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온 산이 신록으로 푸르게 물드는 계절이다.
5월은 청소년의 달이니, 어린이 날이니 이런 것들이 있지만,
고3에겐 그저 공부해야할 피곤한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지만,
이제 6개월 후면, 
온 세상이 낙엽에 휩싸일 거고,
노랗게 은행나무도 익어갈 거고,
고3도 끝날 거다.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가렴. 

오늘은 그런 의미로 가을을 생각하며 은행나무를 하나 만나 보자.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종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곽재구, 은행나무>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이 수미상관으로 이뤄져 있다.
늘 그렇듯이,
수미상관은 '처음' 구절과 '마지막' 구절의 반복 사이에서,
주제가 형상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란다. 

조지훈의 '승무'의 수미상관에서,
여승의 번뇌가 승무를 통해 종교적으로 승화되듯이 말이지. 

은행나무를 '너'라고 형상화하고 있고,
은행잎이 노랗게 변한 것을 '노오란 우산깃'으로 형상화하고 있지. 

그리고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무이쉬킨의 대사에서
선한 인간만이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인용하면서 시를 끌고 있구나. 

음... 첫부분에선 은행나무가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덮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길거리에 널부러져 말라가고 부서지는 은행잎을 보면서,
화자는 '빛나는 눈썹'과
'아름다운 연서'를 상상한다.
'누군가의 옛 추억'도 떠올리며 금빛 추억을 떠올리는
신비롭고도 참 아름다운 시인의 눈이지.  

은행잎 가득한 거리에선 '절망'을 노래할 수 없대.
그런데,
은행잎 다 떨어진 헐벗은 가지 위에
곡예를 하듯 매달린 도롱이집이 몇 개 매달렸어.

'도롱이집'은 도롱이나방의 집인데, 이 시에선 노오란 우산깃과 상반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고 있단다
은행잎이 다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고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걸고 버티고 있어.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 도롱이집.
왠지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권력자, 독재자들이 생각나는구나.  

 

이렇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은행잎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서는
수천만 황인종인 한민족의 희망의 형상으로 기록될 것이라서
힘든 일도 버텨낼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는구나. 

수능에서 이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물어본 적이 있단다.

① '빛나는 눈썹',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은 은행나무 잎을 비유한 것이다.
② '노래할 수 없다',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화자의 의지를 나타낸다.
③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는 상황에 대한 운명적 수용을 나타낸다.
④ '노오란 우산깃'이라는 표현을 반복 사용하여 대상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⑤ '불타는 형상'은 '희망'을 감각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답은 뭘까? 
3번이지? 운명적 수용이 아니라,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니까 말이야. 

다음엔 이 시와 함께 엮여서 수능에 나왔던 이용악의 <낡은 집>을 읽어 보자.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느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세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한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절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한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이용악, 낡은 집>  

제목이 <낡은 집>이니, 왜 그 집이 사람이 살지않는 폐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첫 연에서 낮밤으로 거미가 줄치는 집, 흉가가 등장해.
이 집 사람들은 '은동곳', '산호관자'처럼 조금이라도 값어치있는 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단다. 
동곳은 '상투에 꽂는 막대'고 '관자'는 망건에 다는 거야. 

이성부의 <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죄도 없이 죄 지어서>라는 구절이 나오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시련을 겪고 흩어져 유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으리라 상상해 볼 수 있겠지. 

예전에는 재넘던 당나귀, 항구가던 소도 있었나봐.
근데, 털보네 외양간엔 내음새 남아있지만 종적이 없어졌단다.
무곡은 곡식 무역하는 거고, 콩실이는 콩 싣고 다니던 일이지.

찻길이 놓이기 전.
찻길은 새로 놓은 길이라고 '신작로'라 불렀단다.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마구 놓였으니, 일제 이전이겠지.
동물도 아이들도 자유롭던 옛날. 

털보 아저씨 셋째는 내 친구였는데,
(싸리빗자루로 말을 타던 죽마고우였지)
이집 안방 반짇고리 옆에서 태어났대. 

근데, 아이가 태어나도 축복받지 못하는 가난한 집이었나부지.
송아지는 팔아라도 먹지만, 인간은 밥만 축낸다는 말에서,
가난이 가득 묻어나지.  

마을아낙들이 무심호 흘린 이야기를 들은 밤,
삼대를 꼬아 피운 '겨릅등' 가에서 털보 아저씨는 울고 있었다지.
소주에 취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거야. 

갓을 쓴 스님에게 자식을 줘버리는 이야기,
무서운 절간 생활 이야기.
그런 가난 속에서 동무는 마음졸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 

그렇지만, 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고양이는 발정이라도 난 듯 울어 제키고,
어미는 방앗간에서 분주히 일할 때도,
나의 친구는 그 <낡은 집>에서 작은 꿈을 키웠지. 

친구가 9살 때, 겨울이었는데,
그 집 7식구가 사라져버렸어.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화자의 애잔한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어. 

오랑캐의 땅 만주로 갔을까,
러시아(아라사)로 갔을까.
노인들의 이야기 속의 땅은 모두 무서운 곳 뿐. 

이제 다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수미상관으로 반복되고 있어.
예전에 털보 아저씨 살던 시절엔
제철이 되면 먹음직한 탐스런 살구 열매 가득하던 살구나무도,
이제 그루터기만 남아서
봄이 와도 귀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 쓸쓸한 풍경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시대 변화로 인한 삶의 팍팍해진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단다.

이 시의 주제라면 <가난과 시대가 준 한 가족의 파탄된 삶>이 되겠지.
꼭 털보네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시대 일제의 압제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던 비극적 삶을 형상화한 거지.

이 시의 특징은 시 속에 이야기(서사 구조)가 들어있다는 거지. 

이 시에 대한 감상문을 쓰기 위해 <보기>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한 내용 중 적절하지 않은 것은?
이런 문제가 수능에 등장했단다. 한번 읽어 봐. 어렵진 않을 거야. 

<보기> 발표 연도 : 1938년

 작가 소개 : 이용악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소금 장사를 하였는데, 아버지의 객사(客死)로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을 했던 이용악은 일본 유학 시절에도 품팔이로 학비를 조달했다. 그러면서도 방학 때면 으레 귀국하여 동포들이 모여 사는 간도 등지를 돌며 유이민(流移民)의 비극적인 삶을 살펴보기도 했다.

① 1938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가난', '겨울'과 같은 시어를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읽을 수도 있겠어.
②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이라는 시구에서 시적 화자의 아버지가 객사했음을 알 수 있어.
③ 이 시에 나타난 궁핍한 생활상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작가의 실제 삶과도 관련된다고 볼 수 있어.  
④ 유이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털보네 가족의 삶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보여.
⑤ 함경도에서의 공간 체험이 시에 방언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

쉽지?
답은 두번째 것이지. 시적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니 말이지.
낡은 집, 곧 털보네 집 이야기임을 알면 쉽게 풀 수 있었던 문제야.
하나 더 볼까?

이 시의 4연 부분을 <보기>와 같이 희곡으로 구성할 때, 시의 맥락에 비추어 자연스럽지 않은 대사는?  

장소 : 털보네 안방
(갓 출산한 털보 처와 산파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산파 : 아들이야. 애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먼.
ⓐ 털보 처 :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어쩌다가 이런 집안에 태어났는지……. 

마을 빨래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주머니 1 : 털보네, 아들 낳았다면서요?
ⓑ 아주머니 2 : 그러게요. 자식새끼만 줄줄이 낳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원…….
ⓒ 아주머니 3 : 송아지라도 낳았으면 팔아나 먹지. 쯧쯧.

털보네 안방
(등불이 가물거리는 어두운 방. 털보와 털보 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털보 처 :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없는 살림에 입만 자꾸 늘고……. 어떡해요, 앞으로…….
ⓔ 털보 : 걱정 말구려. 저 먹을 건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잖소. (아기를 들여다보며) 고놈, 참 잘도 자네. 이놈이 다 자랐을 때면 세상도 달라져 있겠지. 

이런 걸 틀린 사람도 있었을까?
5번이지. ㅋ 
  

이 시는 길어 보이지만,
그 속에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진 않을 거야.

아까 은행나무를 읽다 보니깐,
가을의 샛노란 심상이 떠올라서 김춘수의 시 한 편 덧붙일게.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한번 감상해 보렴.        

샤갈의 마을에는 3월의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은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벨로루시란 나라에서 태어난 화가였어.
늘 고향의 환상적인 색감을 사용하곤 하던 화가지.
샤갈의 그림은 언제나 꿈꾸듯 무중력 상태의 세상을 표현했단다. 

이 시의 '샤갈의 마을' 역시 실제 공간이 아닌 환상적인 세계라고 봐야겠지.

바르르 떠는 남자의 정맥,
이런 시어를 통해서 봄이 살포시 오고 있음을 표현하는 시란다.  

눈송이들이 날리는 모습을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신선한 표현도 돋보인다. 

눈, 올리브, 불 등을 상상해 보렴.
이 소재들은 선명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봄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잘 반영된 거지.


맑고 순수한 생명감이 피어나는 <봄>을 그리기 위해,
샤갈의 그림 이미지를 끌고 왔고,
파리한 사나이의 관자놀이의 정맥과
홧홧한 아궁이의 불길이 어울려 풍요로운 마음이 살아있는 시지.  

햇살은 밝은데,
대기는 아직 차다.
건강 조심하고, 중간고사 잘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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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3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감기가 지독해서 몽롱하게 페이퍼를 읽습니다.
이런 날은 심상이 더욱 가득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 황금빛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서 놀랐습니다.
도롱이집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부분과 샤갈의 무중력 상태에 대한 부분으로 시를 다시 읽게 되는군요.

항상 저는 시를 토막쳐서 읽는게 싫다고
그냥 다가오는 대로 멋대로 해석하고 싶다고 주장했었답니다. 마이페이스 B형이거든요.
하지만 요즘 글샘님의 시 설명을 읽으며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즐거운 주말되셔요.

글샘 2011-04-30 12:24   좋아요 0 | URL
짧은 시는 통째로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시가 길거나 좀 어려운 구절을 만났을 땐, 토막도 치고 한 구절을 오래 곱씹다 보면,
한 순간에 탁, 하고 오는 기회를 만나기도 하죠.

뭐, 배울 거는 없을 거예요.
맨날 애들에게 하는 수업인데 글로 적으니 뭐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
원래 시 속에 배울 게 많은 법이죠.

마녀고양이님도 즐거운 주말 만드시길... 이불은 두 장 덮으세요. ^^

페크pek0501 2011-05-0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읽기로 했었죠? 저,최근 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 읽었어요. 아주 꼼꼼히 읽었어요. 큰 일 한 것 같아요.ㅋ
저는 한꺼번에 서너 권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이 책, 내일은 저 책을 읽죠. 장르가 다 달라서 내용이 헷갈릴 일은 없어요. 그 중 시집도 한 권 넣어 읽고 있어요.
다른 시 감상하고 싶을 땐 이곳을 들러요. 이곳 왕성한 에너지를 얻어 갑니다.

글샘 2011-05-03 10:44   좋아요 0 | URL
저도 되는대로 여러 권 읽기의 달인이었는데, 요즘엔 바쁘다는 핑계로...
저는 다른 시...랄것은 없구요. 고딩들 문제집에 잘 등장하는 시들을 읽고 있답니다.
왕성한 에너지를 얻어가신다면 제가 영광이죠. ^^