 부딪혀 삐걱거리며 소리를 낸다고나 할까? 때로 그런 불협화음을 들으며 사는 일도 우리 삶의 일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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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이 글을 삭제해서, 다시 올리는 글입니다.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갔다. 내가 족저근막염 때문에 밖에 나가서 걷지 못한지가 좀 되었다. 휴일 오전의 공원은 한적했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좀 있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개를 풀어놓고 산책을 시키고 있었다. 그걸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식이 없는 인간이네. 나는 그 인간을 피해서 인근 아파트 단지 안쪽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그러고 나서 다시 공원을 거쳐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 인간은 여전히 개를 풀어놓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저씨, 개를 묶고 다니세요. 저기 현수막에 써 있잖아요."

  공원의 현수막에는 반려견 산책 시 목줄을 하라는 경고문이 써져 있다. 그 현수막에 대해서라면 나는 할 말이 많다. 그 공원에 개를 풀어놓고 다니는 인간들이 좀 있다. 산책하러 나갈 때마다 그런 인간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스트레스였다. 나는 구청 공원관리과에 현수막이라도 달아주면 좋겠다고 민원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구청에서 현수막을 제작해서 걸어놓았다. 내가 가리킨 것은 바로 그 현수막이었다.

  "이봐. 당신 일이나 신경 써. 내가 뭐 피해준 거 있어? 어디서 싸가지 없이."

  하, 저놈 봐라. 우아하게 싸우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럴 때는 방법이 없다. '이 구역의 미친 인간은 나'라는 그것을 시전할 수밖에. 꼭 이렇게 일 년에 두어 번은 이런 일을 겪는다. 휴대 전화를 갖고 있었으면 그놈 상판대기를 찍어서 바로 신고해 버렸을 텐데. 나는 산책하러 나갈 때, 전화기는 무거워서 잘 가지고 다니질 않는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 저런 무식함을 내뿜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공원이 지네 안방인가? 개를 풀어놓고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에 나는 개 데리고 다니는 인간들 때문에 너무나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개 목줄을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게 다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웬만하면 그런 인간들은 피해서 간다. 개념 없는 사람과는 부딪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저 무식한 놈이 공원 산책을 하면서 저렇게 개 풀어놓고 다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걸 눈여겨보았다가 오늘에서야 말한 참이었다. 결국 그 쓰레기 같은 놈은 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나에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저런 인간들과 마주치게 되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계층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결코 중산층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러나 하층민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그러니까 그 두 계층에 어중간하게 걸친 사람들이 사는 곳. 고장 난 전자 제품을 재활용 분리수거함 앞에 내다놓으면 10분 이내에 바로 사라지는 곳. 주로 나이 먹은 인간들이 목줄을 안 한 개를 데리고 단지 내에서 어슬렁거리는 곳. 그러니 내가 아파트 인근 공원에서 저런 무식한 놈과 마주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내가 '이 구역의 미친 인간'임을 잠깐 입증했다가 돌아오는 길. 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서 개를 풀어놓고 똥을 누게 하는 젊은 여자가 있다. 저 여자는 자기 개를 꼭 아파트 화단에서 누게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도 나는 그 여자가 그런 역겨운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미친 인간'의 기운이 남아있어서, 큰 소리로 한마디 했다. 개 목줄 좀 해요. 지 개새끼 뒷처리를 해주던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개 묶고 다니라고. 내가 두 번째 말했을 때, 그제서야 여자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알았어요. 덩치 큰 여자의 입은 부어터져 있었다.

  내가 오늘 만난 두 사람은 참으로 무식하고 추잡스러운 인간들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좀 더 비싼 아파트로 이사 가면 저런 인간들을 좀 안 볼 수, 아니 덜 볼 수 있을까?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은 어쩌면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계층성에도 적용될지도 모른다. 끼리끼리 산다. 나는 언젠가 읽은 미국 잡지의 글이 생각났다. 미국 사회에서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은 학생이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연구 대상자들의 삶을 수십 년에 걸쳐 살펴보는 사회학적 종단 연구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빚을 내든 어떻든 무리해서라도 좋은 사립학교에 들어간 가난한 학생은 중산층에 편입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학생이 지닌 지적인 능력도 중요한 요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하층민의 머리 좋은 학생이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인적인 네트워크였다. 부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만난 동기, 선후배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층민 학생은 중산층의 계층적 아비투스(habitus)를 배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다양한 기회들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그것이야말로 머리 좋은 하층민 계층의 학생에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닭의 대가리가 되기보다는 용의 꼬리라도 붙잡고 살아가기. 나는 내가 사는 이 아파트에는 그저 그런 닭대가리들이 득실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가봐야 그 닭의 무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계층적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뼈저린가? 나는 아마도 오늘 공원에서 마주친 무식한 놈과 같은 부류의 인간을 내년에 또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아파트 단지를 떠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어느 동, 어느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면 용의 발톱 부스러기들의 삶을 볼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은 '돈'의 문제로 귀결될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아파트를 떠날 돈이 없다.

  내가 한달에 한번 약을 타러 다니는 종합병원 가는 길에는 '로또 복권 가게'가 있다. '2등 당첨자의 집'이라는 글귀가 전자 간판에서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곳이다. 지나가다 보니, 그 간판을 보고 운전하던 차에서 내려 복권을 사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깜빡이를 켜둔 차는 복권을 급하게 사서 나오는 남자와 함께 사라진다. 로또 대박이나 터지지 않는 이상,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중산층에 편입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부모님이 왜 1980년대의 부동산 광풍에서 강남의 주공 아파트를 내다 팔고 강동구로 이사 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부모님은 부동산에 무지했다. 결국 그것이 우리 가족의 계층성을 결정적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개 풀어놓는 무식한 놈에게 내가 '이 구역의 미친 인간'을 시전한 날의 이 저녁은 기이하고 씁쓸한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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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별 2023-12-10 11:29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댓글에 답글을 쓰다가 실수로 삭제 버튼을 클릭했네요. 그래서 글과 함께 댓글도 지워졌네요. 댓글이 지워지게 되어 미안하고, 양해를 부탁합니다.
 

 

 올해 들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문제였다. 주로 영화를 보고 글을 썼는데, 올해 초부터 그 일이 아주 버겁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는 일도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는 'Writer's Block'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글쓰기는 막막하고 넘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해결 방법은 딱히 없다. 각자 알아서 극복하는 수밖에. 나는 Writer's Block에 대한 여러 글을 읽다가 한가지 조언에 눈길이 멈추었다. 자신이 쓰던 글과는 다른 장르의 글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시나 수필을 쓰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매일 조금씩이나마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 수필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수필을 그저 신변잡기의 소소한 글로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소재로, 어떻게 써 내려가지? 글쓰기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쓰기는 했지만, 솔직히 쉽지 않았다. 수필과 함께 쓰기 시작한 것은 소설이었다. 나는 습작이란 과정을 제대로 거쳐본 적이 없었다. 물론 영상원 재학 시절에 글쓰기와 관련된 창작 수업을 많이 듣기는 했다. 그렇지만 소설 쓰기를 끈기 있게, 집중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등장인물은 어떻게 묘사하며, 대화는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그런 작업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일기장에 쓰는 끄적거림 같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글쓰기에 대한 책은 많이 읽었다. 거기에 쓴 책값만 해도 꽤 된다. 문제는 그걸 제대로 써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나마 글쓰기에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책은 일본의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쓴 '연필로 고래 잡는 글쓰기'다(이 좋은 책이 절판된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지만, 이야기 책으로도 아주 재미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글쓰기를 비유한 멋진 표현이 생각난다. 그는 소설을 쓰려는 사람이 '글'이라는 대상과 캐치볼을 하듯 공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저 열정적으로 따라다니거나 하면 상대방은 놀라서 달아나 버린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소설과 작가의 관계도 그러하다고 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말을 걸면서 공을 주고받는 것. 나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그 비유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멋진 소설을 쓸 거야. 내가 쓰는 소설을 반드시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말겠어. 이런 과도한 열정은 '글'이 작가에게서 멀리 달아나게 만든다. 끊임없이 공을 주고 받으며, 글이 던지는 공을 잘 받아내는 것. 소설 쓰기는 그런 훈련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그들의 생각을 뒤따라가는 일. 나에게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나름 재미있었다. 물론 내가 재미를 느끼고 열심히 쓰는 것과 독자들의 반응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를 써낸다는 작업이 참으로 생산적이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 글을 올리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져도, 오랜만에 글을 올리면 꼭 찾아와서 읽어주는 독자도 있었다. 작가가 그런 열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독자를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 독자 한 명만 있어도 작가는 불모의 시기를 견딜 수 있다. 잊지 않고 이 블로그를 찾아주는 독자들에게 이 글을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내 주변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사회와 세계의 문제, 과학 기사, 그리고 대중가요에 대한 이야기도 썼다. 어떤 면에서 그런 글들은 잡문(雜文)으로 통칭할 수 있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글을 써 내려감으로써 글쓰기의 벽을 넘어서려고 했다는 점이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다. 이건 마치 마라톤으로 치면 아주 힘든 고비를 넘기고, 37km 정도쯤에 온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여전히 영화 글쓰기는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영화 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진 점도 있다. 그나마 올해 본 영화들 가운데 'Past Lives(2023)'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 영화에 대해 글을 써야지, 하고 쓰지는 못했지만.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그 영화를 안 본 이가 있다면, 꼭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해마다 연말이면 '올해의 좋았던 일'과 '올해의 나빴던 일'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본다. 올해는 '나빴던 일'의 목록이 유독 길었다. 온갖 불운과 마(魔)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았던 일'의 리스트가 텅 비어있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어쨌거나 글을 썼다'가 들어있다. 또한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도 들어있다. 나는 그 목록을 그렇게 채울 수 있어서 정말 기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좋은 글은 사람들이 뒤돌아보게끔 만드는 미인과 같다고."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안즈코(杏っこ, Anzukko, 1958)'에는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에 휘말리게 된 아름다운 안즈코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좋은 남편감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쪼잔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한심한 남자였다. 그는 유명한 작가인 장인의 명성을 시기한다. 장인과 같은 작가가 되겠다면서 글을 쓰지만, 이 남자가 써내는 글은 허섭스레기 같을 뿐이다. 남자는 아내에게 장인만이 알고 있는 글쓰기의 비밀이 있나 물어본다. 그러자 안즈코는 그렇게 대답한다. 그러자 남편이란 작자는 이렇게 응수한다.

  "그럼 내 글은 추녀라는 말이군."

  '미인'이라는 단어가 요새의 성 인지 감수성에는 좀 튀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미남'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어쨌든 글이란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대사를 마음에 꾹꾹 담아두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나 스스로 물어본다. 내 글은 사람들이 돌아보게 할만한 미모를 가졌는가? 아, 글이란 역시 어렵다. 내년에도 나는 그 어려운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안즈코(1958)'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32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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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6 08:29   좋아요 0 | URL
잘 안되는 글쓰기, 그 기분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떤 날은 그냥 술술 쓰지지만 또 어떤 때는 찢어버리는 원고지만 휴지통네 가득하지요.

푸른별 2023-12-06 12:40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때로는 텅 빈 모니터의 깜빡이는 커서가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써 내려가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호시우행님의 행복한 글쓰기를 응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