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읽고 가슴에 꼭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 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스무 살의 까뮈가 적은 서문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지. 얼마나 멋진 책을 만났다는 찬사인지... 그렇지만 나는 저런 스무 살을 가지지 못하였더랬다. 나의 스무 살은... 되돌아 보면 부끄러운 스무 살이었다. 세상은 혼돈의 소용돌이였는데, 나는 학교에서 짤릴 것이 두려워 멍청하니 보내던 스무 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던 선배가 권해준 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는 내 어떤 점이 그리 맘에 들었던지 모르겠다. 하긴, 세상 살면서 알고 지나가는 일이 무엇이냐.

스무 살의 나는 '섬'을 읽으면서 별 감동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얼마나 어리석은 나이였던지... <나>의 본질, 나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던 나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팔십년대의 그 책에서 '까뮈'의 서문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 때도 섬의 고독함이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학생회관 식당에서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읽었던 듯도 하고, 창밖에 비가 내렸던 듯도 하다.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지만, 내가 이 책을 별로 감명깊어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을 왜 권해줬지?'하고 생각했었으니까...

스무 살의 나이를 두 번 산 지금, 이제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아, 거기엔 섬이 있었다. 바로 '내'가 있었다. '너'도 있었고...

나의 존재를 <나> 자신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남들과 상대적인 좌표를 매겨 보는 것을 <대타 의식>이라고 한다. <나>를 <남>과 비교해 보고 견주다 보면 우리는 어느 날 문득 <나 = 섬>임을 발견한다. 나는 외로운 하나의 섬이다. 독도처럼 고립된 섬. 스스로 혼자뿐인 한 인간. 여럿이 있어도, 군중 속의 고독을 새삼 깨닫는 섬들, 곧 혼자씩일 뿐인 인간 개개인들 말이다.

그러나, 섬은 왠지 낭만적이고, 황홀함, 신비로움을 감싸안고 있다. 독립된 자유로움과 새로운 세계와도 맞닿아 있고, 나날이 놀라움으로 충만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품 사진에 석양과 섬, 안개에 싸인 섬, 이런 것들이 얼마나 낭만적인 미감을 불러 일으키던가...

휴가 vacance와 비움 vacancy은 그 어원이 같다고 하던가. 우리는 휴가를 얻으면 무얼로 그것을 채울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넉넉하게 쉴 기회를 놓친다. 휴가는 비어 있는 그 자체가 휴가임을 모르고, 억지로 비울 것 없이도 비어 있는 것이 우리 삶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5-06-2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섬은 아니지만 저도 20대 초반에 장 그리니에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잘 이해못하는 그런 책을요...

글샘 2005-06-24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딩때 별로 배운 거 없이 외우기만 했기 때문에, 그 무식하던 대학생 시절에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아이들에게 세상 보는 눈을 키워주는 교사가 되지 못하고 있어서... 부끄럽네요.

비연 2005-06-2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그르니에. 제가 진실로 좋아하는 작가들 중의 하나죠.
님의 리뷰를 보면서 그와의 절실했던 마음을 다시 되새겨보게 됩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