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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
리처드 부스 지음, 이은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극구 칭찬하는 교수님이 있었다. 이 책에 수십 개의 책갈피를 붙여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던 그 교수님을 생각하면, 이제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이 책의 어디가 그렇게 밑줄 칠 데가 있단 말인가. 하마나 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었지만, 정말 밑줄 칠 곳은 별로 없었다.
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책 모으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고, 읽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책을 들고 혼자서 줄글을 읽다가 생각에 잠기고 하는 그 행위는 나를 멋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책을 읽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멘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책방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책방 주인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좋겠다... 하면서. 그런데 이제 그런 꿈은 깰 때가 되었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서점은 고등학교 앞의 참고서 판매소 외엔 모두 문을 닫았고, 대학 앞의 서점도 거의 폐쇄되고 구내서적부만 학기초에 북적인다. 모두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한 것이다. 그리고 2차원의 행간에서 4차원의 상상력을 넘나들던 책의 기능이 3차원을 보여주는 비쥬얼 문명에 정복당한 탓이 크리라.
영국의 헤이온와이란 마을에 리처드 부스란 사람이 헌책방을 운영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에겐 별로 철학이랄 것도 없고, 이 글은 계속 잡담의 연속으로 점철한다. 작가의 위대한 점은 뛰어난 기억력이다. 어쩜 그렇게 별것도 아닌 일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리처드 부스가 헌책방을 운영할 때, 도움이 되었던 점은 그 시기가 새로운 식민 문화를 정착시키던 시기여서 미국과 호주의 새 대학에 엄청난 양의 책들이 필요했단 것이다. 그리고 그 책들은 당연히 <영어>로 된 것이어야 했고. 이런 말까지 있을 정도로... '돈을 벌고 싶으면 도서 목록을 만들어서 신생 대학교에 쫙 돌려라.' 사실 대학 도서관의 거대한 책장에는 별로 인기없는 묵은 책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헌책방. 헌책의 냄새. 이것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내음새다. 향기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새책방에서는 맡기 어려운 먼지내 비슷한 냄새. 영화 국화꽃 향기에서 보여주었던 석양에 비친 실루엣의 내음이라고나 할까. 부산에는 보수동에 헌책방 골목이 있다. 서울에는 청계천에 헌책방 골목이 있었는데, 복원사업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강원도 영월에는 영월책박물관도 만들었다는데... 우리나라 책은 어디까지나 우리말로 되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요즘은 헌책이라는 가장 아날로그적 상품을 인터넷이라는 가장 디지털적인 도구를 활용해 판매하는 '고구마'같은 서점도 생겼다는데... 난 아직도 책방 주인이 되고 싶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장 맡고 싶은 일이 도서관 담당 교사다. 그런데 난 아직 한 번도 그 일을 맡아본 적이 없다. 도서실에 쿡 박혀서 여름방학도 잊고 책에 파묻히고 싶은데... 내년엔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하긴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일이지만.
책이라는 아름답고 사랑스런 멘토와 함께 삶의 풍요로움을 나누게 된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는 가을날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