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무어는 9/11 테러가 나던 날 아침 어느 새신랑('새'와 '신(新)'은 의미상 중복이다, 이런 게 생각나는 나도 어지간한 직업병 증후군이다.)에게 일어난 사건을 시작으로 자기 이야기를 썼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새신랑의 아내가 음식이 서툴러서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그가 참지 못해 집으로 차를 돌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오지 않았더라면, 그 빌딩의 바로 그 층에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을 텐데... 정말 머리가 핑 돌 일이다. 9/11 테러는 미국인들에게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서준식은 재일동포의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공부를 하다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사람이다. 제목에서 나오듯이 십팔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어느 독재자가 지배한 햇수와도 일치하는 그 십팔년은 발음만큼이나 비극적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으로 기억하는데,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유태인은 3년간에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 우리는 식민지 35년간 비슷한 숫자가 죽어갔다. 누가 더 괴로웠을까. 하루이틀 괴로운 것이 나을까, 아니면 몇 년을 두고두고 괴로운 것이 나을까. 이것은 물에 빠져 죽을래, 맞아 죽을래처럼 결말이 죽는 것과는 종류가 다른 의문이다. (일본 관동대지진때 조선인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헤엄쳐서 나오는 이는 때려 죽였다고 한다. 징헌 놈들) 조정래씨의 결론은 우리가 훨씬 오랫동안 괴로웠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1800년 정조 임금이 급사한 후로 우리 역사책에는 역사다운 역사가 한 줄이나 기록되었던가. 흥선대원군의 업적 정도 나올까 말까 했지만 그의 방어는 바가지로 벼락 막는 셈이었으니... 삼정의 문란, 외세의 침입, 식민지 시대, 전쟁, 독재와 내정간섭 시대, 그리고 비틀거리는 문민정부시대. 누구는 박정희가 경제 개발의 은인이라고도 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혀 빈말이 아님을 알지만,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필리핀의 3년 식민의 대가로 5억 5천만 달러를 받아간 반면, 우리는 35년의 대가로 3억 달러를 받았을 뿐이라는 김종필과 박정희의 단견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병신같은 짓거리다.(수치가 맞는지는 자신없지만, 대략 그렇다고 기억한다.)

미국이 테러로 입은 상처는 별거 아닌 것이다. 찰과상 정도. 아까징끼(요드팅크액) 바르고 나면 낫는 상처 정도다. 이라크에 분풀이하면 낫는 상처다. 우리 역사에 남은 흠집은 생사를 넘나들만큼 중했던 상처가 온 몸에 가득하다. 이 책의 기록도 그 상처의 하나에 속한다.

같은 옥중 작품이라 하더라도, 예전에 읽었던 신영복 님의 글은 연륜과 깊이가 느껴졌고, 박노해의 그것은 비굴과 합리화가 지배한 반면, 황대권의 그것은 생동감과 인생의 지혜가 감동적이었고, 서준식의 이 책은 젊은 피가 곤두박질치는 미칠듯한 번뇌가 너무도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어떤 부분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풋내음이 남기도 하지만, 감옥에서의 사색은 정말 고통과 인내와 비참함으로 점철된 시간들이다. 국방부 시계만큼이나 안가는 시계가 법무부 시계라던가.

그의 '자생력'은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삶의 싸움터에서 자기 손으로 잡아야 하는 것이었기에 그만큼 치열했고, 뼈에 새긴 글발들이 아니었던가. 각고(刻苦). 뼈에 새기는 고통으로 적은 서간들이 모여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이루다니.

그가 그 긴 세월 동안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던, 괴테의 한 마디는 두고두고 내 마음을 누르고 있다.

Without haste, without rest.(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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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9-0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멋진 글 하나 읽고 갑니다. ^^

달팽이 2004-09-0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의 역사가 지나간 자리, 그 자리에서 피의 흔적을 보며 우리는 영혼의 상처를 받습니다. 때로는 다시는 밟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 교훈을 아로새기기도 하고요...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기적 유전자를 스스로 다스리지 아니하고는 어쩔 수 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적, 시대적 업의 소용돌이에 말릴 수밖에 없는 일들에 너무나 마음 상처만 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군요... 괴테의 말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고" 담담히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샘 2004-09-0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 과찬이시네요. 늘 글을 써 놓고 나서 하루 지나 읽어보면 내가 좀 불평분자같기도 하고, 스스로 모자랄 뿐인데요. 그래도 용기를 주시니 책 읽기 괴로운 계절이지만, 열심히 읽고 열심히 적어 보렵니다.
달팽이님/ 반갑습니다. 괴테의 말, 정말 좋은 말인데요, 우리 고3 아이들에겐 참 좋은 말이라 들려 주기도 하지만, 서준식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법무부 시계를 이겨내는 참을성이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생각하거든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