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인이 도록을 번역한 관계로 해서, 지난 3월 27일 목요일 오후, 작가 및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겸한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 회고전의 개회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날까지도 도록의 번역본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 씁쓸해졌다(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불만은 일전에 내 어머니의 '이유 있는 비판'을 소개하면서도(http://blog.aladin.co.kr/sinthome/1840680)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다른 유수의 국내 '현대' 미술관들 역시 사정이 결코 나은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전시회를 자주 방문하는 이들은 이미 익히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회고전(retrospective)'이라는 '거대 형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일단 이러한 대규모의 전시회 형식이 '미술 산업'의 한 측면을 가장 거대하고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상 한 자락은 굳이 여기서 첨언하지 않아도 되리라. 여러 굵직한 회고전 때마다 내가 느끼게 되는 일종의 심리적 '중압감' 내지 육체적 '피곤함'은 아마도 저 '거대 서사'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는 하나의 병증일 것. 하여, 도약하자면, 이제ㅡ겨우 이제서야?ㅡ'미술'은 '미술관'을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떠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오래 묵은 상념과 투정의 한 자락, 다시금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음악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악이 콘서트홀과 클럽 등 기존의 '닫힌' 공간으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음악의 작곡과 연주라는 지극히 '음악[내]적인' 문제를 떠나 그 문제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 자체를 이동시키는ㅡ어쩌면 '해소'까지 해주는ㅡ물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형식 바깥의 형식'이 지닌 문제, 곧 장르라는 내적 형식 바깥에서 그 장르 자체를 구성해주는 외부적 형식이라는 문제는, 일종의 '공간'에 대한 물음을 다시 묻는 물음이며ㅡ이러한 문장 형식을 통해 나는 이미 스스로 '사이비-하이데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ㅡ이는 따라서 '시간 예술'로서의 음악이 자신의 '전제'이자 '영점(零點)'으로 지니고 있는 '존재 조건'을 묻는 물음이기도 하다.

Annette Messager: les messagers(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Xavier Barral, 2007.

2) 위의 책은 작년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열렸던 아네트 메사제 회고전을 기념해 출간된 도록으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의 도록 역시ㅡ아직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ㅡ이 책의 번역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도록에 수록된 글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하게 되는, '확인 사살'을 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미술과 철학이 맺어온ㅡ또한 지금도 맺고 있는ㅡ저 '열정적인 관계'에 다름 아니다. 이 관계가 지닌 '뜨거운'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기생적(寄生的) 현대 철학의 '더부살이'라는 생존 형태가 지닌 하나의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은 영화와 흘레붙고 미술과 흘레붙고 음악과도 흘레붙는다. 정신분석과의 '근친상간'은 거의 '겁탈'과도 같은 이러한 철학의 '짝짓기' 행태가 가장 여실히 드러난 최근의 사례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철학과 예술 각각의 '순수주의' 따위를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한 철학적 개입의 '과잉'이 너무나도 쉽게 저 '의미'ㅡ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이 '감추고 있는', 예술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상정된 어떤 '의미'ㅡ에 대한 일종의 '강박적 집중'으로 귀결되곤 한다는 점이다(그러나 이러한 '진단'의 외형 역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철학과 정신분석이 서로 배 맞는 형국을 띠고 있지 않나). 이 지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의미'에의 과도한 집착에 의해 붕괴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술' 그 자체이며, 그로 인해 살아남는 것은 '스타'와 '산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예술의 '순수주의'에 대한 주장ㅡ또는 모든 '의미'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감ㅡ과는 섬세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는데, 내가 의미와 이론의 과잉에 의해 질식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예술의 '순수한'ㅡ또는 '순수하다'고 상정된ㅡ취지와 의도가 아니라 바로 현대 예술의 저 '텅 빈 형식'이기에 그렇다. 텅 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형식'으로서의 예술. 어쩌면 '의미'에 대한 과잉된 집착은 저 텅 빈 형식의 속을 꾸역꾸역 채우려고만 하는 과식과 폭식의 형식일 것. 고로, 나는 이러한 텅 빈 형식에 '숭고한 대상'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그렇다면 여기서 '레테르'라는 단어는ㅡ관습적으로라도ㅡ일종의 '부정적' 표식이 되어야 할까).

▷ 늘어놓는, 하지만 만질 수는 없는, 볼 수도 없는. [사진: Rosa]

3) 따라서 '의미(meaning)'와 '전언(message)'은 섬세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당연하게도, 예술은 확정된 의미를 정할 수 있는 기표가 아니다. 곧, 예술은 의미로 바로 치환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예술은 말을 건다. 하지만 반드시 그 말의 의미를 결정하고 확정하는 것이 감상과 비평의 책무는 아니다. 예술을 하나의 '의미'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의 '전언'으로 보느냐 하는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를 지독한 '헤겔주의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예술은 '매개된' 형식이다. 의미의 '직접적' 현전이 불가능한 이유는ㅡ역시나 나를 지독한 '해체주의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ㅡ또한 그것이 언제나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구성되기 때문이다. '전언'은 어떻게 구성되고 전달되는가, '편지'는 어떻게 [항상 수신자에게] 도착하게 되는가. 전언들은 도착(arrival)과 도착(perversion) 사이를 왕복한다. 우회적으로 말하자면, '정갈하게' 늘어놓은 저 '디스플레이'의 형식은 액자와 틀(frame)의 규격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엿보는 공간 안의 사물들이 지녀야 할 배열의 형식으로는 그리 적당하지 못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저 '엿보는' 공간은 이미 그 스스로 누군가 자신을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도착적 성격이 지닌 힘은 그렇게 발생한다(그렇다면 사르트르적인 타자의 시선을 '역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형식은, 역설적으로 실로 '적당하고 적절한' 디스플레이의 방식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저 공간 안에 '전시된' 액자들 각각의 '의미'가 아니다(그 액자들이 개별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공간이 말을 걸어올 뿐이다. 형식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고, 그 형식의 텅 빈 틀만이, 기억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엿보고 있다는 '상상적 의미'를 넘어서, 나에게 하나의 전언을 전한다. 따라서 이 언어는, 당연하게도, 하나의 '상징적인' 형식을 띠게 된다.

▷ '피'는 호흡하고, '숨'은 출혈한다. [사진: Rosa]

4)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피가 쏟아져 내린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의 압권이라 말하고 싶은 위의 작품 <카지노>를 보면서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샤이닝(The Shining)>의 마지막 장면들을 떠올렸던 이가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 '차가운 풍만함'을 머금은 채, 피는 숨을 내쉬고, 숨은 피를 뿜어낸다, 호흡하는 피, 출혈하는 숨. 하지만 여성성으로서의 '피'와 그 '흐름'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 듣자(제발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작가의 '유년 시절'이 평범했나 독특했나 따위의 질문은 하지 말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주문과 상동적인 관계에 있는 하나의 제안). 반복하자면, 문제는 '의미'가 아니다. 자칫 방심하면, 작가란 존재는 정신분석가 앞에 앉은 '어설프고 영악한' 피분석자처럼 자신의 '상상적 자아상'만을 반복하는 존재가 되기 쉽다. 문제는 그러한 상상적 의미일 수 없다. 이 작품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오히려 [오로지] '기술적' 문제 때문이었다. 미술이 '환상'을 드러내고 향유하는 방식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technique/description)'. 미술은 이미 '시각'을 떠난지 오래지만, 저 '미술 작품'은 공감각적인 것을 오로지 '시각적인 것'의 영역 내에서만 보여주고 또 향유하고자 한다. 그 '기술'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것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지만, 동시에 실로 경이로운 것이기도 하다. 왜 의심스러운가: 언제나 의미의 함정ㅡ저 의미를 '감촉'할 수 있다는!ㅡ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왜 경이로운가: 공감각적인 매체와 경험들을 '시각'이라고 하는 하나의 감각만으로 소화하고 소환하려는, 곧, '환원'과 '소급'이 아니라 '매개'하고 '증식'하려는 그 '형식적' 전언의 노력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 파손 주의: 하나의 서명을 만들기 위해. [사진: Rosa]

5) 하나의 서명, 가장 마음에 드는 자신의 서명을 만들기 위한 저 모든 [헛된] 시도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 이삿짐, 병 속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진 편지와도 같다. 이에 전언은 이제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의 '고유명'으로[만] 남는다. 서명 만들기는 정체성(identity)의 구성과 확립을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시도이지만, 또한 그것은 동시에 그 자체로 동일화(identification)가 지닌 지난하고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징후'이기도 하다. 하나의 서명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러한 무수한 시행착오가 말 그대로 '무수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아포리아에 있을 터. 때로는, 폐가의 천장을 따라 직조되는 거미줄처럼, 때로는, 잘라도 잘라도 다시 끈질기게 자라나는 몸의 터럭들처럼, 그 서명은 결코 확정되거나 안착하지 못한 채로 부유하고 증식할 것이다. 그 이름[들]과 서명[들], 혹은 이름과 서명을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들] 속에서, 그것이 점지해주는 어떤 '운명적' 운동을 감지하는 것. 어쩌면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이름[들]을 따라갔던 저 데리다(Derrida)의 여정에서처럼, 메사제(Messager)의 이름[들]을 따라 그 전언(message)이 지닌 운명과 형식에 주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연상'이란 무의식적이라기보다는 실로 [전]의식적이지 않은가.

▷ 파편적인 몸[들]이 한데 뭉쳐 이루어낸 한 염(念/殮)으로서의 소원[들]이란? [사진: Rosa]

▷ 손금을 보고, 그리고, 주문을 내려쓰다, 기록하다. [사진: Rosa]

6) 손금에 기록된 운명은 하나의 단어가 되어 액자 밑을 향해 반복적으로 흘러내린다. 그 단어를 단순한 명사들의 반복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일종의 명령문 또는 감탄사의 강조적 용법으로 읽어내야 할까. 이는 말하자면, 그림책을 '읽으면서' 글자가 있는 부분은 뛰어넘고 그림만을 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오히려 그림책 안에서 그림들은 제쳐두고 글자들만을 '감상할' 것인지를 택하는, 그런 기묘한 선택지와도 같다. 그렇다면 '손금-운명'이라는 무채색의 그림에 대해 각양각색의 '문자-기록'이라는 형태로 응수하는 저 '주석'으로서의 '주문'은, 일종의 '시각적' 형용모순(oxymoron)이라 할 것인가. 작품 앞에 도착하여 도착적인 '인상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한 명의 비평가란, 사실 그 자신의 '상상적 자아상'과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분석주체에 다름 아니었다. 하나의 '그림', 하나의 작품 앞에 선다는 것이 이제 일종의 '자가-정신분석(auto-psychoanalysis)'이 되어버린 자에게, 저 모든 흘레붙는 철학적 리비도의 총체는 하나의 황홀한 '언어적' 증상으로 [승]화한다. 다만 내용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형식으로서의 전언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할 뿐. '분석가'의 자격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하나의 작품은, 그러므로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훌륭한'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것.

7)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그렇게 까칠하게' 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의 말은 지나가는 길에 툭 하고 던진 농담 같은 것이었겠지만(마치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 가사처럼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것은 실로 스스로의 '까칠함'을 많이 죽이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ㅡ혹은, '죽이면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ㅡ사뭇 진지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어떻게 덜 까칠하게 살지?'라는 반문이 혀와 목구멍에 걸렸으나, 내뱉지는 않았다, 아니, 뱉지 못했다. 까칠함과 섬세함, 과민함과 예민함 사이의 경계, 사실 나도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하지만, 자신은 예민함이자 섬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에게는 과민함과 까칠함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또한 바로 그러한 사실 자체가 저 두 개의 개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계'를 설정해주는 하나의 '경험적'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지긋이 인정할 정도로, 나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다, 죽이면서 살고 있었다. 아마도 저 마지막 사진은 그런 나의 초상화일 것이다, 어지러운 손금이 점지한 운명에 눌려버린, 날카로운 손톱이 지시한 행로에 찍혀버린.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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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