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니체의 초상.

40) 그런데 이러한 '본질적인' 의문, 이러한 '반격'과 관련하여 니체의 전략은 보다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가 취하고 있는 '자서전'의 전략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분법을 오히려 역으로 도치시키고 전도시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에 있어서 핵심적인 술어가 되는 것은 바로 정신적인 '건강'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광인의 자서전'이 계속하여 이러한 '건강성'의 개념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스스로를 통제한다. 나는 내 자신을 다시 건강하게 만든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은ㅡ모든 생리학자들이 인정할 것이겠지만ㅡ 근본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병약한 생명은 건강하게 될 수도 없거니와 스스로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는 더 더욱 없다. [그러나]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는 반대로 병적인 것이 오히려 삶에, 더 큰 삶에 하나의 활동적인 자극제(Stimulans)가 되어주는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6(번역: 람혼).

41) 니체가 제시하고 있는 기준은 단순한 건강함이 아니라 '근본적인(im Grunde)' 건강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건강성이 단지 표피적인 건강성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구분법의 배후에 보다 중요한 어떤 '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이러한 건강성(Gesundheit)의 개념은 순수성(Reinheit)을 낳고 불결한 것들에 대한 구역질(Ekel)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건강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결벽증과 구토증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일반적인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 건강한 것과 병적인 것, 순수한 것과 불결한 것의 기준은 전도된다:

"우리는 미래라는 나무에 둥지를 짓는다. 독수리들이 우리 고독한 자에게 그들의 부리로 먹이를 날라다 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 바람처럼 그들[불결한 자들] 위에서 살기를 바라는지! 독수리들의 이웃, 눈(Schnee)의 이웃, 태양의 이웃으로, 즉 강한 바람으로 살기를!"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77(번역: 람혼).

42) 결벽증의 언어. 이것은 물론 자기 변호와 자기정당화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들"의 결벽증에 대한 위반의 결벽증, 자신을 정상으로 규정 짓고 타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모든 종류의 배타적이고 규범적인 결벽증에 대한 그만큼의 '배타적인' 전복의 결벽증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순수성과 그로 인해 '발병한' 구역질은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진부한 명제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증명한다. 따라서 '어떻게(wie)'와 '무엇(was)'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부제(『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는 'Wie man wird, was man ist'이다)가 일견 이유를 묻는 '왜(warum)'라는 의문사를 갖는 일련의 '수사의문문'들로 변용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주지하다시피, 『이 사람을 보라』의 각 장을 이루는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왜 이토록 현명한가(Warum ich so weise bin)', '나는 왜 이토록 영리한가(Warum ich so klug bin)',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Warum ich so gute Bücher schreibe)'). 이는 어떤 동문서답이 아니라 '나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정상성의 자서전이 갖는 질문에 대해 구문론적인 차원에서 '무시'와 '거부'로써 응수하는 것, "그들"이 갖고 있는 소외와 배제의 원리를 상대화시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 Georges Canguilhem, Le normal et le pathologique
    Paris: PUF(coll. "Quadrige"), 1966.
▷ 조르쥬 깡길렘, 『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여인석 옮김), 인간사랑, 1996.

43)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규범이라는 개념의 논쟁적인 목적과 용법의 이유를 정상-비정상의 관계의 본질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는 모순이나 외재성의 관계가 아니라 역전과 극성의 관계가 중요하다. 규범은 자신과 대조하여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경시하며 자신으로부터 용어의 역전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규범은 다양성을 통합하고 차이를 흡수하며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가능한 양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시되는 것(se proposer)은 부과되는 것(s'imposer)이 아니다. 규범은 자연의 법칙과는 달리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규범이 결코 유일하고 단순한 의미를 지니지 않음을 말한다. 규범이 제공하는 준거와 해결의 가능성은 가능성만이 문제가 되므로, 역전이 가능한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포함한다. 사실 어떤 규범은 그것이 어떤 것에 대한 선호의 표현으로, 불만스러운 상태를 만족스러운 상태로 대체하려는 의지의 도구로서 확립되고 선택될 때만 준거의 가능성이 된다.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질서에 대한 모든 선호에는 있을 수 있는 역전된 질서에 대한 반감이 아주 암암리에 동반된다. [...] 솔직함은 위선보다 우위라는 윤리적 규범이 위선이 솔직함보다 우위라는 규범으로 역전될 수 있는 것처럼, 거짓에 대한 진실의 우위라는 논리적 규범은 진실에 대한 거짓의 우위라는 규범으로 역전될 수 있다. 논리적 규범의 역전은 논리적 규범이 아니지만 미학적 규범은 될 수 있다. 윤리적 규범의 역전이 윤리적 규범은 아니지만 정치적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요컨대 암시적이건 명시적이건 어떠한 형태 하에서 규범은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는 양극의 대립에 따라 현실을 가치에 비추어보고 질의 구별을 표현한다. 이러한 규범화/정상화(normalisation)의 경험, 즉 특별히 인류학적이거나 문화적인 [...] 경험의 극성을 고려하여 규범과 그 적용의 관계를 살펴보면 보통 위반(infraction)이 우선함을 확인할 수 있다."
ㅡ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원서 pp.177-178, 국역본 263-264쪽(번역 일부 수정).

▷ 서재에 앉아 있는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의 모습.

44) 그러므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하고 있는 전략은, 정상성의 자서전이 내표하고 있는 규범적 언어를 전복시키고 그 규범 안에 잠재되어 있던 다른 극성의 가능성을 새롭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서전에 대한 일종의 역전과 위반을 수행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자'로서의 광인은 바로 그 '이해받지 못함'이라는 성질로 인해 다른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타인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 혹은 선지자를 특징 짓는 성격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하는 일종의 '자기정당화'일 터:

"나의 인류애(Humanität)는 인간의 상태를 동정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가 인간을 동정한다는 사실을 참아내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나의 인류애는 지속적인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76(번역: 람혼).

45) 기대어 호소하지 않는, 굽실거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냉소의 재기를 발휘하고 있는 이 넘치는 자부심. '광인의 자서전'은 고립과 고독을 순수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서전 언어의 '정치성'의 획득한다. 다수에 의한 고립과 배제를 또 한 번의 고립과 배제를 통해 그 관계를 역으로 전복시키고 있는 이러한 시도는, 그러므로 정상성을 '약올리는' 행위이다. 정상성은 너무 '평범'하고 너무 '안전'하며 '웃음'이 아닌 '하품'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 안전성이란 존재에 대한 일종의 '배반'일 것. 비정상의 자서전에 있어서 그러한 안전성은 참을 수 없는 권태이며 타성에 젖은 억압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전도된 결벽성과 위반의 차별성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게 된 이후로 이 사람은 눈이 없고 저 사람은 귀가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은 다리가 없고 혀나 코 혹은 머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나에게 가장 사소한 일이다. / 나는 그보다 더 심한 것도 보고 있고 또 봐왔는데, 그 대부분은 그 각각을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 몇몇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것들이다. 즉 한 가지만을 지나치게 많이 갖고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없는 인간들,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아가리 또는 하나의 커다란 배 등 어떤 커다란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인간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들을 전도된 불구자(umgekehrte Krüppel)라고 부른다."
ㅡ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평학습판 전집 4권, pp.177-178(번역: 람혼).

  

▷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4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age].
▷ 프리드리히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 프리드리히 니체,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청하, 1984.

46) 저 '건강성'에 대한 논의는 이렇듯 '불구자'에 대한 규정을 전도시킴으로써 극에 달한다. 광기에 휩싸인 자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소위 '정상적인' 자는 "커다란 눈"밖에는 갖지 못한 사람이다. 어떤 쪽을 불구라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 정상성은 불구를 불구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드러내면서 고꾸라진다. 반대로 '근본적인' 건강함 속에서 질병은 오히려 그러한 건강함의 일부로 파악되는 것이다. 니체의 "눈병(Augenleiden)"은 이미 그것이 근본적인 건강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기에 보다 넓은 관점에서 그러한 건강성에 오히려ㅡ다분히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ㅡ'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눈병이 위험하게도 가끔씩 실명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결과일 뿐,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력이 회복될 때마다 시력도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5(번역: 람혼).

47) 그러므로 자신의 정당성과 위대함, 무엇보다도 '진실성'을 내세우는 저 '신용'이란 다시 말해 일종의 '외상(crédit)'이었다. 그러므로 니체의 신용이란 '자기 자신의' 것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일종의 '외상값'이다. 동시대의 불구자들이 결코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따라서 미래의 독자에 의해서 그 '채무'가 상환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미래의 외상인 것. '양심'이 일종의 외상값인 것처럼. 따라서 '어떤 특정한 경로를 따라' 양심은 피해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또한 그 '외상[값]'이란 어쩌면 하나의 '외상(Trauma)'이기도 하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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