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5년 7월
평점 :
절판


전우익 할아버지는 농부다. 먼젓 번 책도 참 좋았지만, 이번 책도 맘에 든다.

호박이 공짜로 굴러오는지... 공짜로 굴러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그럼 호박은 어떻게 굴러들어올까. 스코트 니어링처럼 지적인 활동가는 아니면서, 농사군으로서의 전우익 할아버지의 삶은 나름대로 명쾌하다.

서권기 문자향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오늘 읽던 고은 선생님의 글에도 있었다. 書卷氣 文字香. 좋은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솟고, 글 구절에도 향기가 있다고... 정말 그렇다. 내 서재 제목도 독서는 인생의 멘토라고 했지만, 힘들 때마다 책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이 글 쓰실 때는 나무에 푹 빠져 계셨다. 환경이 좋다는 곳에서 자란 나무는 단단하기도 향기롭기도 덜하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나물수록 나이테가 쫌쫌하고 단단하고 아름답다. 향기도 아주 진하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잘 먹고 잘 사는 아이들이 단단한 맛이 없다. 그러다 보니 멋도 없어 보인다.

루쉰 선생님을 칭찬한 대목도 멋지다. 뒤쪽에 절망이 덕지덕지 붙은 희망의 방패를 들고 밀려오는 절망을 막겠다고 아무도 가담해주지 않으면 혼자라도 하겠다는 자세로 평생을 산 사람이란 비유는 감동적이다. 정말 서권기이고 문자향이다. 루쉰 선생님이 할아버지의 이 글을 못 읽으신 것이 안타깝다.

자연과 멀어지고 인공, 인위 일색으로 사는 것은 발전이 아니다. 자연과 인위의 균형이 깨어져 인공이 판을 치는데 '사람인 변'에 '할위'자 쓰면 거짓위, 속일위 僞자가 된다. 사람이 너무 나선다. 사람이 뭐든지 손을 대려고 한다. 유홍준 교수가 20세기 인간은 문화재에 손 안 대는 것이 가장 보존하는 길이라 했는데...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세월이 만들어주는 빛깔이 있다. 손때처럼. 과정은 조급함보다 느긋함이고, 그 과정은 길 수록 좋고, 과정에서 삶은 이루어지고, 결과에선 삶을 그르칠 수도 있다. 인생도 삶도 과정이지 결과로 판단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고3때 열심히 공부했어도 시험을 못 쳐 버리면 재수라는 구렁텅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야 하고, 훌륭한 학창시절에 불명예를 안기지 않던가. 그리고 그 얄팍한 점수 좀 잘 받아서 서울대 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왔던가.

이 촌로가 권정생 할아버지랑 나눈 대화는 나를 밑바닥부터 반성하게 했다. '간신히 겨우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 그래도 줄기는 오색으로 빛나고 잎은 푸르기만 한 나무처럼.'이라는 말. 나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나. 나는 얼마나 겨우겨우 사는 데 인색했던가. 그걸 혐오한 것은 아닌가. 나는 아이들 앞에서 좀 더 가지라고 강요하며 살고있진 않은가.

요 며칠 알라딘의 시스템이 불안정했다. 다들 그렇겠지만 그간 세심하게 모아왔던 재산들이 날아가지 않았나 걱정할 만 했다. 컴퓨터에선 언제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한때 허접스럽지만 써왔던 글들을 프린트해 놓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이젠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겨우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거란 말에 자신을 얻고. 역시 '서권기'이다. (이렇게 좋은 말은 자꾸 써먹어야 내 말이 된다.) 내가 글을 자꾸 적어 보는 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다. 나중에 나중에 아들이 아빠는 뭘 했어요?하고 물을 때 이렇게 읽고 생각했단다 하고 핑계삼아 쓰고 있다. 그리고 순간순간 좋은 생각들이 놓치고 나면 아쉽기도 하고. 내가 적은 글들도 일이 년 뒤에 보면 제법 괜찮은 것들도 있다. 어느 하루 날잡아서 이것들을 싹- 지워버릴 염이 생길지도 모른다. 좀 더 겨우겨우 살게 되면.

불야성의 시대, 말 그대로 밤낮없이 밝은 이 시대가 더욱 캄캄함을 지켜보던 십 년 전의 할아버지 말씀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세월은 흐르지만 역사가 발전하는가. 가끔은 부정적이다. 늙어죽은 나무(고사목)는 향기도 나고 색깔도 변하는데 죽었다고 하는 사람의 판단이 합당한가. 그냥 열심히 일만 하는 것과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르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하루 하루 열심히 살고, 늘 배우려는 마음 변치않도록 문자의 힘을 빌려서 나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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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0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우익 선생은 이름이 우익이지만 '좌익' 행동을 많이 하고 사신 분이죠..^^ 이오덕, 권정생, 이런 분들과 교류하면서 소박하고 욕심없이 사시는 노철학가의 책을 글샘님의 리뷰를 통해서 잘 만났습니다.^^

드팀전 2004-11-0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우익 할아버지의 책은 느낌표에 소개되기 전까지 소리소문없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통했지요. 느낌표의 김영희 PD가 인터뷰하러 갔을대 책 표지에 나온것과 똑같이 생긴 할아버지 모습이 무척 반가왔습니다.인재 책은 안만드시고 농사만 지으실려나봐요.

글샘 2004-11-2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익... 새는 한 쪽 날개로만 날 수 없는데요... 할아버지가 이제 책을 쓰신다면, 피눈물이 묻어날까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