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쓴 책의 인세로만 살아갈 수 있는 소설가는 몇 명이나 될까? 내가 그 숫자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공지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올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나는 공지영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읽었다. 이 책은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에세이를 표방한 소설이 맞다. 책에는 작가인 '나'의 시골집을 찾아온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세이로 생각하고서 읽다 보면, 여기에 나온 이야기가 진짜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만큼 인물들 각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나 내밀하고 솔직해서이다. 책의 말미에서야, 공지영은 자신이 약간의 소설적 설정과 변형의 형식을 취했노라고 말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좀 김이 빠진달까, 이거 소설이잖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법한 책이다.
공지영의 그 책에 대한 완성도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부분은 따로 있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드는 필력이었다. 나는 솔직히 공지영의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지영의 글이 가진 놀라운 흡인력이랄지, 독자를 자신의 글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만은 상당히 부럽다. 공지영의 글은 쉽게, 잘 읽힌다. 이건 공지영의 문체가 가진 강점이다. 공지영의 문제는 그런 장점을 가졌음에도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장정일은 평론집 '독서 일기'에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공지영은 문제적 소설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그러니까 그 말은 공지영이 자신이 가진 작가로서의 역량을 감상적 차원에서 소모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장정일의 그러한 비판에 동의했다.
독자가 글을 읽게 만드는 것. 그것도 재미있게. 아, 그것이야말로 글로 먹고살아 갈 수 있는 작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독자가 작가의 글을 술술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걸까? 그런 면에서 한 작가의 문체는 작가의 고유한 각인인 동시에 영업비밀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비밀을 알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작가는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였다. 특히 그의 단편 '여학생'은 어찌나 글이 빼어난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저런 소설 하나만 쓰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작가 '이문열'은 한국 문단에서 이제는 잊힌 뒷방 노인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 그가 내놓은 중단편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특히 '하구(河口)' 3부작으로 일컫는 그의 사소설은 매우 빼어나다. 그 시절에 이문열이 써내는 글을 따라서 쓰고 싶었던 문학청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문열은 나중에 창작 레지던시를 열어서 문하생을 두었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는 한다.
이문열의 문체가 화려하고 거침이 없었다면, 박완서의 글은 그와는 아주 다른 지점에 있었다. 박완서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사회적 접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쉽게 읽히지만, 그 쉬운 문체 속에 내재된 인간에 대한 탐구는 가히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박완서의 문체를 따라 하고 싶어 했다. 독자를 힘 있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말하고 함께 걸으면서 글 속으로 초대하는 것. 박완서의 소설은 나에게 그러했다.
어제, 나는 ChatGPT에다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입력했다. 그랬더니, 이 척척박사는 내가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는 소설 작법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흥미 있는 도입부를 쓰고, 그 글을 읽을 독자를 생각해야 하며, 중간중간 독자의 관심을 이끌만한 대목을 배치해야 한다고. 그리고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기성 작가의 문체를 모방해 가면서,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결국 작가에게 글쓰기란, 자신만의 '문체(style)'를 갈고 닦으면서 그 문학적 틀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다.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그 많은 작가의 글들은 멋진 관광 안내서와 같다. 나는 이제 그 안내서를 덮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짐을 싸서 진짜 먼 곳의 풍광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나의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야말로 내가 이런 잡문이라도 꾸준히 써내면서 글쓰기 수련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열심히."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답한 ChatGPT의 마지막 조언은 그러했다. 한글 번역기를 뚫고 나온 그 한마디에 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글쓰기의 비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