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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 솔출판사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겨울 방학 전이다. 수능 마치고 좀 한가롭던 시간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읽어보리라 굳게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정민 선생님의 한시미학산책을 골랐다.
책은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껍고 하드커버로 싸인 학술적인 책으로 보이지만, 구성은 말랑말랑하고 내가 기대했던대로 정민 선생님의 말투는 '~~~ 한시 이야기'와 유사하게 편안했다. 물론 내용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일단은 이 두꺼운 책이 스물 네개의 챕터로 잘 나눠져 있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하루 한 편을 읽을 셈이었지만, 스터디 준비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대여섯 편을 읽어대기도 했고, 어떤 글은 한 편으로 며칠을 끌기도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탓이지, 책의 탓은 아니다.
나는 책을 읽고 잘 깐다. 좋은 말로 하면 비판적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비판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하고 감정에 얽매여 디립다 욕을 퍼붓기 일쑤다.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텍스트를 충실히 읽지 않고 헐뜯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인문학 서적 중에서 읽다보면 짜증 나는 부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펴내는 책들이다. 정보의 바다에 떠다니는 몇 조각의 부유물들을 책으로 엮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그럴듯한 제목을 붙여 책이랍시고 팔아댄다. 정말 짜증난다. 내가 잘 까는 또 한 부류는 해체주의 소설이나 시집이다. 기존의 이야기 틀을 해체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말장난이 심하거나, 글재주만 믿고 까부는 축이 많다. 감동을 주지도 않고, 깨달음이나 깨우침을 주지도 않는데, 잘 팔린다니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욕이 나온다. 나는 까고 욕하면서도 내심 찝찝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네.'하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민 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암의 <답창애2>에 나오는 '눈 뜬 장님' 이야기를 빌려서, 새로운 세상이 되어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나침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나침반의 하나다. 이미 읽었던 정민 선생의 책 중에서 중복된 것도 많다. <~~~ 한시 이야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 책은 그야 말로 한시 입문이라 할 만하다. 나는 한시에 관심이 많아서 전에도 몇 권의 책을 보았지만, 학문적으로 고집있는 사람들의 책들이라 내 수준에 과한 것들이었다. 정민 선생님 덕분에 한 겨울 고전의 정수, 한시를 포식할 수 있었다. 읽고난 지금도 <다시 읽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서 수업 시간에 활용하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지만, 한 번 지나온 길을 다시 가지 않는 '한붓 그리기'와도 같은 내 독서 습관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문학은 흉내가 아니다.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 자기만의 진리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窮卽變, 變卽通, 通卽可久>라고 했다.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갈 것이라고... 새 시대가 왔지만 예전의 학문은 변함이 없어 궁해진다. 그러면 변해야 한다. 변해서 통할 길을 찾고, 통하면 오래간다. 그러나 그저 막무가내로 변해서는 아니 된다. 오래갈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정표>가 이 책이 될 수도 있다.
가끔 내가 적어 둔 리뷰를 돌아볼 때가 있다. 좋은 구절을 적어뒀다가 찾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감각적 직설>에 치우침이 많은 것을 본다. '詩思의 온유 돈후를 중시하라. 감각적 직설 보다는 에돌려 말하는 데서 오는 온건한 말이 더 깊고,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는 말은 뼛속을 에인다. '情을 잘 말하는 자는 삼키고 토해 냄이 깊은 듯 얕아 드러날 듯 다시금 감추어져 문득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고, 景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끊어버리고 약간의 보탬만을 더하였는데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또한 흘러 넘친다'고 한 것은 남의 글을 읽을 때,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혜안 없이 그저 남의 눈을 놀래키는 수사적 기교에 탐닉하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한 것은 나를 꾸짖는 말이 아닌가 해서 심장이 덜컹거릴 따름이다.
이 책은 시의 미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부분과, 시의 표현, 시 창작을 둘러싼 이야기들, 시가 해체되는 과정의 참요, 잡시, 문자유희 등도 다루고, 선, 산수, 사랑, 역사 등 주제에 따른 시들도 다루고 있다. 스물 네 장으로 나눈 만큼, 분류의 기준은 뚜렷하지 않으나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을 골고루 영양섭취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한자를 어느 정도 알면 한시 읽는 맛을 더할 수 있겠고, 특히 국문학과 학생이나 문학 전공자라면 한자 공부삼아 정도할만한 책이다. 일반 교양인들도 한시를 대충 읽는다면 읽어볼 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1969년에 국민 1인당 5편의 영화를 보았을 정도로 번창하던 영화 산업이 1970년에는 텔레비전에 그 자리를 넘겨 주었으니... 내가 어릴 때는 M, T, K의 세 채널이 있었고 프로그램도 거의 외우고 있었지만, 요즘은 채널 개수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영향력은 양적 팽창이 늘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 발전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요즘은 케이블 티비를 통해 재방송을 끝도 없이 하다 보니 같은 방송을 하루에도 몇 번 만날 수 있다. 요즘 아이들 앞에서 선생하려면 <웃찾사>, <개콘>, <폭소클럽>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된다.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있으나 없으나 개그 프로는 가능한 한 보는 편인데, '그런거야', '희한하네', '생뚱맞죠', '그때그때 달라요', '오, 베이베', '남녀본색', '사장님 나빠요', '안어벙에게 빠져 봅시다, 마데 전자', '봉숭아 학당의 다중이, 까잇거 경비원' 등의 말들이 요즘 유행이다. 어떤 프로그램에도 이런 말들은 서로 패러디 되고 있다. 한두개라야 쉽게 외울 수 있는데, 요즘은 너무 많아서 어렵기도 하다.
한 때, <~~ 시리즈>로 나가던 개그들이 그야말로 다원화 되어 종합 선물 세트가 된 셈인데, 간혹은 비판의 힘이 강한 코너도 있지만, 그야말로 말장난이거나 국어 사용을 해치는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물론 개그가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난 적어도 매번 기본 컨셉은 같고 말장난만 바꿔대는 3,6,9나 봉숭아학당 같은 코너는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코너라면 블랑카 같은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언어 유희>로서의 한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득이었다. 개그가 현상적인 언어유희를 뛰어넘어, 생각의 깊이나 감각의 폭, 경험의 넓이나 역사의 부피를 소화할 수 있도록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공시적, 통시적 차원을 아우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에서도 결국 <시는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인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인가> 하는 문학의 선악설까지 다루게 되지만, 시를 짓고 감상하는 과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감응해서 설계하고 실현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왜 다시 한시인가. 정민 선생이 가진 콘텐츠가 한시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시라는 특수한 표현 매체를 통한 전달의 특이성 때문에 <특이한 전달의 과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용가치를 상실해 가는 한문학의 한 부분의 연구를 통해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매체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라서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한시이지만,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가시 덤불 속에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을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어 막힌 길을 새로 뚫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절치부심한 정민 선생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한 겨우내 방구석에 틀어박혔지만, 선경을 바라보고, 호쾌한 장부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