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 위에 놓인 귤 하나, 그 작은 것으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꾸려가는 거야."


  결혼을 앞둔 딸에게 아버지는 너무 경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렇게 충고한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린 시절 '안즈(살구)'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안즈코(가가와 교코 분)는 유명한 소설가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안즈코에게 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현명한 인생의 상담자이기도 하다. 여러 구혼자들을 만나 보다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료키치(기무라 이사오 분)와 결혼하게 된 안즈코.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마음의 갈등은 커져 간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안즈코(Little Peach, 1958)'에는 결혼의 풍경, 그것도 꽤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내면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접힌 부채가 펼쳐지면서 보이는 그림처럼, 접혔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혼의 실체가 안즈코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부모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료키치는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가진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오직 자존심만이 하늘을 찌른다. 장인의 명성에 대한 질투는 아내에 대한 온갖 짜증과 트집잡기로 이어진다. 이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럼에도 안즈코는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 여성 관객들에게 '안즈코'는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답답함과 울분을 선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안즈코와 장인에게 돼먹지 못한 언사와 행동으로 일관하는 남편 료키치. 그의 찌질함과 무례함은 영화 내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이지만, 속 깊은 이 부녀()는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안즈코는 결혼 생활을 쉽사리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곱게 키운 딸의 시련과 고생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묵묵히 딸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가 다 그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흠은 남자에게는 순간이지만, 여자에게는 평생을 가지."


  여기에서 흠이란 '이혼'을 뜻한다. 아버지는 딸의 이혼 가능성을 언급하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혼녀'라는 사회적 낙인(烙印)이 평생을 가던 시절에 지지고 볶으며 살더라도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마치 딜레마 같다. 서서히 말라 죽으나, 남은 생애 동안 엄혹한 비바람 속에 서 있거나. 물론 지금 시대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본질, 즉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내하면서 매번 새롭게 닥치는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것이 힘든 사람에게 출구로서의 '이혼'이 안즈코가 살던 시대 보다는 좀 더 쉽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3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 이외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결혼 생활의 끝은 그에게 깊은 우울감을 남기기도 했다. '안즈코'에서 그가 그려내는 결혼의 풍경은 지독한 혐오의 감정까지는 아니지만, 근본적인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편과 친정을 오가는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안즈코의 내면은 더욱 더 피폐해질 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결혼 전, 여유있고 평안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던 안즈코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곤궁한 결혼 생활은 피아노마저 팔게 만든다. 궁기 가득한, 생기 잃은 안즈코에게 결국 결혼이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안즈코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은 그 대답을 유보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혼의 풍경이 칙칙한 회색의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 감각이 가득하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는데, 1956년에서 이듬해까지 '동경신문'에 연재되었던 무로우 사이세이의 동명 소설이 그것이다. 원작이 가진 탄탄한 구조와 뛰어난 문장을 영화 속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즈코가 아버지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결혼을 평생 복무해야 하는 지겨운 군대 생활로 비유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남편 료키치가 안즈코에게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의견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 대한 안즈코의 답이 걸작이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소설은 미인과 같다고. 뭘해도 예쁜 사람이 있잖아. 목소리나 걷는 모습 같은 거 말야. 소설도 그렇게 완전한 것이 되었을 때 편집자가 사려고 한다고."


  글에 대한 재치있는 비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찌질한 남편은 그럼 내 소설은 추녀인가 보군, 하며 이죽거린다. 그런 생동감 있는 대사들이 이 영화의 우울함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안즈코'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일본인이 쓴 리뷰를 읽게 되었는데, 그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 'Little Peach'에 이의를 제기했다. 원래 '안즈'는 '살구(apricot)'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영어 자막에서도 그렇게 표기하면서(안즈코가 구혼자와 통성명을 하는 장면에서 단 한번 언급된다) 왜 제목을 '작은 복숭아'로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그런 것이 살짝 걸리는 부분인가 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에게 '살구 같다'라는 표현 보다는, '복숭아 같다'라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영어 단어 'peach'가 가진 의미도 '예쁜 아이, 멋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그 어여쁜 안즈코가 결혼으로 인해 생고생을 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괴로운 영화.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결혼의 풍경은 그러했다.



*사진 출처: tiff-j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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