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長毋相忘 장무상망.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완당의 세한도에 찍힌 도서의 한 구절이다.
세한도란 추울 때, 내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아무도 찾는 이 없을 때... 그럴 때, 잊지 말자는 뜻일까?
세한도를 만나면 그 여백에서 몸서리치게 차가운 냉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이 구절을 읽자니 한결 치웁다.

아, 오주석 선생님.
깊은 잠에 빠지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유홍준이 우리 문화 유산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면,
오주석 선생은 우리 그림을 읽는 법을 정말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
그런 큐레이터와 함께라면 어떤 박물관인들 지겨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실, 수학 여행이나 가족 여행 코스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을 때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막상 작품을 눈앞에 대했을 때, 검은 것이 먹이고, 흰 것이 종이라는 생각 외엔 별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큐레이터가 필요한 거다.

오주석 선생님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그림 속에서 화가의 인격이 보이고, 당대의 모습이 살아움직인다.
마치 역사 스페셜에서, 정지되었던 화면 속에서 갑자기 예전의 상황이 재생되는 느낌이랄까?

거꾸로, '한국의 미 특강'을 먼저 읽어서, 제법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 책을 읽은 것이 벌써 몇년 지났으니 내 머릿속엔 별로 남은 것이 없다.

이 책이 근간이 되어 '특강'을 낳았으리라. 그리고 특강은 좀더 입말의 찰진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그림 설명과, 작자의 시대를 함께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좀 딱딱하다면 딱딱할 수도 있는 것은, 공자 맹자 노자와 함께 철학의 시대를 살았던 선인들의 삶을 조망하다 보니 그런 한문 어구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거겠지.
그런데, 실지로 딱딱한 한문 어구들을 무시하고 읽어도 별로 지장은 없겠다.

김명국의 달마상의 호탕한 선과 여백.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담긴 잔잔한 심경.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담긴 이상향, 무릉도원.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읽는 비장의 미완.
김홍도의 주상관매도에 담긴 여백과 풍류.
윤두서의 진단타려도에 얽힌 읽을거리.
김정희의 세한도를 통한 그림 보기를 뛰어넘어 그림 읽기.
김시의 동자견려도의 재미와 유머.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에 담긴 이야깃거리들.
이인상의 설송도에 드러난 선비의 정신.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담긴 청신한 시각과 따스한 정.

그림을 통해서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임을 보여주는 그는 볼품없고 전통없어 보이는 찢어진 한국 문화에 크나큰 위안이 되는 분이다.

선생의 강연을 듣지 못하게 된 것을 정말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선생을 뛰어넘은 큐레이터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정말 한국인임이 자랑스런 것은,
금메달이나 축구공 넣었을 때가 아니라,
이런 책을 마음 속에 담았을 때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한다.

오래도록 서로 오주석 선생을, 옛그림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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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4-0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도 출간되었지요..
생전에 하려하신 작업을 남은 사람들이 모아서 낸...

글샘 2006-04-10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주석 선생님 글을 읽고 있으면, 조선의 선비 정신이 물려지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쉽기만합니다.

파란여우 2006-04-1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은 '한국의 미'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더군요.
너무 안타깝게 일찍 가셨어요

글샘 2006-04-1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에도 중복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특강'은 그야말로 강의한 내용을 속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지요. 슬프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