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Paris: Stock/IMEC, 1992.
▷ 루이 알튀세르,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

30) 알튀세르(Althusser)는 '자서전적 사법성'을 박탈당한 자서전 저자이다. 정신병 판정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살인죄에 대해서조차도 '자기만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그러므로 역으로 말해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죄'에 대해서조차 권리를 갖고 있는 것). 알튀세르의 '서명'이 저 '자서전의 규약'을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자서전과 서명이 맺고 있는 안정적인 '계약 관계'의 표면을 어지럽힌다. 실명(實名)의 저자와 그의 서명, 이것은 자서전의 진실성을 확보해주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장치이지만, 알튀세르는 그러한 자서전의 공간 밖에 있는 완전한 타자로서, 실명을 잃은 사람, 자신에 대한 서명의 권리를 잃은 금치산자, 결국 사회적 '실명(失明)'에 이른 저자로서 등장한다. 그는 논리적 언어와 일관성 있는 기억의 영역인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간주되는 사람, 따라서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사람, '저자 이전의' 저자로서 존재한다. 그 존재는 곧 '존재하는 부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실명(實名)이 실명(失明)되는 순간, 일견 안정적으로 보이던 자서전과 서명 사이의 계약 관계가 파기되고 무화될 수 있는 (불)가능성의 순간을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앞서 알튀세르에 대해 '자서전 글쓰기의 사법성을 잃어버린 저자'라고 말했던 것은 사실 '순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글쓰기의 사법권과 서명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시점으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의 자서전 쓰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의 자서전을 구성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광인으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남겨진 글쓰기의 전략은 무엇인가: 자신의 삶과 내면을 재구성하는 것(여기까지는 '정상적인' 자서전 저자의 전략과 결코 다르지 않은데), 그리고/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허구적 구성과 배치의 전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

31)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를 집필했던 시점은 1888년, 즉 그가 '발광'하기 1년 전이었다. 이 글은 마치 영원한 잠, 잔인한 침묵의 시기로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남겨진 유언장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평가는 '마지막 노래(Swan Song)'를 미친 듯이 써내려간 후 절명하고 마는 이상화된 낭만주의적 작가에 대한 감상에 넘친 은유나 찬사가 결코 아니다. 니체는 낭만주의적 한계 속에서도 낭만주의를 '초극'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저술에 대한 이러한 '정리' 작업 속에서, 들이치는 광기 속에서, 저자로서의 사법권을 움켜쥐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오히려 '방생'해버린다:

"나와 내 저서들은 별개의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98(번역: 람혼).

32) 나는 나고, 내 글은 내 글이다. 그렇다면 자서전 안에서 저자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이렇듯 방기해버리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와 나의 작품은 별개의 것이라고 무심한 듯, 그러나 '세련되게' 읊조리는 행위가 여전히 낭만주의적 태도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면, 같은 말을 조금은 거칠게, 그리고 그 자신도 결코 예외일 수 없는 자서전 바로 그 안에서 지극히 '메타적으로' 발설하는 행위는, 동시에 역으로 낭만주의를 넘어서려고 하는 기획에 다름 아닌 것. 니체는 자서전이라고 하는 것이 허구의 작업이며 재구성의 행위라는 사실을 우회를 통하지 않고서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저자와 작품 사이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환원적 소급으로서의 모든 해석 행위들을 직접적이고 퉁명스러운 일갈로 일축한다. 이는 자서전의 허구적 구성 행위를 은폐하는 또 다른 모든 허구적 장치들을 던져버리는 것, 자서전이라는 허구적 구성물의 성격을 단언의 형식을 통해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낭만주의의 한계 안에서 여전히 머무르기, 또는 그렇게 하는 척 하기,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 밖으로부터 치고 들어가기. 그는 곧 바로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이러이러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하지 말라!"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57(번역: 람혼).

33) 예언자의 어조에 대한 포착. 여기서 자신에 대한 혼동과 부정에 초점이 맞춰진 니체의 '경고'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정하기를 '짓궂게 기다렸던' 예수의 경고(신약, 요한복음, 18장 15-27절 참조)와는 그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이미 허구이기에, 또한 그 자신에 대한 글인 자서전 역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읽혀서는 안 된다. '이데아'에 대해 오히려 존재론적 우위를 점하게 되는 가상의 '전도된 존재론':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니체를 만나면 니체를 죽이라는 것, 이는 곧 차라투스트라의 설법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정상의 자서전은 또한 붓다의 자서전, 달마의 자서전이기도 한 것. 자신의 죽음을 읊는, 그를 통해 또 다른 삶과 재생을 기록하는 자서전은, 그러므로 하나의 도정(道程)과도 같은 의미를 띠게 된다. 진실성을 진실성 자체의 담론 내부에서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면서 얻으려고 하는 이러한 전도된 진실성에의 시도는 광인의 자서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서술 방식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비정상의 자서전은, 정상인의 자서전이 취하곤 하는 '예의 바른' 겸손의 언어와 그를 통해 오히려 은밀한 방식으로 더욱 강하게 암시되고 있는 자부심의 어법을 거부함으로써, 자기 서술에 있어서 하나의 '낯선' 형식, 보다 더 '내면적인' 자서전의 형식을 발견한다. 그 형식과 어조는 직접적인 할(喝)의 그것, 예언자 혹은 신비주의자의 그것이 된다.

34) 자서전의 저자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자서전의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동일성도 완전한 타자성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또한 자신을 '대상화'해야 하므로 일종의 '대리인'이라는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중성을 갖는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ecce homo)!"(신약, 요한복음, 19장 5절) 그러나 이 '명대사'가 예수의 것이 아니라 빌라도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또 다시 자서전의 저자는 법적 '대리인'일 수밖에 없는 것, 그는 '경계선을 걷는 자'로서의 저자이며, 예수이자 동시에 빌라도인 것.

   

▷ Chateaubriand, Mémoires d'outre-tombe, tome 1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51.
▷ Chateaubriand, Mémoires d'outre-tombe, tome 2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51.

35) 그러나 또한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사회 제도 안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알튀세르의 자서전 쓰기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경계선 위에 위치한다. 아찔하게, 위험한 곡예를 하며. 말하자면, 그는 아직 한 번도 무덤으로 간 적이 없는, 하지만 동시에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온 저자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이러한 '무덤의 글쓰기' 앞에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저 '무덤'은 문제조차 되지 않는 것. 알튀세르가 자신의 자서전을 서술하고 있는 환경은 처절한 느낌이 들 만큼 독특하고 고독하다. 심지어 니체의 자서전이 결정적인 '발광' 이전의 것인 반면,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금치산자 선고를 받은 이후 10여 년이 흐른 뒤에 나온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자기 변호와 자기정당화라는 자서전의 기본적 구성 요소를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고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서전 안에서의 서명과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첨예한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의 자서전 중에서도 특히나 두 번째 장은 프랑스의 형법 제도 안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은 피고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세밀하게 서술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기까지 하다(원서 pp.14-25, 국역본 28-40쪽 참조, 여기서 알튀세르가 취하는 입장은 다분히 푸코(Foucault)의 저 『광기의 역사』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다). 특히 자신의 아내를 정신착란 상태에서 교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인 첫 번째 장(원서 pp.11-13, 국역본 25-27쪽)은 그 몽환적이고도 차갑도록 담담한 어조로 인해 섬뜩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알튀세르는 그러한 '눈먼' 살해의 원인을 어머니가 자신의 자살 충동을 알튀세르로 하여금 대리 수행하게 한 것의 전이로 분석하면서, 전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신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 재배열시키는 자서전 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내게 루이(Louis)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루이, 무척이나 오랫동안 내가 문자 그대로 혐오했던 이름이다. 나는 모음이 단 하나뿐인 이 이름이 너무 짧다고 여겼으며 마지막 모음 'i'의 그 날카로운 음조는 나를 찔러대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름은 나 대신 너무 쉽게 '위(oui)'라고 말했으며, 나는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위'인 그 '위'에 대해 반발했다. 그리고 특히 그 이름은 3인칭 대명사인 '뤼(lui)'를 말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제3자를 부르는 것처럼 울림으로써 나 자신의 모든 고유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내 등 뒤에 있는 그 남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뤼(lui), 그것은 곧 루이(Louis)였으며, 나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나의 삼촌이지 내가 아니었다. / 이 이름은 나의 아버지가 베르덩 하늘에서 죽은 자기 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원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나의 어머니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사랑했던 그 루이를 기리기 위해 그녀 자신이 원했던 것이다."
ㅡ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원서 pp.33-34, 국역본 49-50쪽(번역은 국역본의 것).

36) 이 문장을 읽을 때면 이상하게도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원래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알튀세르의 삼촌의 약혼자였지만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어떤 막연한 책임감과 순수한 사랑이 섞여 있는 감정 속에서 나중에 자서전의 저자 루이의 아버지가 될 죽은 '루이'의 형 샤를 알튀세르는 그녀에게 청혼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에 관한 이 일화는 알튀세르로 하여금 자서전을 쓰게끔 만들었던 현실적 박탈의 경험과 겹쳐진다. 'oui'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욕망이 투영된 'Louis'라는 이름의 내 존재. '나'는 그러한 어머니의 욕망(자살의 충동)에 의해서 아내를 교살하고(그러므로 아내 엘렌은 곧 그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 마치 3인칭 대명사 '뤼(lui)'가 '나'의 고유한 인격과 사법적 권리를 박탈했던 것처럼 '나'는 금치산자라는 선고 속에서 '내' 자신의 욕망과 권리로는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분석은 정신분석적으로 너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구조를 갖는 것이기에 나로 하여금 이 자서전의 구성과 해석 방식이 지극히 '인위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알튀세르가 '생전에' 유지했던 정신분석과의 저 긴밀한 관계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인위성과 주관성은 '말할 수 없는 자'의 말을 가능케 해주는 핵심적인 전략에 다름 아니다.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 저자의 자서전이 원칙적으로 진실성에 대한 보장을 결여하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알튀세르는 자신의 삶을 특정한 강박의 결과물로서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의도적으로' 밝힘으로써 표면적인 진실성과는 다른 종류의 '진실성'에 가닿는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나의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들었던 모든 정서적 감정상태들의 충격이다."
ㅡ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원서 p.25, 국역본 40쪽(번역은 국역본의 것).

37)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란 결국 만들어진 존재, 따라서 허구 혹은 가상의 존재이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텍스트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상과 비정상을 넘어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러나 대부분 그 작용을 은폐하고자 하는 '허구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그는 독자에 대해서 오히려 '솔직할' 수 있는 것이며 '광인의 자서전'에만 고유한 특유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서전 저자로서의 법적 자격이 박탈된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글쓰기의 권리, 역설적으로 그것은 진실에의 권리가 아니라 '거짓에의 권리', 허구와 가상에의 권리인 것. 따라서 자서전이 반드시 진실성을 담지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이 텍스트는 '자서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텍스트는 오히려 온전한 '자서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표면적인 진실성을 부정하는 허구의 권리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가 필요했었다면, 그에게는 같은 강도로 반대 방향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위반의 언어'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것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자신의 '진술'로써 비로소 '자서전'이 되는 것,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불가능'의 자서전이 된다(이러한 자서전에 대한 '부정성'의 규정은 오히려 알튀세르가 그 스스로 루소의 『고백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 파이프를 물고 있는, 말년의 알튀세르(Althusser).

38) 그러나 내가 앞의 인용문 안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정서적 감정상태들의 충격(l'impact des affects émotifs)"이라는 구절인데, 이는 자서전이 재구성과 사후(事後) 분석의 언어라는 일반적인 규정을 넘어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이 결국 '내면에 대한 언어'이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사후(事後)에 서술될 수밖에 없는 자서전,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건과 기억들이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 자서전은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곧 사후(死後)에 씌어지는 자서전, 그래서 결국 재구성이라는 작업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전략을 취하는 '내면의 자서전'이 된다. 곧 비정상의 자서전이 정상성의 자서전에 대한 '위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어화될 수 있는 외적 경험의 나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인'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의 경험에 대한 서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허구를 감추는 허구'의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허구를 드러내는 허구'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

39) 이렇게 하여 '광인의 자서전' 속에서 취해지는 허구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변호의 언어이며 정당화의 문법을 갖지만 동시에 그 구성의 '허구성' 자체를 드러내는 허구라는 점에서 단순한 변명이 아닌 '위반'의 성격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알튀세르의 자기 변호는 정상성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는 사회적 제도들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기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와 저자의 서명이 갖는 사법적 권리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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