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애쉬즈 투 애쉬즈>의 포스터를 위한 사진(사진: 정형우).
1) 올해 내가 작곡한 세 번째 음악은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연극 <애쉬즈 투 애쉬즈(Ashes to Ashes)>를 위한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전통적인 조성 형식을 사용하면서 연극의 앞을 열고 뒤를 닫는 두 개의 짧은 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가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첼로 협주곡이 지닌 파열과 치유의 느낌에 대한 '절제된' 재-전유(re-appropriation), 그리고 피에르 앙리(Pierre Henry)의 구체 음악과 존 케이지(John Cage)의 피아노 음악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어떤 '정서적' 결합/동거(co-habitation)였다.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작곡은 하나의 심상(心像)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단, 그러한 심상과 그림이 비단 시각적인 것'만으로' 해소/소급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첨언하고 싶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일단 '공감각'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느끼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감각보다는 감각의 '묶음'이, '여러 개의' 단일한 감각들보다는 '하나의' 공감각이 먼저 주어진다는 점이다. 단, '심상'이라고는 해도 그것이 딱히 '심리[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아니,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심리주의적인 것을 넘어서는 곳에 작곡의 요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또는, 시작은 '현상학적으로' 미약했으나 끝은 '[反-]미학적으로' 창대해야 하지 않을까, '어설픈' 작곡가로서의 나는, 일단은 일종의 '부정어법'과 '패러디'를 사용하여, 그렇게 생각해오고 있다. 말하자면 이는 일종의 '형식주의'인 것. 그런데 이러한 '형식주의'는 또 다른 형식주의와 섬세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일화를 예로 들자면, 지난 달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유명한' 작곡가를 만나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대뜸 그가 먼저 꺼낸 이야기는, 베토벤(Beethoven)의 음악을 공부하고 분석해봤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에겐 이른바 '3B(Bach-Beethoven-Brahms)'의 작품들이 음악의 요체이자 궁극이었던 셈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나는 '쇤베르크의 음악은 결국 바흐로 귀착된다'라든가 '베토벤의 음악은 그 자체로 음악의 완성이다'라든가, 또는 '음악의 분석은 <푸가의 기법>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하는 따위의, 기원과 궁극에 관한 담론들에 대해서 이견(異見)을 달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옳은'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러한 '옳은' 주장에 대해 거의 항상 '체질적으로' 그리고 '생리적으로' 일종의 구토 증세를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그러한 궁극과 기원을 일종의 '절정'이자 '절대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왜 [아직까지도] 작곡을 하고 있는 겁니까?
▷ <애쉬즈 투 애쉬즈>의 두 배우, 한명구와 김호정(사진: 정형우).
2)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해 말하기, 혹은 아예 말하지 않기. 최근 부쩍 '다시금' [이론적] 주목을 받고 있는 홀로코스트와 그에 대한 여러 담론들에 대해 지젝(Žižek)이 말하고 있듯이ㅡ그런데 바로 지젝 그 스스로가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역으로' 흥미로운 사실일 텐데ㅡ,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론적' 질문은 사회적 변화들(social changes)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안정성(stability)과 영속성(permanence)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곧, 기독교는 어떻게 자본주의의 번성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나, 또는, 반유대주의는 어떻게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가(지젝 外 편집, 『신학과 정치적인 것: 새로운 논쟁(Theology and the Political: the New Debate)』, p.57 참조). 이 연극을 관극 내내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극장 문을 나서면서 이것이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불륜'의 이야기 속에서 '녹여낸' 것이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설명을 전해 듣고는 마치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구슬들이 단숨에 한 줄로 엮여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는 한 관객의 일화를 곱씹어본다. 꼭 이 일화만큼, 꼭 그만큼이나 '교과서적인' 하나의 물음이 오롯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서사(narrative)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수줍게' 제안하는 하나의 '독법(讀法/毒法)'은, 서사의 구조와 진행을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알레테이아(αληθεια)로 바라보라는 것. 곧, 연극 안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정의상 서로 닿거나 만나지지 않는, 두 개의 평행선이 존재한다. 그 두 평행선은 극의 진행상 데블린(Devlin)과 관객이 공유하는 어떤 것이며, 또한 극의 구조상 레베카(Rebecca)의 언어가 만들어낸 궤적을 따라가는 선이기도 하다. 그 둘ㅡ혹은 셋ㅡ은 서로를 '보충'하며 전체적인 서사를 추동한다. 갈등의 봉합이라는 결말이 아니라 파국에의 초대에까지 이르는 어떤 시작을 향해. 말하자면, 홀로코스트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현상의 자격으로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개인사' 안에서, 하나의 '일상' 안에서, 세 개의 극적인 선과 두 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대화 안에서, 여전히 끈질기게 '잔존(殘存)'하고 있는 것이기에ㅡ그러나 이 '잔존'이란 단어는 '멸절(滅絶)'을 전제하거나 목표로 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ㅡ여전히 '문제적'인 문제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 이 연극이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어쩌면 이러한 '간극'일 터.
▷ 해롤드 핀터, 『 해롤드 핀터 전집 9 』(오경심 옮김), 평민사, 2002.
▷ C. Davis, J. Milbank, S. Žižek(eds.), Theology and the Political: the New Debate,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5.
3) 역시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항상 번역과 연출의 선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번역자와 드라마투르그가 해야 할 일은ㅡ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으로ㅡ'적절한' 대사의 창출과 안착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명제는 몇 번이나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가장 기초적인 사항일 텐데, 번역자가 '무모한' 고집을 피울 때 극의 언어는 실종된다. 분명 말은 말인데, '들리지 않는' 말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번역극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문제이자 한계일 텐데, 이러한 병증에는 시간만이 능사가 아닌 모양이다. 기존의 번역본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 번역한 대본을 사용했지만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출의 언어 또한 너무도 쉽게 '현실의 공간'을 포기해버릴 때 그 발언의 공간이 확장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되는 '기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고도로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형식은 어쩌면 가장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더욱 증폭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도 연출의 언어야말로 바로 이러한 하나의 '역설'에 대해 언제나 더욱 깊이 사유해야 하는 언어의 형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모든 것이 만족되고 충족되기에는, 연극이라는 좁은 무대가 너무나도 넓다. 상연은 4월 27일까지, 산울림 소극장에서.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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