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인이 도록을 번역한 관계로 해서, 지난 3월 27일 목요일 오후, 작가 및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겸한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 회고전의 개회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날까지도 도록의 번역본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 씁쓸해졌다(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불만은 일전에 내 어머니의 '이유 있는 비판'을 소개하면서도(http://blog.aladin.co.kr/sinthome/1840680)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다른 유수의 국내 '현대' 미술관들 역시 사정이 결코 나은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전시회를 자주 방문하는 이들은 이미 익히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회고전(retrospective)'이라는 '거대 형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일단 이러한 대규모의 전시회 형식이 '미술 산업'의 한 측면을 가장 거대하고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상 한 자락은 굳이 여기서 첨언하지 않아도 되리라. 여러 굵직한 회고전 때마다 내가 느끼게 되는 일종의 심리적 '중압감' 내지 육체적 '피곤함'은 아마도 저 '거대 서사'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는 하나의 병증일 것. 하여, 도약하자면, 이제ㅡ겨우 이제서야?ㅡ'미술'은 '미술관'을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떠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오래 묵은 상념과 투정의 한 자락, 다시금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음악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악이 콘서트홀과 클럽 등 기존의 '닫힌' 공간으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음악의 작곡과 연주라는 지극히 '음악[내]적인' 문제를 떠나 그 문제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 자체를 이동시키는ㅡ어쩌면 '해소'까지 해주는ㅡ물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형식 바깥의 형식'이 지닌 문제, 곧 장르라는 내적 형식 바깥에서 그 장르 자체를 구성해주는 외부적 형식이라는 문제는, 일종의 '공간'에 대한 물음을 다시 묻는 물음이며ㅡ이러한 문장 형식을 통해 나는 이미 스스로 '사이비-하이데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ㅡ이는 따라서 '시간 예술'로서의 음악이 자신의 '전제'이자 '영점(零點)'으로 지니고 있는 '존재 조건'을 묻는 물음이기도 하다.

Annette Messager: les messagers(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Xavier Barral, 2007.

2) 위의 책은 작년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열렸던 아네트 메사제 회고전을 기념해 출간된 도록으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의 도록 역시ㅡ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ㅡ이 책의 번역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도록에 수록된 글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하게 되는, '확인 사살'을 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미술과 철학이 맺어온ㅡ또한 지금도 맺고 있는ㅡ저 '열정적인 관계'에 다름 아니다. 이 관계가 지닌 '뜨거운'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기생적(寄生的) 현대 철학의 '더부살이'라는 생존 형태가 지닌 하나의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은 영화와 흘레붙고 미술과 흘레붙고 음악과도 흘레붙는다. 정신분석과의 '근친상간'은 거의 '겁탈'과도 같은 이러한 철학의 '짝짓기' 행태가 가장 여실히 드러난 최근의 사례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철학과 예술 각각의 '순수주의' 따위를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한 철학적 개입의 '과잉'이 너무나도 쉽게 저 '의미'ㅡ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이 '감추고 있는', 예술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상정된 어떤 '의미'ㅡ에 대한 일종의 '강박적 집중'으로 귀결되곤 한다는 점이다(그러나 이러한 '진단'의 외형 역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철학과 정신분석이 서로 배 맞는 형국을 띠고 있지 않나). 이 지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의미'에의 과도한 집착에 의해 붕괴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술' 그 자체이며, 그로 인해 살아남는 것은 '스타'와 '산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예술의 '순수주의'에 대한 주장ㅡ또는 모든 '의미'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감ㅡ과는 섬세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는데, 내가 의미와 이론의 과잉에 의해 질식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예술의 '순수한'ㅡ또는 '순수하다'고 상정된ㅡ취지와 의도가 아니라 바로 현대 예술의 저 '텅 빈 형식'이기에 그렇다. 텅 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형식'으로서의 예술. 어쩌면 '의미'에 대한 과잉된 집착은 저 텅 빈 형식의 속을 꾸역꾸역 채우려고만 하는 과식과 폭식의 형식일 것. 고로, 나는 이러한 텅 빈 형식에 '숭고한 대상'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그렇다면 여기서 '레테르'라는 단어는ㅡ관습적으로라도ㅡ일종의 '부정적' 표식이 되어야 할까).

▷ 늘어놓는, 하지만 만질 수는 없는, 볼 수도 없는. [사진: Rosa]

3) 따라서 '의미(meaning)'와 '전언(message)'은 섬세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당연하게도, 예술은 확정된 의미를 정할 수 있는 기표가 아니다. 곧, 예술은 의미로 바로 치환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예술은 말을 건다. 하지만 반드시 그 말의 의미를 결정하고 확정하는 것이 감상과 비평의 책무는 아니다. 예술을 하나의 '의미'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의 '전언'으로 보느냐 하는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를 지독한 '헤겔주의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예술은 '매개된' 형식이다. 의미의 '직접적' 현전이 불가능한 이유는ㅡ역시나 나를 지독한 '해체주의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ㅡ또한 그것이 언제나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구성되기 때문이다. '전언'은 어떻게 구성되고 전달되는가, '편지'는 어떻게 [항상 수신자에게] 도착하게 되는가. 전언들은 도착(arrival)과 도착(perversion) 사이를 왕복한다. 우회적으로 말하자면, '정갈하게' 늘어놓은 저 '디스플레이'의 형식은 액자와 틀(frame)의 규격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엿보는 공간 안의 사물들이 지녀야 할 배열의 형식으로는 그리 적당하지 못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저 '엿보는' 공간은 이미 그 스스로 누군가 자신을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도착적 성격이 지닌 힘은 그렇게 발생한다(그렇다면 사르트르적인 타자의 시선을 '역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형식은, 역설적으로 실로 '적당하고 적절한' 디스플레이의 방식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저 공간 안에 '전시된' 액자들 각각의 '의미'가 아니다(그 액자들이 개별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공간이 말을 걸어올 뿐이다. 형식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고, 그 형식의 텅 빈 틀만이, 기억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엿보고 있다는 '상상적 의미'를 넘어서, 나에게 하나의 전언을 전한다. 따라서 이 언어는, 당연하게도, 하나의 '상징적인' 형식을 띠게 된다.

▷ '피'는 호흡하고, '숨'은 출혈한다. [사진: Rosa]

4)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피가 쏟아져 내린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의 압권이라 말하고 싶은 위의 작품 <카지노>를 보면서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샤이닝(The Shining)>의 마지막 장면들을 떠올렸던 이가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 '차가운 풍만함'을 머금은 채, 피는 숨을 내쉬고, 숨은 피를 뿜어낸다, 호흡하는 피, 출혈하는 숨. 하지만 여성성으로서의 '피'와 그 '흐름'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 듣자(제발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작가의 '유년 시절'이 평범했나 독특했나 따위의 질문은 하지 말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주문과 상동적인 관계에 있는 하나의 제안). 반복하자면, 문제는 '의미'가 아니다. 자칫 방심하면, 작가란 존재는 정신분석가 앞에 앉은 '어설프고 영악한' 피분석자처럼 자신의 '상상적 자아상'만을 반복하는 존재가 되기 쉽다. 문제는 그러한 상상적 의미일 수 없다. 이 작품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오히려 [오로지] '기술적' 문제 때문이었다. 미술이 '환상'을 드러내고 향유하는 방식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technique/description)'. 미술은 이미 '시각'을 떠난지 오래지만, 저 '미술 작품'은 공감각적인 것을 오로지 '시각적인 것'의 영역 내에서만 보여주고 또 향유하고자 한다. 그 '기술'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것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지만, 동시에 실로 경이로운 것이기도 하다. 왜 의심스러운가: 언제나 의미의 함정ㅡ저 의미를 '감촉'할 수 있다는!ㅡ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왜 경이로운가: 공감각적인 매체와 경험들을 '시각'이라고 하는 하나의 감각만으로 소화하고 소환하려는, 곧, '환원'과 '소급'이 아니라 '매개'하고 '증식'하려는 그 '형식적' 전언의 노력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 파손 주의: 하나의 서명을 만들기 위해. [사진: Rosa]

5) 하나의 서명, 가장 마음에 드는 자신의 서명을 만들기 위한 저 모든 [헛된] 시도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 이삿짐, 병 속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진 편지와도 같다. 이에 전언은 이제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의 '고유명'으로[만] 남는다. 서명 만들기는 정체성(identity)의 구성과 확립을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시도이지만, 또한 그것은 동시에 그 자체로 동일화(identification)가 지닌 지난하고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징후'이기도 하다. 하나의 서명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러한 무수한 시행착오가 말 그대로 '무수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아포리아에 있을 터. 때로는, 폐가의 천장을 따라 직조되는 거미줄처럼, 때로는, 잘라도 잘라도 다시 끈질기게 자라나는 몸의 터럭들처럼, 그 서명은 결코 확정되거나 안착하지 못한 채로 부유하고 증식할 것이다. 그 이름[들]과 서명[들], 혹은 이름과 서명을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들] 속에서, 그것이 점지해주는 어떤 '운명적' 운동을 감지하는 것. 어쩌면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이름[들]을 따라갔던 저 데리다(Derrida)의 여정에서처럼, 메사제(Messager)의 이름[들]을 따라 그 전언(message)이 지닌 운명과 형식에 주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연상'이란 무의식적이라기보다는 실로 [전]의식적이지 않은가.

▷ 파편적인 몸[들]이 한데 뭉쳐 이루어낸 한 염(念/殮)으로서의 소원[들]이란? [사진: Rosa]

▷ 손금을 보고, 그리고, 주문을 내려쓰다, 기록하다. [사진: Rosa]

6) 손금에 기록된 운명은 하나의 단어가 되어 액자 밑을 향해 반복적으로 흘러내린다. 그 단어를 단순한 명사들의 반복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일종의 명령문 또는 감탄사의 강조적 용법으로 읽어내야 할까. 이는 말하자면, 그림책을 '읽으면서' 글자가 있는 부분은 뛰어넘고 그림만을 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오히려 그림책 안에서 그림들은 제쳐두고 글자들만을 '감상할' 것인지를 택하는, 그런 기묘한 선택지와도 같다. 그렇다면 '손금-운명'이라는 무채색의 그림에 대해 각양각색의 '문자-기록'이라는 형태로 응수하는 저 '주석'으로서의 '주문'은, 일종의 '시각적' 형용모순(oxymoron)이라 할 것인가. 작품 앞에 도착하여 도착적인 '인상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한 명의 비평가란, 사실 그 자신의 '상상적 자아상'과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분석주체에 다름 아니었다. 하나의 '그림', 하나의 작품 앞에 선다는 것이 이제 일종의 '자가-정신분석(auto-psychoanalysis)'이 되어버린 자에게, 저 모든 흘레붙는 철학적 리비도의 총체는 하나의 황홀한 '언어적' 증상으로 [승]화한다. 다만 내용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형식으로서의 전언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할 뿐. '분석가'의 자격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하나의 작품은, 그러므로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훌륭한'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것.

7)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그렇게 까칠하게' 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의 말은 지나가는 길에 툭 하고 던진 농담 같은 것이었겠지만(마치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 가사처럼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것은 실로 스스로의 '까칠함'을 많이 죽이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ㅡ혹은, '죽이면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ㅡ사뭇 진지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어떻게 덜 까칠하게 살지?'라는 반문이 혀와 목구멍에 걸렸으나, 내뱉지는 않았다, 아니, 뱉지 못했다. 까칠함과 섬세함, 과민함과 예민함 사이의 경계, 사실 나도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하지만, 자신은 예민함이자 섬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에게는 과민함과 까칠함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또한 바로 그러한 사실 자체가 저 두 개의 개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계'를 설정해주는 하나의 '경험적'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지긋이 인정할 정도로, 나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다, 죽이면서 살고 있었다. 아마도 저 마지막 사진은 그런 나의 초상화일 것이다, 어지러운 손금이 점지한 운명에 눌려버린, 날카로운 손톱이 지시한 행로에 찍혀버린.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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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애쉬즈 투 애쉬즈>의 포스터를 위한 사진(사진: 정형우).

1) 올해 내가 작곡한 세 번째 음악은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연극 <애쉬즈 투 애쉬즈(Ashes to Ashes)>를 위한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전통적인 조성 형식을 사용하면서 연극의 앞을 열고 뒤를 닫는 두 개의 짧은 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가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첼로 협주곡이 지닌 파열과 치유의 느낌에 대한 '절제된' 재-전유(re-appropriation), 그리고 피에르 앙리(Pierre Henry)의 구체 음악과 존 케이지(John Cage)의 피아노 음악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어떤 '정서적' 결합/동거(co-habitation)였다.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작곡은 하나의 심상(心像)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단, 그러한 심상과 그림이 비단 시각적인 것'만으로' 해소/소급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첨언하고 싶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일단 '공감각'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느끼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감각보다는 감각의 '묶음'이, '여러 개의' 단일한 감각들보다는 '하나의' 공감각이 먼저 주어진다는 점이다. 단, '심상'이라고는 해도 그것이 딱히 '심리[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아니,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심리주의적인 것을 넘어서는 곳에 작곡의 요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또는, 시작은 '현상학적으로' 미약했으나 끝은 '[反-]미학적으로' 창대해야 하지 않을까, '어설픈' 작곡가로서의 나는, 일단은 일종의 '부정어법'과 '패러디'를 사용하여, 그렇게 생각해오고 있다. 말하자면 이는 일종의 '형식주의'인 것. 그런데 이러한 '형식주의'는 또 다른 형식주의와 섬세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일화를 예로 들자면, 지난 달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유명한' 작곡가를 만나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대뜸 그가 먼저 꺼낸 이야기는, 베토벤(Beethoven)의 음악을 공부하고 분석해봤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에겐 이른바 '3B(Bach-Beethoven-Brahms)'의 작품들이 음악의 요체이자 궁극이었던 셈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나는 '쇤베르크의 음악은 결국 바흐로 귀착된다'라든가 '베토벤의 음악은 그 자체로 음악의 완성이다'라든가, 또는 '음악의 분석은 <푸가의 기법>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하는 따위의, 기원과 궁극에 관한 담론들에 대해서 이견(異見)을 달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옳은'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러한 '옳은' 주장에 대해 거의 항상 '체질적으로' 그리고 '생리적으로' 일종의 구토 증세를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그러한 궁극과 기원을 일종의 '절정'이자 '절대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왜 [아직까지도] 작곡을 하고 있는 겁니까?

   

▷ <애쉬즈 투 애쉬즈>의 두 배우, 한명구와 김호정(사진: 정형우).

2)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해 말하기, 혹은 아예 말하지 않기. 최근 부쩍 '다시금' [이론적] 주목을 받고 있는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여러 담론들에 대해 지젝(Žižek)이 말하고 있듯이ㅡ그런데 바로 지젝 그 스스로가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역으로' 흥미로운 사실일 텐데ㅡ,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론적' 질문은 사회적 변화들(social changes)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안정성(stability)과 영속성(permanence)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곧, 기독교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번성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나, 또는, 반유대주의는 어떻게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가(지젝 外 편집, 『신학과 정치적인 것: 새로운 논쟁(Theology and the Political: the New Debate)』, p.57 참조). 이 연극을 관극 내내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극장 문을 나서면서 이것이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불륜'의 이야기 속에서 '녹여낸' 것이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설명을 전해 듣고는 마치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구슬들이 단숨에 한 줄로 엮여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는 한 관객의 일화를 곱씹어본다. 꼭 이 일화만큼, 꼭 그만큼이나 '교과서적인' 하나의 물음이 오롯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서사(narrative)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수줍게' 제안하는 하나의 '독법(讀法/毒法)'은, 서사의 구조와 진행을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알레테이아(αληθεια)로 바라보라는 것. 곧, 연극 안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정의상 서로 닿거나 만나지지 않는, 두 개의 평행선이 존재한다. 그 두 평행선은 극의 진행상 데블린(Devlin)과 관객이 공유하는 어떤 것이며, 또한 극의 구조상 레베카(Rebecca)의 언어가 만들어낸 궤적을 따라가는 선이기도 하다. 그 둘ㅡ혹은 셋ㅡ은 서로를 '보충'하며 전체적인 서사를 추동한다. 갈등의 봉합이라는 결말이 아니라 파국에의 초대에까지 이르는 어떤 시작을 향해. 말하자면, 홀로코스트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현상의 자격으로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개인사' 안에서, 하나의 '일상' 안에서, 세 개의 극적인 선과 두 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대화 안에서, 여전히 끈질기게 '잔존(殘存)'하고 있는 것이기에ㅡ그러나 이 '잔존'이란 단어는 '멸절(滅絶)'을 전제하거나 목표로 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ㅡ여전히 '문제적'인 문제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 이 연극이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어쩌면 이러한 '간극'일 터.

   

▷ 해롤드 핀터, 『 해롤드 핀터 전집 9 』(오경심 옮김), 평민사, 2002.
▷ C. Davis, J. Milbank, S. Žižek(eds.), Theology and the Political: the New Debate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5.

3) 역시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항상 번역과 연출의 선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번역자와 드라마투르그가 해야 할 일은ㅡ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으로ㅡ'적절한' 대사의 창출과 안착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명제는 몇 번이나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가장 기초적인 사항일 텐데, 번역자가 '무모한' 고집을 피울 때 극의 언어는 실종된다. 분명 말은 말인데, '들리지 않는' 말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번역극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문제이자 한계일 텐데, 이러한 병증에는 시간만이 능사가 아닌 모양이다. 기존의 번역본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 번역한 대본을 사용했지만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출의 언어 또한 너무도 쉽게 '현실의 공간'을 포기해버릴 때 그 발언의 공간이 확장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되는 '기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고도로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형식은 어쩌면 가장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더욱 증폭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도 연출의 언어야말로 바로 이러한 하나의 '역설'에 대해 언제나 더욱 깊이 사유해야 하는 언어의 형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모든 것이 만족되고 충족되기에는, 연극이라는 좁은 무대가 너무나도 넓다. 상연은 4월 27일까지, 산울림 소극장에서.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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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를레앙(Orléans)에서 마들렌 샵살(Madeleine Chapsal)과 대담하는 바타이유(Bataille). 죽기 1년 전인 1961년의 모습이다. 

48) 그렇다면 니체(Nietzsche)의 이러한 '외상'은 비뚤어진 또 다른 '엘리트주의', 니체 자신이 그렇게 비난해마지 않았던 저 '기독교적' 원한(ressentiment)의 감정으로 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그 자체로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희들을 찾으라고. 그리고 너희가 나를 모두 부정했을 때(wenn ihr mich Alle verleugnet habt)야 비로소 나는 너희들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1(번역: 람혼).

49) 이 외침 속에는 두 가지 종교의 '명대사'가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곧, '나를 버려라', '나를 만나면 나를 죽여라'라고 하는 대사, 그리고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라고 하는 대사가 바로 그것. 그러므로 이러한 '부정'은 일련의 '긍정'의 시련을 거친 후에 도달할 수 있는 부정, 즉물적인 부정을 넘어선, 또한 변증법적인 부정을 넘어선 부정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비정상의 자서전은 '달마'의 자서전이 되고 '예수'의 자서전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니체가 기독교적 원한 또는 정상성의 어법과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죄의식'의 부정, 그리고 '회심(回心)의 내러티브'에 대한 거부에 있다:

"그는 '불행(Unglück)'도 '죄(Schuld)'도 믿지 않는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7(번역: 람혼).

50) 어떻게 하면 죄의식(Schuldbewußtsein)과 결별할 수 있을까. 니체는 '회개'의 주제를 의도적으로 제거시킴으로써 '회심의 자서전'이라고 하는 정상적 자서전의 문법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 죄의식과 그로 인한 회심이 정상성의 자서전 안에서 주인공이 겪는 어떤 '성장'의 구조를 구성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 그러한 회개와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서전 안에서 어떤 극적인 반전과 깨달음이 성장의 전개 과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서전을 시작할 때부터 그 전도된 문법 안에서 회심의 전개 구조는 거부되고 부정되고 전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궁극적으로 죄의식의 부정, 원죄라는 개념에 대한 위반이다(니체의 글이 지닌 이러한 '회심의 구조'에 대한 거부는 특히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록』과 대조하였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의 건강한 "눈병"은 '진리'에 눈먼 것이 아니라 '죄의식'에 대해 눈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명(失明)'의 경험은 단순한 무지(無知, ignorance)의 경험이 아니라 비지(非知, non-savoir)의 경험인 것. 그리하여 나는 모든 '진정한' 예언자는 '맹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저 테이레시아스의 사례!).

▷ '시각'에 가하는 '시각적' 충격.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내 작업의 위대함과 동시대인들의 보잘것없음 사이에 놓인 불균형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사실로 표현된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57(번역: 람혼).

51) 자신의 '눈먼' 경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력 상실'과 '청력 상실'로 변용된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할 수 있는 생리학적이고 병리학적인 입장인 것. 그러므로 데리다(Derrida)가 '귀에 관한 과학'을 의미하는 말인 'otologie'와 '자서전'을 의미하는 말인 'autobiographie'를 결합하여 만들고 있는 단어인 'otobiographie'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쉽게 자서전이 '소통'의 텍스트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과 귀의 은유로 표현되는 이러한 신체 구조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은 경험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 개체와 개체 사이에 가로놓인 밑 빠진 공허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자서전의 공간은 또한 소경과 귀머거리의 공간, 절대적 고독의 공간이기도 한 것. 이제 이 귀머거리는 다른 것을 '들으려' 한다, 이 맹인은 다른 것을 '보려' 한다:

   

▷ Georges Bataille, L'expérience intérieure, Paris: Gallimard(coll. "Tel"), 1978.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5, Paris: Gallimard, 1973.

"'모퉁이를-돌아서-봄(Um-die-Ecke-sehn)'의 심리학"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6(번역: 람혼).

52) 실명의 경험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보지 못한다는 것이 '다른 것'을 보려는 의지로 전환된다. 모퉁이를 돌아서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구석을 본다는 것, 그것은 시각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 본다는 것, 즉 역설적으로 '맹점(盲點)을 본다는 것'이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내적 체험(L'expérience intérieure)』에서 지성의 맹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성(知性) 속에는 하나의 맹점(tache aveugle)이 존재한다. 그것은 눈(œil)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눈 안에서처럼 지성 안에서도 우리는 그 맹점을 어렵사리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의 맹점이 보잘것없는 것임에 반해 지성은 본성상 자신의 맹점이 그 안에 지성 자체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를 원한다."
ㅡ 바타이유, 『내적 체험』, 전집 5권, p.129(번역: 람혼).

53) 이 맹점이 바로 비지(非知)이다. 지성은 맹점 너머에 있을 어떤 '의미'를 갈구하지만 비지로서의 맹점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것이다. 지성의 맹점은 지(知)가 아니므로 거기에는 의미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 지로써는 맹점을, 그 '실명'의 경험과 체험을 파악해낼 수가 없다. 그 사이에는 어떤 심연이 놓여 있고 본질적인 균열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비지는 곧, 삶에 있어서 '균열'이라고 하는 것을 '속류 헤겔주의'의 방식으로 소위 '변증법적 통합' 안에서 해소될 수 있는 일종의 '안티테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ㅡ이것이 바로 저 '지성'의 일반적인 방식일진대ㅡ오히려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의 요소로서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Minuit(coll. "Critique"), 1969.

54) 균열은 본질적인 것이며, 들뢰즈(Deleuze)가 말하듯, "모든 것은 심연(abîme)에 의해서 시작된다."(『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p.219) 그러한 '긍정적인' 균열에 대한 서술은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 '내면의 언어'라는 형식으로 발견된다. 그러므로 광인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맹인의 자서전이 된다. 따라서 니체의 저 '눈병'은 표피적인 건강성을 넘어선 근본적인 건강성이 되는 것이며, 알튀세르의 '눈먼' 착란과 실명(實名)의 실명(失明)은 비정상성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에 또한 바타이유의 '균열'은 부정의 부정, 암흑의 긍정, 비지의 밤 속에서 어둡게 빛나는 음울한 섬광이 된다:

"균열(fêlure)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감내하는(subie) 균열, 즉 타락으로부터 영광으로(곧 사랑하는(aimée) 균열로) 나아간다."
ㅡ 바타이유, 『죄인(Le coupable)』, 전집 5권, p.259(번역: 람혼). 

55) 이렇게 인식된 균열은 하나의 '영광(gloire)'이다. 발전과 진보를 전제하는 직선적인 내러티브와 회심의 클라이맥스를 갖는 변증법적 성장 구조는 정상성의 개념과 함께 사라진다. 진정한 것은 비약과 돌출이며 결국 균열이다. 그러한 균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규정 짓는 것, 모순과 차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해소되어야 할 일종의 '중간항'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자체를 사랑하고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자서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출하면서 취하고 있는 핵심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균열(fêlure)은 내면적이지도 외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경계선 상에 있으며 감각할 수 없고 형태가 없으며 관념적인 것이다."
ㅡ 들뢰즈, 『의미의 논리』, p.181(번역: 람혼).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2, Paris: Gallimard, 1970.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7, Paris: Gallimard, 1976.

56) 그러므로 이러한 '비지의 균열'을 옮겨가는 내면의 언어로서의 자서전이란 내면과 외면을 구분 짓는 정상성의 어법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분법은 지성의 작용이며 그렇게 구분된 내면은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자서전의 공간이 아니다. '내면 연기', '내면적 고뇌'라는 쉽고 편하게 통용되고 있는 어법 속에서 발견되는 내면에 대한 이 소박하고 경박한 하나의 '인식론'은, 그러므로 지성의 '농간'일 것. 내면은 혼란스러움에 반대되는 '평온한' 안정이 아니며 '가벼움'이라는 대립항을 상정하는 저 무거운 '무게'도, 끝을 모르는 '깊이'도 아니다. 바타이유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내면이란 혼란과 공포 그 자체인 것. 고야(Goya)가 말하듯, 그리고 바타이유가 다시 그 말을 이어받아 변용시켜 말하듯,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것은 이성의 잠이고 ㅡ 그것은 괴물을 낳는다."(바타이유, 『종교의 이론(Théorie de la religion)』, 전집 7권, p.351) 이 괴물은 우리가 어렵사리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진정한' 내면의 모습이다. 이성이 잠들면, 하나의 '꿈'이 깨어난다:

"바지가 벗겨진 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있었던 기억과 연결되는 유년 시절 거미들의 공포 등등. / 가장 끔찍한 것과 가장 장엄한 것 사이에 있는 일종의 양면성.[...] / 꿈에서 깨어나, 나는 쥐들의 공포와 나를 매질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결합한다, 나는 독수리(아버지)가 부리를 내리찍어 피를 흘리는 두꺼비의 모습이다. 나는 엉덩이가 드러나 있고 배에서는 피를 흘린다. 붉은 빛 닫힌 눈을 통해 보여진 태양과도 같이 너무나도 눈이 부신(aveuglant) 기억. 아버지가 눈이 멀었기에(aveugle) 나는 상상해본다, 아버지 자신도 눈이 부신(aveuglant) 붉은 빛의 태양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ㅡ 바타이유, 「꿈(Rêve)」, 전집 2권, p.10(번역: 람혼).

▷ La Rochefoucauld, Maximes, Paris: Garnier-Flammarion, 1977.

57) 바타이유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교차하고 있는 자신의 꿈으로부터 '맹인의 언어'를 이끌어낸다. 맹인의 언어는 그 자신에게도,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도, 결국 '눈이 부신' 것, 동시에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그 앞에서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곧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가 이미 언급했던바, 죽음과 태양에 대한 공통적인 체험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과 태양이라는 존재를 쉽게 마주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바타이유의 '송과선 눈(œil pinéal)'의 은유가 탄생한다. 이 눈은 바로 실명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하는 것. 기존의 두 눈이 아니라 뇌 속의 송과선이 자라나 머리 위를 뚫고 솟아나는 또 다른 눈. 그 눈은 태양을 직시하는, 따라서 또한 죽음과 대면하는 제 3의 눈인 것. 곧 이 눈은 비지와 맞닥뜨리는 하나의 창문이 된다. 지의 정상성이 아니라 비지의 비정상성을 마주 대하는 이 새로운 눈은, 그러므로 비로소 태양을, 곧 죽음을 응시하는 눈에 다름 아니다. 그 눈은 죽음에 대한 굴성(trophisme)을 갖는 눈, 비지의 밤과 함께 열리는 통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문제 삼았던 자서전들은 곧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한 번 더 변용된다. 데리다(Derrida)가 '해부'한 대로, '자기-삶-기록(auto-bio-graphie)'로서의 자서전은 또한 동시에 "타자-죽음-기록(allo- et thanatographie)"으로 변용되기도 하는 것(데리다, 『오토비오그라피』, p.73):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인 이상, 원칙적으로 죽음은 매 순간마다 돌출할 수 있다."
ㅡ 데리다, 『우편 엽서(La carte postale)』, p.326(번역: 람혼).

   

▷ Jacques Derrida, La carte postale. De Socrate à Freud et au-delà
    Paris: Flammarion(coll. "La Philosophie en effet"), 1980.
▷ Jacques Derrida, Otobiographies, Paris: Galilée, 1984.

58) 그러므로 또한 데리다가 이야기하고 있는 "자서전적 사색(spéculation autobiographique)"이란 곧 죽음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니다(데리다, 『우편 엽서』, p.326 참조). 비정상성의 자서전은 단순한 삶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속되는 죽음의 이야기, 곧 죽음으로써 비로소 삶을 살게 되는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 된다. 따라서 결국 그러한 글쓰기 안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곧 자기에 대한 '동일성(identité)'의 문제이며, 이는 자서전이 '자기에 대한 글쓰기'라는 일반적인 정의만 떠올려봐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 곧 죽음과 태양을 바라보는 일에 준하는 문제이다. 광인의 자서전은 건강성의 개념과 정상성의 기준 그 자체에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따라서 나는 자서전적 글쓰기가 '실존주의적'이거나 '현상학적'인 글쓰기라기보다는 일종의 '병리학적' 글쓰기, '타나토스적'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고야(Goya)의 환상.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59) 자서전을 한 편의 '시(詩)'로 읽기, 그것도 '광인'의 시로 읽기. 시는 의식 없는 세례와 영감의 침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저 '플라톤적' 시론의 부활? 그렇다면 이것은 '낭만주의'로의 회귀인가, 아니면 '고전주의'로의 복귀인가. 확실한 것은, 비지의 밤이 곧 지성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내면은 '외부의 안쪽'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일 수 있다. 비정상의 자서전은 '극도의 혼란과 공포'를 머금고 있는 '내면의 글쓰기'이지만, 그 '안'에서 문제 되고 있는 '내부'는 더 이상 대립적인 규정으로 환원되는 '내면'이 아니다. 자서전의 공간은 고독의 공간임과 동시에 소통(communication)의 공간이며ㅡ여기서의 '소통'이란 바타이유적이고 블랑쇼적인 의미에서의 소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ㅡ, 니체가 말했듯이 "어쩌면 내가 산다고 하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뜨거운 혹한(酷寒)의 공간이다.

   

▷ Jean-Paul Sartre, Les mots, Paris: Gallimard(coll. "Folio"), 1972(1964¹).
▷ 사르트르, 『 말 』(이경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3.

*) 2008년에 쓰는 후기: 이러한 '자서전 집중 독해'의 시기에 미처 하나의 글로 정돈하지 못하고ㅡ하긴 위의 글들도 결코 '잘 정리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테지만ㅡ독서 카드들만 잔뜩 작성했던 책이 있었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Les mots)』이 바로 그것이다(개인적으로 한 동안 사르트르의 책들을 읽지 못했다). 조만간 기회가 될 때 사르트르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한 편의 글로 묶어서 다뤄볼까 한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일곱 개의 조각 글들을 모두 올리고 나니, 슬며시,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입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 글을 쓴 이후로 여러 해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의 신발끈은 헐겁고 성기다, 그런 생각이 든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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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meilette's paper 2008-09-3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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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r 2008-03-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들렀는데 페이퍼에 재미있는 제목이 붙어있군요. 시간을 내서 찬찬히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람혼 2008-03-03 13:39   좋아요 0 | URL
처음으로 글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 반갑고 감사합니다, 마르님.^^

marr 2008-03-03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렵군요. 제게는 마치 암호문 같습니다.
자서전적 글쓰기가 일종의 '병리학적' 글쓰기, '타나토스적' 글쓰기이고, 따라서 비정상의 자서전이며 '극도의 혼란과 공포'를 머금고 있는 '내면의 글쓰기'이다? 라는 건가요?
이런 결론의 전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니체와 바타이유와 데리다와 들뢰즈를 경유했기 때문인가요? 람혼님의 다음 글을 어떻게 읽을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람혼 2008-03-06 04:12   좋아요 0 | URL
결론만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일부러 니체와 알튀세르와 바타이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이른바 '에둘러 가는' 글의 소재들로 선택했던 이유도 저 당시의 저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던 것 같은 느낌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으로는, '병증'을 통해 '건강'을 살피고, '도착'을 통해 '정상'을 살펴보자는 의도였다고 하겠지요. '어떻게' 읽는가는 전적으로 마르님의 선택입니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누에 2008-03-0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이런저런 영감을 주는 조각들이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물론 마르님(안녕하세요~)에게처럼 제게도 암호문 같았습니다만.. 아니 그보단 조각퍼즐 같은 재미를 주는 글이었습니다.

람혼 2008-03-06 04:14   좋아요 0 | URL
영감을 드렸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드리는 마음이 됩니다. 퍼즐 같은 재미는 저 역시나 참 즐기는 것인데요...^^; Paris는 요즘 어떤지요? 조만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부쩍이나 더 생기는 요즘입니다.^^

누에 2008-04-03 18:41   좋아요 0 | URL
이곳은 무덤같은 곳이지만, 그런 숭고한 분위기의 흔적마져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고야를 볼 수 있고 루이스 부르조아를 만날 수 있답니다.

람혼 2008-04-04 17:04   좋아요 0 | URL
조만간 그 무덤 같은 도시를 한 번 방문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데, 혹시 그때 한 번 찾아뵈어도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누에 2008-04-05 17:07   좋아요 0 | URL
영광입니다. ^^ 자세한 일정이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 '청년' 니체의 초상.

40) 그런데 이러한 '본질적인' 의문, 이러한 '반격'과 관련하여 니체의 전략은 보다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가 취하고 있는 '자서전'의 전략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분법을 오히려 역으로 도치시키고 전도시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에 있어서 핵심적인 술어가 되는 것은 바로 정신적인 '건강'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광인의 자서전'이 계속하여 이러한 '건강성'의 개념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스스로를 통제한다. 나는 내 자신을 다시 건강하게 만든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은ㅡ모든 생리학자들이 인정할 것이겠지만ㅡ 근본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병약한 생명은 건강하게 될 수도 없거니와 스스로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는 더 더욱 없다. [그러나]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는 반대로 병적인 것이 오히려 삶에, 더 큰 삶에 하나의 활동적인 자극제(Stimulans)가 되어주는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6(번역: 람혼).

41) 니체가 제시하고 있는 기준은 단순한 건강함이 아니라 '근본적인(im Grunde)' 건강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건강성이 단지 표피적인 건강성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구분법의 배후에 보다 중요한 어떤 '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이러한 건강성(Gesundheit)의 개념은 순수성(Reinheit)을 낳고 불결한 것들에 대한 구역질(Ekel)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건강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결벽증과 구토증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일반적인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 건강한 것과 병적인 것, 순수한 것과 불결한 것의 기준은 전도된다:

"우리는 미래라는 나무에 둥지를 짓는다. 독수리들이 우리 고독한 자에게 그들의 부리로 먹이를 날라다 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 바람처럼 그들[불결한 자들] 위에서 살기를 바라는지! 독수리들의 이웃, 눈(Schnee)의 이웃, 태양의 이웃으로, 즉 강한 바람으로 살기를!"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77(번역: 람혼).

42) 결벽증의 언어. 이것은 물론 자기 변호와 자기정당화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들"의 결벽증에 대한 위반의 결벽증, 자신을 정상으로 규정 짓고 타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모든 종류의 배타적이고 규범적인 결벽증에 대한 그만큼의 '배타적인' 전복의 결벽증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순수성과 그로 인해 '발병한' 구역질은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진부한 명제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증명한다. 따라서 '어떻게(wie)'와 '무엇(was)'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부제(『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는 'Wie man wird, was man ist'이다)가 일견 이유를 묻는 '왜(warum)'라는 의문사를 갖는 일련의 '수사의문문'들로 변용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주지하다시피, 『이 사람을 보라』의 각 장을 이루는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왜 이토록 현명한가(Warum ich so weise bin)', '나는 왜 이토록 영리한가(Warum ich so klug bin)',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Warum ich so gute Bücher schreibe)'). 이는 어떤 동문서답이 아니라 '나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정상성의 자서전이 갖는 질문에 대해 구문론적인 차원에서 '무시'와 '거부'로써 응수하는 것, "그들"이 갖고 있는 소외와 배제의 원리를 상대화시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 Georges Canguilhem, Le normal et le pathologique
    Paris: PUF(coll. "Quadrige"), 1966.
▷ 조르쥬 깡길렘, 『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여인석 옮김), 인간사랑, 1996.

43)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규범이라는 개념의 논쟁적인 목적과 용법의 이유를 정상-비정상의 관계의 본질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는 모순이나 외재성의 관계가 아니라 역전과 극성의 관계가 중요하다. 규범은 자신과 대조하여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경시하며 자신으로부터 용어의 역전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규범은 다양성을 통합하고 차이를 흡수하며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가능한 양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시되는 것(se proposer)은 부과되는 것(s'imposer)이 아니다. 규범은 자연의 법칙과는 달리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규범이 결코 유일하고 단순한 의미를 지니지 않음을 말한다. 규범이 제공하는 준거와 해결의 가능성은 가능성만이 문제가 되므로, 역전이 가능한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포함한다. 사실 어떤 규범은 그것이 어떤 것에 대한 선호의 표현으로, 불만스러운 상태를 만족스러운 상태로 대체하려는 의지의 도구로서 확립되고 선택될 때만 준거의 가능성이 된다.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질서에 대한 모든 선호에는 있을 수 있는 역전된 질서에 대한 반감이 아주 암암리에 동반된다. [...] 솔직함은 위선보다 우위라는 윤리적 규범이 위선이 솔직함보다 우위라는 규범으로 역전될 수 있는 것처럼, 거짓에 대한 진실의 우위라는 논리적 규범은 진실에 대한 거짓의 우위라는 규범으로 역전될 수 있다. 논리적 규범의 역전은 논리적 규범이 아니지만 미학적 규범은 될 수 있다. 윤리적 규범의 역전이 윤리적 규범은 아니지만 정치적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요컨대 암시적이건 명시적이건 어떠한 형태 하에서 규범은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는 양극의 대립에 따라 현실을 가치에 비추어보고 질의 구별을 표현한다. 이러한 규범화/정상화(normalisation)의 경험, 즉 특별히 인류학적이거나 문화적인 [...] 경험의 극성을 고려하여 규범과 그 적용의 관계를 살펴보면 보통 위반(infraction)이 우선함을 확인할 수 있다."
ㅡ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원서 pp.177-178, 국역본 263-264쪽(번역 일부 수정).

▷ 서재에 앉아 있는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의 모습.

44) 그러므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하고 있는 전략은, 정상성의 자서전이 내표하고 있는 규범적 언어를 전복시키고 그 규범 안에 잠재되어 있던 다른 극성의 가능성을 새롭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서전에 대한 일종의 역전과 위반을 수행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자'로서의 광인은 바로 그 '이해받지 못함'이라는 성질로 인해 다른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타인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 혹은 선지자를 특징 짓는 성격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하는 일종의 '자기정당화'일 터:

"나의 인류애(Humanität)는 인간의 상태를 동정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가 인간을 동정한다는 사실을 참아내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나의 인류애는 지속적인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76(번역: 람혼).

45) 기대어 호소하지 않는, 굽실거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냉소의 재기를 발휘하고 있는 이 넘치는 자부심. '광인의 자서전'은 고립과 고독을 순수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서전 언어의 '정치성'의 획득한다. 다수에 의한 고립과 배제를 또 한 번의 고립과 배제를 통해 그 관계를 역으로 전복시키고 있는 이러한 시도는, 그러므로 정상성을 '약올리는' 행위이다. 정상성은 너무 '평범'하고 너무 '안전'하며 '웃음'이 아닌 '하품'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 안전성이란 존재에 대한 일종의 '배반'일 것. 비정상의 자서전에 있어서 그러한 안전성은 참을 수 없는 권태이며 타성에 젖은 억압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전도된 결벽성과 위반의 차별성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게 된 이후로 이 사람은 눈이 없고 저 사람은 귀가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은 다리가 없고 혀나 코 혹은 머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나에게 가장 사소한 일이다. / 나는 그보다 더 심한 것도 보고 있고 또 봐왔는데, 그 대부분은 그 각각을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 몇몇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것들이다. 즉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많이 갖고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없는 인간들,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아가리 또는 하나의 커다란 배 등 어떤 커다란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인간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들을 전도된 불구자(umgekehrte Krüppel)라고 부른다."
ㅡ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평학습판 전집 4권, pp.177-178(번역: 람혼).

  

▷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4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age].
▷ 프리드리히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 프리드리히 니체,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청하, 1984.

46) 저 '건강성'에 대한 논의는 이렇듯 '불구자'에 대한 규정을 전도시킴으로써 극에 달한다. 광기에 휩싸인 자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소위 '정상적인' 자는 "커다란 눈"밖에는 갖지 못한 사람이다. 어떤 쪽을 불구라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 정상성은 불구를 불구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드러내면서 고꾸라진다. 반대로 '근본적인' 건강함 속에서 질병은 오히려 그러한 건강함의 일부로 파악되는 것이다. 니체의 "눈병(Augenleiden)"은 이미 그것이 근본적인 건강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기에 보다 넓은 관점에서 그러한 건강성에 오히려ㅡ다분히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ㅡ'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눈병이 위험하게도 가끔씩 실명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결과일 뿐,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력이 회복될 때마다 시력도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5(번역: 람혼).

47) 그러므로 자신의 정당성과 위대함, 무엇보다도 '진실성'을 내세우는 저 '신용'이란 다시 말해 일종의 '외상(crédit)'이었다. 그러므로 니체의 신용이란 '자기 자신의' 것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일종의 '외상값'이다. 동시대의 불구자들이 결코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따라서 미래의 독자에 의해서 그 '채무'가 상환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미래의 외상인 것. '양심'이 일종의 외상값인 것처럼. 따라서 '어떤 특정한 경로를 따라' 양심은 피해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또한 그 '외상[값]'이란 어쩌면 하나의 '외상(Trauma)'이기도 하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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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Paris: Stock/IMEC, 1992.
▷ 루이 알튀세르,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

30) 알튀세르(Althusser)는 '자서전적 사법성'을 박탈당한 자서전 저자이다. 정신병 판정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살인죄에 대해서조차도 '자기만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그러므로 역으로 말해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죄'에 대해서조차 권리를 갖고 있는 것). 알튀세르의 '서명'이 저 '자서전의 규약'을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자서전과 서명이 맺고 있는 안정적인 '계약 관계'의 표면을 어지럽힌다. 실명(實名)의 저자와 그의 서명, 이것은 자서전의 진실성을 확보해주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장치이지만, 알튀세르는 그러한 자서전의 공간 밖에 있는 완전한 타자로서, 실명을 잃은 사람, 자신에 대한 서명의 권리를 잃은 금치산자, 결국 사회적 '실명(失明)'에 이른 저자로서 등장한다. 그는 논리적 언어와 일관성 있는 기억의 영역인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간주되는 사람, 따라서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사람, '저자 이전의' 저자로서 존재한다. 그 존재는 곧 '존재하는 부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실명(實名)이 실명(失明)되는 순간, 일견 안정적으로 보이던 자서전과 서명 사이의 계약 관계가 파기되고 무화될 수 있는 (불)가능성의 순간을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앞서 알튀세르에 대해 '자서전 글쓰기의 사법성을 잃어버린 저자'라고 말했던 것은 사실 '순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글쓰기의 사법권과 서명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시점으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의 자서전 쓰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의 자서전을 구성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광인으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남겨진 글쓰기의 전략은 무엇인가: 자신의 삶과 내면을 재구성하는 것(여기까지는 '정상적인' 자서전 저자의 전략과 결코 다르지 않은데), 그리고/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허구적 구성과 배치의 전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

31)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를 집필했던 시점은 1888년, 즉 그가 '발광'하기 1년 전이었다. 이 글은 마치 영원한 잠, 잔인한 침묵의 시기로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남겨진 유언장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평가는 '마지막 노래(Swan Song)'를 미친 듯이 써내려간 후 절명하고 마는 이상화된 낭만주의적 작가에 대한 감상에 넘친 은유나 찬사가 결코 아니다. 니체는 낭만주의적 한계 속에서도 낭만주의를 '초극'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저술에 대한 이러한 '정리' 작업 속에서, 들이치는 광기 속에서, 저자로서의 사법권을 움켜쥐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오히려 '방생'해버린다:

"나와 내 저서들은 별개의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98(번역: 람혼).

32) 나는 나고, 내 글은 내 글이다. 그렇다면 자서전 안에서 저자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이렇듯 방기해버리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와 나의 작품은 별개의 것이라고 무심한 듯, 그러나 '세련되게' 읊조리는 행위가 여전히 낭만주의적 태도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면, 같은 말을 조금은 거칠게, 그리고 그 자신도 결코 예외일 수 없는 자서전 바로 그 안에서 지극히 '메타적으로' 발설하는 행위는, 동시에 역으로 낭만주의를 넘어서려고 하는 기획에 다름 아닌 것. 니체는 자서전이라고 하는 것이 허구의 작업이며 재구성의 행위라는 사실을 우회를 통하지 않고서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저자와 작품 사이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환원적 소급으로서의 모든 해석 행위들을 직접적이고 퉁명스러운 일갈로 일축한다. 이는 자서전의 허구적 구성 행위를 은폐하는 또 다른 모든 허구적 장치들을 던져버리는 것, 자서전이라는 허구적 구성물의 성격을 단언의 형식을 통해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낭만주의의 한계 안에서 여전히 머무르기, 또는 그렇게 하는 척 하기,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 밖으로부터 치고 들어가기. 그는 곧 바로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이러이러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하지 말라!"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57(번역: 람혼).

33) 예언자의 어조에 대한 포착. 여기서 자신에 대한 혼동과 부정에 초점이 맞춰진 니체의 '경고'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정하기를 '짓궂게 기다렸던' 예수의 경고(신약, 요한복음, 18장 15-27절 참조)와는 그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이미 허구이기에, 또한 그 자신에 대한 글인 자서전 역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읽혀서는 안 된다. '이데아'에 대해 오히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하게 되는 가상의 '전도된 존재론':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니체를 만나면 니체를 죽이라는 것, 이는 곧 차라투스트라의 설법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정상의 자서전은 또한 붓다의 자서전, 달마의 자서전이기도 한 것. 자신의 죽음을 읊는, 그를 통해 또 다른 삶과 재생을 기록하는 자서전은, 그러므로 하나의 도정(道程)과도 같은 의미를 띠게 된다. 진실성을 진실성 자체의 담론 내부에서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면서 얻으려고 하는 이러한 전도된 진실성에의 시도는 광인의 자서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서술 방식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비정상의 자서전은, 정상인의 자서전이 취하곤 하는 '예의 바른' 겸손의 언어와 그를 통해 오히려 은밀한 방식으로 더욱 강하게 암시되고 있는 자부심의 어법을 거부함으로써, 자기 서술에 있어서 하나의 '낯선' 형식, 보다 더 '내면적인' 자서전의 형식을 발견한다. 그 형식과 어조는 직접적인 할(喝)의 그것, 예언자 혹은 신비주의자의 그것이 된다.

34) 자서전의 저자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자서전의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동일성도 완전한 타자성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또한 자신을 '대상화'해야 하므로 일종의 '대리인'이라는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중성을 갖는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ecce homo)!"(신약, 요한복음, 19장 5절) 그러나 이 '명대사'가 예수의 것이 아니라 빌라도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또 다시 자서전의 저자는 법적 '대리인'일 수밖에 없는 것, 그는 '경계선을 걷는 자'로서의 저자이며, 예수이자 동시에 빌라도인 것.

   

▷ Chateaubriand, Mémoires d'outre-tombe, tome 1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51.
▷ Chateaubriand, Mémoires d'outre-tombe, tome 2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51.

35) 그러나 또한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사회 제도 안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알튀세르의 자서전 쓰기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경계선 위에 위치한다. 아찔하게, 위험한 곡예를 하며. 말하자면, 그는 아직 한 번도 무덤으로 간 적이 없는, 하지만 동시에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온 저자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이러한 '무덤의 글쓰기' 앞에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저 '무덤'은 문제조차 되지 않는 것. 알튀세르가 자신의 자서전을 서술하고 있는 환경은 처절한 느낌이 들 만큼 독특하고 고독하다. 심지어 니체의 자서전이 결정적인 '발광' 이전의 것인 반면,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금치산자 선고를 받은 이후 10여 년이 흐른 뒤에 나온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자기 변호와 자기정당화라는 자서전의 기본적 구성 요소를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고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서전 안에서의 서명과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첨예한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의 자서전 중에서도 특히나 두 번째 장은 프랑스의 형법 제도 안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은 피고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세밀하게 서술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기까지 하다(원서 pp.14-25, 국역본 28-40쪽 참조, 여기서 알튀세르가 취하는 입장은 다분히 푸코(Foucault)의 저 『광기의 역사』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다). 특히 자신의 아내를 정신착란 상태에서 교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인 첫 번째 장(원서 pp.11-13, 국역본 25-27쪽)은 그 몽환적이고도 차갑도록 담담한 어조로 인해 섬뜩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알튀세르는 그러한 '눈먼' 살해의 원인을 어머니가 자신의 자살 충동을 알튀세르로 하여금 대리 수행하게 한 것의 전이로 분석하면서, 전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신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 재배열시키는 자서전 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내게 루이(Louis)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루이, 무척이나 오랫동안 내가 문자 그대로 혐오했던 이름이다. 나는 모음이 단 하나뿐인 이 이름이 너무 짧다고 여겼으며 마지막 모음 'i'의 그 날카로운 음조는 나를 찔러대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름은 나 대신 너무 쉽게 '위(oui)'라고 말했으며, 나는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위'인 그 '위'에 대해 반발했다. 그리고 특히 그 이름은 3인칭 대명사인 '뤼(lui)'를 말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제3자를 부르는 것처럼 울림으로써 나 자신의 모든 고유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내 등 뒤에 있는 그 남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뤼(lui), 그것은 곧 루이(Louis)였으며, 나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나의 삼촌이지 내가 아니었다. / 이 이름은 나의 아버지가 베르덩 하늘에서 죽은 자기 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원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나의 어머니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사랑했던 그 루이를 기리기 위해 그녀 자신이 원했던 것이다."
ㅡ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원서 pp.33-34, 국역본 49-50쪽(번역은 국역본의 것).

36) 이 문장을 읽을 때면 이상하게도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원래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알튀세르의 삼촌의 약혼자였지만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어떤 막연한 책임감과 순수한 사랑이 섞여 있는 감정 속에서 나중에 자서전의 저자 루이의 아버지가 될 죽은 '루이'의 형 샤를 알튀세르는 그녀에게 청혼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에 관한 이 일화는 알튀세르로 하여금 자서전을 쓰게끔 만들었던 현실적 박탈의 경험과 겹쳐진다. 'oui'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욕망이 투영된 'Louis'라는 이름의 내 존재. '나'는 그러한 어머니의 욕망(자살의 충동)에 의해서 아내를 교살하고(그러므로 아내 엘렌은 곧 그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 마치 3인칭 대명사 '뤼(lui)'가 '나'의 고유한 인격과 사법적 권리를 박탈했던 것처럼 '나'는 금치산자라는 선고 속에서 '내' 자신의 욕망과 권리로는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분석은 정신분석적으로 너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구조를 갖는 것이기에 나로 하여금 이 자서전의 구성과 해석 방식이 지극히 '인위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알튀세르가 '생전에' 유지했던 정신분석과의 저 긴밀한 관계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인위성과 주관성은 '말할 수 없는 자'의 말을 가능케 해주는 핵심적인 전략에 다름 아니다.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 저자의 자서전이 원칙적으로 진실성에 대한 보장을 결여하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알튀세르는 자신의 삶을 특정한 강박의 결과물로서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의도적으로' 밝힘으로써 표면적인 진실성과는 다른 종류의 '진실성'에 가닿는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나의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들었던 모든 정서적 감정상태들의 충격이다."
ㅡ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원서 p.25, 국역본 40쪽(번역은 국역본의 것).

37)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란 결국 만들어진 존재, 따라서 허구 혹은 가상의 존재이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텍스트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상과 비정상을 넘어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러나 대부분 그 작용을 은폐하고자 하는 '허구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그는 독자에 대해서 오히려 '솔직할' 수 있는 것이며 '광인의 자서전'에만 고유한 특유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서전 저자로서의 법적 자격이 박탈된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글쓰기의 권리, 역설적으로 그것은 진실에의 권리가 아니라 '거짓에의 권리', 허구와 가상에의 권리인 것. 따라서 자서전이 반드시 진실성을 담지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이 텍스트는 '자서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텍스트는 오히려 온전한 '자서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표면적인 진실성을 부정하는 허구의 권리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가 필요했었다면, 그에게는 같은 강도로 반대 방향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위반의 언어'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것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자신의 '진술'로써 비로소 '자서전'이 되는 것,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불가능'의 자서전이 된다(이러한 자서전에 대한 '부정성'의 규정은 오히려 알튀세르가 그 스스로 루소의 『고백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 파이프를 물고 있는, 말년의 알튀세르(Althusser).

38) 그러나 내가 앞의 인용문 안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정서적 감정상태들의 충격(l'impact des affects émotifs)"이라는 구절인데, 이는 자서전이 재구성과 사후(事後) 분석의 언어라는 일반적인 규정을 넘어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이 결국 '내면에 대한 언어'이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사후(事後)에 서술될 수밖에 없는 자서전,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건과 기억들이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 자서전은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곧 사후(死後)에 씌어지는 자서전, 그래서 결국 재구성이라는 작업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전략을 취하는 '내면의 자서전'이 된다. 곧 비정상의 자서전이 정상성의 자서전에 대한 '위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어화될 수 있는 외적 경험의 나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인'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의 경험에 대한 서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허구를 감추는 허구'의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허구를 드러내는 허구'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

39) 이렇게 하여 '광인의 자서전' 속에서 취해지는 허구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변호의 언어이며 정당화의 문법을 갖지만 동시에 그 구성의 '허구성' 자체를 드러내는 허구라는 점에서 단순한 변명이 아닌 '위반'의 성격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알튀세르의 자기 변호는 정상성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는 사회적 제도들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기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와 저자의 서명이 갖는 사법적 권리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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