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를레앙(Orléans)에서 마들렌 샵살(Madeleine Chapsal)과 대담하는 바타이유(Bataille). 죽기 1년 전인 1961년의 모습이다. 

48) 그렇다면 니체(Nietzsche)의 이러한 '외상'은 비뚤어진 또 다른 '엘리트주의', 니체 자신이 그렇게 비난해마지 않았던 저 '기독교적' 원한(ressentiment)의 감정으로 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그 자체로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희들을 찾으라고. 그리고 너희가 나를 모두 부정했을 때(wenn ihr mich Alle verleugnet habt)야 비로소 나는 너희들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1(번역: 람혼).

49) 이 외침 속에는 두 가지 종교의 '명대사'가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곧, '나를 버려라', '나를 만나면 나를 죽여라'라고 하는 대사, 그리고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라고 하는 대사가 바로 그것. 그러므로 이러한 '부정'은 일련의 '긍정'의 시련을 거친 후에 도달할 수 있는 부정, 즉물적인 부정을 넘어선, 또한 변증법적인 부정을 넘어선 부정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비정상의 자서전은 '달마'의 자서전이 되고 '예수'의 자서전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니체가 기독교적 원한 또는 정상성의 어법과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죄의식'의 부정, 그리고 '회심(回心)의 내러티브'에 대한 거부에 있다:

"그는 '불행(Unglück)'도 '죄(Schuld)'도 믿지 않는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7(번역: 람혼).

50) 어떻게 하면 죄의식(Schuldbewußtsein)과 결별할 수 있을까. 니체는 '회개'의 주제를 의도적으로 제거시킴으로써 '회심의 자서전'이라고 하는 정상적 자서전의 문법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 죄의식과 그로 인한 회심이 정상성의 자서전 안에서 주인공이 겪는 어떤 '성장'의 구조를 구성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 그러한 회개와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서전 안에서 어떤 극적인 반전과 깨달음이 성장의 전개 과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서전을 시작할 때부터 그 전도된 문법 안에서 회심의 전개 구조는 거부되고 부정되고 전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궁극적으로 죄의식의 부정, 원죄라는 개념에 대한 위반이다(니체의 글이 지닌 이러한 '회심의 구조'에 대한 거부는 특히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록』과 대조하였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의 건강한 "눈병"은 '진리'에 눈먼 것이 아니라 '죄의식'에 대해 눈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명(失明)'의 경험은 단순한 무지(無知, ignorance)의 경험이 아니라 비지(非知, non-savoir)의 경험인 것. 그리하여 나는 모든 '진정한' 예언자는 '맹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저 테이레시아스의 사례!).

▷ '시각'에 가하는 '시각적' 충격.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내 작업의 위대함과 동시대인들의 보잘것없음 사이에 놓인 불균형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사실로 표현된다."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57(번역: 람혼).

51) 자신의 '눈먼' 경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력 상실'과 '청력 상실'로 변용된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취할 수 있는 생리학적이고 병리학적인 입장인 것. 그러므로 데리다(Derrida)가 '귀에 관한 과학'을 의미하는 말인 'otologie'와 '자서전'을 의미하는 말인 'autobiographie'를 결합하여 만들고 있는 단어인 'otobiographie'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쉽게 자서전이 '소통'의 텍스트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과 귀의 은유로 표현되는 이러한 신체 구조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은 경험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 개체와 개체 사이에 가로놓인 밑 빠진 공허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자서전의 공간은 또한 소경과 귀머거리의 공간, 절대적 고독의 공간이기도 한 것. 이제 이 귀머거리는 다른 것을 '들으려' 한다, 이 맹인은 다른 것을 '보려' 한다:

   

▷ Georges Bataille, L'expérience intérieure, Paris: Gallimard(coll. "Tel"), 1978.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5, Paris: Gallimard, 1973.

"'모퉁이를-돌아서-봄(Um-die-Ecke-sehn)'의 심리학"
ㅡ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평학습판 전집 6권, p.266(번역: 람혼).

52) 실명의 경험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보지 못한다는 것이 '다른 것'을 보려는 의지로 전환된다. 모퉁이를 돌아서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구석을 본다는 것, 그것은 시각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 본다는 것, 즉 역설적으로 '맹점(盲點)을 본다는 것'이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내적 체험(L'expérience intérieure)』에서 지성의 맹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성(知性) 속에는 하나의 맹점(tache aveugle)이 존재한다. 그것은 눈(œil)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눈 안에서처럼 지성 안에서도 우리는 그 맹점을 어렵사리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의 맹점이 보잘것없는 것임에 반해 지성은 본성상 자신의 맹점이 그 안에 지성 자체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를 원한다."
ㅡ 바타이유, 『내적 체험』, 전집 5권, p.129(번역: 람혼).

53) 이 맹점이 바로 비지(非知)이다. 지성은 맹점 너머에 있을 어떤 '의미'를 갈구하지만 비지로서의 맹점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것이다. 지성의 맹점은 지(知)가 아니므로 거기에는 의미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 지로써는 맹점을, 그 '실명'의 경험과 체험을 파악해낼 수가 없다. 그 사이에는 어떤 심연이 놓여 있고 본질적인 균열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비지는 곧, 삶에 있어서 '균열'이라고 하는 것을 '속류 헤겔주의'의 방식으로 소위 '변증법적 통합' 안에서 해소될 수 있는 일종의 '안티테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ㅡ이것이 바로 저 '지성'의 일반적인 방식일진대ㅡ오히려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의 요소로서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Minuit(coll. "Critique"), 1969.

54) 균열은 본질적인 것이며, 들뢰즈(Deleuze)가 말하듯, "모든 것은 심연(abîme)에 의해서 시작된다."(『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p.219) 그러한 '긍정적인' 균열에 대한 서술은 광인의 자서전 안에서 '내면의 언어'라는 형식으로 발견된다. 그러므로 광인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맹인의 자서전이 된다. 따라서 니체의 저 '눈병'은 표피적인 건강성을 넘어선 근본적인 건강성이 되는 것이며, 알튀세르의 '눈먼' 착란과 실명(實名)의 실명(失明)은 비정상성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에 또한 바타이유의 '균열'은 부정의 부정, 암흑의 긍정, 비지의 밤 속에서 어둡게 빛나는 음울한 섬광이 된다:

"균열(fêlure)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감내하는(subie) 균열, 즉 타락으로부터 영광으로(곧 사랑하는(aimée) 균열로) 나아간다."
ㅡ 바타이유, 『죄인(Le coupable)』, 전집 5권, p.259(번역: 람혼). 

55) 이렇게 인식된 균열은 하나의 '영광(gloire)'이다. 발전과 진보를 전제하는 직선적인 내러티브와 회심의 클라이맥스를 갖는 변증법적 성장 구조는 정상성의 개념과 함께 사라진다. 진정한 것은 비약과 돌출이며 결국 균열이다. 그러한 균열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규정 짓는 것, 모순과 차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해소되어야 할 일종의 '중간항'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자체를 사랑하고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비정상의 자서전이 자서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출하면서 취하고 있는 핵심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균열(fêlure)은 내면적이지도 외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경계선 상에 있으며 감각할 수 없고 형태가 없으며 관념적인 것이다."
ㅡ 들뢰즈, 『의미의 논리』, p.181(번역: 람혼).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2, Paris: Gallimard, 1970.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7, Paris: Gallimard, 1976.

56) 그러므로 이러한 '비지의 균열'을 옮겨가는 내면의 언어로서의 자서전이란 내면과 외면을 구분 짓는 정상성의 어법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분법은 지성의 작용이며 그렇게 구분된 내면은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자서전의 공간이 아니다. '내면 연기', '내면적 고뇌'라는 쉽고 편하게 통용되고 있는 어법 속에서 발견되는 내면에 대한 이 소박하고 경박한 하나의 '인식론'은, 그러므로 지성의 '농간'일 것. 내면은 혼란스러움에 반대되는 '평온한' 안정이 아니며 '가벼움'이라는 대립항을 상정하는 저 무거운 '무게'도, 끝을 모르는 '깊이'도 아니다. 바타이유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내면이란 혼란과 공포 그 자체인 것. 고야(Goya)가 말하듯, 그리고 바타이유가 다시 그 말을 이어받아 변용시켜 말하듯,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것은 이성의 잠이고 ㅡ 그것은 괴물을 낳는다."(바타이유, 『종교의 이론(Théorie de la religion)』, 전집 7권, p.351) 이 괴물은 우리가 어렵사리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진정한' 내면의 모습이다. 이성이 잠들면, 하나의 '꿈'이 깨어난다:

"바지가 벗겨진 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있었던 기억과 연결되는 유년 시절 거미들의 공포 등등. / 가장 끔찍한 것과 가장 장엄한 것 사이에 있는 일종의 양면성.[...] / 꿈에서 깨어나, 나는 쥐들의 공포와 나를 매질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결합한다, 나는 독수리(아버지)가 부리를 내리찍어 피를 흘리는 두꺼비의 모습이다. 나는 엉덩이가 드러나 있고 배에서는 피를 흘린다. 붉은 빛 닫힌 눈을 통해 보여진 태양과도 같이 너무나도 눈이 부신(aveuglant) 기억. 아버지가 눈이 멀었기에(aveugle) 나는 상상해본다, 아버지 자신도 눈이 부신(aveuglant) 붉은 빛의 태양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ㅡ 바타이유, 「꿈(Rêve)」, 전집 2권, p.10(번역: 람혼).

▷ La Rochefoucauld, Maximes, Paris: Garnier-Flammarion, 1977.

57) 바타이유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교차하고 있는 자신의 꿈으로부터 '맹인의 언어'를 이끌어낸다. 맹인의 언어는 그 자신에게도,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도, 결국 '눈이 부신' 것, 동시에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그 앞에서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곧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가 이미 언급했던바, 죽음과 태양에 대한 공통적인 체험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과 태양이라는 존재를 쉽게 마주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바타이유의 '송과선 눈(œil pinéal)'의 은유가 탄생한다. 이 눈은 바로 실명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하는 것. 기존의 두 눈이 아니라 뇌 속의 송과선이 자라나 머리 위를 뚫고 솟아나는 또 다른 눈. 그 눈은 태양을 직시하는, 따라서 또한 죽음과 대면하는 제 3의 눈인 것. 곧 이 눈은 비지와 맞닥뜨리는 하나의 창문이 된다. 지의 정상성이 아니라 비지의 비정상성을 마주 대하는 이 새로운 눈은, 그러므로 비로소 태양을, 곧 죽음을 응시하는 눈에 다름 아니다. 그 눈은 죽음에 대한 굴성(trophisme)을 갖는 눈, 비지의 밤과 함께 열리는 통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문제 삼았던 자서전들은 곧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한 번 더 변용된다. 데리다(Derrida)가 '해부'한 대로, '자기-삶-기록(auto-bio-graphie)'로서의 자서전은 또한 동시에 "타자-죽음-기록(allo- et thanatographie)"으로 변용되기도 하는 것(데리다, 『오토비오그라피』, p.73):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인 이상, 원칙적으로 죽음은 매 순간마다 돌출할 수 있다."
ㅡ 데리다, 『우편 엽서(La carte postale)』, p.326(번역: 람혼).

   

▷ Jacques Derrida, La carte postale. De Socrate à Freud et au-delà
    Paris: Flammarion(coll. "La Philosophie en effet"), 1980.
▷ Jacques Derrida, Otobiographies, Paris: Galilée, 1984.

58) 그러므로 또한 데리다가 이야기하고 있는 "자서전적 사색(spéculation autobiographique)"이란 곧 죽음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니다(데리다, 『우편 엽서』, p.326 참조). 비정상성의 자서전은 단순한 삶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속되는 죽음의 이야기, 곧 죽음으로써 비로소 삶을 살게 되는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 된다. 따라서 결국 그러한 글쓰기 안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곧 자기에 대한 '동일성(identité)'의 문제이며, 이는 자서전이 '자기에 대한 글쓰기'라는 일반적인 정의만 떠올려봐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 곧 죽음과 태양을 바라보는 일에 준하는 문제이다. 광인의 자서전은 건강성의 개념과 정상성의 기준 그 자체에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따라서 나는 자서전적 글쓰기가 '실존주의적'이거나 '현상학적'인 글쓰기라기보다는 일종의 '병리학적' 글쓰기, '타나토스적'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고야(Goya)의 환상.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59) 자서전을 한 편의 '시(詩)'로 읽기, 그것도 '광인'의 시로 읽기. 시는 의식 없는 세례와 영감의 침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저 '플라톤적' 시론의 부활? 그렇다면 이것은 '낭만주의'로의 회귀인가, 아니면 '고전주의'로의 복귀인가. 확실한 것은, 비지의 밤이 곧 지성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내면은 '외부의 안쪽'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일 수 있다. 비정상의 자서전은 '극도의 혼란과 공포'를 머금고 있는 '내면의 글쓰기'이지만, 그 '안'에서 문제 되고 있는 '내부'는 더 이상 대립적인 규정으로 환원되는 '내면'이 아니다. 자서전의 공간은 고독의 공간임과 동시에 소통(communication)의 공간이며ㅡ여기서의 '소통'이란 바타이유적이고 블랑쇼적인 의미에서의 소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ㅡ, 니체가 말했듯이 "어쩌면 내가 산다고 하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뜨거운 혹한(酷寒)의 공간이다.

   

▷ Jean-Paul Sartre, Les mots, Paris: Gallimard(coll. "Folio"), 1972(1964¹).
▷ 사르트르, 『 말 』(이경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3.

*) 2008년에 쓰는 후기: 이러한 '자서전 집중 독해'의 시기에 미처 하나의 글로 정돈하지 못하고ㅡ하긴 위의 글들도 결코 '잘 정리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테지만ㅡ독서 카드들만 잔뜩 작성했던 책이 있었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Les mots)』이 바로 그것이다(개인적으로 한 동안 사르트르의 책들을 읽지 못했다). 조만간 기회가 될 때 사르트르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한 편의 글로 묶어서 다뤄볼까 한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일곱 개의 조각 글들을 모두 올리고 나니, 슬며시,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입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 글을 쓴 이후로 여러 해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의 신발끈은 헐겁고 성기다, 그런 생각이 든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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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meilette's paper 2008-09-3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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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r 2008-03-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들렀는데 페이퍼에 재미있는 제목이 붙어있군요. 시간을 내서 찬찬히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람혼 2008-03-03 13:39   좋아요 0 | URL
처음으로 글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 반갑고 감사합니다, 마르님.^^

marr 2008-03-03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렵군요. 제게는 마치 암호문 같습니다.
자서전적 글쓰기가 일종의 '병리학적' 글쓰기, '타나토스적' 글쓰기이고, 따라서 비정상의 자서전이며 '극도의 혼란과 공포'를 머금고 있는 '내면의 글쓰기'이다? 라는 건가요?
이런 결론의 전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니체와 바타이유와 데리다와 들뢰즈를 경유했기 때문인가요? 람혼님의 다음 글을 어떻게 읽을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람혼 2008-03-06 04:12   좋아요 0 | URL
결론만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일부러 니체와 알튀세르와 바타이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이른바 '에둘러 가는' 글의 소재들로 선택했던 이유도 저 당시의 저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던 것 같은 느낌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으로는, '병증'을 통해 '건강'을 살피고, '도착'을 통해 '정상'을 살펴보자는 의도였다고 하겠지요. '어떻게' 읽는가는 전적으로 마르님의 선택입니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누에 2008-03-0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이런저런 영감을 주는 조각들이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물론 마르님(안녕하세요~)에게처럼 제게도 암호문 같았습니다만.. 아니 그보단 조각퍼즐 같은 재미를 주는 글이었습니다.

람혼 2008-03-06 04:14   좋아요 0 | URL
영감을 드렸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드리는 마음이 됩니다. 퍼즐 같은 재미는 저 역시나 참 즐기는 것인데요...^^; Paris는 요즘 어떤지요? 조만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부쩍이나 더 생기는 요즘입니다.^^

누에 2008-04-03 18:41   좋아요 0 | URL
이곳은 무덤같은 곳이지만, 그런 숭고한 분위기의 흔적마져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고야를 볼 수 있고 루이스 부르조아를 만날 수 있답니다.

람혼 2008-04-04 17:04   좋아요 0 | URL
조만간 그 무덤 같은 도시를 한 번 방문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데, 혹시 그때 한 번 찾아뵈어도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누에 2008-04-05 17:07   좋아요 0 | URL
영광입니다. ^^ 자세한 일정이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