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쟁과 여성 -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속의 여성, 기억, 재현
김현아 지음 / 여름언덕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전쟁 영화로 '태극기 휘날리며'를 꼽는다.
그 영화는 유명하다. 천만이 넘어서 유명하고, 감독과 배우가 유명하고...
그런데, 난 그 영화가 왠지 싫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물감. 지긋지긋함.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혐오감의 정체를 밝힐 수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당황했던 것은 이은주의 죽음이었다.
보리쌀 두 되를 얻기 위해 '보도 연맹'에 가입했다가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을 입고 죽어간 한 여인.
죽으면서도 자기의 순결만을 이야기했던... 그리고 남자들의 지긋지긋한 '전투'
이 영화엔 전투는 있었지만, 전쟁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싫다. 페미니즘이 어떤 것인지... 그런 스펙트럼을 분절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극성맞은 여자들이 모든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페미니즘에 싫증이 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해는 되지만, 동의할 수 없다. (똘레랑스인 체...)
내 의식이 그렇게 말한다. 곰곰 따져보면,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의식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페미니즘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아니 증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조건지어져 왔다.'라는 일반론으로서의 페미니즘의 식상함을 들고 나오면 설득력이 없지만, 이 책에서처럼 <여성은 못배워서 못 남기는 전쟁의 피해자였다>는 입장에서 여성들의 증언을 <구술로 채록>함으로써 증언하고 있다. 손을 뗄 수 없는 책이었다.
얼마 전 읽은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가 남성들이 쓴 전쟁 이야기라면, 이 책은 여성들이 쓴 전쟁 이야기다.
여성들은 단지 피해자로만 있지 않았다. 베트남의 여성들은 얼마나 당당하게 민족해방전선에 나섰던가. 남부군의 빨치산에도 당당한 여성 전사들은 존재했다.
전쟁이란 역사의 격변기에 가장 심하게 다치는 것도 여성이다. 베트남과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의 여성, 어머니들... 그러면서도 전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밑바닥을 책임지는 것도 여성이다.
그러나 황금기에 그 열매를 고루 나눠받는 데는 실패하는 것도 여성이다.
표지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응옥의 눈동자는 <가부장제로써 여성의 기억을 짓눌러 온> 역사를 말해주는 듯 하다.
말은 덜 슬픈 사람이 하는 것이라 했다. 역사의 기록은 배웠던 남성들 중심으로 기술되어왔다.
이제 여성들의 목소리를 잔잔한 음성으로 기록하는 기록물들에도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전쟁 후, 민간인 학살을 당한 유족의 말 못하는 심정을 이승만 정권은 <국가 보안법>을 내세워 심하게 탄압했다. 유족회를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감옥에 처넣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렇게 나쁜 놈이다. 멍청한 사람들은 국부 이승만, 이승만 박사, 초대 대통령... 으로 미화하지만, 그는 역적이고 매국노일 뿐이다. 국립묘지에서 당장 파내야 할 놈.)
이승만이 도망가고 나서 봇물을 이룬 듯, 유족들의 신원 운동은 시작되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다시 혁명재판은 유족들을 처벌하고, 십년을 기다려 겨우 수습한 유골을 파헤치는 부관 참시를 자행한다. 징헌 것들.
이 뒤에 도사린 법이, 친일파 놈들의, 친미파 놈들을 위한, 그들에 의한 <국가 보안법>인 것이다.
연좌의 사슬은 학살의 그림자로 이어지는 법이다.
한국 역사는 실존의 망각을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이 아픈 기억의 파편들을.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숨을 골라야 하고,
고문이나 학살을 이야기하면서 숨을 멈추고,
자신의 혈육이 죽어간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는 이런 기록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 책은 소중한 역사의 한 단면을 기록한 훌륭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