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철학을 말하다 토트 아포리즘 Thoth Aphorism
강신주 엮음 / 토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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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하고 습한 남도 지방에서는 생선을 보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장을 손질한 생선에 소금을 가득 뿌려서 젓갈로 만들어 먹는다.

그런데 썩지 않고 삭은 것은

이전의 원재료와는 전혀 다른 깊은 맛을 내준다.

상큼하고 발랄하던 미각을 희생하여 만든 그 맛은,

진득하고 깊어진 것이 미각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오랫동안 웅숭깊은 맛을 감돌게 한다.

 

이 책은 남도 젓갈같은 그런 책이다.

철학자 강신주가,

추천하고 싶은 철학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영어, 한문과 함께 모아 두었다.

 

처음엔 얄팍한 상술인 줄 알고 심드렁해 했는데,

곰곰 읽어볼수록 깊은 맛에 빠져들게 된다.

원래 철학이란 그런 것 아니었던가.

독서의 달콤함이나 싱싱함을 던져버리고,

곱씹고 곰삭아 원래의 맛과는 전혀 다른 깊은 맛을 느끼게 할 때 철학은 비로소 발효의 미학을 드러내는 법.

 

이 책 역시 한 번 읽고 만다면, 그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없다.

영어로 번역된 부분까지 섬세하게 읽고 음미하며

오랜 시간을 곰삭도록 반추한다면 제 마음 속에서 몇 가지 줄기는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진 젓갈로 발효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귀는 '양주'다.

 

옛날 사람들은 한 개의 터럭을 뽑음으로서

천하게 이롭데 된다고 하여도 뽑아주지 않았고,

천하를 다 들어 자기 한 사람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받지 않았다.

사람마다 한 개의 터럭도 뽑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도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처세술이라기보다는, 정치 철학이다.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아야 좋은 정치다.

천하를 한 사람에게 바친대도 받지 않아야 좋은 정치다.

정치의 기본은 이렇게 쉽다.

'최선을 다 하자', '하면 된다'가 판치는 세상은 그래서 나쁜 세상이다.

 

온전한 삶이 가장 위이며,

부족한 삶이 그 다음이며,

죽음이 그 다음이고,

핍박받는 삶이 가장 아래다.(화자)

 

이 역시 정치 철학일 것인데,

인간을 인간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 최상의 정치이자 삶의 철학이다.

왜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의 행복지수가 더 높은지... 이 철학은 보여준다.

가난한 삶은 온전한 삶의 다음일 수 있으니 그렇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에서 스스로 스스로를 핍박하여

더 높은 곳, 더 많은 곳으로 채찍질하는 삶은 최선이 아니라, 최고를 위하는 체하는 최하의 삶인 것이다.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아래쪽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스런 이유다.

 

옛날 참다운 사람들은

잠을 자더라도 꿈을 꾸지 않았고

깨어있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었다.

그들의 음식은 달지 않았으며, 그들의 숨은 깊었다.

참다운 사람들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고 보통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장자)

 

양생 - 웰빙을 이야기하는 장자의 이야기다.

웰빙은 정치철학이자 처세술의 핵심이다.

불면증과 우울증, 음식에의 탐닉과 얕은 호흡이 잘못사는 길이란다.

 

깊은 숨...

발뒤꿈치까지 호흡이 닿을 정도로 스스로를 관조하는 삶이라면,

인생에서

불면과 우울의 나날을 보낼 일은 없을 수 있을라나?

 

머리는 교환의 신체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들뢰즈)

 

머리로는 주고 받는 것을 따진다.

그러나 심장은 오고 가는 것을 넘어서는 '반복을 통한 익숙해짐'의 감정을 느낀다.

이 책 역시 머리로 '배울 것, 얻을 것'을 따질 책이 아니다.

심장으로, 반복을 사랑하는 책으로 삼고 싶은 그런 책이다.

 

 진지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글자 그대로,

'진짜로 무언가를 꽉 잡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무엇인가를 꽉 움켜잡아야

거기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중)

 

곰삭은 젓갈의 맛은 입맛을 꽉 움켜잡는다.

원래의 맛을 버리고 죽음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

 

그게 젓갈의 맛이자,

젓갈이 곰삭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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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08-0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자 백가의 귀환 양주와 묵자편 너무 기대되요. 언제쯤 나올런지...

이곳은 지금도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아랫쪽은 엄청나게 덥다고 하더군요.
물론 비가 온다고 해서 덥지 않은건 아니지만 ...
건강 유의하시구요...리뷰 늘 잘 읽고 있어요^^

페크pek0501 2013-08-0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의 다상담 1, 2 >가 신간으로 나왔는데 관심이 가더군요.
강신주 님의 책은 어떤 책이든 잘 팔릴 만큼 마음을 끄는 것 같아요.

글샘 님, 이 더운 날씨에 잘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