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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ㅣ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밀란 쿤데라에 기대어 무더위를 통과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 L'immortalite'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징'에 대한 이야기이고, '소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사랑, 상징, 소설'은 모두 '인생'에 대한 변주곡일 따름이다.
소설은 결국 인간의 삶의 한 측면을 이미지화하게 마련인데,
그 단면을 단적으로 말하면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데 작가의 생각은 미친다.
"지금 자네가 쓰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이 소설에선 '이마골로그'란 단어가 등장한다.
번역 과정에서 그 뜻을 각주로 붙여주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대~충 의미를 때려잡게 된다.
이미지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이 말은,
결국 '삶' 역시 이마골로그들에게 농락당하는 것 아니냐? 뭐, 이런 비꼼의 감정이 담겨있다.
'내가 써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스스로 골격을 드러내는 소설가.
이 소설은 그래서 소설에 대한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랑이 슬픈 것은,
사랑은 늘 '불멸'을 추구하지만, 삶의 혼란 와중에 그 사랑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다뤄지기도 하다는 걸,
인간의 '사랑'이란 말과 '사랑'이란 감정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 것인지를 반문하는 방식으로 소설은 흘러간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한줄한줄 촘촘히 읽을 수 없게 만든다.
근데...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평하는 대목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말러의 교향곡에서 아무리 주의깊은 방청객이라 해도, 아마 그 교향곡에서 포착하는 건 거기 담긴 내용의 100분의 1 정도일 겁니다. 말러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100분의 1 말입니다."
너무나 온당한 이 생각은 그를 기쁘게 했으나, 나는 점점 더 슬퍼졌다.
만약 독자가 내 소설을 한 줄이라도 건너뛴다면 소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텐데,
그렇지만 행을 건너뛰지 않는 독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행과 페이지를 잘 건너뛰는 사람 아닌가?(533)
자신 역시 자신의 작품의 한 줄조차 건너뛰지 않는 독자를 만나고 싶어한다.
허나 그것은 불가능함을 스스로 깨닫고 있다.
독자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불멸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70년대, 낭만의 시대에 유행했던 시 낭송 중에 박인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뭘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턴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단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얼굴 / 박인환 詩)
인간은 왜 사랑에 매혹되는가?
그건 다 유전자의 지령이란 과학자의 심드렁한 반응에 따르든,
인간의 열정이 서로를 탐욕스럽게 추구하기 때문이란 낭만주의 애정학에 근거하든,
인간의 사랑이 지향하는 것은 '불멸'이다.
인간과 인간의 '감정-사랑'이 육체적으로 파르르 불타오르고 나면,
오르가슴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사랑의 허무함에 눈물흘리면서도,
'나를 잊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불멸에의 추구'가 인간의 유전자에 담긴 허영의 한 단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걸 찾아나서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에...
사랑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에는 우아하고 성스러운 것이 남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추구하는 '불멸의 성스러움'을 파괴하는 것이 인간성의 회복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헤밍웨이의 작품이란 위장된 헤밍웨이의 삶일 뿐이요.
그 삶이 우리 중 누구의 삶 못잖게 하찮다는 걸 증명했어야 합니다.
말러의 교향곡을 산산조각 내, 화장지를 청할 때 쓰는 음악 재료로나 사용했어야 합니다.
불멸자들의 횡포를 영원히 끝장냈어야 합니다.
모든 '파우스트'의
모든 '9번 교향곡'의 그 도도한 권력을 처부수었어야 했다는 거요. (535)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의 삶에서 '사랑'을 가장 핵심 고리로 여기고 소설의 초점을 맞춰나갈 수밖에 없는 것을 고백하는 바,
그 이유을 이렇게 쓴다.
사랑에 대한 모든 정의에는 언제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랑은 뭔가 본질적인 것이요, 삶을 운명으로 바꿔 놓는다는 점이다.(478)
본질적인 사랑이 있는 반면, 에피소드적인 '사랑 저 너머'에 존재하는 매력적인 'love affair' 들도 있지만...
사랑은 역시 삶에서 가벼운 소재가 아님을 확인한다.
삶 역시 별것 아니지만, '존재'가 사랑스러운 것을 확인하는 일은 소중함을 확인하듯이...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412)
이 복잡하고 어려운 소설에서 내가 알아먹겠는 말은 이런 것이다.
삶은, 사랑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나도, 소설가도 모른다는 거...
그치만,
당신의 존재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면,
그리고 나의 존재가 당신의 삶을 고통스럽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내가 샘터가 되어,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은 온 우주가 품고 있는 에너지를 가득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에게 삶의 행복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것.
결국 인생의 '불멸'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느끼는' 것에서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어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을 당할 때는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 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 (325)
작가는 '로라'와 '베티나'를 통하여 자기중심적 사랑의 일단을 보여준다.
로라,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야.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 (293)
베티나가 "진정한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관계-사랑이 아니라 감정-사랑이다. 그런 사랑은 부정을 모른다.
대상이 바뀔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하늘의 손길이 피운 똑같은 불꽃으로 남는다.(310)
이들의 욕망, 몸짓에 대하여 작가는 부정적 이미지를 담은 이마골로그가 되어 이렇게 평한다.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다.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267)
그러나 작가가 애정을 담아 애써 긍정적으로 그리려고 하는 아녜스 역시 사랑에 대하여 고뇌하지만,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다.
아녜스와 대화를 나누는 외계의 이방인과의 대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얼굴이 있나요?"
"아뇨, 얼굴은 여기, 당신들 혹성에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구분하죠?"
"그곳에서는 말하자면, 각자가 자기 자신의 작품입니다.
각자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만드는 거죠."(71)
사랑하는 남편 폴과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나겠느냐는 진지한 질문에, 그는 더이상 만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그녀는 사랑의 환상 앞에서 소리 나게 문을 닫아 버렸다.(73)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왜 이 소설에 붙여주고 싶어했는지...
가슴을 저미는 공감이 생긴다.
인간이 서로 같아지려고 성형수술을 하는 현실을 돌아본다면,
'얼굴'의 무의미함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자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작가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얼마나 참을 수 없이 존재는 가벼운 것인지가...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진정한 사랑'과 '사랑의 환상'의 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은 <존재를 가볍게> 한다.
'존재'는 현재 여기에서 어떠한 '느낌'을 가지는가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무게를 갖는다.
now-here 재밌게, 신나게 인생을 살지 않는다면,
no-where 어디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
불멸을 추구하는 일은 하찮고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는 것.
얼굴보다는 잊혀진 사람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고 싶지 않은 '몸짓'이 필요하다는 것.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아녜스를 통해 보여주려하는 '관계-중심'의 사랑과 '빼기'의 사랑,
이런 것이 '여자'로 대변되는 사랑의 중심 축일 수 있다.
세 가지 불멸에 대한 추구 모두 사소하다.
첫 번째는 작은 불멸.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
두 번째는 큰 불멸.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것
세 번째는 우스꽝스런 불멸.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는 한 우화로 탈바꿈하는 것
소설가 또는 '나'로 대변되는 서술자 역시 남자이며,
여자를 ABC로 나열시키는 루벤스 역시 남자다.
남자들의 섹스에 대한 순간의 탐닉에 대하여 서술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루이 아라공의 시구를 집어넣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고...
그래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불멸의 추구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이야기에 대한 침묵'을 위반한 하나의 부조리에 불과할는지 모를 일...
왜냐,
존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임 역설한 이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는 밀란 쿤데라의 일련의 소설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들을 읽는 일보다는 천천히 나아가지만,
재미에 있어서는 결코 덜하지 않다.
느리게 통과하는 무더위 속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을 누리면서,
느리게 읽기엔 그의 소설들이 제격이다.
오죽하면 그의 소설엔 '느림'도 다 있을까?
다음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