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로 이 글을 삭제해서, 다시 올리는 글입니다.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갔다. 내가 족저근막염 때문에 밖에 나가서 걷지 못한지가 좀 되었다. 휴일 오전의 공원은 한적했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좀 있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개를 풀어놓고 산책을 시키고 있었다. 그걸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식이 없는 인간이네. 나는 그 인간을 피해서 인근 아파트 단지 안쪽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그러고 나서 다시 공원을 거쳐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 인간은 여전히 개를 풀어놓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저씨, 개를 묶고 다니세요. 저기 현수막에 써 있잖아요."
공원의 현수막에는 반려견 산책 시 목줄을 하라는 경고문이 써져 있다. 그 현수막에 대해서라면 나는 할 말이 많다. 그 공원에 개를 풀어놓고 다니는 인간들이 좀 있다. 산책하러 나갈 때마다 그런 인간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스트레스였다. 나는 구청 공원관리과에 현수막이라도 달아주면 좋겠다고 민원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구청에서 현수막을 제작해서 걸어놓았다. 내가 가리킨 것은 바로 그 현수막이었다.
"이봐. 당신 일이나 신경 써. 내가 뭐 피해준 거 있어? 어디서 싸가지 없이."
하, 저놈 봐라. 우아하게 싸우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럴 때는 방법이 없다. '이 구역의 미친 인간은 나'라는 그것을 시전할 수밖에. 꼭 이렇게 일 년에 두어 번은 이런 일을 겪는다. 휴대 전화를 갖고 있었으면 그놈 상판대기를 찍어서 바로 신고해 버렸을 텐데. 나는 산책하러 나갈 때, 전화기는 무거워서 잘 가지고 다니질 않는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 저런 무식함을 내뿜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공원이 지네 안방인가? 개를 풀어놓고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에 나는 개 데리고 다니는 인간들 때문에 너무나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개 목줄을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게 다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웬만하면 그런 인간들은 피해서 간다. 개념 없는 사람과는 부딪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저 무식한 놈이 공원 산책을 하면서 저렇게 개 풀어놓고 다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걸 눈여겨보았다가 오늘에서야 말한 참이었다. 결국 그 쓰레기 같은 놈은 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나에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저런 인간들과 마주치게 되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계층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결코 중산층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러나 하층민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그러니까 그 두 계층에 어중간하게 걸친 사람들이 사는 곳. 고장 난 전자 제품을 재활용 분리수거함 앞에 내다놓으면 10분 이내에 바로 사라지는 곳. 주로 나이 먹은 인간들이 목줄을 안 한 개를 데리고 단지 내에서 어슬렁거리는 곳. 그러니 내가 아파트 인근 공원에서 저런 무식한 놈과 마주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내가 '이 구역의 미친 인간'임을 잠깐 입증했다가 돌아오는 길. 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서 개를 풀어놓고 똥을 누게 하는 젊은 여자가 있다. 저 여자는 자기 개를 꼭 아파트 화단에서 누게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도 나는 그 여자가 그런 역겨운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미친 인간'의 기운이 남아있어서, 큰 소리로 한마디 했다. 개 목줄 좀 해요. 지 개새끼 뒷처리를 해주던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개 묶고 다니라고. 내가 두 번째 말했을 때, 그제서야 여자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알았어요. 덩치 큰 여자의 입은 부어터져 있었다.
내가 오늘 만난 두 사람은 참으로 무식하고 추잡스러운 인간들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좀 더 비싼 아파트로 이사 가면 저런 인간들을 좀 안 볼 수, 아니 덜 볼 수 있을까?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은 어쩌면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계층성에도 적용될지도 모른다. 끼리끼리 산다. 나는 언젠가 읽은 미국 잡지의 글이 생각났다. 미국 사회에서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은 학생이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연구 대상자들의 삶을 수십 년에 걸쳐 살펴보는 사회학적 종단 연구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빚을 내든 어떻든 무리해서라도 좋은 사립학교에 들어간 가난한 학생은 중산층에 편입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학생이 지닌 지적인 능력도 중요한 요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하층민의 머리 좋은 학생이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인적인 네트워크였다. 부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만난 동기, 선후배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층민 학생은 중산층의 계층적 아비투스(habitus)를 배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다양한 기회들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그것이야말로 머리 좋은 하층민 계층의 학생에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닭의 대가리가 되기보다는 용의 꼬리라도 붙잡고 살아가기. 나는 내가 사는 이 아파트에는 그저 그런 닭대가리들이 득실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가봐야 그 닭의 무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계층적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뼈저린가? 나는 아마도 오늘 공원에서 마주친 무식한 놈과 같은 부류의 인간을 내년에 또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아파트 단지를 떠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어느 동, 어느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면 용의 발톱 부스러기들의 삶을 볼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은 '돈'의 문제로 귀결될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아파트를 떠날 돈이 없다.
내가 한달에 한번 약을 타러 다니는 종합병원 가는 길에는 '로또 복권 가게'가 있다. '2등 당첨자의 집'이라는 글귀가 전자 간판에서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곳이다. 지나가다 보니, 그 간판을 보고 운전하던 차에서 내려 복권을 사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깜빡이를 켜둔 차는 복권을 급하게 사서 나오는 남자와 함께 사라진다. 로또 대박이나 터지지 않는 이상,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중산층에 편입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 부모님이 왜 1980년대의 부동산 광풍에서 강남의 주공 아파트를 내다 팔고 강동구로 이사 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부모님은 부동산에 무지했다. 결국 그것이 우리 가족의 계층성을 결정적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개 풀어놓는 무식한 놈에게 내가 '이 구역의 미친 인간'을 시전한 날의 이 저녁은 기이하고 씁쓸한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